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지 여행(모산 15기 2009.4.25)
사월 마지막 토요일 새벽 5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뜨자 용수철처럼 발딱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바깥은 아직 어둠이 깔려 있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았으나 손에 물기는 느낄 수 없었다. ‘와! 비가 그쳤네! 제발 하루 종일 잿빛 하늘이라도 좋으니 비만 내리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먼저 목욕재계를 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매만지면서 기분은 한껏 들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정선 아우라지에서 초등학교 동기생들을 만나는 날이다. 그곳 고등학교에 교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인균 샘 덕분에 서울 촌사람들이 아우라지 구경을 할 기회가 온 것이다. 강릉에서도 많은 남녀 동기생들이 참석할 예정이라기에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일기 예보에서 반갑지 않은 비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주에 내린 비로 어느 정도 가뭄은 해갈되었다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못한 터라 비 소식은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단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처럼 정다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벼르고 별렀던 날이니 이날만큼은 좋은 날씨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침 6시50분 대림역까지 태워다 주면서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는 남편의 배웅을 뒤로 한 채 지하철을 타고, 함께 출발할 서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사당역으로 갔다. 우리를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태우고 갈 흑기사 준복님이 이미 9인승 승용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준복님은 강릉을 갈 때면 늘 서울 친구들을 위해 이렇게 봉사를 한단다. 가다가 죽전에서 2명을 더 태우고 일행 6명이 정선 아우라지를 향해 떠났다. 서울에 사는 동기생들은 제법 많은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6명밖에 가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그토록 염려했던 날씨는 간간이 빗발을 뿌리기도 하고, 잠깐씩 해님이 얼굴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종일 오락가락 했지만 우산을 한 번도 펴지 않고 그런대로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전 11시30분 경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다. 꼬박 4시간이나 걸렸지만 우리는 얘기꽃을 피우느라 지루한 줄도 몰랐다. 운전하는 친구는 힘들었겠지만 전혀 힘든 내색도 하지 않아서 더욱 고마웠다.
말로만 듣던 정선 아우라지는 정말 첩첩 산중이었다. 앞뒤가 다 산이지만 그 사이로 맑은 내가 흐르고, 도로는 비교적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그 어디에도 비포장도로는 찾아 볼 수 없었고, 연록색의 싱그러움과 봄나물 향기 그윽한 아우라지의 소박한 농촌 풍경은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어느새 마음은 아련한 나의 유년시절의 추억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친구가 근무하는 학교는 중.고등학교가 붙어 있어 생각보다 제법 규모가 컸다. 학교 급식소의 주방 시설이랑 식당도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이렇게 어디든지 학교 급식이 가능하고 나름대로 참 많이 발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국가나 가정이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의 학창시절을 잠시 떠올려 보았다.
학교 급식소 주방에는 이미 강릉 여자 친구들이 식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쪽에서는 추어탕을 끓이고, 또 한쪽에서는 미꾸라지 튀김을 하고, 또 한편에서는 주먹만큼이나 큰 감자를 드문드문 넣고 급식소 오븐에 밥을 찌고...마치 잔칫집을 방불케 하였다. 강릉 남자 친구들은 어느새 교장 사택에 둘러앉아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눈 후 잠시 학교를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서 우리도 뭔가 돕겠다고 했더니 강릉 친구들이 손사래를 치면서 도울 것 없으니 저쪽 식당에 가서 떡도 먹고 메밀부침도 먹으면서 밥 다 될 때까지 놀고 있으란다. 그 정겨움이 마치 친정에 갔을 때 어머니나 언니처럼 따뜻하고 끈끈한 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우리는 못이기는 체 나와서 식당으로 갔더니 그곳에는 강릉친구들이 새벽부터 준비해서 날라다 놓은 음식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쑥절편과 메밀부침에, 알맞게 익은 열무김치, 큼직큼직하게 썰어놓아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깍두기, 오이, 풋고추, 양념장, 과일, 사탕까지 골고루 식탁위에 좌판을 벌려 놓았다.
갑자기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이른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하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몇 시간을 차를 탔으니 잔뜩 시장기를 느낄 때인지라 말랑말랑한 쑥절편이랑 메밀부침을 보는 순간, 준비하느라 먹어 보지도 못한 강릉 친구들한테 미안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한 개만 먹어봐야지’ 했는데 너무 맛있어 몇 개를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에 맛있는 추어탕을 먹을 생각에 더 먹고 싶은 욕망을 억제 하긴 했지만....
드디어 점심을 먹으려고 둘러 앉아보니 남녀 22명이 모였다. 숫자는 각각 절반 정도였다. 술은 먹든 못 먹든 모두 소주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높이 들고, 초대하는 입장인 교장 샘이 짧은 인사말을 한마디 하고 우리는 변함없는 우정을 다지며 다 같이 건배를 하였다. 잠시 전에 먹은 떡은 이미 소화가 되었는지 추어탕 한 그릇에 밥 한 그릇씩을 뚝딱 해치웠다. 이렇게 먹어대고 살이 안 찐다면 오히려 이상한거지. “건강을 위해서는 소식해야 한다는데 그래도 오늘 만큼은 먹고 보자” 하면서 모두들 60고개를 넘긴 사람들이지만 서로가 이름 부르며 초등학교 시절의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껏 웃고 떠들면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아우라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월 단종(조선 제6대 임금)제를 보러 갔다. 레일 바이크 타기는 날씨가 좋지 않아 포기하고, 마침 단종 문화제가 열리고 있다고 하니 참석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우리 모두는 영월로 향했다.
단종제는 영월 군민들이 1967년 4월 단종제향일에 문화제를 함께 개최함으로써 단종의 고혼과 충신들의 넋을 축제로 승화시킨 단종문화제를 탄생시켰으며 전국에서 유일하게 왕릉에 제향을 올리는 43년의 역사와 전통이 살아있는 전통 역사축제이다. 잠시 축제의 한 부분인 굿판도 구경하고, 그 외 사적도 살피고, 단종 왕릉에도 올라가서 참배는 하지 않았지만 해설사를 통해 왕릉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들었다.
단종이 승하한 후 단종의 시신에 손을 대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말에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나 영월호장 엄홍도가 시신을 거두어 영월 엄 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에 매장하게 되었고, 훗날 노산대군이 단종으로 복위되고 능호도 노릉에서 장릉으로 추복되었고, 장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196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슬프고도 애환이 많은 단종대왕의 능은 다른 능에 비해 많이 다르다. 다른 왕릉은 한양 백리 안에 모시는 것이 관례이지만 지방에 모셔진 유일한 왕릉이며 낮은 구릉에 모셔진 다른 왕릉에 비해 높은 곳에 모셔져 있으며 그 외에도 다른 점이 많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축제는 며칠을 두고 열리기 때문에 아마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행사도 많고 축제의 하일라이트인 것 같았다. 점심에 과식을 해 아직도 배가 만삭처럼 불러 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 없잖아?" 하면서 도토리묵과 메밀부침을 안주 삼아 달콤한 동동주 한 잔 씩을 하고 난 후 우리 일행은 단종제를 뒤로 하고 다시 원주로 향했다.
원주에는 동기생인 권헌길 님이 위암 2기로 얼마 전에 수술을 받고 지금도 항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에 병문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우리 나이가 60줄에 들고 보니 성인병에 걸리는 친구들이 많아진다.
위암이라든가 대장암, 또는 인파선암 등,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질병들이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건만 심심찮게 우리들의 몸과 싸우자고 덤벼들어 우리 친구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래도 대부분 요즘 의학이 많이 발달되었고, 또 강인한 투병생활로 모두 잘 이겨내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다.
20명이 넘는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 병문안을 가는 것이 오히려 환자나 가족에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었는데 막상 가보니 환자도 그의 아내도 몹시 반가워하고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그리고 ‘역시 가 보길 잘 하였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병문안까지 끝내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친구 보천님이 고맙게도 저녁을 쏘겠다고 한다. 저녁을 먹기에는 시간상으로 다소 이른 감은 있었지만 쏘겠다는 친구의 성의가 고마워 사양하지 못하고, 원주에서 소문난 남원 추어탕 집에 가서 저녁을 또 맛있게 먹었다. 보천님께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싶다. 그나저나 배도 입 믿고 산다는데 배를 너무 혹사 시키는 것 같았다. 미처 소화시킬 틈도 안 주고 계속 쑤셔 넣으니 배가 불만이 상당히많을 것 같다.
바야흐로 이제 정말 작별의 시간이다. 강릉 친구들과 서울 친구들은 헤어지기 섭섭하여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 채 서로서로 손을 잡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종일 오락가락 하는 날씨 속에 이렇게 하루일정을 모두 마치고 원주에서 강릉행과 서울행으로 각각 갈라지면서 못다한 얘길랑은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강릉 친구들이 싸준 떡과 부침을 받아들고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가슴이 따뜻하고 마냥 행복하였다.
갈 때는 여섯 명이었는데 귀경길에는 한 명은 강릉으로 가고 다섯 명이 돌아왔다. 문막 쯤 오니 빗줄기가 제법 굵어졌다. 계속 많이 내릴까봐 다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다시 비는 그쳤다. 우리의 흑기사 준복님은 아침에 출발하던 바로 그 자리에 온전히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거기서 흑기사님께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아우라지 여행의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떠날 때 비 소식 때문에 은근히 염려 되었지만 비록 잿빛 하늘이었으나 적당히 좋은 날씨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추억 만들기를 성공적으로 하게 되어 내심 마음이 뿌듯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사진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는 점과 이번에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다. 내년 졸업 50주년 기념행사에는 기념 사진도 많이 찍고 빠지는 사람 없이 다 참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초대해 준 교장 샘 인균님과 맛있는 음식을 준비 해준 강릉 여자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한없는 고마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다. 특별히 총무를 맡은 영식이에게 감사하고, 우리 어리미골 혜숙이, 그리고, 옥자, 선자, 재자, 시임, 금자, 영남이 모두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아참! 함께 해준 남자 친구들 모두에게도 감사한다. “고마워! 친구들아! 그리고 건강해”
첫댓글 아우라지 에서의 만남. 좋은 추억 되셨다니 축하 드리며 모처럼의 친구들과 따뜻한 추억 만드셨다니 고맙군요 왜?......산 나물이라도 좀 사오시지 않고...! 배 . 생각해 입만 바쁘셨군요....! 22명의 친구들 만남 그자체가 추억이며 기뿜이지요. 규원님의 마음 충분히 이해감니다......기행문에 담겨 있는 분위기 그느낌 이곳 부산에서 다시 잃으며 새겨 봄니다 궁굼증 확 풀림니다
고마와요.규원님. 참석 못해 몹시 아쉽고 궁금했는데, 기행문 잘 올려 주어서 궁금증이 좀 풀렸네요. 그래도 누구누구 참석했는지, 얼굴도 보고 싶으니, 어리미 혜숙 사진 작가님, 사진 좀 빨리 올려 주세요.초대해준 고인균님과 강릉 주최자님들 수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좋은 추억거리 만들어 주어서 고맙고, 참석자 모두에게 축하와 감사를 드립니다.
아니, 권헌길이 위암 수술 받아서 원주 병원에 있다고? 병 문안 결과 환자와 가족이 걱정하지 않는 걸보니 환후가 좋은 모양이구나. 다행이긴 한데, 왜 그런 병에 걸려서 고생을 한담. 앞으로 또 한참 고생을 해야할텐데. 아무튼 모두가 건강하게 잘 삽시다.
규광님, 바보님, 함께 하지 못해 서운한 마음 금할 길 없네요.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요. 위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유감스럽게도 디카를 준비한 사람이 없어서 사진은 없어요. 혜숙이는 디카가 문제가 좀 생겼대요. 다른 사람도 준비한 사람이 없었고... 그리고 권헌길님은 결과가 꼭 좋다기 보다는 앞으로 투병생활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 같은데 남들에게 보여주는 표정은 너무 밝았다는 거에요. 그렇게 밝은 모습으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아무래도 치료에도 많은 도움이 될 줄로 믿어요. 모든 환자는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치료 효과가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고 하잖아요. 부디 빨리 쾌차되기를 빌어요. 리플 감사해요.
남11명 여11명 이라...! 만일 여기에 나라도 갔다면 큰 실수 할뻔 햇구만. 아니. 사전 약속 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서 부산에선 규광이와 군자가 단 둘이 만나 모산 15기 동창회를 했담니다 ........!
하루의 일과를 일기로 쓰셨구만. 이 글을 읽으니 "이반데비소니치의 하루" 솔제니친(노벨평화상수상, 구소련)가 생각나는군 아주 자세히 쓰셨군, 수고했습니다. 추억으로 남겠군.
참석자 김남수, 민병하, 박준복, 이보천, 정영교, 정용시, 조영안, 최선민, 함영기, 고인균, 권영남, 김금자, 김시임, 김영식, 서선자, 심재자, 이혜숙, 최규원, 최옥헌, 전옥자, 김혜자, 조명숙
최재구가 빠졌네요. 그리고 여자는 금자만 참석하고 혜자가 빠진 게 아니었나? 두 사람 내가 이름이 좀 헷갈려서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암튼 남자 11명, 여자 11명 그런 것 같은데...아무려면 어때? 만났다는 게 중요하고 재미 있었다는 게 중요하지요. 서울 사람들은 이번에 입만 가지고 가서 넘 잘먹고 잘 놀다 왔는데 언제 신세 갚을 기회가 있엇으면 좋겠네요.
그날의 광경 눈에 그리며 기행문같은 글 찬찬히 잘 읽었다. 모두가 즐거웠다니 더더욱 고맙구나. '노산군'에서 '단종'되기까지 280년이 걸렸다지? '천만리 머나먼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곳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밤길 예놓다.' 시조가 맞는지 몰겠다 하도 오래전 외웠던터라... 전설같은 애환서린 이야기가 역사실록의 한편이라니 돌이켜 보면 내가 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았고 살고 있다고...
그래 참석 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적었지. 너도 그날 함께 왔으면 좋았을텐데....
규원이 말이 맞아요. 어쩐지 이상하더라 했더니. 재구에게 미안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