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가 패(浿). 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적혀 있다. 이 미추골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는 말로서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 또는 미달(彌達)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고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 즉 수도라는 뜻이다. 비류(沸流)와 소서노(召西努)는 소서노의 부(父) 연타발(延타勃)과 같이 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 지금의 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浿). 대(帶) 지역에 터를 잡고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을 도왔으나, 고주몽이 맏이(伯)인 자기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고주몽이 죽었을 때 패. 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위 패(浿). 대(帶) 지역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 하류이다. 즉 비류백제의 미추골(수도)은 태자하와 혼하 하류에 있었다.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요서(遼西) 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중국의 사서에 북평(북경)에서 유성(조양) 사이에 백제의 요서군(遼西郡)이 있었다고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그와 같이 주장하였으나,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백제는 구태백제이지 비류백제가 아니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요서 지방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패수, 대수는 나라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던 강이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건국된 B.C 19년경에는 한반도에 나라군(樂浪郡)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 아니다.
2. 건국 경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 받았다. 延타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 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 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소서노는 연타발과 같이 골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패. 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10년 만에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겼다. 소서노는 그 공으로 고주몽으로부터 패. 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 백제 왕의 칭호인 어라하의 오기?)에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고주몽은 비류수상류에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 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소서노의 몸에서 난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沸流)는 고주몽의 이러한 조치가 고주몽을 도와 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고주몽이 죽었을 때 비류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에서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인 자기에게 있다며 스스로 고주몽고구려의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은 유리가 차지하였고, 비류(沸流)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는 비류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위 비류(沸流)라는 명칭은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비류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한 것이며, "流"는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즉 비류(沸流)는 물 옆에 살던 천제의 아들이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사서에는 비류(沸流)와 고구려(일명 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沸流)가 고구려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가 들어간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비류는 진짜던 가짜던 간에 자신이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로부터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라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단지 맏이라는 이유 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沸流)는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또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3. 비류백제 역사
환단고기(桓檀古記)나 삼국사기(三國史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경위만 간략히 적혀 있을 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역사나 멸망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나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수(漢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 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이l 텅 비어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류(沸流)는 이 무렵 패. 대 지역에서 한지(韓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A.D 19년경은 고주몽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 상류 지역에 거주한 양맥(梁貊)과 심양(沈陽)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 현(高句麗 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이때 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은 고주몽고구려가 점령한 태자하 중. 상류 지역으로 도망갔다. 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로 도망가자 비류(沸流)는 한지(韓地)로 가서 홍성 금마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 땅을 할양 받아 한지(韓地)에 나라를 다시 세울 마음으로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미추골(彌鄒忽: 수도라는 뜻으로, 이 미추골은 비류가 洪城 金馬 馬韓을 만나기 위하여 한반도로 와서 일시 정착한 곳이므로 牙山灣에 있는 仁州密頭里로 추정된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라서 비류는 땅을 할양 받지 못하였다. 이에 비류는 온조(溫祚)의 도읍지가 자리 잡히고 백성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註 어떤 분은 비류가 죽었을 때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지 않고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계속 존속하였고, 위 비류백제가 뒤에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진출하는 등 강국(强國)이 되었다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패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온조왕(溫祚王) 재위 때 멸망하였으므로, 위 주장은 사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해는 A.D 390년이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있던 구태백제(九台百濟: 광개토왕비문에는 "倭" 또는 “伊殘”으로 적혀 있다)를 공격한 해는 영락(永樂) 6년(A.D 396년)이므로, 비류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는 주장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진출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비류(沸流)가 패(浿). 대(帶) 2강을 건너 미추골(彌鄒忽)에 이르러 살았다고 적혀 있다. 이 미추골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는 말로서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따라서 미추골(彌鄒忽) 또는 미달(彌達)은 특정한 지명이 아니고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 즉 수도라는 뜻이다. 비류(沸流)와 소서노(召西努)는 소서노의 부(父) 연타발(延타勃)과 같이 전에 고구려(일명 북부여)의 수도로 사용된 골본(忽本: 지금의 심양)에서 살다가 B.C 42년에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와 패(浿). 대(帶) 지역에 터를 잡고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의 입국을 도왔으나, 고주몽이 맏이(伯)인 자기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자 고주몽이 죽었을 때 패. 대 지역에서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위 패(浿). 대(帶) 지역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태자하(太子河)와 혼하(渾河) 하류이다. 즉 비류백제의 미추골(수도)은 태자하와 혼하 하류에 있었다.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요서(遼西) 지방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분은 중국의 사서에 북평(북경)에서 유성(조양) 사이에 백제의 요서군(遼西郡)이 있었다고 적혀 있는 문구를 보고 그와 같이 주장하였으나, 뒤에 나오는 바와 같이 요서 지방으로 진출한 백제는 구태백제이지 비류백제가 아니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요서 지방이 아니다. 또 어떤 분은 비류백제(沸流百濟)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한서(前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패수, 대수는 나라군(樂浪郡) 지역을 흐르던 강이다. 그러나 비류백제가 건국된 B.C 19년경에는 한반도에 나라군(樂浪郡)이 아직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비류백제가 건국된 패. 대 지역은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 지역이 아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에서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 경위를 살펴본다. 「연타발(延타勃)은 졸본(卒本)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에 봉 받았다. 延타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 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 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에 의하면 비류(沸流)와 소서노는 연타발과 같이 골본(忽本)에서 살다가 B.C 42년에 패. 대 지역으로 이동하여 10년 만에 많은 재물을 모은 후 재물로 고주몽을 섬겼다. 소서노는 그 공으로 고주몽으로부터 패. 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於瑕羅: 백제 왕의 칭호인 어라하의 오기?)에 책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이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과 결혼하였고,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에 의하여 사위 자격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에 있던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상류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다. 고주몽은 비류수상류에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 왕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소서노의 몸에서 난 비류(沸流)를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비류(沸流)는 고주몽의 이러한 조치가 고주몽을 도와 준 자신을 배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고주몽이 죽었을 때 비류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에서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인 자기에게 있다며 스스로 고주몽고구려의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러나 아무도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은 유리가 차지하였고, 비류(沸流)의 통치력이 미친 범위는 비류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위 비류(沸流)라는 명칭은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비류 자신을 천제의 아들이라 칭한 것이며, "流"는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천제의 아들을 뜻하였다. 즉 비류(沸流)는 물 옆에 살던 천제의 아들이 물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는 뜻이다. 사서에는 비류(沸流)와 고구려(일명 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沸流)가 고구려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가 들어간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비류는 진짜던 가짜던 간에 자신이 고구려 6세 고무서 단제로부터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의 적자가 아니라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여 단지 맏이라는 이유 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沸流)는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또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환단고기(桓檀古記)나 삼국사기(三國史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건국경위만 간략히 적혀 있을 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역사나 멸망시기는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나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비류백제(沸流百濟)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 수(漢 水)의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 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에 비류백제(沸流百濟)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이l 텅 비어 사람이 없었으므로, 비류(沸流)는 이 무렵 패. 대 지역에서 한지(韓地)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A.D 19년경은 고주몽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 상류 지역에 거주한 양맥(梁貊)과 심양(沈陽)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 현(高句麗 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할 때이다. 이때 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은 고주몽고구려가 점령한 태자하 중. 상류 지역으로 도망갔다. 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沸流百濟) 무리들이 고주몽고구려로 도망가자 비류(沸流)는 한지(韓地)로 가서 홍성 금마 마한(馬韓)으로부터 마한(馬韓) 땅을 할양 받아 한지(韓地)에 나라를 다시 세울 마음으로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미추골(彌鄒忽: 수도라는 뜻으로, 이 미추골은 비류가 洪城 金馬 馬韓을 만나기 위하여 한반도로 와서 일시 정착한 곳이므로 牙山灣에 있는 仁州密頭里로 추정된다)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홍성 금마 마한이 온조백제(溫祚百濟)의 공격으로 멸망한 후라서 비류는 땅을 할양 받지 못하였다. 이에 비류는 온조(溫祚)의 도읍지가 자리 잡히고 백성들이 안락한 것을 보고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溫祚)에게 귀순하였다. [註 어떤 분은 비류가 죽었을 때 비류백제(沸流百濟)가 멸망하지 않고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계속 존속하였고, 위 비류백제가 뒤에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 등지로 진출하는 등 강국(强國)이 되었다가 광개토왕(廣開土王)에게 패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紀)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온조왕(溫祚王) 재위 때 멸망하였으므로, 위 주장은 사서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또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진 해는 A.D 390년이고,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온조백제(溫祚百濟) 남쪽에 있던 구태백제(九台百濟: 광개토왕비문에는 "倭" 또는 "伊殘"으로 적혀 있다)를 공격한 해는 영락(永樂) 6년(A.D 396년)이므로, 비류백제가 멸망한 후 그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응신조(應神朝)를 세웠다는 주장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요서(遼西), 중국동해안(中國東海岸), 일본열도(日本列島)로 진출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다.]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사람들 -노, 키, 나침반을 발명한 백제인-
이 글은 김성호 박사의 '중국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맑은소리, 1996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김성호 박사님은 1983년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을 통해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본기의 이설, 광개토태왕의 비문,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한 비류백제의 실재를 주장하여 주목을 받았던 분입니다. '중국진출......'을 통해 김성호 박사님은 중국 25사에 나타나는 주산군도의 해민들의 정체를 구명하고 이들이 백제유민들로 명나라 때까지 동아시아 바다를 실제로 지배한 해양세력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글은 그 가운데 극히 일부를 발췌하여 제가 덧붙인 것입니다.
1. 바다의 주인들
고대인에게 바다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였다. 18세기, 동력선이 개발될 때까지 바다는 대대로 전문지식을 이어온 특정 家門이나 집단의 전유물 이었으며, 인도로 가는 해상로를 개척할 때까지 유럽의 귀족들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공급하는 향신료를 원산지 가격의 1,000배 이상을 주고 사다 먹었다.
유럽에서 대양을 항해하는 것은 왕실의 후원을 등에 업고 목숨을 거는 국가적으로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는 벤처산업이었다. 향신료 가격은 금값에 필적할 만 하였다.
그렇다면 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한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왜구와 임진년의 침략으로 유명한 일본일까? 아니면 중국? 그도 아니면 먼 가야왕국까지 공주를 시집 보낸 인도였을까? 정답은 바로 백제왕국과 그 유민들이다.
2. 오랑캐의 배
고대 동아시아의 배는 바닥모양과 추진체에 따라 크게 선(船)과 박(舶)으로 나눈다. 船은 바닥이 평평하고 배 옆의 도(櫂)를 저어 전진하는 카누와 같은 형태로 강과 운하를 항해할 수 있는데, 舶은 흰 돛을 달아 바람을 이용하고 배 꼬리에 노(櫓)를 달아 전진하며 바닥이 뾰족해 파도를 해치고 대양을 항해할 수 있는 배로 중국인들은 이것을 '오랑캐의 배'라고 불렀다.
AD1세기부터 AD15세기까지 무려 1,500년간 아시아의 동쪽 바다를 백제(유민)들은 이런 배를 타고 지배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지도에서 보듯이 동 아시아 곳곳에 남아있다.
이들은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이 이전 왕조들과 달리 자신들을 명나라 지배 안에 강제 편입하려 하자 목숨을 걸고 300년간 싸우다가 대부분 고려, 일본, 필리핀,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화교로 알고 있는 이들이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명나라의 海禁政策에 대항하여 싸우다 피신해간 사람들이고 이들은 대부분 백제유민들의 후손이었다.
3. 주산군도의 백제인
이들은 양자강 하구 항주만 입구에 있는 주산군도라는 섬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지배했고, 그 문화는 멀리 사라센까지 전파되었다.
9세기에 사라센 여행가인 이븐 후르다드베와 마우스디는 이 땅을 일러 "이 나라는 Syla(신라)라는 나라로 금이 많고 경관이 아름답고 땅이 기름져 모든 것이 충족된 아름다운 나라"라고 묘사했고, 10세기에 '알 이드리시'와 14세기에 '앗 다마시키'라는 사라센인은 "신라는 6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며 그 곳 주민들은 개1의 사슬이나 원숭이 목걸이도 모두 금으로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남겨, 이들이 말한 신라가 통일신라가 아니라 주산군도의 백제유민들이 세운 해상왕국임을 나타내고 있다.
4. 나침반을 발명한 백제인
최근에 사라센에 나침반을 전한 것은 중국인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유인즉, 사라센어로 나침반은 Khann이라고 하는데 이는 중국어로 나침반을 뜻하는 침(針)과는 관계가 없고 우리말 '가늘다'의 어근인 '가는'이란 말과 발음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또 명 태조가 주산군도의 주민들로부터 빼앗은 항해관련 서적들을 정리하면서 '항해 관련 서적들이 모두 오랑캐 말로 되어있어 본토인들이 뜻을 알 수 없으므로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였다'는 명사(明史)의 기록은 바다의 주인이 중국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라 방에 신라인들이 산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신라 방 사람들이 '한가위'가 무엇을 하는 날인지 몰랐다는 唐書의 기록은, 그들이 바로 백제가 망하기 전부터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하던 백제의 유민들이었기에 신라인으로 불리면서도 신라인의 최대명절인 '한가위'를 몰랐던 것이라고 한다.
등소평의 해외 화교자본 유치정책이 실시된 후 화교들이 중국 땅에 들어와 최초로 한 일은 주산군도에 있던 백제인들의 절을 복원하고 여기서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화교의 정체가 무엇인지 시사하고 있다.
백제 관련 지명 분포 - 김성호 저, 중국진출 백제유민들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또 다른 문헌 - 비류백제(沸流伯帝)
[비류백제는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고 언제 멸망하였는가?]
1). 환단고기 (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 (高句麗國本紀) 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 경위 - 「연타발 (延勃) 은 졸본 (卒本: 註 전에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심양 방면)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曷思: 註 갈사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압록강과 흑룡 강 지칭)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富)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서 창업입도(創業立都)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九黎河: 註 심양 옆을 흐르는 혼하, 고대에는 요하나 혼하를 구려하라 불렀다)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高朱蒙) 성제(聖帝)가 북옥저(北沃沮: 장춘 방면)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訥見: 註 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坐原: 註 자기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에 봉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년[註 B.C 25년) 3월이다. 延勃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而理財致富累至巨萬陰助朱蒙其創基立都之功居多後率衆轉徙九黎河而賈魚鹽之利及高朱蒙聖帝伐北沃沮納穀五千石移都訥見而先自願納招撫亡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而年八十歿多勿三十四年丙寅春三月也」「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 기묘년(B.C 42년) 3월에 (비류와 소서노는) 패(浿). 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註 소서노가 연타발의 터전인 심양 방면에서 혼하를 따라 혼하하류로 내려 갔다는 뜻)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帶水: 註 혼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 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於瑕羅)에 책봉했다. 高朱蒙在位時嘗言曰若嫡子琉璃來當封爲太子召西弩慮將不利於二子歲己卯三月因人得聞浿帶之地肥物衆南奔至辰番之間近海僻地而居之十年買田置庄致富累萬遠近聞風來附者衆北至帶水西濱大海半千里之土境皆其有也遣人致書于朱蒙帝願以內附帝甚悅而奬之冊號召西弩於瑕羅」 [註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중략..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다는 문구는 소서노가 고주몽을 섬긴 이후의 상황을 적은 것인데 순서가 바뀌어 앞쪽에 적혀 있다.]「(어하라) 13년(B.C 19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자 (어하라국)의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及至十三年壬寅而薨太子沸流立四境不附」 [註 어하라 13년이 B.C 19년이므로, 소서노가 어하라에 책봉된 해(어하라 원년)는 B.C 31년이다.]
위 환단고기(桓檀古記)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문구를 정리해 본다.
연타발(延勃)은 졸본(卒本: 전에 고구려의 수도로 사용된 심양 방면) 사람으로 남북의 갈사(曷思: 갈사는 큰 강이라는 뜻으로 위 문구에 나오는 남북 갈사는 압록강과 흑룡강을 지칭한다)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은 후 B.C 28-27년에 고주몽이 북옥저(北沃沮: 장춘 방면)를 칠 때 양곡 5,000석을 바쳤고, B.C 26년에 고주몽이 서울을 눌현(訥見: 장춘 방면)으로 옮길 때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流亡民)을 초무(招撫)하고 왕사(王事)를 권하여 공을 세우고 좌원(坐原: 자기가 터전으로 삼고 있는 곳 즉 심양 방면)에 봉 받았으며, B.C 25년에 죽었다. [註 고주몽이 연타발을 좌원에 봉하였을 때 당시 (고주몽)고구려의 세력이 연타발의 근거지인 심양 방면까지 미치고 있지 않았다. 이는 뒤에 고구려의 세력이 심양 방면까지 미치게 되었을 때 그곳을 연타발의 봉지(封地)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기묘년(B.C 42년) 3월에 패(浿). 대(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辰). 번(番)의 사이에 이르러 여기에 살면서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로 10년 만에 몇 만금을 모으고 B.C 31년에 사람을 보내어 고주몽을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고주몽은 기뻐하며 소서노를 왕비로 삼고 패. 대 지역을 다스리는 어하라에 책봉하였다. 그 후 고주몽은 비류(沸流)를 (고주몽)고구려의 태자로 삼지 않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고주몽이 비류를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 것은 비류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때문이었다. 고주몽은 B.C 59년에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의 딸 예씨와 결혼하여 다음해 B.C 58년 10월에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가 죽을 때 유언으로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이어 받았으나, 골본(忽本: 일명 卒本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심양 방면)에 있는 고구려 무리들이 고주몽을 죽이려 하므로 고주몽은 이들을 피하여 비류수(혼하) 상류로 도망 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운 후 분열된 고구려(북부여) 무리들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고주몽)고구려 왕이 고구려(북부여)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다고 보고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 단제의 딸 예씨(禮氏)의 몸에서 난 유리(琉璃)를 태자로 삼았다. 그 후 임인년(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어하라국)의 태자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다. 비류(沸流)는 자신이 비록 적자는 아니지만 고주몽을 친아버지처럼 섬겼는데도 맏이(伯)인 자신을 (고주몽)고구려의 태자로 삼지 않고 유리를 태자로 삼은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다가 B.C 19년에 고주몽이 죽자 패(浿). 대(帶) 지역에서 스스로 임금(帝)의 위(位)에 올라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이 맏이(伯)인 자기에게 있다는 뜻으로 백제(伯帝)라 칭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비류(沸流)를 따르지 않아 비류가 장악한 지역은 패. 대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때 비류가 사용한 "沸流"라는 칭호는 물(水)+불(弗)+ 흐른다(流)는 뜻이 합쳐진 것으로, 물(水)은 혼하를 뜻하고, 불(弗)은 천제의 아들 즉 지상의 임금을 뜻하며, "流"는 혼하를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뜻이다. 고대에는 하늘에 있는 해를 "불"이라 불렀는데, 하늘에 있는 "불"은 하늘나라 임금(천제)을 뜻하였고, 지상에 있는 "불"은 지상의 임금을 뜻하였다. 사서에는 비류와 고구려(북부여) 6세 고무서(高無胥) 단제(檀帝)와의 관계가 적혀 있지 않으나, 비류가 고구려(북부여)의 임금을 뜻하는 "弗(불)"자와 강을 뜻하는 "水"자 및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 왔다는 "流"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칭호를 만든 것을 보면, 비류는 자신이 고구려(북부여)의 대통(大統)을 물려 받았다고 자칭하였다. 이는 비류가 고주몽으로부터 친자식같이 대우받았지만 적자(適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주몽으로부터 (고주몽)고구려의 대통을 물려받지 못하자 맏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유리(琉璃)와의 정통성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고 보고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 외에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까지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비류는 "沸流"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한 외에 "伯帝"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자신이 맏이(伯)이기 때문에 (고주몽)고구려의 정통성도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였다.
2). 삼국사기 (三國史記) 백제본기 (百濟本紀) 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건국경위
「일설에는 백제의 시조는 비류왕이다. 그 아버지 우태(優台)는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海扶婁)의 서손(庶孫)이요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니 졸본(卒本) 연타발(延勃)의 딸이다. 처음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요 다음은 온조(溫祚)다. 우태가 죽으매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그 뒤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도 자기의 소생자나 같았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세워서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아우 온조더러 이르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의 난리를 피하여 도망해서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기울여 나라의 창업을 도왔으니, 그 공로는 이만 저만이 아니다. 지금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여 국가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있어 무사마귀 모양으로 답답하게 지낼진대 어머니를 모시고 남으로 가서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와 더불어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한다. 一云始祖沸流王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庶孫母召西奴卒本人延勃之女始歸于優台生子二人長曰沸流次曰溫祚優台死寡居于卒本後朱蒙不容於扶餘以前漢建昭二年春二月南奔至卒本立都號高句麗娶召西奴爲妃其於開基創業頗有內助故朱蒙寵接之特厚待沸流等如己子及朱蒙在扶餘所生禮氏子孺留來立之爲太子以至嗣位焉於是沸流謂弟溫祚曰始大王避扶餘之難逃歸至此我母氏傾家財助成邦業其勸勞多矣及大王厭世國家屬於孺留吾等徒在此鬱鬱如贅不如奉母氏南遊卜地別立國都遂與弟率黨類渡浿帶二水至彌鄒忽以居之」
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구를 정리해 본다. - 비류의 아버지는 우태(優台)이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이다. 소서노는 우태(優台)에게 시집 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고 다음이 온조(溫祚)였다. 고주몽은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 봄 2월에 부여에서 남으로 달아나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召西奴)를 데려다가 왕비로 삼았다. 소서노가 주몽의 기업을 창건함에 대하여 자못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고주몽의 사랑함과 대접이 특히 후하여 비류 등을 대하는 것이 자기의 소생자와 같았다. 그 후 고주몽이 부여에 있을 적에 예씨(禮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류(孺留)가 찾아오자 유류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비류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도당을 거느리고 패(浿), 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골에 이르러 살았다.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彌鄒忽))의 미(彌)는 용(龍)을 뜻하고 용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한다. 그리고 추(鄒)는 조(祖) 또는 고(古)와 같은 뜻이고[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미추왕편 참조], 골(忽)은 고을을 가리킨다. 즉 미추골(彌鄒忽)은 어떤 특정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고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있는 곳(수도)이라는 뜻의 보통명사이다. 고기에 의하면 비류백제의 수도인 미추골은 패수(태자하)와 대수(혼하)가 하류에서 서로 만나는 패. 대 지역에 있었다.
3). 삼국사기 (三國史記) 백제본기 (百濟本紀) 에 적혀 있는 비류백제의 멸망경위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백제가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정확한 연도는 적혀 있지 않다. 「전략.. 비류는 미추골이 토지가 습하고 물 맛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어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도읍이 자리 잡히고 백성이 안락하므로 드디어 뉘우침 끝에 죽으니 그 백성이 다 위례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沸流以彌鄒忽土濕水鹹不得安居歸見慰禮都邑鼎定人民安泰遂慙悔而死其臣民皆歸於慰禮」 三國史記 百濟本紀 이때는 비류가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무리를 거느리고 한반도로 건너온 후 상황이다. 따라서 위 문구에 나오는 미추골은 요동의 패. 대 지역에 있는 미추골이 아니고 한반도에 있는 미추골이다. 삼국유사에는 이곳이 인주(仁州: 아산군 인주면)라고 적혀 있다. 비류는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무리들이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감으로써 패. 대 지역이 텅 비자 홍성 금마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 받아 한반도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만으로 와서 지금의 아산군 인주면에 일시 정착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마한이 멸망한 후이고, 온조백제가 마한 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면서 비류의 정착을 용납하지 않자 비류는 뉘우침 끝에 죽고 그 백성들은 다 위례성으로 가서 온조에게 귀순하였다. [註 삼국사기에는 미추골이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의 인주(今仁州: 지금의 인천)라고 적혀 있고, 삼국유사에는 인주(仁州)라고 적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인천도호부(仁川都護府)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천부(仁川府)는 고려 인종 원년에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 건치연혁조(建置年革條)에 의하면 인주(仁州)는 고려 초에 설치되었다. 즉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금인주(今仁州)는 지금의 인천이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인주는 아산군 인주면이다. 조선시대에 지은 동사강목(東史綱目)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인주가 지금의 인천이라고 적혀 있다. 「미추골(彌鄒忽)은 지금의 인천이다 세속에 전하여 오기를 문학산 위에 비류성(沸流城)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남아있으며, 성 안에 비류정(沸流井)이 있는데 물맛이 시원하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실리지 않아 한스럽다.」 東史綱目「여지지(輿地志)에 이르기를 미추골은 바로 비류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지금의 인천부 남쪽에 산이 있는데, 이름하여 남산(南山)이라 하고 또 일명 문학산 이라고도 한다. 산 위에 성이 있는데, 대대로 비류왕(沸流王)이 도읍했던 곳이라 전해온다. 왕이 노하여 분개하다 죽은 까닭에 애분성이라고도 이름하였다. 인천부 남쪽 10리에 해평(海坪)이 있고, 그 위에 큰 무덤이 있는데, 담장을 둘렀던 옛 자취가 완연하다. 돌로 만든 사람이 넘어져 엎드러진 것이 매우 큰데, 세속에 전하기를 미추왕의 묘(墓)라고 한다.」 增補文獻備考 비류가 요동의 패. 대 지역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온 것은 마한이 멸망한 것을 모르고 마한을 만나 땅을 할양 받아 한반도에 다시 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저자의 견해로는 위 문구의 미추골(彌鄒忽)은 인천이 아니라 홍성 금마와 가까운 아산군 인주면이 맞다. 동사강목 등에 인주(仁州)가 비류의 터전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삼국사기 견해를 따른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비류백제의 멸망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온조왕(溫祚王) 37년(A.D 19년) 한 수(漢 水)이 동북 부락이 흉년이 들어 민가 1천여 호가 (고주몽)고구려로 도망해 가고 패(浿). 대(帶) 사이는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三十七年漢水東北部落饑荒亡入高句麗者一千餘戶浿帶之間空無居人」三國史記百濟本紀 「대무신왕 2년 봄 정월 백제민 1천여 호가 와서 항복하였다. 二年百濟民一千餘戶來投」三國史記 高句麗本紀 위 문구에 의하면 A.D 19년경 비류백제(沸流伯帝)의 근거지인 패. 대 지역은 텅 비어 사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A.D 14년에 태자하(太子河) 중. 상류 지방의 양맥(梁貊)과 심양(沈陽) 방면의 현도군 고구려 현(高句麗 縣)을 점령한 후 요동반도 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이다. 이때 패. 대 지역에 살고 있던 비류백제 무리들은 동북쪽에 있는 고구려 영역으로 도망을 갔다. 일부 사학자는 위 백제를 온조백제로 보고 당시 온조백제의 북쪽인 지금의 황해도 지방과 평안도 지방에는 최리(崔理) 나라(樂浪)가, 함경도 지방에는 동옥저(東沃沮)가, 강원도 지방에는 동예(東濊: 저자는 강원도 지방 나라<樂浪>로 본다)가 각 있었으므로, 백제인들이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위 문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비류백제, 온조백제, 구태백제의 역사가 함께 적혀 있는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착각이다. 또 일부 사학자는 비류백제는 이때 멸망하지 않고 그 후에도 온조백제 남쪽에 존재하면서 요서(遼西)와 중국동해안 지방 등지로 진출하였다가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때 일본열도로 쫓겨갔다고 주장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북사(北史) 등에 의하면 요서(遼西)나 중국동해안지방으로 진출하여 동이(東夷)의 강국이 된 백제는 비류백제가 아니고 구태백제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비류가 세운 나라는 온조왕 시대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첫댓글 많아서 못보지만..결론은 중국,일본은 씹새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