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짓말하는 게 영 서툴다.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세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이상한 말이지만, 요컨대 '심각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서툴지만, 해롭지 않는 엉터리를 말하는
것'은 꽤 좋아한다는 말이다.
옛날에 어떤 월간지에서 서평을 부탁 받은 적이 있다. 나는
책을 쓰는 인간이지 비평하는 인간이 아니라서 서평이란 것
은 가능하면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사정이 있어서,
'좋아요. 하죠.' 하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가공의 책을 만들어서 그것을 자세히 평론하기로
했다. 실재하지 않는 사람의 전기의 서평을. 한번 해 보니 여
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없는 책을 만들어 내는 만큼 머
리는 쓰지만, 책을 읽는 시간은 절약할 수 있었다. 게다가 거
론한 책의 저자에게 '그 자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써대다
니.'하고 개인적으로 원망받을 일도 없다.
이 가상 서평을 쓸 때는 나중에 누군가에게 '돼먹잖은 거짓
말하지 마.' 라는 항의 편지나, '어디 가면 이 책을 구할 수 있
어요.'하는 문의가 오지 않을까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
었지만, 한 건도 오지 않아 되려 기운이 빠졌다고나 할까. 그
건 그것대로 안심했다고나 할까. 결국 월간지 서평 따위는 아
무도 진지하게 읽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어떨
는지.
지금은 비교적 진지하게 대답하고 있지만, 한창 건방졌던
젊은 시적에는 인터뷰에서도 나는 종종 엉터리 대답을 했다.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하고 묻는 일이 있으면, '글쎄요. 최
근에는 메이지 시대의 소설을 자주 읽습니다. 초기 언
문일치 운동에 관련된 마이너 작가들을 좋아하는데요, 구체
적으로 말하자면 구와다 마사오라던가, 오자카 고헤이의 작
품은 지금 읽어도 몹시 자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
하기도 했다.
물론 둘 다 실존하지 않는 작가다. 완전히 꾸며 낸 이야기
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얼렁
뚱땅 만들어 내어 대답하는 데에 의외로 능하다. 특기라고 할
까, 장기라고 할까.
일본어에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째서 거짓말이 빨간색이란 말인가? 나라 시대의
일본에서는 악질적인 거짓말을 해서 민심을 현혹시킨 자에게
는 한꺼번에 빨간 떡 열두 개를 입 속에 넣어 질식사시키는
잔혹한 형벌이 있었기 때문이다 ㅡ 이 이야기는 물론 거짓
말이다. 어째서 거짓말이 빨간색인지 옛날부터 궁금해서 언
젠가 조사해 보려고 생각했지만, 수십 년 동안 줄곧 정신없이
바빠서(거짓말하고 있네)아직 조사하지 못했다.
영어에는 white lie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죄가 없는(방편
의, 의례적인) 거짓말'을 말한다.(이것은 사실이다.)문자 그대
로 '새하얀 거짓말' 내 거짓말은 어느 쪽인가 하면 이쪽에
가깝다. 해롭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빨간 떡을 열두 개나 억
지로 먹인다면, 정말 못 견디겠지?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삼각형 모양을 한 땅이었던 것이다.
나와 그녀는 그런 땅 위에 살았었다.
1973년 인지 1974년인지 그 즈음의 이야기다.
'삼각지대'라고는 하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델타의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살았던 '삼각지대'는 좀더 가늘고 길며, 쐐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먼저 둥근 치즈 케이크를 생각해 주면 좋겠다.
그 다음 식칼로 그 케이크를 12등분 해 주면 좋겠다.
요컨대 시계의 문자판 같은 모습으로 자르면 될것이다.
그 결과로 당연하게 각도가 30도인 케이크 조각이 12개 만들어진다.
그 하나를 접시에 올려 놓고, 홍차라도 홀짝 거리면서 가만히 바라보면 된다.
그것이 - 그 끝이 날카롭고 가늘고 긴 케이크 조각이 - 우리들의 '삼각지대'의 정확한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부자연스러운 땅이 만들어지게 되었느냐고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어쨌거나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거기에 오래 산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도 잘 몰랐다.
그것은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삼각형이었고, 지금도 삼각형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삼각형일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것이 없었다.
그 지방 토박이들은 어느 쪽인가 하면 그 '삼각지대'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도 싫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째서 '삼각지대'가 그런 모습으로- 귀 뒤에 난 사마귀처럼- 푸대접을 당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아마도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각지대'의 양옆으로는 두 종류의 철도 노선이 지나고 있었다.
하나는 국철이고 하나는 사철이다.
그 두개의 철로가 얼마간 나란히 가다가 그 쐐기의 끝을 분기점으로 해서 마치 찢기듯이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전망이었다.
'삼각지대'의 끝에서 전철이 오고 가는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파도를 가르고 바다 위를 헤쳐나가는 구축함의 사령탑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거주 상태나 거주의 적합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삼각지대'는 터무니없고 형편없는 장소였다.
그것은 그렇다.
여하튼 두 개의 철로에 빈틈없이 끼어 있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현관문을 열면 눈앞에 전철이 달리고 있고, 뒷 창문을 열면 거기는 거기대로 다른 전철이 눈앞을 달리고 있다.
눈앞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전철을 탄 승객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를 할 정도의 거리에서 전철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전철이 지나가 버리고 나면 조용해지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 대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실제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지막 전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객 열차가 오전 한시전에 모든 운행을 마치고 나면, 이번에는 야간 화물 옆아가 그뒤를 이었다.
그리고 새벽녘까지 화물 열차가 계속해서 지나가고 나면 다음날의 여객수송이 시작된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자 - 알 한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라서 살았던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집세가 쌌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으로 방이 세개 있었고, 욕실이 붙어 있었으며, 작은 뜨락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 한칸짜리 아파트와 집세가 거의 비슷했다.
단독 주택이기 때문에 고양이도 키울 수 있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은 듯한 집이었다.
우리들은 갓 결혼했고, 자만할 일은 아니지만 기네스북에 실려도 이상할 것이 하나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우리들은 역앞에 복덕방에 붙어 있는 종이에서 그 셋집을 발견했다.
조건과 집세와 집의 구조만을 본다면, 그 집은 경의적인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만저만 싼게 아냐."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주인이 말했다.
"상당히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 정도 참을수 있다면 보물을 파냈다고 말할 수 있지."
"하여튼 가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물었다.
"좋아. 그런데 댁들끼리 가면 안 될까? 난 거기에 가면 머리가 아파서..."
그는 열쇠를 빌려 주었고, 집까지의 약도를 그려주었다.
기분좋은 복덕방 아저씨였다.
역에서 보면 '삼각지대'는 매우 가깝게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무서울 정도의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철로를 한참 돌아서 육교를 건너고, 구중중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올라가고 해야 겨우 뒷쪽에서 '삼가지대'로 돌아 들어가게 된다.
주위에 상점이나 그 비슷한 것은 전혀 없다.
빼어날 정도로 초라하다.
나와 그녀는 '삼각지대'의 끝에 외따로 세워져 있는 집 속으로 들어가 한시간정도 거기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꽤나 많은 전철이 집 양쪽으로 지나다녔다.
특급이 통과하면 유리창이 덜컹덜컹 소리를 냈다.
전철이 통과할 때에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전철이 지나가면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전철이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용해져서 우리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곧바로 다음 전철이 왔다.
이런 것을 일컬어 커뮤니케이션의 분단이라고 할까 단절이라고 할까.
소음을 별개로 한다면 집의 분위기 자체는 상당히 괜찮았다.
만든지는 확실히 오래 되었고, 전체적으로 흠이 있었지만 방이며 뒷마루 등은 느낌이 좋았다.
창으로 비쳐드는 봄볕이 방바닥 위에 작은 사각형 양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적이 있는 집과 닮았다.
"빌리도록 하지."
나는 말했다.
"분명히 시끄럽기는 하지만 어떻게 익숙해지겠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그것으로 좋아요."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마치 내가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하지만 정말로 결혼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
나는 말했다.
우리들은 복덕방으로 돌아가 집을 빌리겠다고 말했다.
"시끄럽지가 않았어?"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아저씨가 물었다.
"시끄럽기야 하지만 어떻게 익숙해지겠죠."
나는 말했다.
복덕방 주인은 안경을 벗어서 헝겊으로 안경을 닦고, 찻잔속의 차를 한 모금 훌쩍이고는 안경을 다시쓰고 내얼굴을 보았다.
"하긴 젊으니까."
그는 말했다.
"예."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임대계약을 맺었다.
이사는 친구의 작은 소형차 한 대면 충분했다.
이불과 의류와 식기와 전기 스탠드와 몇 권의 책과 한마리의 고양이. 그것이 우리들의 전재산이었다.
라디오가 없으니 당연히 텔레비젼도 없었다.
세탁기도 냉장고도 식탁도 가스 난로도 전화도 전기 청소기도 토스터도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들은 그 정도로 가난했다.
따라서 이사라고 해봐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인생은 매우 간단하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친구는 두 개의 철로에 끼어 있는 우리들의 새로운 주거지를 보고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이사를 마치자 우리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말했지만, 마침 특급열차가 달려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했어?"
"정말로 이런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감동한 듯이 그는 말했다.
결국 우리들은 그 집에서 2년간 살았다.
두려울 정도로 창이나 문의 여닫이가 나쁜 집이어서 외풍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덕분에 여름에는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겨울은 지옥 이었다.
난로를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해가 지면 나와 그녀와 고양이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말 그대로 서로 껴안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부엌의 개수대가 얼어 있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겨울이 끝나자 봄이 왔다.
봄은 멋있는 계절이었다.
봄이 오자 나도 그녀도 고양이도 안심했다.
4월에는 며칠간 철도 회사의 파업이 있었다.
파업을 했을 때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전철은 하루종일 단 한대도 철로 위를 달리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철로로 내려가, 양지에 앉아 볕을 쬐었다.
마치 호수 바닥에 앉아있는 것 같이 조용했다.
우리들은 젊었고,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태양빛은 공짜였다.
나는 지금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 삼각형의 가늘고 긴 땅이 생각난다.
지금 그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지각한 여고생이 담 넘어 가는 광경을 보면 하루종일 즐겁다
나는 대충 시간에는 꼼꼼한 편이라서, 여간한 일이 없는 한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부터 쭉 그래왔던 게 아니고, 학생시절에는 지각 상습범이었고, 사람을 기다리게 해놓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뻔뻔스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시작하여 타인에게 '절대로 지각을 하지 않도록'이라고 명령하는 입장이 되고부터는 내 자신의 지각벽도 깨끗이 나아 버렸다. 지각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킨 당사자가 지각을 해서야 누가 그 인간의 말을 듣겠는가.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학생 시절에는 지각쯤 해도 별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는 시간이 좀 늦어진다고 해서, 별 재미도 없는 수업의 앞대가리 부분을 좀 못듣는다고 해서, 그런 것을 손실이라면서 안타까워 할 만한 것도 못된다.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버릇이나 습관을 교정하는 것은 사회에 나가서 시작해도 충분하다.
내가 가끔 머무는 시내의 호텔 창문 바로 아래로 여자고등학교의 정문이 내려다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아침식사를 한 후 한숨 돌리고 있노라면 대개 고등학교의 등교 시간이 된다. 똑같은 검은 가방을 들고 세라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줄줄이 걸어와서는 교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한참 구경을 하다보면, 차츰 여자애들이 종종걸음으로 길을 달려온다. 이윽고 운명의 벨 소리가 울리고, 교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닫힌다. 트레이닝 웨어를 입은 심술맞게 생인 선생이 문옆에 서서, 지각을 한 여자애들에게 일일이 훈시를 하며 이름을 적는다.
그러나 개중에는 반드시 '지각생이란 딱지를 내가 호락호락 붙일성 싶으냐'라는 발상을 하는 용감한 여고생이 있다. 그런 여자애는 교문 가까이에 있는 전신주 뒤에 숨어 사태를 관망하다가 트레이닝 웨어 차림의 선생이 잠시 한눈을 파는 틈을 타, 날쌘 토끼처럼 길을 가로질러 인가의 담으로 뒤어올라 가서는 살살 그 담을 타고 그대로 학교 담 안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치마자락을 탁탁 털고, 시침 뚝 뗀 얼굴로 교실에 들어간다. 용기와 판단력과 체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아슬아슬한 재주이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나는 호텔의 사층 창문가에서 나도 모르게 짝짝하고 박수를 치며, 그 하루를 즐거운 기분으로 보낸다.
그런 까닭으로, 나는 그 여고가 내려다 보이는 호텔을 제법 좋아한다.
고양이의 수수께끼
인간에게도 서로 다른 수많은 성격이 있듯, 고양이에게도 실로 다양한 성격이 있다.
나는 대체로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터라, 우리집 고양이의 움직임을 종종 관찰하곤 하는데,
아무리 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고양이가 열 마리 있다면 거기에는 열 가지 개성이 있고, 열 가지 버릇이 있으며, 열 가지 삶의 모습이 있다.
그야 살아있는 생물이니까 당연하잖느냐고 하면 그뿐인 얘기지만, 그래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여러 가지로 신통한 일이 많아,
줄 곧 '거 참 신기하다, 신통하다.' 하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구경하다 하루 해를 보내기도 한다.
우리 집에는 열 한 살짜리 샴종 암코양이와 네 살짜리 애비시니언종 수코양이가 있는데,
성격의 복잡함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나이를 먹은 샴고양이 쪽이 역시 연륜이 깊다.
그녀는 먹이를 주어도 곧장 입을 대는 법이 없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흥, 밥이야.' 하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휑하니 저쪽으로 가, 한동한 꼬리를 날름날름 핥는다.
그러고는 한참이 지나 열기가 사그라졌을 즈음에 다가가서는 '이제 먹을까.' 하는 식으로 식사를 시작한다.
어째서 그렇게 일일이 거드름을 피우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리고 또 그녀는 추운 계절에 이불 속으로 들어올 때면, 반드시 세 번은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습관이 있다.
우선 이불 안에 들어가 길게 누웠다가는 잠시 생각한 후, '아무래도 안되겠다.' 는 듯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이런 동작이 세 번 거듭되다가, 네 번째에서야 간신히 안심하고 잠드는 것이다.
이 의식에 대충 십 분에서 십 오 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어떤 식으로 생각해봐도 이건 단순한 시간 낭비다.
고양이쪽도 성가실테고, 내쪽도 이제 잠이 들락말락 하는데 고양이가 들락날락거리니까 울컥 화가 치민다.
세상에는 '삼고의 예' 라는게 있는데 고양이가 한밤중에 그런 의식을 치러야 할 필연성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때때로 어째서, 어떤 이유로, 어떤 경과를 통하여 그런 버릇이 일개 고양이의 머리 속에 생겨나게 되었을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나름의 유아 체험이 있고, 사춘기의 뜨거운 고뇌가 있고, 좌절이 있고, 갈등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 개체로서 고양이의 주체성이 성립되어, 그녀는 겨울 밤에 정확하게 세 번 이불 속을 들락날락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것일까?
고양이는 그런 많은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다.
호른
예컨대 호른이라는 악기가 있다.
그리고 그 호른 연주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한 일은 이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일일지 모르지만, 이런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머리는 입체적인 미궁처럼 혼란스러워진다.
왜 그게 호른이어야만 했을까?
왜 그는 호른 연주자가 되었고, 나는 되지 않았을까?
어떤 한 인간이 호른 연주자가 된다는 행위에는, 어떤 한인간이 소설가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수수께끼가 함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풀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것을 간한히 알 수 있는 그런 수수께끼가.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내가 소설가이지 호른 연주자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호른 연주자였다면, 어떤 한 인간이 소설가가 된다는 행위 쪽이 훨씬 더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날 오후, 깊은 숲속에서 호른과 우연히 맞닥뜨렸을지도 모른다, 고 나는 상상해본다.
그리고 세상돌아가는 이야기 따위를 하다가 아주 의기투합해져서, 그래서 그는 직업적인 호른 연주자가 된 것이다, 라고. 혹은 호른은 그에게 극히 호른적인 신세타령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소년 시절이라든가, 복잡한 가정환경이라든가, 용모상의 콤플렉스라든가, 성적인 고민이라든가 그러한 것을.
"바이올린이라든가, 플루트 일 같은 건 난 잘 몰라"
라고 호른은 나뭇가지로 땅바닥을 후비면서 말했을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쭉 호른이었거든. 도대체가 나는 외국에 간 적도 없고, 스키를 탄 적도 없고......" 라는등등.
그리고 그날 오후를 경계로 해서 호른과 호른 연주자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좋은 콤비가 된다.
이윽고 '플래시 댄스'와 같은 상투적인 힘든 나날을 거쳐.
호른과 호른 연주자는 지금 손에 손을 잡고 화려한 무대에 서서 브람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제1절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다.
콘서트 홀의 의자에 앉아, 나는 문득 그런 일을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른 숲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튜바 일 같은 것도.
첫댓글 무라카미 하루키 너무 좋아!
고양이의 수수께끼 ^^ 재밌네요.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