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기생충,
BTS가 부르는 몇가지 사념
김성렬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대박을 터뜨리면서 우리 한국인들은 요즘 ‘국뽕’에 푸~욱 빠졌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의 주요상을 휩쓸고 BTS가 빌보드의 1위를 십 주 간이나 차지하는 판이니 우리가 소프트파워 강국의 자부심을 한껏 즐겨도 지나치다 할 일은 아닐 것 같다. 영국 유명일간지인 더 타임스나 파이낸셜 타임스 등이 한국문화콘텐츠의 세계적 부상을 거듭 다루는 것을 보면 한류가 이제 그야말로 세계적 ‘대세’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한국이 1990년대 말 이후 문화콘텐츠의 중요성에 진작 주목하고 국가적 지원을 투입한 선견지명을 예찬하고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피 속의 뜨거운 그 무엇이 마침내 깨어났다는 것이다.
나는 한류가 이처럼 부상하게 된 첫 번째 원인으로 우리 한국인들의 피 속에 숨어있던 ‘끼’를 들고 싶다. 한국인들이 잘 놀고 잘 마시는 ‘끼’를 가졌다는 것은 약 1,800년 전의 중국인들에게 진작 눈에 띈 자질이다. 서기 3세기경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동이東夷들이 음주가무에 뛰어나다고 기록한다. BTS뿐만 아니라 요즘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을 보면 노래 부르고 춤추는, 특히 그 춤추는 동작이 신기에 가까울 지경이다. 동네마다 자리잡고 있는 노래방이 이런 노래와 춤꾼의 배출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고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동이의 후예들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인물들도 잘 생겼다. 한국인들이 잘 생겼다는 것은 흥미롭게도 외국인들이 지적하는 사실이다. 일찍이 1890년대의 우리나라를 기록한 이자벨라 비숍은 그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한국인들은 확실히 잘생긴 종족이라 평했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근래의 설문에서도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특징으로 잘생긴 외모를 꼽았다.* 잘생기고 잘 놀고 잘 마시는 자질은 명리학을 참고하면 도화살에 해당한다. 도화살을 가지면 예전에는 기생이 되거나 화류계로 나간다 하여 꺼렸으나 요즘의 해석은 이것이 있으면 외모도 남다르고 끼가 넘치는지라 문화예술계 종사자의 기질로 본다. 잘 놀고 잘 마신다 했지만 이것은 달리 말해 네델란드의 문화학자 호이징하가 그의 저서 『호모루덴스』에서 밝힌, 모든 문화예술의 근원 동력인 ‘유희의 정신’이 뛰어남을 이름이다.
한국인들은 유희 정신이 남다르고 그걸 즐긴다는 것인데―그래서인가, 공교롭게도 〈오징어게임의 주된 소재는 한국의 놀이들이다(^^) ― 실상 놀이의 근본은 자유로움의 지향에 있다. 니체가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를 예찬한 것은 이 신격이 가진 자유로움의 추구와 그로부터 발현하는 풍요로운 창조력 때문이었다.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놀이는 또한 누구나 억압 없이 평등한 대동 세상의 실현을 꿈꾸는 것이니 우리 한국인들이 풍부하게 소유한 놀이의 DNA는 결국 우리의 몸 어딘가에 새겨진 자유와 평등 추구의 정신에 다를 바가 아니다. 예로부터 민속학자들은 우리 한국인들을 ‘신명’ 또는 ‘신’이 많은 민족이라 규정하고 우리의 농악이나 강강수월래에서 그 신명과 대동의 정신을 증거하곤 했는데 이러한 규정 또한 유희를 즐기는 한국인, 자유와 평등을 생래적으로 추구하는 한국인을 증명하는 또 다른 고찰 방식의 하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 이러한 놀이의 정신을 한껏 꽃피울 수 있는 시대적 난장을 만났다. 헐리우드 산이 아니라도, 백인 주인공이 아니라도, 재미있고 좋은 것은 세계적 확산을 가능케 한 인터넷 환경이 그것이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한국인의 자유로운 영혼은 마침내 그 영혼에 어울리는 멋진 놀이터를 만난 것이다. BTS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유튜브 덕분이고, 그들의 자유로운 영혼과 놀이의 정신은 ‘Permission to Dance’에 유감없이 드러난다. 음악과 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그들의 노랫말은 우리가 음주가무를 즐긴 동이족의 후예임을 명료하게 증거한다.
〈오징어 게임〉이나 〈기생충〉 등 서사를 기본으로 하는 이들 영상물은 우리 문학/문화의 저류에 흐르는 도도한 전통이 때를 만나 갑자기 분출한 것이라 본다. 그 도도한 전통을 나는 리얼리즘과 풍자의 정신에서 찾는다.
이 두 영화는 모두 오늘의 세계가 처한 양극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기생충〉의 기택이나 〈오징어 게임〉(이하 〈오징어〉)의 기훈이나 모두 서민층이다. 자신들의 무능 탓도 크지만 그러나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는 이들의 입지를 더 좁히고 가진 자들의 부를 더 늘린다. 〈기생충〉의 대저택 지하에 근세가 은신(기생)하고 사는 것, 〈오징어〉에 생존을 위해 경쟁에 목을 건 낙오자들과 그 게임을 즐기는 부호들이 있다는 설정은 빈부의 양극화에 대한 날카로운 반영임과 동시에 부조리한 세태뿐만 아니라 부자들의 불량한 양심 또는 인간 일반에 자리한 자기중심적 욕망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이러한 문제 현실의 재현과 그에 대한 풍자는 실로 우리 문화/문학의 DNA요 저력이었다. 생각해 보라. 허균의 『홍길동전』이 그랬고 마당판에서 벌어진 우리의 탈춤, 판소리가 그랬다. 홍길동은 호형호제를 허용 않는 당시의 신분 차별을 비판했고 판소리와 탈춤은 민중의 정서를 기반으로 가식적인 양반, 땡땡이 중, 권력층을 신랄하게 조롱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일제 강점기로 이어져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로써 저항하는 문학으로 이어진다. 일제 강점기의 우리 문학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현실에 비판적이며 그 현실을 개선코자 하는 리얼리즘 문학이 주류를 이룬다.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최서해, 나도향, 채만식, 강경희 등은 모두 리얼리즘을 그들의 표현방식으로 삼았고 채만식은 그 중에서도 풍자의 정수를 보여준 작가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서울 시내의 긴 계단을 미장센으로 활용한 봉준호 감독은 자본주의에 침윤되기 시작한 경성의 실상을 롱샷으로 묘사한 『천변풍경』의 작가 박태원의 외손자이다. 봉준호 감독은 갑자기 우리 문화사에 돌출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전통은 면면하였다. 1950년대에는 손창섭, 장용학, 서기원 등이 전후의 혼돈스런 현실을 재현, 비판하는 리얼리즘 전통을 이었고 1960년대 이후로는 최인훈, 박경리, 박완서, 황석영 등의 대가들이 산업화의 명암을 리얼리즘 정신으로 반영하고 당대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 풍자였다. 1990년대 이후로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 메스를 들이댈 자격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자의식이 발동하여 문학판에서는 그 정신이 다소 약화되었는데 이제 우리의 영화, 드라마―대중문화들이 그러한 DNA를 계승한 격이다. 대중문화인만큼 작가나 제작자들이 우리의 핏줄 속에 숨은 DNA를 자의식 없이 과감하게 살릴 수 있었던 점, 세계적으로는 대중문화에 희박했던 현실 비판적인 풍자의 정신을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첨예하게 부각시킨 데서 오늘날 우리의 영상 장르들이 드높은 환호를 받는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이번에 〈오징어 게임〉이 터뜨린 ‘세계적 대박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지적이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미국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오징어〉의 폭력성에 물들지 않도록 유의해달라는 학부모 청원이 있었다던지, 유럽에서도 그러한 사례는 제법 있었다고 한다. 특히 독일의 〈슈테른〉지 9월 26일자 기사는 “이 K-드라마(오징어 게임)는 향수와 사회비판, 사회적 실험과 호러 무비의 경계 사이를 오가고 있으며, 주저하지 않고 끔찍한 장면을 보여준다”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오징어〉의 폭력성을 강하게 경고했다 한다.* 물론 할리우드의 폭력물들은 이보다 더 잔혹한 영상들도 내놓지만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영화의 잔혹성은 우리의 자의식을 요한다. 〈올드 보이〉로 시작하여 흥행몰이를 한 박찬욱의 영화들은 흔히 복수 3부작으로 불리거니와 실상〈오징어 게임〉 뿐 아니라 〈기생충〉도 작품의 밑바닥에는 복수심이 깔려있다. 약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와 멸시를 행하는 강자들에 대한 복수심이 그것이다. 우리의 복수심은 어제 오늘의 연원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륙을 장악한 몽골, 명, 청 그리고 우리를 수시로 침략하고 마침내 강점한 일제뿐 아니라 우리 민족 내/외부의 쟁투로 인한 국토 분단 등 그 연원은 깊다. 우리는 이것을 ‘한’이라 일러 왔지만 그러나 이것은 니체가 이른 르상티망, 즉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복수의 격정과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 단지 이러한 격정이 스스로의 긍정적 의지로 전화되어 자신과 타자의 공존을 위한 상생의 에너지로 체화될 때 그것은 박경리 선생이 이른―서운함, 괴로움, 복수심과는 다른 ‘생산적 의미의 한’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콘텐츠가 세계를 감동케 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그러나 복수를 넘어―헐리우드를 뺨치는 잔혹한 폭력적 영상을 넘어, BTS가 이미 일부 실현하고 있듯이 우리 한국인이 사랑하는 평화와 조화, 상생의 정신을 세계에 널리 전하는 것은 우리 문화콘텐츠가 유념할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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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현·홍성태, 「외국인들이 본 한국, 한국인, 그리고 한국 제품」, Trade Focus, Vol.12, No.58,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 2013, 45/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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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래, 「‘오징어 게임’ 축배는 충분하다, 이제 할 말을 하자」, 『오마이뉴스』, 21.10.22 일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