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나무
황형철
바이올린 공명판에는
이삼백 년 천천히 자라며
가지도 없이 밑동에서부터 수십 미터 쭉 뻗은
가문비나무가 가장 좋아요
빛을 받지 못해 말라죽은 삭정이
스스로 떨군 자리에
단단하고 진한 향기 밴
옹이가 생겨나
둘도 없는 울림을 만드는 것이죠
상처가 힘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혹여라도 가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손금처럼 쥐고 태어난
옹이 몇 개가
나를 키웠다는 말은 끔찍하고
상처 많은 사람이 다 악기가 되는 것도
악기가 모두 음악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쯤
어른이 돼서야 알아서
더는 상처를 키우지 않으려 악이나 쓸 뿐
높은 곳에 올라도 무서움을 덜 타고
그럭저럭 추위도 잘 참으니
다소간 숲도 그늘도 가질 수 있겠지요
다행이라면 다행이지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1월호 발표
황형철 시인
1999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2006년 계간 『시평』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바람의 겨를』, 『사이도 좋게 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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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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