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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이송원
관심
사서 고생하는 거 맞아요. 두 시간이면 되는 길을 네 시간, 여섯 시간씩 가야 하죠. 그런데 신기하게 다녀오면 정말 뿌듯합니다. 저도, 아이도요. 억만금을 줘도 못 사는 경험이죠.
아이와 4년째 산에 오르는 아빠가 있다. 다섯 살에 아빠와 단둘이 첫 산행에 나선 아이는 어느새 의젓한 초등학생이다. 『오늘도 아이와 산으로 갑니다』를 쓴 박준형(44) 작가 얘기다. “혼자 가도 힘든 산행을 굳이 아이와 가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생을 자처할 만큼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박정민 디자이너
그는 한여름을 제외하면 매달 최소 한 번, 많게는 세 번도 산에 오른다. 물론 아들(8)과 함께다. 동네 뒷산을 시작으로 해발고도 1200m가 넘는 산까지 정복했다. 최근엔 경남 창원 장복산의 5봉을 일곱 시간에 걸쳐 등정했다. 박 작가와 아이가 각각 20kg, 4kg짜리 배낭을 짊어진 채 말이다. 부자(父子)는 영하 19도의 혹한에도 산에 오른다. 휴대전화 신호조차 잡히지 않는 깊은 곳까지 거침이 없다. 둘이 간 산행만 80여 번,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 야영까지 하는 백패킹도 40여 번 했다.
산악인의 피가 흐르는 걸까? 대체 뭐 때문에 이 부자는 고된 산행을 계속하는 걸까? 아이와의 산행을 꿈꾼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까? 헬로 페어런츠(hello! Parents)가 지난 18일 박 작가를 만났다.
⛰️아빠는 아들과 왜 산으로 갔을까
Part 1 시작은 오늘 한 걸음부터
Part 2 다섯 살 아이를 끝까지 걷게 한 대화의 힘
Part 3 산이 부자(父子)에게 열어준 세상
⛰️ Part 1 시작은 오늘 한 걸음부터
박준형 작가는 산과 인연이 깊다. 10대 땐 산악자전거를 즐겼고, 아내도 10년 전 한라산에서 만났다. 그가 아이와 산행하는 아빠가 된 건 지극히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즈 카페가 익숙한 평범한 양육자에게 산행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산은 재미없다’는 아이의 마음부터 돌려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박 작가는 “일단 한 번만 가보라”고 했다. 그리고 “가서는 모든 걸 아이와 함께하며 아이에게만 집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다섯 살 아들과 단둘이 산행을 간 이유도, 지금까지 계속하는 비결도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산행을 시작했다는 건가요?
사실 세 가족이 산에 자주 갔어요. 첫째 서진이가 생후 200일 무렵부터 캐리어 배낭에 아이를 업고요. 서진이와 단둘이 산행을 가기 시작한 건 3년 전이었어요. 둘째가 태어난 지 60일쯤 됐을 때였죠. ‘어린이날 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었더니 ‘캠핑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동생 태어나기 전에 캠핑을 갔던 게 즐거웠다면서요. 둘째가 태어나고 소외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첫째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는 동생을 봐야 하니, 아빠랑 가자고 했죠. 그런데 아이가 싫다는 거예요.
엄마는 안 가니까 싫다는 거였나요?
이유가 또 있었어요. ‘아빠는 가서 계속 일만 할 거잖아’라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죠. 저는 텐트 치고, 짐 정리하고, 저녁 준비하느라 계속 움직일 테니까요. 아이 생각엔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방치될 것 같았겠죠. 그래서 ‘그럼 같이 하자!’고 했어요. 짐 나르고, 의자 펴고, 텐트 치고, 요리하는 것까지 다요. 실제로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나눠줬어요. 아이도 제 몫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해했어요. 그리고 신나게 놀았습니다. 돌멩이로 성벽 쌓고 나뭇가지로 칼싸움도 하면서요.
또 가자고 하던가요?
첫 캠핑이 끝나고 집에 와서 자려는데 그러더라고요. ‘아빠랑 또 캠핑 가고 싶다’고. 아빠의 시간을 고스란히 차지했다는 데서 행복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자연만큼 아이에게 집중하기 좋은 곳이 없습니다.
박준형 작가는 "아이와 산에 가면 아이에게 오롯이 집중하는 시간을 선물하라"고 말했다. 2022년 5월 박준형 작가와 아들 서진이는 강원도 평창 선자령에 백패킹을 가서 찍은 사진. 사진 박준형.
등산과 백패킹은 캠핑하곤 완전히 다르잖아요. 아이와 함께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아이와 처음 백패킹을 갔던 산은 세종시 전월산이었는데요. 평소 아이와 자주 가던 산이었어요. 등산로도 익숙했고 산행 시간도 예상 가능했어요. 배낭을 메고 산에 가서 잠을 잤다는 데 의의를 둔 거죠.
등산은 힘들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아이도 많아요.
전 아이와 산에 가면 사계절을 느낄 수 있는 활동과 놀이를 많이 해요. 배 타고 인천 굴업도에도 가보고, 강원도 홍천강에서 카누를 타기도 하고요. 여름엔 계곡을 트레킹하고, 겨울엔 꽁꽁 언 얼음 계곡 위에서 텐트 치고 잤어요. 특히 케이블카는 아이의 흥미를 자극하고 성취감도 줄 수 있는 치트키죠. 영남 알프스로 꼽히는 천황산을 오를 땐 밀양에서 얼음골 케이블카 타고 중턱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했어요. 문명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다섯 살이던 아이는 높은 산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로 자부심을 느꼈어요.
몇 살이면 산에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백패킹이 아니라면 아이가 두 발로 잘 걷는 시기부터 문제가 없어요. 물론 아이가 조금 걷다가 ‘힘들다. 안아 달라’고 하면 ‘왜 왔나’ 싶을 겁니다. 사실 그래서 산에 가기 무섭죠. 그럴 땐 마음을 좀 내려놓으세요. 처음부터 정상까지 가려 들면 아이도, 부모도 지칩니다. 같은 산을 자주 가면서 걷는 거리를 점점 늘려가세요. 오늘 한 걸음 걸었던 게 내일은 두 걸음, 세 걸음이 되니까요. 그럼 아이도 성취감을 느낍니다. 지난번보다 멀리 갔으니까요. 그 기분에 또 산에 가자고 하고요. 그러다 보면 정상까지 갈 수 있어요. 가까운 공원이나 동네 산책길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함께 걷는 시간부터 늘려 보세요.
박준형 작가의 아들 서진이가 2021년 영남 알프스 중 하나인 천황산 정상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박 작가 부자의 네 번째 백패킹 날이었다. 사진 박준형.
⛰️Part 2 다섯 살 아이를 걷게 한 힘, 대화
산에 오르던 아이가 이런 말을 하면 고비다. ‘언제 다 가?’ ‘얼마나 남았어?’ 아이가 지쳤다는 신호다. 이럴 때 어른들이 흔히 하는 말은 ‘조금만 더 가면 돼’다. 하지만 박준형 작가는 “거리가 제법 남았다면 절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아이를 끝까지 걷게 하려면 솔직해져야 한다.
‘거의 다 왔다’고 해야 좀 더 걷지 않을까요?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제 딴에는 제법 걸었는데도 목적지에 닿지 않으면 아이는 한순간에 무너져버려요. 그때부터는 ‘정말 거의 다 왔다’고 해도 안 믿겠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건 물론 절망적이죠. 그렇더라도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지 상황을 정확히 아는 게 중요해요.
어린 아이는 시간이나 거리 개념이 없잖아요. 어떻게 설명했나요?
아이 눈높이에 맞춰서 말해주려 했어요. 다섯 살 무렵 서진이는 10까지 셀 수 있었어요. 그래서 ‘10까지 가야 하는데, 지금 6까지 왔어. 앞으로 4만큼 더 가야 해’라고 설명해 줬죠. 등정의 난이도는 간식 개수로 말했고요. 산에서 아이와 젤리를 간식으로 먹었는데, ‘에너지’라고 불렀거든요. 산행 전 아이에게 ‘오늘 산은 좀 힘들어. 에너지 5개짜리야’ 하는 식으로 가늠할 수 있게 표현해 줬어요.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요.
산에서 아이가 말을 안 듣고 고집부리면 정말 난감할 것 같아요.
산에서는 안전 문제 때문에라도 아이가 부모의 지시를 잘 따라야 해요. 서진이도 늘 제 말을 잘 듣는 건 아니에요. 다행스러운 건 산에서만큼은 아빠를 ‘선생님’으로 인정하고 잘 따라 주는 편입니다. 저도 아이에게 그런 믿음을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고요.
2022년 12월 박준형 작가의 아들 서진이가 눈 덮인 전북 고창 방장산을 걷고 있다. 사진 박준형.
어떻게 하셨나요?
신뢰라는 게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잖아요. 평소 아이와 한 약속은 지키려고 했어요.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아예 하지 않았죠. 산행지가 정해지면 그 지역과 산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코스, 난이도, 약수터 같은 것에서부터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까지요. 아이의 사소한 질문에 다 답할 수 있도록요. 아이가 물었는데 잘 모르면 솔직하게 모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찾아보고 알려줬죠. 돌다리도 여러 번 두드리는 모습을 봐선지 아이가 저를 믿고 따른 것 같아요. 그리고 무조건 강요하지 않았어요. 산행을 갈 지 말지, 어느 산으로 갈지, 어느 길로 갈지 같은 것에서요. 위험하지만 않다면 아이에게 선택권을 줬어요.
아이가 잘못되거나 무리한 선택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경우도 많죠. 하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대전 계족산에 백패킹을 갔을 때 일인데요, 정상까지 가는 길이 두 가지 있어요. 완만하고 쉬운 황톳길, 그리고 가로질러 빨리 갈 수 있는 가파른 계단길요. 아이가 계단길로 가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둘 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어서 힘들 게 뻔했죠. 쉬운 길로 가자고 했는데도 아이가 주장을 굽히지 않더라고요. 아이 의견을 따랐죠. 중간쯤 아이가 ‘너무 힘들다. 아까 나 좀 말리지 그랬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어요. ‘네가 선택한 길이니, 끝까지 가야 한다’고요. 그랬더니 끝까지 올라가더라고요. 그 뒤로 아이는 무언가 선택해야 할 때 나름대로 고민하고 판단하려고 하더군요. 스스로 선택하면 책임감을 갖고 끝까지 하려고도 하고요.
박준형 작가는 아들에게 산행길에 대한 선택권을 준다고 했다.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와 끝까지 산길을 갈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다. 강정현 기자
⛰️Part 3 산이 부자(父子)에게 열어준 세상
박준형 작가는 “아들이 산을 오르며 자연을 즐길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바람대로 아이는 온몸으로 사계절을 만끽했고, 산 그림자와 운무가 만든 절경도 누렸다. 산이 내어준 선물은 또 있었다. 박 작가는 “산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법까지 배웠다”고 했다. 아이뿐이 아니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산을 통해 세상을 배웠다고요?
서진이는 그간 다녔던 산을 기준으로 국내 지리를 익혔어요. 강원도 하면 백패킹했던 도롱이 연못 있는 곳, 집(세종) 기준으로 옆에 있는 곳으로 익히는 거죠. 산에 다녀오면 국내 명산 지도에 스티커도 붙입니다. 등산하는 날 맑았다면 빨간 스티커, 비 오거나 흐렸다면 파란 스티커로요. 자기만의 기준을 만든 거죠. 최근엔 한자에 관심이 많은데요, 제가 한자 지역명을 풀어주기도 해요. 거제에 트레킹하기 좋은 화도(花島)라는 섬이 있거든요. 이렇게 설명해 줬어요. ‘꽃 화(花) 알지? 이순신 장군이 항해하다 그 섬에 꽃이 많은 걸 보고 화도라고 부르자고 했대. 그런데 위아래 두 섬이 있으니 위에 있는 걸 윗 상(上), 상화도, 아래 있는 걸 아래 하(下), 하화도라고 했대.’
지난해1월 박준형 작가와 아들 서진이가 충북 민주지산 정상에 올랐다. 사진 박준형
산에 다니면서 아는 것도 많아졌겠네요.
또 있어요. 아이가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어릴 땐 이웃을 만나면 엄마 뒤로 숨기 바빴죠. 그런데 지금은 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요. 산에서 만나는 어른들이 다 아이에게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시고, ‘힘내라’며 간식도 나눠주시거든요. ‘큰 사람이 돼라’고 덕담도 해주시고요. 도시의 일상에선 아이가 그런 응원과 칭찬을 받을 일이 없잖아요. 그것도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요. 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기운을 받고 어울리는 법도 배운 것 같아요.
작가님에게도 변화가 있었나요?
아이와 백패킹 다녀오면 항상 온라인 커뮤니티에 후기를 올렸어요. 제 글에 공감하고 응원해 주는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 그런 댓글이 아이와 산행을 이어가고, 또 기록으로 남기는 데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백패킹을 가기도 했고요. 산행이 새 인연을 만들어준 거죠. 덕분에 이렇게 책도 썼고요. 아이와 산에 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죠.
아이와의 산행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가 있나요?
아이는 언젠가 사춘기가 올 테고, 힘든 일도 겪을 겁니다. 그때 저와 산에 갔던 기억이, 그때 주고받았던 대화가 시련을 극복하는 힘이 됐으면 해요. 그 기억을 더 오래 남게 하려면, 들춰보게 하려면 기록을 해야겠더라고요. 첫째와 그리고 아직 어린 둘째가 아빠의 산행기를 읽으면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으려면요. 그럼 나중에 제가 같이 산에 가자고 할 때 흔쾌히 따라와 주지 않을까요?
박준형 작가는 최근 산행길에서 아이가 부쩍 컸다는 걸 실감했다. 그는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바랄까? “자기만의 속도로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산에서 배우는 것 같아요. 정상에 빨리 가려고, 남보다 먼저 가려고 애쓰는 게 산을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요. 전 아이가 너무 지치거나 처지지 않도록 힘닿는 데까지 같이 걷고 싶어요.
박준형 작가는 “아이가 자기만의 속도로 목표를 향해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