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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나라(雪國)
이 수 영
세찬바람과 함께 눈발이 거세다.
추르르르, 차르르르 싸락눈이 교실 유리창을 두드린다. 아이들이 모두 그쪽을 본다. 그 좁디좁은 유리창 틈으로 눈이 스며들어 어느 새 창틀에는 소담스레 눈이 쌓여간다. 이쯤 되면 수업을 포기해야 한다.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운동장을 향한 남쪽 창문가에 모여들어 소리를 지른다. 온 몸이 근질거리는 모양이다. 에라! 인심 한 번 쓰자.
“모두 장갑 끼고 운동장으로…!”
우루루 운동장으로 몰려나간 아이들은 신명이 났다. 말이 필요 없다. 눈싸움을 벌이고, 눈에 뒹굴고, 눈사람을 만들고…. 그날은 1978년, 울릉도 발령을 받고 T초등학교에 부임한지 며칠 되지 않은 3월 초순이었다.
세상에!
나는 3월에도 그처럼 눈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해 본적이 없었고, 그 눈발이 유리창 틈새로 날아들어 교실 남쪽 창틀 안쪽에 소복소복 쌓여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몇 시간을 그러더니 어느 새 날은 개고 눈은 발목이 덮일 정도로 많이 왔다. 내가 눈이 많이 왔다고 감탄을 하고 있는데 선임자들이 빙그레 웃으며 이건 눈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여객선이 좋아서 몇 시간이면 울릉도에 갈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청룡호 또는 동해호라는 정기 여객선이 포항에서 도동까지 가는 데는 순항을 해도 8시간이 걸렸고, 풍랑이 심하거나 날씨가 사나워지면 12시간 이상을 바다에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 뱃길의 끝에 만나는 섬의 풍경은 그냥 감동이었다.
배가 서서히 섬 쪽으로 다가서면 섬은 거대한 성벽처럼, 그리고 하얀 웨딩드레스를 떨쳐 입은 화사한 신부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그곳은 눈의 나라였고 기기묘묘한 바위와 처음 보는 식물들이, ‘신밧드 모험’ 속의 신기한 나라들처럼 가슴을 짠하게 하는 감동이 있었다.
배가 서서히 섬 쪽으로 다가서면 멀리서 두 손, 그리고 플래카드(Placard)와 피킷(Picket)을 흔들며 우리를 환영 하는 것이었다. 울릉교육청 직원들이 외로운 섬에 부임하는 교원들을 맞이하는 따뜻한 배려였고 그날 하루의 잠자리와 임지로 가는 방법 등을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손을 흔들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맞이한다거나 떠나 보내는 풍경은 상상한 적이 없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섬사람들의 일상이었다. 험한 바다를 앞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어부든 길손이든 한 번 배를 타면 절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어쩌면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었고 배가 항구에 들어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시각으로 그들의 가슴에 각인된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그들을 닮아 갔다.
설국! 울릉도의 첫 대면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다행히 울릉도에는 학교마다 육지에서 부임하는 교사들을 위한 관사가 있었다.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를 다독이며 짐을 옮겨 놓고 청소를 하고 불을 지펴 난방을 하고 있는데 이웃집 선배 선생님이 먹어보라며 처음 보는 나물을 가져왔다. 이름하여 ‘전호나물’, 미나리 비슷하기는 한데 모양도 조금 다르고 향이 좀 진했다. 이 나물은 2월부터 먹을 수 있는데, 눈이 많아 오는 울릉도에서는 눈을 이불 삼아 그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는 눈석임물로 자란다고 했다. 해열제 진통제의 약효도 있어서 기침 감기에도 좋다고 했다.
눈 그리고 눈 속에서 자란다는 전호나물과의 만남이후 좀은 생소한 섬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다시 겨울이 왔다.
그때 그 눈이 온 것은 아마도 1979년 2월로 기억된다. 울릉도의 눈은 한 번 오기 시작하면 무릎 정도는 보통이고 오면서 밑으로는 녹아내리기 때문에 쌓인 눈이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저녁 무렵부터 내리는 눈을 보고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일어나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온 세상이 눈! 눈! 눈이었고 그 눈은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눈발이 많이 잦아들긴 했지만 아직도 바람결에 조금씩 눈이 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옆집의 동료를 불렀다. 그러자 뭔가를 탁탁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대답이 왔다.
“이 선생, 눈을 치우려고 하지 말고 두드려! 그렇구나. 눈이 가슴 높이로 쌓일 땐 눈을 밀어내거나 삽으로 퍼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길을 내려고 눈가래로 눈을 탁탁 두들겨 단단하게 다지고 그 위로 걸어다닌다는 것이었다. 한참 땀을 흘리고 두들기니 이웃과도 연결이 되었다. 그 길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추녀가 쌓인 눈의 높이와 키재기하고 마을 골목길이 지붕의 거의 반쯤 높이까지 와 있었다.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학부모들이 마을 앞길에서 교문까지, 그리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아이들의 등굣길을 틔우려고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내 생애 처음 보는, 눈물이 찔끔 나도록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학교 뒷산의 소나무 가지가 더러는 꺾이고 거센 바람에 운동장의 간이 농구대가 비스듬하게 기울긴 했어도, 오히려 눈이 있어서 그 기울어진 농구 골대를 버티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가슴까지 쌓였던 눈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하루에 10Cm, 또는 20Cm씩 쑥쑥 낮아지더니 며칠 지나자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이었다. 흡사 땅 속에 무슨 불기운이 있어서 녹여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로 나는 웬만한 눈에는 놀라지 않는다. 그 이듬해 내가 그 섬을 떠나던 해 2월에도 그렇게 눈이 많이 왔다. 그 눈 속에서 고개를 들어 멀리 산을 바라보거나 섬 기슭의 바위나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기가 바로 눈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곳 사람들은 3무(도둑, 거지, 뱀) 5다(바람, 눈, 향나무, 미인, 오징어)를 자랑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 중에 눈으로 치장한 울릉도의 그 산하를 제일로 꼽고 싶다.
지금도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 그 눈 속에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소박하고 정겨운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 이 글은 2014년에 쓴 글을 수정한 글입니다.
2017. 11. 30
첫댓글 선생님의 글을 읽고 말로만 듵던 을릉도의 눈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어촌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치우는 아름다운 광경이 아름답습니다. 도시 사람들도 자기집 앞 눈은 각자 치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설국 울릉도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에 선 합니다. 저는 아직 울릉도 구경 한번 못했습니다. 글을 읽으며 눈오는 울릉도 가보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설경에 걸 맞는 멋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드립니다.
울릉도에 눈이 많이 내린 소식은 뉴스를 통하여 자주 접했습니다만, 실제 체험한 선생님의 글을 통하여 동해의 아름다운 섬, 울릉도가 설국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눈으로 인해 불편한 점도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아름다운 글재가 되고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울릉도, 설국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그렇게 눈이 흔한데도 아이들은 눈 오는 날을 좋아하는군요..섬사람들의 애환, 그리고 섬마을에 적응해 가는 섬마을 선생님의 이야기가 하얀 눈처럼 아름답기만 합니다. 그리움과 추억은 봄눈처럼 녹지 않고 늘 살아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남편이 4년동안 근무했던 울릉도 이야기가 나오네요. 기상변화에 따라 방학이 보름씩 늦을때도 있고 배가 움직일 수 없어 포항에서 되돌아오던 그 때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립니다. 고생 덕분에 직할시 되던해에 대구시로 발령을 받았지만 4년 이란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울릉도가 설국이라 할 만큼 눈이 많은 곳인 모양입니다. 같은 경북이면서 울릉도는 다른 새상인가봅니다. 울릉도에 살면서 겪은 경험이 운치있게 닥아옵니다. 나도 한번겪어버고 싶은 마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울릉도. 눈이 쌓여 가지말라는 주민들의 조언을 듣고도 성인봉을 올랐을 때를 생각하며 雪國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포항시에서 10년간 재직하며 울릉도 정보는 대충 알았습니다만 눈에대한 애환은 신기합니다. 그당시 얼마나 황당하고 시련이 많았겠지만 순기능도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고생하셨으며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