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방 교육
요한 보스코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도직은 젊은이들의 참된 인간적.영적 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의 이론 가라기보다는 교육실천가로서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방 교육 방법' (preventive system)이었다.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또한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선으로 이끌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 보스코가 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한 혁신 방법이었다.
1) 예방 교육의 기본적 원리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강압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교육에 대응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악을 사전에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약보다 위생을, 치료보다 예방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의학의 발전적 경향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강압적 방법은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거나 잘못 처신 했을 때 그들을 처벌하거나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고, 예방적 방법은 친절로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돕고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율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교육의 첫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학생들의 마음에 넣어주는 것이고 교리 교육과 윤리 교육을 통해 선에 대한 애착과 악에 대한 혐오감을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에 의해 그리고 실천적 신앙생활을 통해 성성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업, 노동 그리고 그들의 놀이에서 도 언제나 친절한 도움을 준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나쁜 습성, 악의 유혹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은 엄한 벌 이나 책망보다 친절한 사랑과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 신심을 실천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사랑, 이성, 종교를 예방 교육 방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즉 인간적.영적으로 성숙하는 전인(全人)양성이었으며, 그 교육의 영성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많은 결실 중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소년 성인 도메니코 사비오를 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성(대화와 합리적 설득)
요한 보스코에 의하면 이성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순응하도록 이끌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방법 중의 하나였다. 교육자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올바른 분별력을 통해 학업 뿐 아니라 규율 준수나 부과된 벌, 나쁜 습성의 교정 또는 전례와 성사 생활의 의미, 실천의 당위성 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방법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 준수 뿐 아니라 부과된 모든 과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된다.
나) 종교(복음적 신앙 교육)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에서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육 사목 체험에서 젊은이들이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합당하게 자주 받으면 그들의 인간적.영적 형성에 효과적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활에서 교육자의 솔선 수범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 사랑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고린 13, 4~7 참조)에 대한 바오로 가르침에 토대를 둔다. 예방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애정 어린 협력 관계이므로 사랑을 그의 교육의 최고 원리로 여겼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스코는 그들 가운데 좥현존하는 것좦과 그들을 위해 '항구하게 일하는 것' 을 사랑 교육의 두 원리로 채택하였다.
2) 특성
요한 보스코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 졌으며 평화롭고 신뢰에 찬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가) 가족 정신
가족 정신은 복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교육의 근본 이상 이며 지도 이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고 평화로운 기쁨이 그 공동체를 감싸 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바른 행위에 어울리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러한 가족 정신 안에서 기쁨이 체험되었으며 마음의 개방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 만남과 대화
가족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는 젊은이들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요한 보스코는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들을 영성지도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했으며 흔히 고해성사로 끝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밤 인사(Buona notte) 시간을 교육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 사랑의 인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도움되는 교훈이나 명언 혹은 감명을 주는 일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동으로 구성된 오락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항상 즐겁게 그들과 어울렸으며 그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다) 효율적 처벌과 훈계
그는 가능하면 처벌보다는 칭찬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계속 실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벌해야할 경우엔 그 벌이 감정적 화풀이가 아니라 오직 학생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훈계나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음을 열고 산보를 청하거나 일이나 놀이에 초대하여 대화하면서 진상을 규명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이성과 신앙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신중함 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꾸중은 개인적으로 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코는 '귓속말' 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효율적인 권고와 훈계를 하였다. [가톨릭신문, 2000년 11월 19일]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살레시오회(상)
사진말 = 지난해 사제수품식 때 새 사제들이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사진 위). 서울 대림동에 있는 직업학교 목공소에서의 작업 장면.
창설과 역사
청소년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위대한 교육자인 요한 보스코.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 안에 뿌리내린 그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를 창설해 세계의 수많은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사랑을 심어줬다.
1815년 8월 15일 이탈리아 토리노 베키지역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아홉 살 때 꾼 꿈을 계기로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도시로 나와 상점의 점원이나 공장의 직공 등의 일을 했지만 사제가 되고자하는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남들보다 몇해 늦게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는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가 됐다.
당시 공업화가 한창이던 이탈리아는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이 많았고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를 저질렀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이 때 요한 보스코 신부는 바르톨로메오 가렐리라는 고아를 만나면서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버림받아 신앙의 안내자를 필요로 하던 젊은이들을 주일마다 성당으로 초대해 함께 놀면서 교리를 가르쳤다. 날이 갈수록 이같은 청소년들은 늘어났고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라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고 일자리를 얻는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줬다. 이때 오라토리오에서 함께 생활하던 600여명의 청소년들 모두 그의 각별한 사랑을 느낄 만큼 보스코 신부는 학생 하나 하나에게 애정을 쏟으며 사랑을 베풀었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고 했던 보스코 신부는 오라토리오의 청소년들이 점차 늘자 이들을 더 잘 보살피기 위해 1864년 수도회를 창설했다. 당시 보살핌을 받고 있던 청소년들 가운데 성숙한 젊은이들이 함께 했던 살레시오회는 수도자가 되기보다 항구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보스코 신부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한평생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등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했던 보스코 신부는 자신의 이상대로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시절부터 존경해왔던 살레시오 성인의 영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판단하고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라고 정했다.
살레시오 성인은 17세기 제네바의 주교로서 칼빈주의에 맞서 가톨릭의 진리를 선포하며 샤블레라는 지역에서 수많은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세상 안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완덕의 길을 제시하며 성화의 길로 이끈 살레시오 성인은 온유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은 살레시오회는 창설자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따라 끊임없는 인내와 사랑으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청소년들을 끌어안으며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실천했다. 1868년 '살레시오 오라토리오 출신자회'를 탄생시킨 보스코 신부는 1872년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이어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해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들에게 다 내어준 보스코 신부는 1934년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성인으로 반포됐으며,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실천적인 사랑과 교육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2천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보스코 신부는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로서 교회 안에서 큰 영성가로 남아있다.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가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살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학교, 기숙사, 성당, 기술학교 등을 갖춘 살레시오 공동체를 설립하면서 청소년 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또한 살레시오회는 1954년 6·25의 아픔을 안고 살던 한국에 진출해 현재까지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를 비롯해 많은 오라토리오 공동체를 운영하면서 이 땅에서 요한 보스코 신부의 청소년 교육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5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중)
사진말 = 돈보스꼬 정보센터 전경(사진 위)과 중국 연길 직업학교 졸업식 장면.
청소년 사목을 위해 적극 투신했던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은 젊은이들을 교육하면서 채택되고 체험된 영성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을 통해 종교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세상 삶을 위한 실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그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예방교육'이라는 영성을 통해 교육사에 크나큰 공헌을 남겼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교육 영성이라는 새로운 장을 마련한 요한 보스코 성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교육을 목표로 했다.
이성과 종교, 친절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방교육은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해 그들이 사랑한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으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종교로 젊은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주며, 친절한 사랑으로 그들의 인격을 존중해 하느님과의 사랑을 매일의 삶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길 당부했다.
젊은이들과 대화하고 통교하는 힘은 이성에서 비롯된다고 말한 그는 청소년들을 교육하기에 앞서 교육자 자신이 스스로의 성격을 다스리도록 권고했다. 보스코 성인 자신도 그의 급한 성격과 과민함을 온유와 사랑으로 다스리며 젊은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한발짝 다가설 수 있었다. 청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심을 가졌던 보스코 성인은 자신의 감정을 먼저 다스림으로써 젊은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그는 젊은이들을 꾸짖을 때 화난 목소리나 몸짓을 지녀서도 안되고 마음을 흥분시킨다거나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지 말라고 당부하며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에 있어 이성과 아울러 신앙생활, 즉 종교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며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또 그는 어릴 적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화해성사와 성체성사는 젊은이들의 영적생활에 힘을 준다고 확신했다. 이 때문에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매일미사, 성체강복, 성체조배 등 조기 신자교육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모신심이 특별했던 그가 예방교육의 세 번째 요소로 언급한 것은 친절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견디어 냅니다"(1고린 13, 4. 7)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모든 살레시안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사랑받도록 해야한다고 했다.
예방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매일 미사와 성체조배 때 젊은이들 한명 한명을 기억하며 기도했고 또 신심이 약하고 반항적인 젊은이들을 위해 언제나 기도했다.
요한 보스코 신부는 예방교육과 함께 가족정신을 중요시했다. 그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인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졌으며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뤄졌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 성인은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 등을 닥치는 대로했던 그는 훗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깊이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됐고 직업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하는 데 원동력이 됐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으며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가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2일, 이진아 기자]
살레시오회(하)
사진말 = 돈보스꼬 직업학교에서 교육받고 있는 청소년들(사진 위)과 살레시오 교육회관에서 펼친 여름캠프 장면
사도적 실천
살레시오회는 1954년 한국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수도회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당시 광주대교구장 헨리 대주교에 의해 초청된 이후 오늘날까지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예방교육을 전개해 내가고 있다.
초창기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이 한국으로 파견돼 살레시안 교육을 펼쳐나갔으며 89년 광주 일곡동으로 이전한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는 현재까지 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57년 노기남 대주교의 초청으로 서울 도림동성당의 사목과 운영을 맡았던 살레시오회는 63년 도림동성당 관할지역인 대림동에 근로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와 신학원을 설립했고 구로공업단지를 관장하는 구로3동에 본당을 신설, 운영했다.
요한 보스코 성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살레시오회는 더 가난하고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해 1970년 서울 영등포구 신길6동에 돈보스코 직업학교를 설립, 젊은이들에게 기계기술을 가르치고 공단지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사회, 문화, 교육을 실시했다. 아울러 살레시오회는 가톨릭노동청년회나 소년원 사목활동도 함께 펼쳐나갔다. 이같은 교육을 통해 살레시안들은 청소년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책임감 및 자립정신을 갖게하고, 개인적으로는 사랑을 나눠주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위한 수련회 활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살레시오회는 80년 전남 영광군 해변 청소년 캠프장 마련을 비롯,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살레시오 교육회관을 설립했다. 입시위주의 교육현실 속에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돕고자 시작된 살레시오교육회관의 프로그램들은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육적 가치가 높이 평가돼 전국적으로 확산, 실시됐다.
서울, 대전, 충남, 강원도 등지에서 교육회관,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각각 지역마다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운용, 청소년들의 필요에 따라 교육회관과 수련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서울 교육회관에서는 인성교육, 리더쉽, 자원봉사학생교육, 가족피정 등을 실시하고 있고, 대전에서는 음악, 역할극, 명상 등 상호학습과 체험학습 위주의 교육을 전개하고 있다.
오라토리오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가족애와 사랑을 실천해온 살레시오회는 결손가정 청소년들을 위한 소규모 복지시설인 '나눔의 집'을 85년부터 시작, 현재 서울과 광주, 대전, 춘천에서 20여개의 소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청소년들의 매스컴 교육에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있는 살레시오회는 94년 돈보스코정보문화센터를 설립해 출판, 영상 및 컴퓨터 등 첨단분야의 청소년교육을 펼치고 있으며 일선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청소년 이해를 넓혀주는 '청소년사목전문학교'도 실시하고 있다. 미디어교육부, 문화교육부, 인터넷기획부 등으로 구성된 정보문화센터는 매년 청소년창작영화제를 개최해 청소년들의 방송제작교육을 체험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해 전국을 순회하면서 영상캠프를 전개하고 있다. 67년부터 근로 청소년들의 야학 및 문화강좌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된 교육부는 지역 청소년들과 주민들의 문화활동 및 취미생활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해오고 있다. 현재 양질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문화센터는 컴퓨터 교실을 포함해 영어, 논술, 만화, 연극, 과학교실, 바이올린 등 17개 과목이 개설돼 있으며 성인들을 위해 영어, 일어회화, 핸드니트, 퀼트, 손바닥정원 들을 제공하고 있다.
현재 독자적인 서버 구축으로 포털사이트(www.ibosco.net)를 운영하고 있는 살레시오회는 다양한 청소년교육사업을 온라인으로 연결해 시너지 효과를 얻어내고 있으며 청소년인터넷방송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도 80년부터 아프리카 등지에 선교사를 파견해온 살레시오회는 96년 중국 연길지역을 한국관구의 선교지로 선정, 2년 뒤 현지에 공업기술고등학교를 세워 중국 청소년들에게 기술교육을 통한 복음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99년 한국진출 45년만에 정식관구로 승격된 살레시오회는 한국에서는 108명(수련자 포함)의 성직·수도자들이 요한 보스코 신부의 정신을 실현,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으며 전세계에서는 1만7000여명의 수도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8월 19일, 이진아 기자]
[수도 영성] 살레시오회*
나에게 영혼을 달라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수사신부
왜 살레시오 수도회인가?
많은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왜 창립자 돈(don : 사제란 뜻의 이탈리아어) 보스코의 이름을 따 ‘돈 보스코 수도회’라고 하지 않고 ‘살레시오 수도회’라고 지었나요?”
돈 보스코에게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프란치스코 드 살, 1867-1622년) 주교는 각별한 인물이었다. 돈 보스코(1815-1888년)보다 앞서 살았던 프란치스코 드 살은 당시유럽 교회 안에서 널리 공경되던 성인이었다. 특별히 그가 남긴 겸손과 온유, 친절과 인내, 사목적 열정과 낙관주의는 돈 보스코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결국 돈 보스코는 수도회를 창립하면서 수도회 수호성인으로 정했을 뿐 아니라, 수도회 이름조차 살레시오회로 명명하게 된다.
돈 보스코는 누구인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이 있는데, 아이들 표현대로 ‘살짝 맛이 간다.’ 거금을 들여 선물공세를 펼치기도 하고, 잠깐의 만남을 위해 천리 길도마다 않고 달려간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눈에 콩깍지가 꼈다.’고 한다.
돈 보스코가 그랬다. 그는 한마디로 ‘청소년에 미친’ 사람이었다. 실제로1841년 사제가 된 돈 보스코에게는 여러 ‘물 좋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돈 보스코는 모두 마다하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청소년들 사이로 내려간다. 이런 그를 두고 동료 사제들은 미쳤다고 했다. 교구 관계자들은 그를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까지 하였다.
돈 보스코가 살았던 1800년대 토리노시 주변의 상황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수많은 농촌인구들이 도시로 유입되었고, 많은 도시빈민이 양산되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조차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의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일터로 나서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청소년들은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었고 노동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나의 목숨까지 다 바치겠다.”는 열망을 지닌 돈 보스코는 토리노 거리를 뛰어다니며 청소년들을 만나고, 오라토리오에 초대하고, 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교육경험을 쌓아나가기 시작하는데, 이를 ‘예방교육’이라 일컫는다.
청소년들과 함께 성화의 길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화의 길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활짝 열려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성인이 되는 길은 더 이상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성화의 길은 하느님 백성이면 누구나가 다 접근 가능한 보편적인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돈 보스코는 시대를 앞서 산 성인이었다. 그는 성화의 길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주 강조했다. 실제로 수많은 그의 청소년들과 제자들이 돈 보스코가 제시한 아주 쉬운 방법을 통해 성덕의 길로 나아갔다. 돈 보스코는 이제 겨우 열두 살, 열세 살 된 자신의 청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애야, 너는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단다.” 깜짝 놀라 반문하는 청소년들에게 돈 보스코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애야, 성인이 되는 길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하루하루 기쁘게 사는 것, 네게 날마다 주어지는 일과를 충실히 행하는 것, 정성껏 미사에 참석하는 것, 고해성사를 잘 준비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성인이 될 수 있단다.”
‘나에게 영혼을 달라’
돈 보스코는 1835년 키에리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당시 신학교 복도에 걸려있던 다음의 글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요 지침이 된다.
‘Da mihi animas cetera tolle’(나에게 영혼을 달라.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가라).
돈 보스코는 “한 청소년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도 절할 용의가 있다.”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까지 말하면서,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을 향한 강력한 열정을 표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영혼 구원을 위한 열정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명확하게 구현하였다.
돈 보스코의 이러한 마음은 그가 청소년들과 함께 기도하고, 뛰놀고, 공부하고, 생활하던 ‘오라토리오’(일종의 기숙 기술학교)라 부르는 삶의 현장에서 활활 타올랐던 그의 사목적 사랑과 수많은 일들을 통해서 실천되었다.
이런 어록들이 눈에 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영혼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우리 수도회는 큰 영광을 이룬 것입니다. 그때 우리 살레시오회 위에는 하늘에서 풍성한 축복이 내릴 것입니다.”
돈 보스코는 본능적으로 이론보다 실천을 앞세웠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강조했다. 말보다는 실제를 중요시했다. 행동 없는 신앙을 믿지 않았다. 생활과 동떨어진 복음도 믿지 않았다.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했습니까?
이토록 활동의 성인이었던 돈 보스코였기에 그의 시복시성 과정에서 큰 암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부족한 기도’ 문제였다. 반대편 사람들은 집요하게 이 한 가지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일의 노예였던 돈 보스코가 언제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한평생 활동으로 충만했던 돈 보스코가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었겠는가? 기도라는 주제는 수도회 창립자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돈 보스코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기본적인 기도마저 소홀히 한 사람을 어떻게 성인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시복시성 조사 과정이 진행될수록 뜻밖에도 돈 보스코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증거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발베리 신부는 증언했다. “돈 보스코는 삶의 순간마다 기도하고 있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는 그가 층계를 오르내릴 때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늘 봐왔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여행 중에는 원고를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언제 돈 보스코가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돈 보스코는 꽤 현실적인 사람, 외적인 활동에만 전념한 사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들을 - 가난한 청소년의 영혼 구원, 영적 생활, 하느님과 일치하기 -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활동하는 관상가’였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살레시오 남녀 수도회가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8년 4월호]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4. 돈 보스코 (1) 생애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 돈 보스코는 거리를 배회하는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 기술학교·주일학교·기숙사 등을 세웠고, 아이들을 체벌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했다.
많은 이들이 돈 보스코(Don Bosco·1815~1888) 성인을 두고 ‘사제의 이상형’‘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가톨릭 교육자’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에 청소년 교육 영성을 도입한 대영성가이자, 가톨릭 신앙을 수호한 호교론자였다. 근대 선교 운동의 개척자였으며, 20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그들의 ‘놀이터’에서 일생을 보냈고, 그 한가운데서 일생을 바쳤다.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의 베끼에서 아버지 ‘프란치스코’와 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니’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이 채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탓에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들일을 거들어야 했고, 심지어는 이웃집 머슴살이까지 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우울한 성장 과정은 불균형적인 인격 형성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학의 전통적 견해는 돈 보스코에게선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는 늘 쾌활했으며 재치가 넘쳤다. 상상력이 풍부했다. 게임과 오락을 즐긴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수, 배우, 마술사 등으로 불렸으며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즐겨 흉내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골목대장이었다. 동시에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에 남달리 충실했으며 기도생활에도 열심이었다.
결국 밝고 맑은 성격의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에 사제 서품을 받는다. 서품 전날 밤, 보스코는 9가지 결심을 세우게 된다.
▲ 환자 방문과 같은 중대한 이유 외에는 절대로 외출하지 않겠다.
▲ 시간을 엄격히 사용하겠다.
▲ 영혼을 구하는 문제라면 언제나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모든 고통을 감수하고 행하며 자신을 겸손되이 낮추겠다.
▲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의 자애와 온유를 본받겠다.
▲ 건강에 해롭지 않는 한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든 항상 만족하겠다.
▲ 포도주를 마실 땐 물을 타서 마실 것이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정도로만 마시겠다.
▲ 일은 영혼을 해치는 적들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루 다섯 시간 내지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않겠다.
▲ 묵상과 영적 독서를 위해 매일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하겠다. 미사 전에는 최소한 15분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며, 미사가 끝난 뒤에도 15분 이상 감사경을 올리겠다.
▲ 고해성사를 주거나 혹은 영적 지도에 필요한 때 외에는 여성들과 절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사제 보스코는 모든 노력을 다해 자신의 결심을 실천해 갔다. 이후 그는 우연히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젊은이들을 방문하는 경험을 한다. 또 얼마 뒤에는 성당의 제의방에서 한 고아 소년을 만난다. 이로써 그는 청소년과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길로 들어선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소년들이 집도 일거리도 없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소년들, 전쟁고아들, 교도소에서 만난 수많은 청소년들, 공장 소년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는 구두 제작, 양재, 목공, 인쇄 제본 등의 기술을 소년들에게 가르쳤다. 주일학교를 시작하고, 고아들과 가출 소년들을 위해 기숙사를 세웠으며, 제본소나 인쇄소 등의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시작하였다. 저술과 출판활동으로 자신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땀을 흘렸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보스코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강요와 체벌을 가하지 않았다. 아이들과 그 사이에는 종교적 유대감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찰, 대응했다.
그는 이어 그의 청소년들 중에서 미래의 협력자들을 찾아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59년 살레시오회를 창설, 선교사업을 전개했으며 이 수도회는 1869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를 받았고, 1871년 회헌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소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립하였고,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2세의 돈 보스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긴다. 그는 최후의 순간 이런 말을 남겼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신부는 혼자서 천국이나 지옥에 가지 않는다. 잘 살면 그의 좋은 표양으로 구원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잘 살지 못하거나 악표양을 주게 되면 그 악표양으로 저주받은 영혼들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이다.
▲ (돈 보스코의 건강을 염려하며 휴양을 권하는 한 부인에게) 저는 제 건강을 돌보기 위해 신부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15일, 우광호 기자]
[사제의 해 기획 - 사제(司祭)의 사제(師弟)]
4. 돈 보스코 (2) 영성
생각과 말이 하느님과 함께 한 사제
- 돈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 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사제의 해를 맞아 사제 영성에 대해 이야길할 때, 돈 보스코는 특히 가깝게 다가온다. 성인은 은수자가 아니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15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 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돈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돈 보스코가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이 아니다. 돈 보스코에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회원에게 그가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돈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돈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돈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돈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 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돈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 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하였다. 그의 저작들은 추상적 가르침을 담고 있지 않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 돈 보스코가 9살때 꿈속에서 성모님을 만난 후로 성모님은 항상 그의 곁에서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의 영성은 구체적인 만남을 통해 보다 육화되었으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실현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다. 돈 보스코는 그 이웃 중에서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한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돈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도록 하여라.” 돈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어려서부터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돈 보스코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삼종기도를 통하여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칠 때까지 즉 닭이 우는 새벽, 일터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돈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 사업의 창립자이시요 후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돈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그분께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돈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르쳤다. 돈 보스꼬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우리의 영혼을 구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회의 목적입니다.”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되었다. 1950년 스페인 정부는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하였다. 그는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이며, 편집자와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돈 보스코가 남긴 말
▲ 여러분이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2일, 우광호 기자]
돈보스코 성인 유해 한국 순례
성인 영성 가까이서 만날 특별한 기회
- 지난 7월 27일 온두라스 테구시갈파에 위치한 성 미카엘 대천사 대성당에 모인 신자들이 돈보스코 성인 유해 모형을 지켜보고 있다. 한국은 캐나다에 이어 21번째 순례국으로 오는 11월부터 순례가 시작된다.
“영적으로나 현실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성인(聖人)들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그분들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실 준비가 돼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 돈보스코(성 요한 보스코) 성인의 유해가 오는 11월 한국에 온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살레시오회가 2015년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마련했다. 2009년 7월 칠레에서부터 시작된 성인 유해 순례는 약 5년에 걸쳐 전 세계 134개국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한국은 캐나다에 이어 21번째 순례국이다.
특히,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신자들이 성인의 유해에 찾아가는 일반적인 순례와 달리, 성인의 유해가 신자들을 직접 찾아온다는 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더욱 가까이서 만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한국에서는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에 이어 광주 신안동 수도원, 살레시오 중고등학교(광주 일곡동 수도원), 예수의 까리따스 수녀회 광주 관구관,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 수녀회 관구관, 서울 구로3동성당, 서울 대림동 수도원 등에서 성인의 유해를 만날 수 있다.
또한 이번 순례를 통해 성인의 유해를 찾아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대사 특전이 주어진다. 전대사를 받기 위해선 고해성사에 이어 돈보스코 성인의 유해 앞에서 봉헌되는 미사에 참례해 영성체 하고, 교황의 지향(2010년 11월 교황의 기도지향)과 함께 주님의 기도, 사도신경, 돈보스코 성인과 함께 드리는 기도를 바치면 된다.
아울러 살레시오회는 성인의 유해가 순례를 하는 동안 돈보스코 성인의 생애와 영성을 되돌아보는 기념특강을 실시한다. 특강은 11월 1~16일 국내 각 순례지에서 매일 다른 주제로 진행된다. 특강기간 중에는 서울대교구 총대리 염수정 주교(11월 4일)와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11월 8일), 서울대교구 서서울 지역 교구장 대리 조규만 주교(11월 14일) 주례로 미사도 봉헌된다.
국내 성인 유해 순례를 담당한 양승국 신부(살레시오회)는 “요즘 우리 가정에서 자녀 교육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번 유해 순례가 그분께 도움을 간구하고, 그분의 영성 안에서 청소년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유해 순례에 앞서서는 살레시오회 제9대 총장 파스칼 차베스(Pascual Chavez) 신부가 방한할 예정이다. 10월 14일 4박 5일 일정으로 방한하는 파스칼 신부는 광주 살레시오 중고등학교와 서울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 등에서 각각 ‘살레시오 가족 영성의 날’을 참관, 미사를 집전할 예정이다.
살레시오회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의 생애와 영성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
▲ '청소년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으로 불리는 돈 보스코 성인.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나의 마지막 숨까지 다 바치겠다."
살레시오회 설립자 성 요한 보스코(1815~1888, 이하 돈 보스코)는 청소년들의 영혼 구원에 혼신을 기울였고, 세상은 그를 '19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교육자'라고 부른다.
그는 책상 앞에만 앉아있지 않았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의 '놀이터'에서 자신의 한 삶을 바쳤다.
1815년 8월 16일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시 베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돈 보스코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늘 밝고 명랑했다. 그는 장터에서 본 광대나 곡예사를 곧잘 흉내 내 친구들 사이에서 가수ㆍ배우ㆍ마술사로 통했을 정도로 밝게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 속에서도 자녀 종교교육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어머니 영향을 받은 그는 훗날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며 기쁨과 희망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돈 보스코는 1835년 신학교에 입학, 6년 뒤인 1841년 토리노교구에서 사제품을 받는다. 사제가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된 청소년들을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공업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고,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모인 청소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 살면서 쉽게 범죄에 빠졌다. 교도소는 이런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이런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돈 보스코는 뒷골목을 방황하는 전쟁 고아들과 공장의 어린 노동자들, 재소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돈 보스코는 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기숙사를 세웠고 직업학교와 기술학교도 열었다. 학교에서는 구두 제작과 양재, 목공, 인쇄 및 제본 등을 가르쳤다.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였다.
돈 보스코는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1코린 13, 4~7)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오직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청소년들을 대했다. 청소년들은 돈 보스코의 각별한 사랑에 감동하며 점차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삶의 무게에 지쳐있던 그들은 돈 보스코의 사랑에 힘입어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열정과 희망, 사랑을 찾아냈다. 돈 보스코는 더 많은 이들과 이 체험을 나누기 위해 1859년 살레시오회를 설립, 1869년과 1871년 교황청으로부터 수도회 인가와 회헌 인가를 받았다. 1872년에는 살레시오 수녀회를, 1876년에는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설립했다.
오직 청소년들을 위해 땀과 기도로 일관한 일생이었다. 1888년 1월 31일 새벽, 73살의 돈 보스코는 미소를 머금은 채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나의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돈 보스코는 1929년 시복, 1934년 4월 시성됐다. 스페인 정부는 1950년 청소년 교육의 선구자였던 그를 전국 상공업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정했고, 교황 비오 12세도 그를 일러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고 불렀다.
[평화신문, 2010년 10월 17일, 이서연 기자]
한국 순례 돈 보스코 유해 환송예식에서 다짐
"우리 모두 젊은이들의 친구가 되자"...22번째 순례국 태국으로 떠나
- 돈 보스코 유해가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을 떠나 22번째 순례국가인 태국으로 떠나고 있다. 한국 살레시오 가족들이 성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에 숙연히 성인 유해 운구를 지켜보고 있다.
"이제까지 저를 사랑해주셨던 것처럼 살레시안으로서 회헌을 잘 지키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주십시오. 하늘나라에서 여러분 모두를 기다리겠습니다."
유언 낭독이 이어지고 17일간에 걸친 한국 순례를 마친 성 요한 보스코(1815~1888)의 유해는 17일 22번째 순례국인 태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수도원에서 거행된 환송예식을 끝으로 성인 유해의 한국 순례가 마무리되자 한국 살레시오 가족은 나라 꽃 무궁화를 봉헌하며 기쁨과 아쉬움 속에서 성인 유해를 떠나보냈다.
환송예식에서 고 이태석 신부가 2008년 살레시오회 수도자와 신학생들 20여 명을 모아 결성한 존스밴드는 김선오(살레시오회 전국 성소담당) 신부 지휘로 '주 찬미하라(Laudate dominum)'와 '성인들의 행진(Saints go marching in)', '여왕이시며(Salve Regina)' 등을 연주하고 돈 보스코 유해 순례의 기쁨과 감사함을 전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이날 성인 유해 한국 순례를 기념해 제작한 돈 보스코 성인 동상을 남ㆍ녀수도회 14개 공동체에 전달했다.
1954년 이 땅에 살레시오회가 파견된 후 처음 한국을 찾은 성인 유해 순례는 돈 보스코의 마음과 삶의 결정체인 '예방교육'을 모두에게 일깨우고, 젊은이들이 드나들 '하늘나라의 문'이 되기를 원하고 젊은이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돈 보스코처럼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다.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요, 벗'으로 이 땅에 온 돈 보스코 성인 유해는 살레시오회와 살레시오수녀회, 예수의 까리따스수녀회 국내 8개 공동체를 순회하며 모두의 가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다시 불러 일으켰고,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서울ㆍ광주 지역 각 수도 공동체별로 이뤄진 돈 보스코 유해 참배엔 3만 4000여 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다. 서울 신길동 관구관(3000명)을 시작으로 광주 신안동ㆍ일곡동수도원(6500여 명), 살레시오여자중ㆍ고(2000여 명), 광주 예수의까리따스수녀회 관구관(2000여 명), 서울 살레시오수녀회 관구관(2500여 명) 서울 구로3동성당(1만 명), 서울 대림동 수도원(3000여 명) 등에 몰렸다. 고해성사를 받으려는 신자들이 몰려 수사신부 10여 명이 성사를 베풀어야 할 정도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해성사를 받고 냉담을 푸는 일도 숱했다.
또한 서울 신길동 관구관에서 염수정(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 광주 일곡동수도원에서 김희중(광주대교구장) 대주교, 서울 구로3동성당에서 조규만(서울대교구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주교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돈 보스코의 생애와 영성, 위대한 교육자 돈 보스코, 돈 보스코와 신자들의 도움이신 마리아, 돈 보스코의 예방교육 영성, 활동하는 관상가 돈 보스코 등을 주제로 그 뜻을 되새겼다.
일시 귀국했다가 유해를 참배한 교황청립 아욱실리움대학 교수 장향주(아우실리아, 살레시오수녀회) 수녀는 "성인께서 이 땅을 찾아주셔서 감개무량하다"며 "성인께서는 한국을 떠나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해 주실 것을 믿으며, 유해를 참배한 우리 모두는 젊은이들의 친구가 되고 돈 보스코의 협력자가 될 것이다"고 다짐했다.
환송예식에 함께한 전혜숙(58, 서울 송파동본당)씨도 "가난한 청소년을 위해 펼치신 돈 보스코 성인의 많은 활동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며 "성인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아 열심히 봉사에 참여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남 신부는 환송예식 강론에서 "돈 보스코 성인이 우리 곁에 오셔서 젊은이들이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이며 모든 것이라는 영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셨다"면서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영성을 기억하며 우리도 젊은이들을 위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순간 실천하고 노력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편 동아시아 - 오세아니아 관구군 순례는 한국을 시작으로 △ 태국(18일~12월 4일) △ 필리핀(12월 5~2011년 1월 15일) △ 베트남(1월 16일~2월 1일) △ 일본(2월2~18일) △ 동티모르(2월19일~3월 7일) △ 오스트레일리아(3월 8일~24일) △ 중국 홍콩ㆍ마카오(3월 25일~4월 10일) △ 미얀마(4월11~30일) 등 모두 9개국에서 이뤄진다. [평화신문, 2010년 11월 28일, 오세택 기자, 이서연 기자]
돈보스코 성인 유해, 17일 국내 순례 일정 마치고 태국으로
큰 사랑 마음에 새겨 기억할게요
- 한국을 찾은 돈보스코 성인의 유해는 17일 국내 순례 일정을 마치고 다음 순례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성인 탄생 200주년 앞두고 살레시오회가 마련한 순례
전국서 4만여 명 찾아 기도
‘나는 여러분을 이 땅에 남겨 두고 떠나지만 그건 잠시뿐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어느 날 영원한 행복의 나라에서 모두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돈보스코의 유언서 중)
이 땅을 찾았던 돈보스코 성인 유해가 17일 국내 순례 일정을 마치고 다음 순례지인 태국으로 떠났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살레시오회가 2015년 수도회 창립자 돈보스코 성인 탄생 200주년을 앞두고 마련했다. 1~17일, 총 17일간의 한국 순례 일정을 마치고 살레시오회 대림동 수도원에서 열린 유해 환송 예식에는 수도회 소속 신부, 수사를 비롯한 살레시오 공동체 식구들과 순례객 등 약 300여 명이 참례해 성인 유해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날 예식에서는 제1독서로 돈보스코 성인의 유서를 낭독하며 평생토록 청소년만을 생각한 성인의 영성을 되새기는 시간이 마련됐다.
또 한국 살레시오 가족들과 청소년들을 축복하고 보호해주는 성인의 사랑을 기억하며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 봉헌도 이어졌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돈보스코 성인께 드리는 감사와 약속,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며 “이번에 이 땅에 오시어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성인의 영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일깨워주고, 살레시안들로 하여금 다시 마음을 모으게 해주심에 감사드리며 하늘에서 기다리겠다는 성인의 유언을 따라 우리도 하늘나라에 가서 성인을 꼭 만나겠다고 약속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살레시오회 신월동 수도원장 겸 나눔의 집 원장 김해영 신부는 “이번 성인 유해 순례 동안 우리 모두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성인께선 우리 안에 계속 살아계실 것”이라며 “성인의 사랑이 청소년, 부모, 교육자 등 모든 이들에게 퍼져나가길 바란다”고 밝혔다.
순례객 장경은(세실리아)씨도 “이번 순례를 통해 성인께서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절실히 깨달았다”며 “성인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활기가 한국교회 안에 퍼져나가 우리 청소년들에게 머물러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특히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신자들이 성인의 유해를 찾아가는 일반적인 순례와 달리, 성인의 유해가 신자들을 직접 찾아온다는 점에서 더 많은 이들이 성인의 영성을 더욱 가까이서 만나는 계기가 됐다.
아울러 전국에서 4만여 명이 성인의 유해를 찾아 기도하는 등 성인의 영성을 닮아가려는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 성인 유해 순례를 담당했던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많은 분들이 성인을 만나고 성인의 은총을 받았다”며 “이번 성인 유해 순례는 순례객들에게 신앙 생활의 변화와 형제애적 일치를 얻게 하는 뜻 깊은 기회가 됐다”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11월 28일, 이우현 기자]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5) 성 요한 보스코 (1)
‘고아들의 아버지’로 평생을 몸 바쳐
정영식 신부 · 효명고등학교 교장, 최인자 · 엘리사벳 · 선교사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무덤 비석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단순히 몇 마디 인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다 가신 분이 아니다.
성 요한 보스코(St. Joannes Don Bosco, 축일 1.31). 교회에 어떤 위기가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신다. 또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하신다. 요한 보스코도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위한 도구였다.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 토리노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치스코 루이지는 근면하고 열심한 신자였고 어머니 마르가리타도 역시 덕이 충만한 신심 깊은 여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 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키우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특히 자녀 신앙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당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모든 어머니들의 모범이다.”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요한 보스코는 신심깊은 소년으로 자라났다. 9세 때 처음으로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다. 이후 요한 보스코는 평생동안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드렸고, 이는 훗날 수도회 창립 등의 열매로 이어진다.
소년 요한 보스코는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 때문에 12세부터 14세까지 2년간 숙부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지냈는데, 이 숙부가 사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참으로 완덕을 염원하며 열심히 생활했다. 하지만 그는 완덕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다고 한다. 결국 요한 보스코는 1841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는다. 첫 미사 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아들에게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부터는 어머니인 나를 염려하지 말고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한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훗날 성인이 되는 토리노의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라는 두 친구가 있었다. 두 친구는 요한 보스코에게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며 교리와 생활 자립을 위한 기술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요한 보스코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아간다. 사실 그의 아이들은 온순한 아이들이 아니었다. 요한 보스코가 그들과 함께 생활하자 사람들은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곧 덕이 충만한 성인의 감화를 받고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된다. 요한 보스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양로원이나 교도소 등도 방문하고 그곳에 있는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요한 보스코는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라고 이름 짓고, 1869년 12월 18일 제자 몇 명을 데리고 당시 교황 비오 9세를 알현,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했으며, 먹고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 등 현세의 행복까지도 배려했다. 이 두 수도원이 얼마나 당시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이 수도원의 혜택을 받은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기도와 함께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회원들의 손을 통해 계속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0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6) 성 요한 보스코 (2)
“저에게는 천국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요한 보스코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성인도 드물다. 지극히 인간적이었으며, 예민한 감수성으로 청소년과 소외된 이웃을 사랑했고,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다.
그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다.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해 사막으로 가지 않았다. 봉쇄 생활을 하지도 않았고, 기도를 위해 하루 몇 시간씩 성당에서 무릎 꿇지도 않았다. 성인은 소위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관상가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며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교구 신학생으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끼에리 대신학교 생활을 거쳐 한 교구의 사제요 사목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본당과 교구 중심의 한국교회에서 요한 보스코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 보스코 성인이 기도나 관상을 멀리했다는 말은 아니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기도는 ‘교육적 기도’였고 ‘청원기도’였으며 무엇보다 ‘삶의 기도’였다. 한 회원이 “저는 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고 말했을 때 성인이 한 말은 “그 아이를 위해 기도했습니까?”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런 요한 보스코를 가리켜 “만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동시에 그의 생각은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요한 보스코는 일마저도 기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는 이냐시오 로욜라 성인과 대 데레사 성녀를 무척 좋아했다. 데레사 성녀로부터는 하느님의 위엄성에 대한 깊은 헌신을 이어 받았으며, 이냐시오 성인으로부터는 악에 대한 열성적 싸움과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이어 받았다. 특히 그는 육체적 금욕보다는 정신적 금욕을 강조했다.
그의 삶을 처음부터 찬찬히 들여다 보자. 1815년에 탄생하셨고 1881년에 선종하셨으니까 65세를 사셨다. 인생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요한 보스코도 예외가 아니다. 가난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어린 시절부터 모시고 살았다. 어머니는 신심 깊은 분이셨고, 늘 기도 안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었다. 요한 보스코는 당연히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신심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고, 영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요한 보스코가 9세 때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는 것도 이러한 가정환경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린 요한 보스코는 발현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모님께서 앞길을 비춰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어린아이는 듣는 대로, 보는 대로, 체험한 대로 행동하는 법이다. 어린 시절에 다가온 이러한 체험은 요한 보스코의 마음에 평생동안 각인되었을 것이다. 요한 보스코가 평생동안 성모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삶을 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시기를 보내면서 줄곧 성모님 안에서 덕행과 극기 금욕의 삶을 잘 살았고, 더 나아가 성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요한 보스코는 결정적으로 천사같은 인물을 만나는데 바로 숙부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요한 보스코는 숙부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살고 있었는데, 그 숙부가 요한 보스코의 그릇이 큼을 알아보았다. 사제의 길을 뒷바라지해 줄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숙부는 그 길로 한 사제에게 요한 보스코를 보냈다. 감수성 많고,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청소년기에 사제와 함께 생활한 것은 행운이었다. 성직자와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영성적 성향으로 형성되어오던 요한 보스코의 내면 형성을 더욱 깊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름다운 일화를 발견하게 된다. 요한 보스코와 함께 생활하던 사제가 얼마 후 죽음을 앞두게 됐다. 그는 죽으면서 요한 보스코에게 작은 금고와 열쇠를 물려준다. 금고 안에 무엇이 들어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요한 보스코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것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린 나이의 요한 보스코가 보인 반응이 놀랍다.
“저에게는 현세의 열쇠는 필요 없습니다. 천국의 열쇠가 필요합니다.”
요한 보스코는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물질적인 것이 아닌 초자연적인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런 요한 보스코가 20세가 됐다.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그가 갈 곳은 오직 한 곳뿐이었다. 바로 신학교였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17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7) 성 요한 보스코 (3)
“초자연적 삶 이끄는 참된 목자가 되어라”
6년 후. 신학교에 입학한 요한 보스코가 오랜 학업생활을 마치고 사제로 막 서품되었을 때였다. 어머니가 서품 받은 아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인간적으로는 내 아들이지만,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오늘부터는 나를 염려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는 만인의 영혼을 위해서 살아라. 만인이 초자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참된 목자가 되어라. 그런 일을 하면 너는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는 것이고, 또한 내 곁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다. 요한 보스코의 어머니는 참으로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삶의 방식을 따랐던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세속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내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집도 내 집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내 옷이다. 하지만 초자연적 의미에서는 내 집이 내 집이 아니고 내 옷이 내 옷이 아니다.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의 옷이다.
어머니는 참으로 영적인 말씀을 이제 막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단순히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신적 신비이신 하느님께서 어머니를 통해서 전해주신 말씀이라고 믿는다. 더 확장시켜서 말하자면 이는 어머니의 말씀이 아니라, 어머니 중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말씀이다. 어머님의 말씀은 바로 어린 시절부터 요한 보스코의 앞길을 비춰주신 성모님의 말씀이었다.
이후 요한 보스코는 더욱 확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하나둘 성취해 나간다. 그런데 이때 요한 보스코에게 두 명의 천사가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점은 인간은 ‘나 홀로’ 성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보내주시는 천사를 우리가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친구는 요한 보스코에게 “자네가 박애사업을 위해 투신했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요한 보스코는 늘 깨어 있었다. 그래서 두 천사들의 말을 적극 실천으로 옮긴다. 여기서 친구들이 왜 박애사업에 대해 강조했는지 당시 시대상황을 짚어보고 넘어가자.
요한 보스코는 르네상스(Renais sance)의 마지막 시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당시 세계는 변화와 변혁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르네상스 사상가들은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부흥과 사회의 개선은 고대 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극단적으로는 근세의 시작은 중세로부터가 아닌 고대로부터라 주장하고, 중세를 지극히 정체된 암흑시대라고 혹평하였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서는 르네상스의 싹을 고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중세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크게 대두되고 있다.
중세는 하느님 중심의 신학이 세상 안에서 여러 방면에 걸쳐 좋은 역할을 많이 한 시기였다. 물론 약간의 교만한 모습도 있었기에 여러 문제점이 생겼지만, 당시는 사회 경제 문화적 차원에서 하느님 신앙의 꽃을 찬란히 피운 시기였다. 르네상스는 중세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토대 위에서 서는 것이 아니라 중세라는 큰 거인의 등에 올라타 먼 곳을 내다보는 난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탄생한다. 「신곡」을 쓴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 「데카메론」을 저술한 보카치오(Giovanni Boc caccio, 1313~1375),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1469~1527), 이상적 국가상을 그린 명저 「유토피아」를 쓴 영국의 성인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 등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또 과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1642), 철학자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예술가인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등이 있다.
르네상스는 이처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등 모든 차원에서 일대 도약과 변혁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를 바라보는 시각도 신앙인이라면 조금 달라야 한다. 단순한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1년 4월 24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8) 성 요한 보스코 (4)
청소년을 교회와 사회의 등불로 이끌다
인간은 삼중구조로 되어 있다. 신체와 정신, 영(靈)이 그것이다. 인간은 이 삼중구조 속에서 자신을 형성시켜 나간다. 하느님도 우리를 이 삼중구조 안에서 인도하신다. 인간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대의 인류는 신체적인 차원, 정신적인 차원이 강했다. 하지만 중세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영적인 차원이 강화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차원이 남용이 되고, 세속 안에서 일부 잘못 적용되면서 근대에 오면서는 다시 정신적인 차원이 일깨워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렇게 늘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먹고사는 육체적인 차원이 조화롭게 통합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간들을 일깨우시면서 인류 역사를 인도하신다.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점이다. 조화가 사라지면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학문적인 면만 해도 그렇다. 인간 정신과 지성을 이용한 학문은 참으로 좋은 것이다. 하지만 경험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물질주의, 유물론이 나오게 된다. 물질만능주의가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까지 판단되는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사회적 문제도 마찬가지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산업화는 인간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아마 요즘 사람들에게 한겨울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초가집에서 살라고 하면 대부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류에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술이 무기제조에 사용될 때는 수많은 무죄한 이들에게 고통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등을 통해 기술의 발달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지 잘 알고 있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는 중세의 종교가 쇄신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근대는 동시에 무신론도 함께 안고 왔다. 수많은 이들이 ‘신은 죽었다’고 외쳤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무신론 혹은 불가지론(신의 존재는 인간으로는 있다 없다고 판단할 수 없다)에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그리스도교 영성의 확립이 필요하다. 진정한 영성이 확립되어야 학문적 오류, 사회적 오류, 종교적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같은 분을 가톨릭교회에 보내주신 이유다. 하느님은 이분들이 신비적 차원에 가장 높은 경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미 섭리를 해주셨다. 그런데 여기서 또 플러스(+)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실천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이 영성의 실천을 위해 요한 보스코를 보내주셨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요한 보스코를 먼저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을 먼저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 다음으로 요한 보스코를 보내셨다.
요한 보스코는 진정으로 행동하는 영성가였다. 서품받은 후 요한 보스코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라 고아와 노인, 죄수들을 위해 헌신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항상 옆에서 도와 주셨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삶이 더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이뤄지는 것이 바로 수도원의 창설이다. 요한 보스코는 54세에 남자 수도원을, 59세에 여자 수도원을 설립하고 미래를 위한 청소년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런데 그의 활동 방법이 참으로 교회적이고 모범적이다. 진정한 기도와 영성 안에 먼저 머물고 그 힘으로 청소년 돌봄에 나선 것이다. 요한 보스코는 잘난 청소년, 못난 청소년을 가리지 않았다. A학생 B학생을 가리지 않았다. 잘생기고, 성실하고, 성격좋은 학생들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A, B, C, D, E, F 모든 학생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문제아들까지 함께 끌어안았다. 그에게 안긴 아이들은 모두 초월적 삶으로 변화됐다. 하느님은 이렇게 요한 보스코 사제를 통해 청소년들이 교회와 사회를 위한 등불로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섭리하셨다. 교회 내적인 차원에서 요한 보스코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듯 싶으니까, 나중에는 레오 13세 교황(요한 보스코 보다 5살 연상)을 통해서도 사회복음화를 실천할 수 있는 교회의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하셨다. 참으로 하느님 섭리의 신비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요한 보스코 성인의 영성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1일]
[영성으로 읽는 성인성녀전] (79) 성 요한 보스코 (5)
“젊다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기 충분합니다”
실천하는 사랑의 영성
요한 보스코는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보기보다는 사랑해야 할 아버지로 보았다. 그 결과 요한 보스코의 영성은 사목을 통해 세상안에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침투케 하는 ‘사목적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완전한 삶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론적이거나 학문적인 영성보다는 실천적 영성을 택했다. 그는 역동적인 영성을 가르쳤다. 특히 젊은이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했고, 자유를 존중했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해 지극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에 있었다. 운동장과 건물들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만나고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는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가난한 젊은이들 안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투신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 이것은 사제로서 그가 걸어간 사도적 활동이었고, 자신을 바쳐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성모신심
9살의 요한 보스코는 꿈을 꿨다. 넓은 마당에 수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때 성모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바로 네 일터이다. 겸손하고 강인하고 굳건한 사람이 되어라.”
요한 보스코가 울면서 무슨 뜻인지 가르쳐 달라고 애원하자, 성모님은 “때가 되면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항상 함께하시며 그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었다. 성모님에 대한 그의 신심은 그의 어머니께 깊이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날 그의 어머니는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너를 성모님께 봉헌했다. 이제 나는 네게 온전히 그분의 것이 되라고 당부하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다.
요한 보스코는 삼종기도를 통해 하루에 세 번 성모님께 인사를 드리는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그는 모든 일의 시작에서 마침 때까지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결국 이러한 성모신심은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게 된다. 실제로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성모님은 살레시오회 모든 활동의 창립자였다. 이는 그의 글 속에는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하나의 수도회를 시작하기 바라십니다. 우리는 살레시오 회원이라고 불리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수도회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세월이 흐르고 건강이 나빠짐에 따라 요한 보스코는 점점 더 ‘도움이신 마리아’께 의탁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적을 청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를 함께 성모님께 드립시다. 정녕코 치유를 해주시고, 들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며, 동정을 베풀어 주시는 분은 성모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응답해 주십니다. 나는 단지 기도할 따름입니다.”
성인이 돌아가신 후 침대 머리맡의 성모상 아래 홈에서 4000장이 넘는 쪽지가 발견되었다. 모두 다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청원기도문이었다.
영혼의 구원
요한 보스코는 ‘포교적’ 사랑을 실천했고 가르쳤다. 요한 보스코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하여” 라는 말에다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라는 말을 종종 덧붙이곤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제가 한 영혼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면 저는 제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확신합니다.”
요한 보스코가 남긴 말
“여러분은 젊은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기쁨 중에 주를 섬기십시오. 달리고 뛰고 소리치고, 죄만 짓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8일]
[성인들의 발자취] 성 요한 보스꼬
'고아의 아버지'로 직업교육 앞장, 살레시오 수도회 창설 - 축일은 1월 31일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요한 보스꼬는 1815년 8월 16일 북부 이태리 「뻬찌」의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근면하고 독실한 부모 밑에서 자라난 요한 보스꼬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남달리 두터웠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윈 요한 보스꼬는 13세부터 농삿일로부터 양복공ㆍ제과공제화공ㆍ목수 등으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으며 그 후 자신의 힘으로 대학과 신학교를 나와 사제가 되었다.
성모께 특별한 공경을 바쳤던 요한 보스꼬는 교황청의 은혜로 심신을 단련해 나갔는데 금욕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아이들을 모아놓고 손장난 등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고 또 함께 기도하고 했다.
1841년 4월 5일 사제품을 받은 요한 보스꼬는 「도리노」에 있던 두 친구, 성 요셉 가파쏘와 성 고도텡고의 권유로 박애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꼬는 버림받은 고아들을 모아 그들에게 기술과 공부를 가르쳤는데 당시에는 고아원이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요한 보스꼬를 도와 고아들을 보살펴주었다.
아이들이 요한 보스꼬를 사랑하고 따랐으므로 요한 보스꼬는 그들이 모여 놀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아이들의 소음에 이웃의 불평이 높아지자 요한 보스꼬는 낡은 헛간을 수리하여 그곳을 기도소라 부르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놀도록 해주었다. 이러한 기도소를 시작으로 요한 보스꼬는 공동작업장ㆍ학교 등을 설립했다.
요한 보스꼬는 그의 사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꼬의 신심회」라는 수도원을 창설, 1859년 12월 18일 삐오 9세를 알현하고 수도회의 인가를 요청했으며 다시 1875년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회는 청소년 교육과 직업기술 교육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으며 교회 내에서 세번째로 큰 수도회가 되었다.
1887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요한 보스꼬는 1934년 교황 삐오 11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요한 보스꼬의 측일은 1월 31일이다.
[가톨릭신문, 1982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