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출판산업 현황
1. 일반 현황 및 주요 지표
(1) 한국 출판시장의 개요
① 국내의 전체 출판시장 규모는 약 8조원으로 도서출판(단행본 및 전집)이 약 3조원, 학습지가 약 4조원(교육시장으로도 분류됨), 잡지가 약 1조원 정도의 산업 규모를 형성하고 있다. 또한 2만개의 출판사, 4만종의 신간 발행종수 등으로 세계 10위권(학습지를 포함하면 4위권)에 해당한다. 보통 출판시장 규모는 도서출판을 의미하는데, 이는 사업주체 및 시장의 범주, 업계 구조가 각각 판이한 데 따른 것이다.
② 유아물, 초중고 교과학습 교재, 대학 교재, 각종 수험서류, 어학?취미 등 실용서 등을 포함한 광의의 ‘교육출판물’ 시장이 전체의 80% 이상을 점유한다.
③ 단행본 출판시장은 IMF 이후 성장세가 꺾였다가 회복세를 보였으며, 경기 침체로 다시 후퇴하는 등 경제와의 연동성 및 시장 탄력성이 매우 강하다.
④ 할인시장(인터넷서점, 할인마트 등)이 출판시장 전체의 30%를 점유하고 있으며, 2003년 2월부터 시행된 출판및인쇄진흥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도서정가제는 실질적으로 형해화된 상태이다. 할인시장의 난립은 ‘자동차 경품’까지 등장하는 마케팅 전쟁으로 이어지며 출판 유통질서가 극심한 혼미 상태에 빠져 있다.
⑤ 학습지 및 수능 시장은 소수 메이저 출판사가 주도하며, 단행본 시장은 대체로 2만개에 육박하는 개인 경영 영세 출판사의 과당경쟁 구조이다.
⑥ 학습참고서, 아동서, 잡지 등 대형 물량의 출판물은 출판사의 수직적 거래관계에 의한 총판 위주의 영업, 일반 단행본은 도?소매 위탁판매가 일반적이다. 무기한 위탁판매, 장기간 자가어음 거래, 유통정보화 불비 등으로 합리적인 영업 거래관리가 어려운 편이다.
(2) 출판시장 변동 추이
국내 출판시장(단행본 기준) 규모는 10년 전 2조원대를 돌파한 이후 성장세를 유지하다가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하향 곡선을 그렸으나 다시 성장세로 반전하였다. 그러나 근년의 경기 침체로 다시 부진 양상을 띠는 등 경제 연동 현상이 뚜렷하다. 즉, 단행본 출판시장 규모는 10년 전과 대동소이한 상태로 정체되어 있다.
(3) 출판분야별 현황
출판 분야별로는 학습참고서, 아동, 만화, 사회과학, 문학 등이 대중성과 시장규모 측면에서 중심적 장르로 형성되어 있다. 이어서 기술과학, 어학, 예술, 종교, 역사, 철학, 순수과학, 총류 등의 순으로 출판시장 규모가 큰데, 이는 선진국의 출판시장 구조와는 매우 다른 양상이다. 문학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 학습참고서와 아동물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 등은 높은 교육열을 반영한 출판현상으로 풀이된다. 아울러 선진국들에 비해 문고본 등의 염가도서나 잡지출판의 발전이 매우 지체되어 있는 점도 출판 및 독서문화의 성숙도와 관련하여 특징적인 현상이다.
2. 출판산업 동향
(1) 출판 경향 및 시장 추이
● ‘교양’에서 → ‘생존’ 콘텐츠로
― 스피드, 디지털, 다매체, 구조불황 반영
― 처세?실용서 초강세 : ‘생존 콘텐츠’ 지배
광의의 솔루션(매체 미분화 상태의 종합 기능)에서 협의의 솔루션(특화된 기능)으로
매뉴얼화의 위험성 : 대체(代替)미디어 또는 대체시장과의 경쟁
― 상업출판 팽창, 학술?인문서 퇴조 뚜렷
― 각박한 세태 반영, 삶을 위무하는 따뜻한 이야기 각광
● 새로운 가치의 발견
― 환경(자연의 일부인 인간)
― 나눔과 공존(휴먼 논픽션, 제3세계, 평화)
― 웰빙(느림의 철학, 정신세계, 건강, 행복, 삶의 질)
― 거시담론에서 미시담론으로
● 시장 양극화
― 판매량의 양극화 : 소수의 빅셀러(big-seller)와 다수의 논셀러(non-seller)로 양극화
― 출판사의 양극화 : 소수 대형 출판사와 영세 출판사로 양분, 신규 출판사 설립 붐
― 유통구조의 양극화 :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 약진, 중소서점 퇴출 (유통 빅뱅)
― 독자층의 양극화 : 다독층과 무독층, 평생학습 참가율 OECD 최저
● 소비자 중심 시장 (push형 → pull형)
― 독자 참가형 출판 : 출판기획, 제작 펀딩, 독자 모니터링, POP(구매시점광고) 활용
● 글로벌 출판
― 외국과의 합작법인 출현 : 2004년에 랜덤하우스중앙, 에이지21 등
― 다국적 기업의 중국시장 각축과 한국의 진출
― 아시아 콘텐츠 공동체 출현 : 한?중?일 삼국간 콘텐츠 교호(交互) 현상, 한류 반영
● 활발한 미디어 믹스 경향
―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 출판 → 영화 → 캐릭터 상품
― <겨울연가> <TV동화 행복한 세상> : TV → 출판
― <그놈은 멋있었다> : 인터넷 → 출판 → 영화
― 만화 : 잡지, 단행본 → 애니메이션 → 게임, 캐릭터 상품, 테마파크
― 출판의 기획력, 정보 발신력 약화 : 매체 경쟁력이 아니라 상품 경쟁력이 관건
● 출판양식의 다양화 추세 : 디지털화와 마케팅 진화
― OSMU(원 소스 멀티 유스)
― POD(주문형 인쇄출판)
― Part Work(分冊百科)
● 한국 출판산업 비전
― 파주 북시티
― 유통 정보화 혁명 필요
― 개성 있는 저자, 출판사, 서점의 출현이 관건
― 도서관 기능의 복원 : 어린이 도서관(기적의 도서관), 학교도서관, 대학도서관, 공공도서관, 마을도서관, 비즈니스도서관 등 생활권 도서관 구축 필요
― 출판산업의 진정한 적은 불황이나 사양산업화 아닌 위기 담론이다.
― 지식정보 사회 = 지식자본주의 시대, 평생학습 사회 = 출판의 성장력 여전함
● 출판시장의 활로
― 정보화, 글로벌화, 다원화 사회
― 차별화, 전문화
― 틈새시장 개척
― 잠재독자 발굴
― 제휴 (타업종, 국제화)
― 커뮤니티 연계 강화 : 출판-독자, 서점-지역사회
● 출판시장의 관건은 독서운동
― 출판 생태계의 바탕은 독서, 무한경쟁 시대에서 독서는 선택사양 아닌 생존과 직결
― 독서운동은 책을 ‘나’와 연결시키는 자극, 계기, 환경 만들기
― 영국 : BBC ‘Big Read’, 북스타트 운동
― 미국 : First Book, ROR(reach out and read), ‘한 도시 한 책’ 운동
― 일본 : 어린이독서추진법, ‘아침 10분 독서’운동
― 한국적 독서운동 프로그램 개발 및 추진 시스템 절실
(2) 주목할 트렌드
① 잡지시장의 개화 : OECD 국가들 대부분이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부터 발달
라이센스지(특히 패션지, 시사지, 다큐멘터리지) 중심에서 대중지로의 발전 양상
② 교육제도 변화, 학생수 감소 등으로 학습참고서 시장 전반의 침체
학습물의 패션화?이미지 마케팅으로 시장변화 가속화
에듀테인먼트 단행본 베스트셀러의 속출
③ 시리즈물, 문고본의 발전 기대
출판사별 간판 시리즈 마케팅의 가속화, 문고본의 본격출판 양상, 저가경쟁 심화
④ 번역물에서 국내 저작물로의 발행량 중심축 변화 (아직은 요원)
수요 검증된 외국 베스트셀러, 명저의 출판 흐름이 내국인 저작자 위주로 변화
리스트가 적은 단행본 기획출판 경쟁
⑤ 주제의 다양화와 매니아 출판
독자의 관심사가 다원화되면서 차별화된 마니아 출판으로 승부하는 출판사 증가
(3) 2003년 이후 주요 동향과 과제
■ 출판 트렌드
베스트셀러 동향을 보면 전반적으로 언론에서 주목 받는 ‘매스컴셀러’가 시장 전체를 끌고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출판 각 장르에서 분야를 불문하고 즉각적 수요를 타깃으로 실용서화 되고 있는 경향, 책의 팬시화, 비주얼화, 혹은 잡지식 편집 경향도 심화되고 있다.
기존에는 이론적으로만 이야기되어 오던 미디어믹스, 책과 인터넷 혹은 TV나 영화와의 연관성을 컨셉으로 한 기획물들이 그 비중을 더욱 늘리고 있다. 그리고 문학작품의 만화화나 동일한 작품을 청소년판이나 어린이판으로 바꾸어 발행하는 등 시장 자체의 외연을 넓혀 나가려는 노력도 치열해지고 있다. 하지만 당대의 건강한 화두를 집결시키거나 담론의 중심축을 끌고 가는 출판의 힘은 부실해지고 있다. 그 만큼 집중적인 시장 흐름이나 빅 셀러가 부재했다는 반증이다.
베스트셀러 동향을 보면 2003년도에는 MBC ‘느낌표’ 브랜드의 매스컴셀러, 심승현과 귀여니 등 청소년 여성독자의 ‘사랑의 느낌’을 쫓는 책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나 『한국의 부자들』을 거쳐 이제는 『나의 꿈 10억 만들기』등 구체적인 액수를 자산 목표로 내건 ‘부자’ 매뉴얼북과 ‘아침형 인간’ 컨셉의 처세 실용서 등의 자기경영 관련서, 감동이 있는 휴먼 스토리 논픽션과 에세이, 틱낫한 류의 명상 관련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련의 해외소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각종 경제경영서나 힐러리 클린턴의 『살아있는 역사』 같은 논픽션, 만화까지 합하면 해외 콘텐츠의 국내 출판 잠식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다. 이라크전, 전쟁과 같은 사회상과 전쟁 드라마가 풍미하는 가운데 전쟁문학의 백미라는 『삼국지』열풍(특히 이문열, 황석영) 관련서도 서점가를 달궜다. 국내 문학과 인문학의 침체가 두드러진 가운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무소유』『호밀밭의 파수꾼』등 신고전 스테디셀러들은 긴 생명력으로 오늘의 지친 대중들과 작가들의 고갈된 문학정신을 위무했다. 한편 우리 고전의 재해석을 통한 현대적 삶의 사유나, 대중과학서-생태-환경-건강-몸-섹슈얼리티 등 일련의 물자체(物自體)로서의 ‘나’를 가치판단의 준거로 삼는 교양?과학?경영서의 뚜렷한 증가세도 지목된다.
한편 2004년 상반기에는『아침형 인간』(사이쇼 히로시), 『선물』(스펜서 존슨), 『연금술사』『11분』(파울로 코엘료) 등 해외 저자들의 문예 및 경제경영 실용서와 자기계발서가 두각을 나타냈고, 국내 작가로는 김훈의 활약이나 이순신 관련서가 두드러졌다. 우리 독자들은 긴박한 생존의 틈새에서 불안한 미래를 헤쳐나갈 마음의 양식을 찾고 있는 듯하다. 주요 기업체의 한자 시험 도입 등에 따른 한자 학습서의 붐 등 어학 및 실용서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포진했다.
■ 경기 침체에 따른 출판시장 불황
올해는 IMF 때보다 경제가 더 어렵고, 개인 부채 증가에 따른 소비 둔화, 주요 독서층이 되어야 할 청년층의 실업률이 사상 최악을 기록하는 등 악재가 겹치고 있다. 출판 현장에서는 책 판매량이 이렇게까지 안 좋았던 적이 없었으며, 신규 기획에 어려움이 많다고 이구동성으로 토로한다. 판매 일선에서의 체감 경기는 매우 혹독했다. 경쟁력 있는 대형 서점들조차 갈수록 매출력이 격감해 우려의 소리가 높다. 불황 하에서 독자들의 구매력 저하라는 절대 조건 때문에 출판계의 자구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불황의 탈출구는 없는 것인가?
경제나 소비자 구매력 향상은 논외로 하더라도, 출판계가 불황의 골에서 탈피하려면 우선 내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의 정보사회는 다원화된 전문 콘텐츠가 요구되는 시대이다. 무료 또는 여타 콘텐츠들과 책의 차별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장르를 가진 차별화된 출판사, 그리고 전문적인 장르를 취급하는 중간 도매상이나 테마형 전문서점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책에 관련된 다양한 정보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 단기적인 시류와 트렌드에 쏠릴 것이 아니라, 출판 콘텐츠 전문기업으로서 소신 있게 자기 분야를 개척할 때 출판사와 서점이 살고, 독자도 살 수 있다. 전문적인 출판이 문화 인프라로서 직립보행 하는 길은 이것 이외에 달리 찾기 어렵다. 아울러 독서운동의 공론화와 조직화도 한층 강화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의 대표적인 사례로 아동서의 재미마주와 역사서의 푸른역사 출판사를 모델로 들 수 있다. 재미마주는 창의적인 그림책 발행과 해외 소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결과 뉴욕타임스가 뽑는 ‘올해의 우수 그림책’ 부문에 2002년(류재수, 『노란 우산』)에 이어 2003년(이호백,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났을까?』)에도 연속 선정되는 큰 결실을 맺었다. 국제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쌓은 것이다. 푸른역사 역시 『조선의 뒷골목 풍경』을 비롯해 특화된 ‘대중과 소통하는 역사서’로 나름의 확고한 위상을 갖추게 되어 주목받는 출판사로 자리매김했다. 이외에도 확고한 출판철학과 장기적인 안목으로 자사만의 기름진 출판의 텃밭을 개간하는 곳들이 적지 않은데, 바로 이런 출판기업들에 의해 불황 논의의 우물 밖에서 비전의 근거가 찾아질 것이다.
■ 출판및인쇄진흥법 시행과 도서정가제 난항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출판에 관련된 종합적인 진흥법을 가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양서 발행 등의 출판활동 전반에 대한 지원책, 유통 활성화, 출판의 국제화, 지방출판 활성화 및 남북 출판교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정책 지원을 통해 출판이 정보사회 발전의 핵심 인프라가 될 수 있도록 ‘책 중심 대한민국?(Ubiquitous Book Korea)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출판및인쇄진흥법이 작년 2월부터 시행되었다. 행정절차법에 가깝던 기존법(출판사및인쇄소의등록에관한법률)을 180도 대체한 이 법은 출판 발전을 위한 정부의 지원 근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규제와 간섭을 전향적으로 없앴으며,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 진출과 전자출판 진흥 등 미래 지향적이라는 측면에서 혁신적인 법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법의 대부분의 조항은 그 효과가 더디게 나타나는 지효성(遲效性) 항목이지만, 가장 큰 관심을 모았고 동시에 즉효성을 띤 것이 도서정가제이다. 아직까지도 도서정가제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순기능과 역기능이 주장되지만, 기본적인 출판유통 질서 유지와 중소 서점 보호가 시급하고 이것이 독자 이익에 직결된다는 한국적 현실에서 볼 때 그 순기능에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만 법 내용이 1년 이내 발행 도서의 경우 인터넷서점에 대해서만 10% 할인을 인정하는 등 오프라인 유통에 대한 역차별성을 띄고 있고, 분야별?연차별로 정가제 대상을 줄이다가 5년 뒤에 완전 폐지하도록 한 일몰법(日沒法) 규정을 둔 채로 ‘출판 진흥’을 지향하는 모순을 안고 있으며, 규제개혁위원회의 반대에 따라 마일리지 서비스에 대한 제한을 두지 않음으로써 시장 혼란을 가속화시킨 점은 이 법의 흠결성 내지는 문화산업에 대한 경제논리의 위악성을 보여준다.
당초 이 법에 대해 이해 당사자들은 최소한의 시장질서 정립을 기대했음은 물론, 인터넷서점들조차 수익률 개선을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과당 경쟁으로 인한 덤핑 시장이 출현했고, 출판사들에게 무리한 출고가 인하를 요구함으로써 도서 가격을 앙등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또한 명목상 정가제로 인해 할인시장에 길들여진 독자들이 제값을 주고 책을 구입하는 ‘정가 신뢰감’이 붕괴된 점도 두고두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겨졌다. 소매상들이 독자의 할인 요구에 응하고 다른 업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갈수록 낮은 가격에 책을 공급받으려 할 것이며, 출판사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따르다 보면 덤핑 시장이 형성되는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실 온?오프라인 간의 가격 역차별 현상은 세계 출판유통 역사에서 처음 있는 잘못된 혁명이다. 그 원인은 온라인 시장의 발전을 수용하거나 제어할 수 있을 만큼 오프라인 유통시장 구조가 발전하지 못하고 너무 허약했기 때문이다. 유통제도나 관행, 출판사의 유통정책, 도매상과 소매상 모두 합리적인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기에는 위약한 영세 문화시장의 기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가격제도가 출판시장 활성화를 위한 규범과 신호등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가제와 관련된 업계 주체들이 어깨를 맞대고 논의를 거듭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출판 발전과 독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공동의 룰과 유통제도의 틀을 하루빨리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출판사들의 최소 공급률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정 등으로 시장질서를 스스로 지켜 나가려는 자구책이 법 개정(마일리지 제한 등)보다 선행돼야 할 숙제이다. 더욱이 현재의 예정대로라면 2005년부터는 실용서가 정가제 대상에서 완전 제외된다. 때문에 특단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데, 출판계가 자사 이기주의나 방관적인 자세를 바꿔 주동적인 문제해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유통 혼란은 더욱 가속화될 개연성이 크다.
■ 출판 트렌드 전망
TV 인기 드라마 관련서나 책 소개 프로그램 관련서, 신문의 주말 북섹션 소개 도서, 기타 매스컴에서 화제가 되는 책, TV 드라마 원작소설 및 관련서, 연예인 관련서 등 전반적으로 ‘매스컴셀러’가 출판시장 전체를 끌고 가는 견인차 역할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기 사극 <대장금> 관련서의 성공은 그 한 예이다. 프로그램 시청률에 정비례하는 출판의 베스트셀러 시장구조 성격상, MBC ‘느낌표’ 선정도서 중단으로 주기적인 대형 베스트셀러의 출현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분산?균형적인 매스컴셀러 지형도가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미디어믹스, 책과 인터넷 혹은 TV나 영화와의 연관성을 컨셉으로 한 기획물들의 비중은 앞으로도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어학 분야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3개 외국어를 중심으로 독특한 컨셉과 효용성을 제시하는 교재들이 변함 없는 성장을 일궈갈 것으로 보인다. 아동서는 작년에 경기 악화와 연동된 약간의 수요 침체가 있었으나 여전히 변치 않는 교육열, 학교도서관 및 어린이도서관의 활성화, 북스타트 프로그램의 전국 확산 경향 등에 의한 영아도서 판매 증대, 신규 시장진입 출판사의 확대 등으로 지속적인 호황을 구가할 것으로 보인다.
비주얼 도서의 선전도 기대된다. 기존의 ‘읽는 책’에서 글과 그림, 만화, 사진을 결합한 ‘보는 책’으로의 전환은 실용서, 교양서 시장에서 그 가능성을 꾸준히 확인시켜 왔는데, 이제 그 영역은 문예물로까지 급속히 확산돼 가고 있다. 화제작 부재로 인한 순문학의 침체와 팬터지의 득세 현상은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정점으로 외국 팬터지 번역물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국산 팬터지의 약진도 기대된다. 인터넷소설에서 부화한 경박단소형 청소년문학은 만화에세이를 거쳐 진화를 거듭할 전망이다. 인터넷소설 붐은 청소년 문학시장에서 예상외로 지지도가 두터워 일시적 조류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학작품의 만화화나 동일한 작품을 청소년판이나 어린이판으로 바꾸어 발행하는 ‘버전 체인지’ 출판도 날로 확산 기세다. 비주얼과 멀티 유스가 완전히 정착되고 있는 추세이다.
구체적 액수를 내걸거나 부동산 투자를 강조하는 ‘부자’ 매뉴얼북과 ‘아침형 인간’ 컨셉트를 잇는 처세 실용서류의 자기경영 관련서, 감동이 있는 휴먼 스토리 논픽션, 명상 관련서, 해외 유명 작가의 소설도 변치 않는 인기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우리 고전의 재해석을 통한 현대적 삶의 사유나, 대중적인 과학서, 역사서, 생존 유명인의 전기, 환경이나 공동체에 대한 담론, 불확실성의 시대를 헤쳐 나가는 모험과 도전의 테마도 새롭게 각광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최근 부각되고 있는 웰빙 관련서도 지속 성장이 예견된다. 특히 건강?다이어트, 스포츠, 환경친화 식품 및 요리, 명상, 취미, 여행, 레포츠, 가족문화 분야의 급속 성장이 두드러질 전망이다. 확대된 여가시간 속에서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회 트렌드에 발맞추어 새롭고 의미있는 가치를 제안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꼼꼼한 매뉴얼북 스타일의 책이 인기를 모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선진국들의 경우도 주5일 근무제 시행 초기에는 수입 확대를 위해 투잡스(Two Jobs) 시기나 소비형?야외형 여가문화 시기를 거쳐 실속형 자기계발 유형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취미와 운동을 핵심으로 한 웰빙 장르와 어학, 자격증, 습관 혁명 등 자기계발 장르가 시장기회를 보다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 출판계의 과제
출판 관련단체들의 2004년 사업 중 상당수는 정부의 국고 지원을 바탕으로 수행되는 관급 사업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 어린이책 한마당’ 개최에 2억원,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선정?보급사업에 30억원, SBI(서울북인스티튜트) 운영에 5억원, 전자책 진흥사업에 12억원, 출판유통 정보시스템 구축(2001~2004)에 31억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운영?사업비로 33억원, 2005 FBF 주빈국 참가 사업 중 ‘한국대표명저 100선 번역’에 25억원, ‘출판저작권 국제유통관리시스템 구축’에 7억원, ‘국제출판유통포럼’ 사업에 3억원, 잡지 콘텐츠 디지털화 기반구축 사업에 4.5억원 등이다.
여기에 종이책 및 전자책 출판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 각종 우수도서 선정?보급 등 간접 지원책을 포함하면 정부의 고(高)관여도 진흥정책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난다.
2003년 12월 17일 청와대에서 개최된 문화관광부의 <참여정부 문화산업 정책비전 보고회>에서도 세계 5대 문화산업 강국 실현을 위한 각종 직간접 지원정책이 망라돼 있다. 아직까지 출판 인프라가 빈약한 상황에서, 특히 도서관 확충을 비롯한 출판문화산업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정부 지원은 긴요하고도 절실하다.
동시에 출판산업 내부의 자생력 강화를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자구노력의 비중을 배가시켜야 할 것이다. 총체적으로 교육출판 시장과 정부 지원에 과다하게 의존하는 산업구조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출판산업의 자생적인 확대재생산 시스템을 축소시킬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판계의 과제는 단기적인 처방전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주춧돌을 세운다는 관점에서 산업전략 로드맵 작성이 필요하다. 출판사는 단발적 시류에 영합하기보다는 세분화된 장르별로 특화된 깊이와 넓이를 갖춘 도서 출판 및 관련 잡지 발행, 새로운 마케팅 기법의 도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또한 서점은 수요가 큰 웰빙 장르 서가를 대폭 확충하고 독자를 찾아가는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별 출판사나 서점의 기업 전문화와 매출 향상 노력 못지않게, 전체 출판계 차원의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서지정보 제공, 독서 마케팅, 미디어 협력, 연구개발 등 상생 시스템 정립이 요구된다.
도매상의 경우에도 영업판매 대행사나 전문 장르 자회사 도매상을 설립하여 수요처 확대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 복합점의 확산, CATV 홈쇼핑 채널을 통한 도서 매출의 급신장 등 유통경로 다변화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판매 및 거래정보를 거래처와 공유하며 신규 매출 포인트를 개발해 나갈 때 도매상의 입지가 보다 확고해질 것이다.
2004년 벽두인 1월 6일, 한국의 중앙M&B와 세계 최대 출판사인 랜덤하우스의 합작법인 ‘랜덤하우스중앙’이 출범을 발표했다. 세계 최대 공룡 출판사의 아시아시장 전략임과 동시에, 우리로서는 언어권의 장벽을 넘어 세계 출판시장과 네트워킹을 꾀하는 기회이다. 일본에서는 e-페이퍼를 활용한 전자책 단말기가 출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화와 디지털화의 파고가 높아지는 데 대한 상황 파악과 대처도 출판계 전체의 숙제로 제기된다.
■ 비전
앞으로의 출판시장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경기 전망도 당분간 5% 이하의 성장률로 전망돼 그렇거니와 출판시장 활성화의 뚜렷한 호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비전을 찾거나 전문 지식?정보를 요구하는 수요는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기획?편집, 창발적인 마케팅, 꾸준한 독서운동과 독서사회화를 통해 책의 진정성을 전달하려는 노력이 지속된다면 희망적인 요소들이 훨씬 더 많다고 본다.
결국 출판 주체들의 위기관리 능력 유무, 정부의 효율적인 시장 활성화 정책에 따라 출판 발전의 속도가 달라질 것이다. 단기적인 해법도 도모되어야 하겠지만, 장기적인 패러다임 변화에 조응하는 출판기업의 체질 변화가 근본 해결책이다. 인재가 곧 출판산업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자세로 출판계 공동의 신규인력 양성 교육제도 지원, 종사자 재교육 등 끊임없는 인적자원 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첫 번째 숙제이다. 기업이나 정부, 학교와 도서관이 양서 구입을 통해 경쟁력 제고에 나서야 한다고 ‘출판계발(出版界發) 독서론’을 주장하는 것 이상으로, 출판계 내부의 교육?연구 시스템이 강화돼야 할 것이다.
“미래의 모습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는 말과 같이, 만성적인 불황론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불황 탈출의 시작이다. 사회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위기와 기회 가운데 기회요인에 주목하고, 특성화된 기업 가치를 증대시키며 독자를 키워가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을 중장기 정책 현안으로 제시한 참여정부는 새로운 성장동력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국가의 미래전략 산업으로 ‘문화콘텐츠’가 선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성장엔진’을 만드는 일은 정부와 출판계 공동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