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227. 묵상글 (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 가혹함에서 사랑을 읽는. 등 )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7 05:07
- 가혹함에서 사랑을 읽는
오늘 주님께서는 눈이 죄짓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그런데 우리 눈이 죄짓게 하면 주님께서 제 눈을 빼버리실까요?
우리는 주님께서 그러실 리 없다고 믿고 싶고
그래서 실제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는 합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노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말했듯
인간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날 때 그때도 인자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 집회서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 하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 위에 머무르리라.”
이 말씀을 뜯어보면 하느님은 마냥 인자하신 분이 아니시고,
죄를 지어도 언제까지나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시고 다만
분노에 더디실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복음 다른 곳에서 비유를 드신 바 있지요.
어떤 사람이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포도 재배인에게 그 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하는데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한 해 더 말미를 주면 공들여 키워보겠다고,
그랬는데도 열매 맺지 않으면 그때 가서 베어 버려도 되지 않겠냐고 하지요.
여기서 포도 재배인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밭의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이신데,
주님께서 그리 애쓰셔도 끝내 회개의 열매 맺지 않는 자는 하느님 아버지께
단죄받는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오늘 주님 말씀은 지엄하고 가혹하지만 사랑이고
그 사랑은 구원의 사랑이요 이 악물고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사랑이요 이 악물고 하는 사랑이라니 뭔 뜻입니까?
그것은 눈을 빼고 다리를 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당뇨 합병증으로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살리기 위해 의사가 이 악물고 다리를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은 하느님께서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기 전에
구원을 위해 스스로 가혹하게 자기 죄를 끊어버리라는 말씀이고
다리를 끊어버리기 전에 죄를 먼저 끊어버리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어쨌거나 가혹함과 단호함에서 사랑을 읽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 하느님의 힘은 사랑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2월 26일 수요일 (호명환 번역) 아홉 번째 주간: 라인랜드(독일)의 신비주의자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 "권능"으로서의 힘을 포기하십니다.
학자 웬디 팔리(Wendy Farley)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 막데부르크의 메흐틸드(Mechthild of Magdeburg)를 소개해 줍니다:
메흐틸드[1212-1282]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지만, 그녀의 이름을 보면 그녀가 슬라브인들의 지역에 가까운 독일어권 국경 지대인 막데부르크에서 삶의 대부분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거의 매일 성령의 "인사"를 받기 시작했던 것은 열두 살인 어린 아이였을 때입니다. 스무살이 되던 무렵 젊은 메히틸드는 막데부르크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녀가 알았던 유일한 사람은 어떤 도미니코회 수사였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온 삶을 베귄(13-16세기에 금욕적 삶을 살면서 자선 행위를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던 여성 공동체 회원)으로 살았습니다.... 메흐틸드가 쓴 아름답고도 과감한 내용을 담은 책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빛(The Flowing Light of the Godhead)는 중세 독일어로 쓰인 첫 번째 종교 작품입니다. 그녀는 당시의 그곳 지방 언어로 글을 썼기에 그녀의 영적 여정과 신학 성찰이 당시 여성들과 평신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1]
팔리는 하느님의 힘에 대한 메흐틸드의 급진적인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말합니다:
메흐틸트 시대의 교회는 인간 사회의 계급적인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느님의 군주적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해서 교황과 주교, 사제, 봉주들, 봉주들에 속해 있던 봉신들, 그리고 가장(아버지)들 순으로 내려가는 계급적 권력 체제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시의 통치자들처럼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라야 했고, 하느님의 징벌을 두려워해야 했습니다.
메흐틸드도 왕(여황제, 여왕 혹은 주군)과 같은 하느님의 이미지를 사용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힘마저도 사랑의 한 형태로 이해했기 때문에 이런 군주적 은유를 특별한 방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는 하느님의 엄위하심과 전능하심마저도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신성한 갈망과 연결되어 있는 하느님의 특별한 속성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메흐틸드에게는 하느님으로하여금 신성한 존재가 되게 하는 원천은 순전한 힘이 아닙니다. 그 원천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과 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놀이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녀는 이 책의 저자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합니다. "나는 나의 힘 없음[unmaht] 안에서 힘을 만들었다[gemachet]. 왜냐하면 나는 인간에게 선물을 내려 주는 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이것이 바로 신성한 하느님의 힘을 묘사하는 역설적인 방법입니다. 하느님마저도 하느님을 억누를 힘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선물을 내려 주시는 것을 멈출 힘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은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려면 권력으로서의 신성 자체를 파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와 마틴 루터와 같은 신학자들은 사랑과 정의 혹은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선택 의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겪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힘을 강압하는 능력 혹은 외부에 의해 간섭받지 않을 수 있는 능력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메흐틸드에게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갈망이 순전한 전능성과 호환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은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권력"으로서의 힘을 포기하시는 분이십니다....
메흐틸드는 엄격한 정의를 요구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며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느님에게 그런 힘을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런 종류의 힘이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힘을 무기력하게 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인해 아버지 하느님은 인간에게 영원히 고통을 주시는 것을 포기하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더 심오하고 더 참된 힘이란 구원하고 치유하고 회복해 주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죄로 인해 짐승처럼 된 이들도 사랑의 일치로 돌려 주는 묘한 형태의 전능-하심입니다.... 하느님의 신성한 힘은 언제나 세상적 권능을 떨쳐 버리는 사랑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제 남편 더그(Doug)는 뇌출혈을 일으킨 후 신체적으로 약해졌고, 말하는 것도 어눌해졌습니다. 그는 조용히 앉아서 고요한 기도를 하며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일종의 평화와 만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그는 그의 삶 대부분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데 할애하였습니다. 내과의사인 그는 누구도 그냥 돌려 보내지 않았고 사람들이 그를 의사라고 부르지 말고 "더그"라고 부르라고 고집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다양한 배경과 종교 그리고 문화의 사람들이 수 백명 참석하였는데, 대개는 더그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준 이들이었습니다. 신비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일부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더그는 그에 대한 대표적인 본보기일 것입니다.
—Ann F.
[1] Wendy Farley, The Thirst of God: Contemplating God’s Love with Three Women Mystics (Westminster Knox Press, 2015), 27, 28.
[2] Mechthild, prologue to The Flowing Light of the Godhead, trans. Frank Tobin (Paulist Press, 1998), 39.
[3] Farley, Thirst of God, 60, 61–6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ugustin Fernandez,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우리는 라인랜드 신비주의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식물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시간과 공간을 통틀어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우리도 이 위대한 신비로 들어가는 관문에 발을 들여 놓도록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
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자그만 정성과 사랑을 향하도록 하는 자극제입니다!
2025.02.27. 06:19
이사야서의 맨 마지막 장(66장) 맨 마지막 말씀이 무언지 아십니까?!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나를 거역하던 자들의 주검을 보리라. 정녕 그들의 구더기들은 죽지 아니하고 그들의 불은 꺼지지 아니한 채 모든 사람의 역겨움이 되리라"(24절).
정말로 무시무시하고 섬뜩한 이미지이지요?! 이는 당시 실제로 예루살렘 외곽에 있던 쓰레기 매립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곳을 "벤 힌놈"이라고 불렀고 "게헨나"라고도 불렀습니다. 이곳에서 폭군 아하즈가 이방 신인 바알을 위한 산당을 짓고 자기 아들딸들을 불살라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 상황을 역대기하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는 또 '벤 힌놈 골짜기'에서 자기 아들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고 요술과 마술과 주술을 하였스며, 영매와 점쟁이들을 두었다. 이렇게 그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많이 저질러 주님의 분노를 돋우었다."(역대하 33,6; 28,3). 예레미야 예언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그들은 '벤 힌놈 골짜기'에 토펫의 산당을 세우고 저희 아들딸들을 불에 살라 바쳤는데, 이는 내가 명령한 적도 없고 내 마음에 떠오른 적도 없는 일이다."(예레 7,31; 32,35).
이곳은 당시에 실제로 벌레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우글거렸고 불이 붙은 곳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솟아 올랐다고 합니다. 이곳이 바로 지옥의 이미지가 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지옥의 이미지도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지옥이 이런 곳일까요?? 아니겠지요?! 하느님 나라와 지옥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관계성과 관련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늘 너무도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게 하시는 말씀, 즉 손과 발을 잘라 버리고 눈을 찍어 던져 버리라는 말씀이나 이 끔찍스럽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지옥의 이미지는 예수님께서 시적인 이미지로 말씀하시는 것임을 전제하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끔찍한 은유를 통해 하느님의 관계성이 단절되는 것, 사랑의 관계성이 끊어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단절과 끊어짐은 지옥에 떨어지는 고통 이상의 극심한 고통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 역시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끔직하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쓰시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 반대쪽, 즉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의 일치가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면 여기서의 단절이 이토록 끔찍하다고 말씀하시는지를 깊이 새겨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 되듯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해 주시는 권고는 우리에게 지옥의 두려움을 심어 주어 우리를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부족함이나 죄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 사랑만을 굳게 신뢰하고 그 사랑에 우리의 시선을 두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길을 따라 그분과 더불어 꿋꿋이 걸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어제 복음 말씀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들어야 합니다. 어제 복음 말씀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아무리 크다고 여기는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그만 정성이라도 들인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받아들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저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의지" 혹은 그러한 "정진"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했고, 또 "물 한 잔이라도 주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자그만 정성"이라도 들이며 살라는 권고로 알아들었습니다.
예전에 학창 시절에 어떤 선생님이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가 칼 같이 정확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다른 이야기보다도 그의 정확하고 빈틈 없는 삶이 그 때에는 참 부럽게 다가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삶이 그렇게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 제가 지향하고픈 삶은 실수와 빈틈이 있더라도 거기에 실망하지 않고 오로지 이 모든 빈 틈을 메워 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만을 확신하며 꿋꿋이 정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아니 전혀 없다는 것을 더더욱 깊이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나' 스스로 빈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나'의 이 턱없는 부족함을 끌어안는 훈련을 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지적을 받을 때도 그것에 심하게 마음 아파하며 그렇지 않은 저를 만들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그러한 '나'를 받아들이고 토닥거리며 좀 더 나은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먹으려고 합니다. 이 노력이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이전의 정신 구조로 이에 반응하는 저를 발견할 때도 있지만, (사실 이런 부족함도 그러려니 해야 하겠지요?!...) 이런 자그만 실천이 놀랍게도 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부족함과 실수에 대해서도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해 준다는 사실을 가끔씩이라도 경험합니다. 물론 여전히 이것도 더 풀어가야 할 숙제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이 무시무시한 말씀이 오히려 저에게 격려처럼 다가와서 마음이 편합니다.^^
하느님께는 우리의 죄가 [벌]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치유]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2.27 06:49
체중이 쥐의 10,000배 큰 코끼리는 쥐보다 몇 배 많은 먹이가 필요할까요? 당연히 10,000배, 아니면 그 이상의 먹이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1,000배 정도 많이 먹을 뿐이라고 합니다. 인간을 봐도 그렇습니다. 자기보다 훨씬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그 체중만큼 더 많이 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크기가 두 배가 되었을 때, 에너지 요구량은 100%가 아니라 75% 증가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체중이 많이 나가면서 에너지 요구량이 그만큼 늘어나서 더 많이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적당량을 먹어야 했습니다.
만약 적당량을 넘어서는 양의 음식을 섭취한다면 어떨까요? 건강에 좋지 않게 됩니다. 체중이 늘어나 비만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상태는 심장병, 당뇨병, 특정 유형의 암과 같은 만성 질환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지만, 소유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당량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지금보다 더’를 외칩니다.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적당량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약간의 풍요하고 넉넉한 삶을 주기도 하지만, 욕심과 이기심으로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욕심을 멀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삶을 살기에, 주님과도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희생도 주저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손이 죄짓게 하면 잘라 버리라고 하시고, 발이 죄짓게 하면 이 역시 잘라 버리라고 하십니다. 눈이 죄짓게 하면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시지요. 이만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과감히 결정해서 구원의 여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걸림돌을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회개의 삶은 거창한 곳에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물 한 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늘에서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 한 잔이라도 줄 수 있는 작은 사랑의 실천만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짠맛을 잃으면 소금으로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치가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받은 주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야말로 참소금이 되는 비결입니다.
--------------------
오늘의 명언: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앙드레 말로).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앞 장면에서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서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2)
우리가 자주 빠지는 일이기에 가슴이 섬찟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죄짓게 하는 도구 세 가지, 곧 자신의 ‘손’과 ‘발’과 ‘눈’을 잘라버리고 빼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구더기와 지옥 불과 지옥 불 소금을 피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손’과 ‘발’과 ‘눈’을 잘라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그 단초가 되는 ‘죄의 뿌리’, 곧 ‘죄를 불러들인 마음의 뿌리를 절단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곧 죄를 불러들이는 단초가 되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금’으로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하십니다.
사실, 소금은 성경에서, 곡물(레위 2,13)이나 향료(탈출 30,35)에 뿌려져 성별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제물(민수 18,19)에 뿌려져 하느님과의 계약 관계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부패를 막고 거룩하게 하며, 거룩한 관계 안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산상설교에서 보여주듯이 ‘소금’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세상의 소금”(마태 5,13) 입니다. 곧 ‘소금’은 ‘다른 이 속으로’ 혹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녹아서 자신이 사라지면서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을 새겨 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참여하는 모든 것, 곧 세상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타인과 함께’, ‘타인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평화 안에서 사랑의 올바른 관계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을 되새겨봅니다.
“여러분의 말은 언제나 정답고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낸 것과 같아야 합니다.”(콜로 4,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 9,50)
주님!
제 마음을 사랑의 소금에 절이소서.
하여, 제 마음이 부패하지 말게 하소서!
제 마음이 깨끗해지고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사랑의 소금으로 형제들에게 녹여 들어가
당신의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단호한 결단
“행동을 통해서 수확하는 것은 습관이고, 습관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성격이며 성격을 심어 수확하는 것은 운명입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관을 만들지만, 그다음에는 습관이 우리를 만듭니다.”그러니 좋은 습관을 지닐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은 덕이 되고, 좋지 않은 습관은 그야말로 악습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모습으로 남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9,4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이 약한 사람을 죄짓게 하여 신앙을 저버리게 한다면 그 책임이 막중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발이 너를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마르9,45-47). 이렇게 섬뜩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악한 행동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섬김의 자세로 살지 않고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이들을 신앙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이 되어서 버려질 뿐입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지요.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합니다. 매 순간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권력과 돈과 허영을 쫓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봉사와 겸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세속적인 유혹’을 이겨내고 출세와 출세를 위해 타인을 망가트리고 싶은 유혹에 잘 맞서야 한다.'
날이 갈수록 신앙이 여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참된 신앙인의 삶보다는 무늬만 신앙인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환경은 좋아졌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정도는 부족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환경과 여건, 처지가 어려웠지만 믿음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상 안에서 나를 유혹하는 것이 너무도 많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도 늘어만 갑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은 한순간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2코린 4,18). 그러므로 영원한 것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마르9,41-50).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은 보존하기 위한 소금이 아니라 주기 위한 소금입니다. 소금은 자기 맛을 느껴지지 않게 하고 오히려 각 음식의 맛이 좋아지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자신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지옥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9,48). 지옥은 엄연한 실재입니다. 우리가 아직 볼 수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과 멀어져 마음의 불안을 느낄 때를 생각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옥불의 뜨거움은 현세에서 불의 뜨거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체험할 수 있겠지만 원한에 사로잡힐 때 영혼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으로 채워져 있지만, 지옥은 온갖 증오와 원한, 분노,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비가 허락되는 이 지상의 삶에서 천국을 희망하고 지옥의 삶을 피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지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사랑으로 천국을 완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성서 말씀에서 저는 두 가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는 단순한 보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라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조건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형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정의롭지 못하게 살거나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면, 형통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학생 때 배운 ‘가정법’이 생각납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예문이 있습니다.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하는 일마다 잘 될 수 있으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조건을 잘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필요한 조건만 채워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한 조건까지 채워져야 합니다. 세례는 구원의 필요조건이지만 그것만으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서 주어지는 책임과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우리가 작은 행동 하나라도 선택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마실 물 한 잔’의 의미는 단순한 물 한 잔을 넘어섭니다. 이는 작은 사랑의 실천, 작은 친절이 큰 축복을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마실 물 한 잔이 될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작은 선행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미소 하나, 관심을 두는 태도도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만드는 씨앗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부자는 좋은 옷과 큰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지만, 집 앞에 있는 라자로라는 거지를 외면했습니다. 부자에게 라자로를 도와주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길에 강도당해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레위는 강도당한 사람이 이방인이라면서 외면했습니다. 사제는 예배 시간이 급하다면서 외면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었고, 여관에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잘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의 친척도,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학자는 이렇게 답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구원은 사제나 레위라는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지금 당장 작은 행동을 통해 미래의 축복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작은 행동이라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형통이 따르고, 우리가 베푸는 선행 하나하나가 하늘에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들려주셨습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예수님께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외롭고, 아픈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예수님께 해 주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발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발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두 눈을 가지고 지옥으로 가느니, 한 눈이라도 가지고 천국으로 가야 합니다.” 나에게 소중한 것을 이웃에게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서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혹은 그에 걸맞은 비용을 지급해야 합니다. 그 비용은 비단 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용은 시간일 수도 있고 노력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자격증을 취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회비용으로 학원등록을 위한 등록금과 그곳에서 공부하기 위한 시간과 우리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기회비용이 합쳐져서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들여서 큰 것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말씀은 조금 무섭게 들립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그것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 발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짓게 하면 그것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말한 기회비용과 다른 문제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꼭 주님 말씀처럼 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솔직한 마음으로…. 손이 잘리기를 원하지 않고 발이 잘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눈을 빼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온전히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만약 그대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면 우리는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한 기회비용을 이런 것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우선 내 손과 발을 예의주시하세요. 죄짓지 않게 말입니다. 내 눈을 주시하세요. 눈에서 독이 나가지 않게... 입도 주시하세요. 입에서 화살이 나가지 않게….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기회비용은 내가 나를 잘 돌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열혈사제
유명한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열혈사제’라는 드라마가 한동안 우리에게 재미를 주었습니다.
친한 두 가족과 식사하던 중 아이들의 등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아침에 제가 아이들과 함께 로만칼라를 하고 등교하면 아이들은 한 번에 주목받게 되겠지요! 열혈사제와 함께 왔다고….’
옆에서 듣고 있던 한 형제가 씨익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부님은 김남길이 아닌데요. 오히려 아이들이 힘들어질 거예요.’라고….
제가 제 모습을 너무 과대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우 김남길님과 동급으로 생각했으니까요.^^
뭐 어떻습니까! 인생 자기 멋에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 중심의 지혜로운 삶
“재산을 믿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죄를 단호히 물리치라”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다시 한 번 불러보는 만세칠창중 하나에 애국가 1절입니다. 새삼 대한민국이 하느님의 각별한 보호속에, 강대국들의 무수한 침략중에도 이렇게 융성한 발전을 이루고 있음은 천운의 기적임을 감사로이 깨닫습니다. <병자호란> 책을 독료하면서 조선이 참혹하게 멸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할수 있었음은 홍타이지의 호의와 더불어 마침 시작된 마마(천연두) 덕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의 난국도 슬기롭게 타개해 나가리라 믿습니다.
조선의 마마에 쫓기어 홍타이지가 삼전도 의례로 전쟁의 막을 내리고 서둘러 귀국했다는 사실을 어제의 독서를 통해 알았습니다. 조선의 천연두가 조선을 구한 것이니 이 또한 천운입니다.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중국의 한족에 흡수되어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구한 역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 불후의 도움이 된 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역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임을 새삼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이 주님의 참된 제자이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주님 중심의 겸손과 지혜, 감사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북돋웁니다. 재산을 믿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히, 또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며 살게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주님의 참된 제자들에게 해당된다 싶습니다.
“나무가 열매로 사람을 모으듯 어른은 성품으로 사람을 따르게 한다.”<다산>
“복숭아와 오얏나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무 밑에 저절로 길이 생긴다.”<맹자>
성령의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주님의 참된 제자들을 지칭한다 싶습니다. 봄의 꽃향기도 좋지만 가을의 둥글게 익어가는 원숙(圓熟)한 열매들의 깊고 그윽한 향기는 비교불가합니다. 이건 가을 열매 익어가는 배밭사이를 걸으며 매해 실감하는 진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는 우리가 추구할바 지혜로운 삶의 방법을 알려줍니다. 주님 중심의 재산을 믿지 않는 초연한 이탈의 삶이,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삶이 참된 제자의 삶임을 가르쳐 줍니다. 가르침이 실제적이며 직접적이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라 공부하는 자세로 마음에 새기며 전문 그대로 인용합니다.
“재산을 믿지 말고, ‘넉넉하다.’고 말하지 마라.
너 자신과 네 힘을 붙쫓지 말고, 마음의 욕망을 따르지 마라.
‘누가 나를 억누르리오?’ 말하지 마라.
주님께서 기필코 징벌하시리라.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는가?’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속죄를 과신하지 마라.
죄에 죄를 쌓을 뿐이다.
‘그분의 인자하심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말라.”
모두가 재산을 믿지 말고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중심의 회개의 본질적 삶에, 주님을 경외하는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무욕의 지혜요 무욕의 겸손입니다. 무욕의 다른 이름은 주님을 사랑하는 청정욕입니다. 청정욕을 발휘하여 순수와 열정, 희망과 기쁨, 감사와 평화,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소금이 상징하는바 이런 청정욕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짯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바로 청정욕의 내용을 이루는 참 좋은 덕목들이 마음의 소금입니다. 또 소금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중심의 회개의 삶에 충실할 때 선물처럼 주어지는 청정욕에 참 좋은 덕목들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죄의 엄중함을 통감하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끊어버리라는 주님의 충격요법적 충고입니다.
죄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를 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 하시니, 이웃을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선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죄짓게 하거든 그 발을 잘라 버리며, 눈이 죄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 던져 버리라는 격렬한 말씀은 바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결코 문자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니 그러하다면 천국은 온통, 한 손, 한 발, 한 눈의 애꾸눈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치명적이니 철저한 회개를 통해 차단하라는 것입니다. 몸이나 사회에 암세포같은 죄의 암세포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암세포같은 죄가 번지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또 개인이나 사회를 부패케 하는 죄입니다.
기도도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너무 죄가 만연되어 죄의 암세포가 마음이나 사회에 퍼지면, 또 부패가 만연되어 마음이나, 사회가 너무 썩으면 기도도 회개도 소용없습니다. 이런 상태의 현대인들은, 나라나 사회는 아닌지 우려되는 총체적 난국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하느님 중심 방향을 향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 중심의 회개와 청정욕의 삶에 항구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시편40,5ㄱ). 아멘.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참된 사람에게
참되니
참된 사람이지요
착한 사람에게
착하니
착한 사람이지요
바른 사람에게
바르니
바른 사람이지요
고운 사람에게
고우니
고운 사람이지요
따뜻한 사람에게
따뜻하니
따뜻한 사람이지요
부드러운 사람에게
부드러우니
부드러운 사람이지요
깨끗한 사람에게
깨끗하니
깨끗한 사람이지요
믿는 사람을
믿으니
믿는 사람이지요
희망하는 사람을
희망하니
희망하는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니
사랑하는 사람이지요
그리스도의 사람을
품으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요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르 9,45)
지옥은 과장이 아니다
어머니나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제가 가짜 도깨비로 협박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아이들이 심하게 울어 그치지 않으면 꾸며 낸 이야기로 아이들을 조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동화가 아니라 진실한 목소리로 선포된 말씀입니다.
-대 바실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모세는 그의 주 하느님께 애원했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 낸 자”라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다시 말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백 마르크의 금화를 하느님을 위해 바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고, 뜻깊은 일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내게 일백 마르크의 돈이 있으면 그것을 거저 바칠 수 있을 터인데라고 마음먹고, 이것이 나의 온전한 바람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나 다름없으며, 하느님은 내게 상을 주셔야 할 것입니다. 마치 내가 하느님께 일백 마르크의 돈을 바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입니다. 내가 온 세상을 소유하여 그것을 하느님께 바치고자 마음먹었다면, 나는 온 세상을 하느님께 바친 것이고, 하느님은 내게 상을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하느님을 위해 온 세상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의 아니게 교황을 때렸다고 해도, 나는 태연하게 제단으로 가서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 속에 있는 ‘인성’이나 교황과 황제 속에 있는 인성이나 똑같이 완전하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들어 있는 인격보다 ‘인성’이 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내가 말한 진리가 우리를 도와서, 우리가 똑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아멘.(339)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5 장 두 천사 세상을 떠나다
성체의 예수님과 함께 희생이 되다
마지막 날의 사연들
히야친따는 때때로 원장님께 말한 적이 었다.
“여러분은 수술하면 된다 하시지만 성모님께서는 내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은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날 파티마에서 문병 온 사람이 있었는데 히야친따는 그에게, 꿈에도 잊지 못하는 루치아에게 자신의 행복스런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모님께서 오셨었는데, 그때 내가 죽는 날과 시간을 가르쳐 주셨어. 그리고 착한 애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어."
히야친따가 갖은 방법을 다해 수술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으나 1920년 2월 2일 도나 스테파니아 병원으로 옮겨져서 8일 후에는 수술을 받게 되었다.
몸이 너무 허약해서 전신 마취를 할 수 없어서 국부 마취를 했다. 보기에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종전보다 더 심해졌고 체력은 눈에 뜨일 만큼 줄어들었다.
왼쪽 가슴에서 두 개의 늑골을 빼낸 자국은 손바닥만한 크기의 상처가 되어 기분 나쁜 모양으로 벌어져 있었다. 붕대를 갈 때가 되면 가없은 순교자는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무서운 고통에 시달렸다. 그러나 소녀는 기특하게도 그 고통을 잘 참아 견디었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려고노력했다.
만일 문병 온 부인이나 간호원 중에 누가 너무 점잖지 않은 옷차림으로 병실 앞을 지나치면 히야친따는 말하는 것이었다.
“저렇게까지 하다니. 도대체 저게 무슨 소용이 될까 ? 저 사람들이 영원이 무엇인지 안다면....”
또 우연히 의사들 입에서 회의주의나 불신 사상이 반영된 말이 새어 나오면,
“가없은 분들! 저 사람들은 무엇이 자기네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요.” 하고탄식하였다.
그 아름다움으로써 소녀의 마음과 상상을 풍요롭게 채우신 빛의 귀부언은 마지막으로 다시 소녀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히야친따의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다.
“보세요. 난 조금도 괴롭지 않아요. 성모님이 오셔서 곧 데리러 오신다고 했어요. 그리고 제 고통을 없애 주셨어요.”.(191)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선행과 기도로 은총의 삶을 /
박윤식 [big-llight] 250226. 18:56 ㅣNo.180359
아프리카서 원숭이 잡는 법이다. 그가 좋아하는 먹이를 나무 구멍에 넣는다. 그러면 원숭이는 거기에 손 넣고 먹이를 꽉 움켜쥔다. 먹이를 쥔 순간 그는 구멍에서 주먹을 뺄 수 없다나. 먹이를 포기하면 되는데도, 끝내 그걸 움켜쥐고는 결국 잡힌다. 참 어리석지 않은가? 그런데 이 원숭이가 어쩜 우리와 닮은 것 같다. 재물과 명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집착 등으로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건 아닌지? 그렇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꽉 잡은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아야 할 게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게 예수님 가르침이다.
“나를 믿는 이 단하나 작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손이 죄지으면 잘라라. 두 손으로 지옥 불에 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을 얻는 것이 낫다. 발이 죄지으면 잘라라. 두 발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 얻는 게 낫다. 또 눈이 죄지으면 빼버려라. 두 눈으로 지옥 가느니, 외눈으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낫다. 지옥에서는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불 소금에 절여지리라.”
참 냉정하고 가혹하다. 남 죄짓게 하는 이에게 닥칠 걸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서 경고하시기에. 가장 소중한 손과 발, 눈이 죄짓게 하면 가차 없이 버리라는 예수님 말씀은, 아예 죄 지을 생각조차 말라는 훈계다. 우리도 간혹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할 수도.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유혹에 빠졌을 때 겪을 고통을, 미리 알고 계셨나 보다.
그렇지만 우리 몸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모를 통해 받았으니, 머리카락 하나라도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게 맞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치 우리 몸을 난도질이라도 하듯, 손이나 발이 죄 지으면 잘라 버리고, 눈마저도 빼 버리라신다. 그분의 이 말씀은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당연히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우리네 이 몸을, 소중히 여기셨음에 틀림없을 게다.
그런데도 왜 이런 무시무시할 정도의 몸서리치는 단호한 말씀을 굳이 하시는지? 사실 우리네 몸 세포 하나하나가 때로는 나쁜 기억들을 품고 있어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유혹하고 있단다. 이 때문에 손발 잘라 내는 아픔을 감수하듯 단호하게 죄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육체의 노예가 된다나.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해 이런 냉정하고 엄격한 생각을 가지셨다.
이는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기고, 하느님을 모르는 게 더 자유롭다고 말하는 냉소적인 이들에게는 대단한 경종이다. 재산 모으기만 하고 나누지 못한 이들이 말년에 겪는 자녀들 재산 다툼, 평생 돈 모으느라 건강 잃어 삶의 기쁨도 잊은 채 병원비로 재산을 몽땅 날리는 이들, 망나니로 키운 자녀들 뒤치다꺼리로 재산을 탕진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경고다. 때로는 이런 훈계가 실감나지 않을 수도. 다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야 뒤늦게 깨닫는 우리이기에. 나만 잘살겠다고 평생 남을 외면하면, 훗날 하느님 마주 뵐 때 무슨 말씀 드릴 것인지 생각해 볼 때다.
죄 짓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언뜻 보면 위압감만 자아낸다. 그렇지만 그대로의 해석은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완벽한 게 아닌 부족한 이들이기에, 죄 짓지 않고 산다는 건 참 어렵다. 그러기에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야만 한다. 속죄의 정신으로 인내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려면 선행과 성사 생활에 충실하자. 은총만이 죄의 유혹 피할 테니까.
----------------------------------------------------
250227. 연중 제 7주간 목요일.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님.
오늘 복음에서는 작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큰 사랑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며 작은 이를 죄짓게 한 사람은 혹독한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이 내용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였다가는 세상에 성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뜻은 그만큼 죄를 두려워하라는 것이고 육신의 지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죄를 부추기는 원인들, 곧 탐욕, 허영, 교만, 이기심 등을 잘라 내라는 뜻일 것입니다.
어떤 교부는 시각(視覺)의 마차에 올라탄 우리의 생각을 하느님 사랑을 향하여 몰고 가야 한다고, 육적인 시선을 마음의 판단에 복종시키라고 권고합니다.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특히 시각은 범죄 영상물까지 포함하여 온갖 종류의 영상이 지배하는 우리 시대에 각별히 절제해야 할 감각입니다.
절제의 덕은 우리에게 죄에 대한 식별력을 길러 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시궁창과 그 얼룩을 잘 알지만 죄악에 빠진 사람은 자기 병세의 심각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시궁창에서도 향유 냄새가 나는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오늘 독서인 집회서가 경고하듯 눈앞의 현실에 몰두하여 주님의 자비와 인내를 과신하거나 남용하지 말고 죄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지켜 주는 절제 안에서 서로 평화롭게 지내려면 마음에 소금을 간직해야 하는데, 대 그레고리오 성인은 이 소금이 바로 하느님 말씀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