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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 무리가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19. 어디로 가시든지 20. 머리 둘 곳이 없다 (1)
4. 예수를 좇으려면 ( 8: 18-22. 눅 9: 57-62. )
18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8: 18. 무리가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
1]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마가는 '그 날 저물 때에'란 말을 명기해 놓고 있다(막 4: 35).
이때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신 지(14-15절)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의 병 고치는 이적을 보고는 떼를 지어 그에게로 모여들었던 것 같다.
물론 그중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무리 중에 자기도 끼워달라고 간구하는 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에워싼 군중들을 피하여 건너편으로 떠나고자 하셨는데 이는 아마 수면을 취할 시간을 가지기도 해야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예수는 제자들을 개인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떠나 제자 훈련의 시간을 가지고자 하셨던 것 같다.
2]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예수는 지금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바다의 북서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계신다. 그렇다면 저편이라고 하는 곳은 아마 디베랴 바다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 19. 어디로 가시든지 -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행하심에 큰 감동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1]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흔히 예수의 적대자들로 등장한다.
본문의 이 서기관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해 예수를 뒤따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기관이라는 직책이 백성의 선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한 데서도 암시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서기관들을 긍정적으로 언급한 곳이 있다.
* 마 13: 52 -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 마 23: 8-10, 34 –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본문에 언급된 '서기관'은 끝내 예수의 제자로 부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21절).
어떤 학자들은(R. Walker) 서기관이라는 신분상의 장애 요인 때문에 '나를 좇으라.'는 말도 듣지 못했고 제자로도 부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1) 일상의 생활을 포기한 전적 헌신자만이 제자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예수를 믿고 따른 자도 제자이다.
(2) 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또 하나'(Another man, one his disciples)가 아니라 본 절의 서기관과 연결하여 '제자 중에 또 하나'(Another of his disciples)라고 기록되었다.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의 해석은 21절 주석을 참조하라.
(3) 예수께로 주저 없이 나아왔을 뿐 아니라 예수를 '선생님' 이라 부르고, 또 어디든 따르겠다는 헌신의 의지를 보인 서기관의 태도는 제자로 부름받기에 충분하다.
(4) 예수께서 두 번째 사람에게만 '너는 나를 좇으라.'(21절) 한 것은 그 사람이 서기관보다 제자로 더 적합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이 즉시 예수를 좇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 서기관은 분명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2] 선생님이여(*, 디다스카레)
이는 교사나 가르치는 자(teacher)라는 뜻으로 서기관이 예수의 가르침에 압도되었음을 나타내는 말인 동시에 예수의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했음을 암시하는 말이다.
3]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그가 예수의 제자 되기를 원한다는 표현이다. 특히 '따르리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콜루데오'(*)는 '따르다', '닮다'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는 일이, 곧 그분의 삶을 좇아가고 인격과 모습 닮기를 노력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즉 그는 절대 순복(obedience)의 자세로 예수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언급하는 예수의 대답을 보면 예수의 제자가 되어 주를 따르는 일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그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를 따르려면 온갖 박해와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4] 제자의 길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손만 얹으면 병든 자들이 일어서고 말씀 한마디에 귀신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서 매우 신기한 마음과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던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청하여 나섰다.
실로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 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원한 사람은 한사람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뿐인 서기관의 결단이 참으로 진실한 것인지 우리는 세심히 검토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예수님이 수없이 많이 베푸는 이적만 보고 결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서기관의 결단을 보면서 참된 제자의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 진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는 간혹 어떤 일의 피상적인 면만 보고서 그것을 진리라거나 진리가 아니라고 쉽게 판단한다. 그러나 진리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판단할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니다. 물론 진리가 숨겨진 보물처럼 찾기가 난해하다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은 아니다.
진리는 항상 평범한 데 있으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평범한 것인 만큼 그것을 취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자기의 지나친 주관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어떠한 진리이든지 우리는 그것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하고 판단한 다음에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할 때 그 받아들인 진리의 기초 위에서 어떠한 일을 추진해 나가든지 실수나 후회나 판단 착오가 없게 된다.
진리의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요구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드러나는 기적과 기사만을 보고서 그의 전부를 판단하지 말고 그의 십자가 고난과 아픔도 생각한 후에 새로운 각오와 결심으로 그분을 좇아야 한다.
(2) 철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진리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진리를 따르고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한 자기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포기가 자기 자신이나 인간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를 범하였을 때도 인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함을 가르쳤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는다. 단지 진리의 구현을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이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는 버려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고는 절대로 진리 되며 스승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
(3) 스승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스승이 지닌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결단과 포기가 필요하지만, 거기에는 스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고난을 수월하게 그리고 끝까지 참아내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스승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 있다면 진리를 좇아가고 이루어 가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오는 모든 역경과 고난을 쉽게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우리를 변개(變改)치 않게 할 것이며, 사랑만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영원히 지속시켜 나갈 것이다.
(4) 그래도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이렇듯 진리의 길은 그 말이 풍기는 뉘앙스처럼 아름다운 길은 아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인내의 길이며,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하는 길이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좁은 길이다.
이 길은 이 길을 좇겠다고 나선 많은 자들이 돌이키며 눈물을 흘리는 눈물의 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요 고통의 길이라 해서 그 길을 포기하고 넓은 길을 택한다면 잠시는 평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후 생애는 고통과 후회의 저주스러운 생애가 된다.
그러나 이 길이 힘들고 어려우며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척받고 외면당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이 길을 인내 하며 끝까지 좇는 자에게는 위로와 내세의 상급과 축복이 준비되어 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잠시 동안의 평안을 택하시렵니까? 영원한 세계에서의 영원한 평안을 택하시렵니까?
8: 20. 머리 둘 곳이 없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
주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길이 어떠할 것을 암시한다.
주께서는 개인 소유의 집을 가지지 않으셨다. 주의 제자가 되는 길은 경제적 불안정과 심지어 고난과 핍박을 각오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다.
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고 예수께서 제자 되길 원하는 서기관의 요청을 거절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제자 됨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제자가 될 경우 자기 부정, 희생, 봉사, 고난 등이 뒤따름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굴'은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거처'는 둥지가 아닌 단지 새가 밤을 지새울 수 있는 나뭇가지 등의 임시 처소를 의미한다(McNeile). 이 말은 아주 빈약한 거주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은 하찮은 짐승들조차도 보금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세계에 와서 안식처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 내쫓김을 당한 방랑자가 되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구절이다.
2] 인자는
'다윗의 아들'은 정통성,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의 신성을 밝힌 칭호라면, '인자'는 종말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실 자로 인식되었다.
* 단 7: 13-14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 용어를 예수께서는 자신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셨다. 자칭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이 말은 신약성경에서 세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 행 7: 56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 계 1: 13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계 14: 14 -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이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는 것과 대칭을 이루어 사람과의 특수한 관계를 내포하는 칭호이다.
* 눅 22: 69-70 –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본문에 언급된 '인자'는 단순히 거처할 곳조차 없는 '나'라는 말로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인자'는 예수께서 당신의 인성을 강조하고 앞으로 당하실 고난을 묵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거처도 없는 가난한 삶을 기꺼이 감당하고 있는 초월적 사랑을 지니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갑시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이 넘쳐 나는 하루 되시길 기원 드립니다
주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갑시다.
설교 감사합니다.
주님이 가셨던 길을 따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