휘릉(徽陵)
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제16대 인조의 계비 양주(楊州) 조(趙)씨 장렬왕후(1624~1688)의 능이다.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셋째 딸로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 한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 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고,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숙종 14년(1688) 사망했는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으로 지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59년 효종이 사망했을 때와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 씨가 사망했을 때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복상이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여기에는 당대의 양대 권력 축인 남인과 서인 간의 세력 싸움이 작용한다. 양쪽의 대표적인 인물은 허목(1595~1682)과 송시열(1607~1689)이다.
허목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동방의 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1657년 환갑이 넘은 나이에 벼슬에 올랐으나 남인의 영수로서 서인과 예송 논쟁의 핵심이 되었다. 효종의 스승인 송시열은 효종이 왕이 되자 곧바로 이조판서가 되어 당대의 두 사람이 모두 한 조정에 몸담게 되었다.
예송 논쟁이 벌어진 이유는 효종이 사망하자 효종의 계모인 조 대비, 즉 장렬왕후가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때문이었다. 집권파인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장렬왕후는 그에 걸맞게 기년(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한 특별한 존재이므로 맏아들에 대한 예법을 적용해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인은 예의 보편적 적용은 국왕도 예외가 아니라는 입장인 반면, 남인은 국왕의 특수한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인 셈이었다. 가통으로 보면 1년 상복, 왕통으로 보면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 까닭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송 논쟁의 배경에는 율곡 학파인 서인과 퇴계 학파인 남인 간의 이념 차이와 둘째 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자격 시비가 깔려 있었다. 어쨌든 송시열의 주장대로 조 대비는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 장 씨가 사망하자 다시 서인과 남인 간에 조 대비의 복상 문제가 재연되었다. 서인은 대공2) 설에 따라 9개월 복으로 결정했다. 이에 남인이 들고 일어나자 현종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기년복으로 정했다. 1659년에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기년복을 입고, 1674년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기년복을 입은 것이다.
예를 둘러싼 논쟁은 학문적 대립에 그치지 않고 정치화되었고 급기야는 충역(忠逆) 논쟁으로까지 비화되어 조선 왕조를 한바탕 회오리 속으로 몰아갔다.
휘릉은 병풍석이 없고 십이지 신상을 새겨 방위를 표시한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봉분 뒤에는 3면의 곡장이 있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숭릉으로부터 5년 뒤에 조영해 석물의 형식과 기법이 비슷하다. 석양과 석호는 각각 2쌍으로 다리가 짧은데 특히 석양은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다. 봉분 아랫단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높이가 2.4미터에 이르는데 문인석은 이목구비가 크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무인석은 눈과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워 우직하고 우람한 무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귀면이 새겨진 고석은 5개다. 조선 태조에서 세종에 이르는 왕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4개로 줄었는데 휘릉 때부터 다시 건원릉의 형식을 따라 5개가 되었다. 귀면의 기원은 동이족이 건설했다고 알려지는 중국의 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에서는 고구려 기와에서 흔적이 발견되며 고려·조선 시대에도 주술적인 제기 장식이나 건축, 고분 등에 많이 사용했다.
정자각에 있는 잡상도 흥밋거리다. 잡상은 지위와 품격이 높은 건물에만 설치하며 숫자는 건물의 위상과 직결된다. 이들은 잡귀가 건물에 범접하는 것을 막는 벽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섯 개인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은 일곱 개, 경회루는 열한 개나 된다.
조선 시대에는 궁궐 건축물의 지붕 기와 제작을 담당하는 와서와 잡상을 제작하는 잡상장을 두었다. 또한 잡상을 만들 때 제대로 제작하지 않으면 중죄인으로 처벌했다. 우리말 중 '어처구니없다'는 말은 잡상에서 유래한다. 신성한 곳에 잡상이 없어 사악한 것을 막지 못하면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하거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다는 뜻으로 풀이되기 때문이다.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 조 씨(1624~1688)
慈懿恭愼徽獻康仁淑穆貞淑溫惠莊烈王后, 자의대비(慈懿大妃)
출생 : 1624(인조 2)
사망 : 1688(숙종 14)
요약 :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제16대 왕인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고, 1651년(효종 2)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장렬왕후는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셋째 딸로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 한 씨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 16년(1638년) 15세의 나이로 인조와 가례를 올려 계비가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사망하자 26세에 대비가 되었으며 1651년 효종으로부터 존호를 받아 자의대비라 불렸고,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뜨자 대왕대비에 올랐다. 장렬왕후는 숙종 14년(1688) 사망했는데 효종, 현종, 숙종 대까지 4대에 걸쳐 왕실 어른으로 지냈다. 이 시기의 붕당 정치는 장렬왕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예송 논쟁이 치열하게 대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는데 그의 복상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이 주장한 기년설과, 남인이 주장한 3년설이 서로 대립하여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결국 송시열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이 채택되어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 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가 죽자 그의 복상문제가 또다시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당쟁이 일어났으나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정권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주조씨로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창원이며, 어머니는 대사간 철견의 딸인 전주최씨(全州崔氏)이다. 1638년(인조 16)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고, 1651년(효종 2) 자의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었는데 그의 복상문제가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당시 집권파인 서인이 주장한 기년설과, 남인이 주장한 3년설이 서로 대립하여 치열한 당쟁이 벌어지고, 결국 송시열(宋時烈) 등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이 채택되어 서인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 뒤 1674년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 장씨가 죽자 그의 복상문제가 또다시 일어나, 서인은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당쟁이 일어났으나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남인정권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호는 장렬이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휘릉이다.
휘릉(徽陵)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