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 스님이 격고 계시는 여러가지 일들을 먼 발치에서 방관하며 바라불 수 밖에 없는 신심도 부족한
재가 불자입니다. 저는 어느 절에도 속하거나 정기적인 예불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그저 부처님의 가피로 책과 강의 등을 통해 불법을 접하게 된 것만으로도 큰 복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직 진정한 불법의 첫 장도 제대로 못넘기고 있는 범부중생이고 수행이라고 할만한 실천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같은 하늘아래 있고 같은 공기로 숨쉬고 있는 사람으로서 '젊잖은 척'만 할 수는 없기에 감히 생각해 봅니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고 하나 저같은 중생에게 그것은 자칫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空'에 빠지기 쉽게 하는 도피처가 되기 쉽습니다. 그 생각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은 살아있으나 죽으나 마찬가지겠죠. 부처님께서 호흡대해 많이 언급하신 것은 건강해지고 깨달음을 얻고 신통력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호흡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그 삶도 호흡과 함께 끝나게되니 '지금 잘 살라'는 이야기이시겠죠?
마침 어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세상과 나가 하나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지장보살님의 이야기가 나와 일부를 옯겨 봅니다. 지금 허정 스님의 존재와 행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살아 있음' 그 자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우둔하고 게을러 스스로 중생의 굴레를 쓰고 있는 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봅니다.
허정 스님 무소의 뿔처럼 '비난에도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는' 보살행을 이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즉문즉설 법륜 스님 2016.10.20
“뉴스를 보면 화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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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건의 피해자 가족 중에도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저건 나랑은 관계가 없는 일이다’라고 생각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20년이 지나서 자기가 사고 피해자 가족이 될 줄은 몰랐다는 고백을 하신 분이 계셨대요.
저도 어릴 때 경찰에게 끌려가서 고문을 당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건장한 장정들이 찾아오더니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제 양쪽에 딱 붙어서 어느 건물의 지하실로 끌고 가더니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면서 두들겨 패고 물고문을 했어요. 그 전까지는 ‘나만 착하게 살면 경찰서 갈 일이 뭐가 있겠어’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 고문을 당했거나 처벌을 받았다고 하면 ‘그래도 뭔가 죄가 있으니까 그런 일이 벌어졌겠지,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에게 그런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과학 책을 읽거나 친구들에게 물들어서 사회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회과학 책을 읽어본 적도 없고, 대학이 아닌 절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그런 친구들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을 직접 당해보면서 ‘우리 사회에 고문기관이 있는 한 언젠가 나도 그곳에 끌려갈 수 있구나’를 깨닫게 되었어요. ‘나만 안 가면 되지’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고문기관 자체가 없는 것이 우리 모두가 고문을 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는 길이에요. 이것이 제가 고문을 반대하고 고문기관 철폐를 찬성하는 이유입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지장보살님을 이해하게 되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되었어요. 지장보살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 중생은 모두 극락에 가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나쁜 짓을 많이 하고도 극락에 가기를 원해요. 그런데 지장보살님은 늘 선행을 하고도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옥에 가서 지옥 중생을 구제하기를 원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지옥에 한 중생이라도 남아있는 한 나는 부처를 이루지 않겠다’는 대원(大願)을 세우셨어요. 그 원(願)을 다시 이해해보면 ‘성불을 하더라도 마지막 한 중생까지 모두 구한 다음에 할 것이다, 만약 한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있다면 나의 소원인 성불의 길을 가기에 앞서 그 중생부터 먼저 구제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고문을 경험하면서 지장보살님이 중생 구제를 하겠다고 세우신 원(願)은 이러한 지옥을 없애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게 되었어요. 만약 지옥이 없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옥에 갈 일은 없을 거잖아요. 그러니 지옥은 그대로 두고 ‘나만 잘해서 천당 가면 된다’가 아니라 지옥을 없애버리면 그 누구도 지옥에 갈 일이 없어지잖아요.
우리는 죄를 짓고도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데, 죄를 짓지 않고도 중생 구제를 위해 지옥에 가겠다고 원(願)을 세우는 모습이 바로 지장보살님과 중생의 차이점입니다. 그 분이 그렇게 지옥에 가서 모두를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우시는 것은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만 아니면 된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 처한 입장이 언젠가 내 처지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자타(自他)를 일체로 보는 마음에서 그러한 사상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저도 지장보살님에 대해 배울 때 그 분이 훌륭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경험적으로는 알 수 없었는데, 고문을 당하면서 지장보살님이 세우신 원(願)에 대해서도 깊은 체험적 이해가 생겼어요.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 우선 내가 화는 나지 않습니다. 화가 나지 않는 것과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가령 어린 아이가 가게 옆을 지나다가 너무 먹고 싶어서 빵을 훔쳤다거나, 자전거 가게 옆을 지나가다 자전거를 너무 타보고 싶어서 자전거를 훔쳤다거나, 청소년이 오토바이가 너무 타보고 싶어서 오토바이를 훔쳐서 탔다면 어린 아이나 학생의 입장에서 그 상황이 이해는 되지만 잘못된 행동이잖아요. 그럴 때 ‘아이고 얼마나 타고 싶어서 그랬을까’하고 내버려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심정이 이해되지만 잘못은 잘못이라고 깨우쳐주어야 합니까?”
“깨우쳐주어야 합니다.”
“그래요. 그러니 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는 하되, 현재 하는 행동이 옳지 않다면 다시는 그 옳지 않은 행동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각자 다를 수 있어요. 작게는 댓글을 달거나, 관련된 글을 써서 알리거나, 관련된 모임에 나가서 활동을 하는 등 각자가 형편에 맞게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을 해야지, 화를 내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면 댓글을 달 때에도 하고자 하는 말을 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을 하게 되고 하고자 하는 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현장에 나가서도 화를 내면 돌멩이를 들거나 나무토막을 들어서 싸우게 돼요. 그렇게 싸워서 전경들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도, 결국 피해를 입는 전경들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아들들입니다. 그 전경 속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장관의 아들이 있을까요? 재벌의 아들이 있을까요? 전경들도 모두 우리 같은 서민들의 아들이에요. 화를 내고 싸워봐야 결국은 내 형제를 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과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다른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화를 내는 것은 단지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심리 현상이지 문제 해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상대방을 이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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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법은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라는 것이지, 상대방의 행동이 온당하다는 말씀이 아니에요. 상대방의 처지를 알면 화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행동으로 옮기면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돼요. 그러니 화가 아닌 자비심으로, ‘저렇게 하면 저 분에게 나쁘겠구나’하는 자비심으로 상대에게 알려주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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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의해서 행동할 수도 있고 자비심으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중생은 분노에 의한 행동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분노가 아닌 자비심으로 행동할 시대입니다. 방치하거나 그렇다고 분노에 의한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 자비심에 기초해서 개선할 부분을 개선해 나가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스님은 그게 항상 되나요?”하고 묻는 사람들도 있어요. 물론 저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목표를 정해두고 노력을 해야지요.”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어요. 저의 좌우명도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입니다. 되든 안되든 해야하는 일을 하는것,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 그래서 저는 슬픔속에서도 기쁨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