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옛 대천고등학교 자리에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보령도서관이 있다.
고향에 내려와 보령시에서 운영하는 중앙도서관과 이곳에서 필요한 도서를 대여하여 읽고 있는데,
도서관 한켠에 '유정 사명대사 기적비'가 세워져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였다.
기적비(紀跡碑)라 함은 '사적을 적은 비'로 사적비(事跡碑)와 비슷한 말로 '역사적, 사실적인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한 비'라 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으로 지대한 공을 세운
사명대사가 우리 고향과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살펴보게 되었다.
사명당(四溟堂)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속명은 응규(應奎)이며 성씨는 풍천임씨(豊川任氏)이다.
1544년(중종39)에 태어나서 1610년 입적을 하였는데, 1559년 김천의 직지사로 출가를 하고
1581년 보현사의 휴정 서산대사를 찾아가 수행을 하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휴정과 함께 승병으로
참여하여 평양성 탈환작전에 가담하였고, 수 많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604년 왜와의 담판을
위해 조정의 사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1605년 왜국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인 3,000여명을
데리고 귀국을 하는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조선이 왜의 침입으로 국가의 존망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한 시기에 승려로써 의병과 함께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사명대사가 보령과
관련이 있다면 자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크게 미흡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설이 정설로
되려면 많은 자료를 확인하는 연구의 과정이 필요하니 그것은 후대들의 몫이다.
여기서 보령문화연구회의 보령문화14집에 발표한 '사명당의 보령관련설( 임근혁,120~133쪽)'과,
보령문화15집 '사명대사 보령 관련설의 재검토(황의천, 142~160쪽)을 참조하여 비교 해 보기로 한다.
2. 두 설의 비교
0. 사명당의 보령 관련설
1) 관음사 ; 웅천읍 수부리 가늠자골에 있는 관음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옛 이름이 신흥사이며
창건문을 보면 신라시대 세워진 고찰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1948년 작은 절을 다시 짓고 신흥사
(新興寺)라 하고,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화상을 모셔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1965년 절 이름을 관음사로 바꾸었는데 그 전까지 이 절을 사명당절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먼 옛날
이곳에서 사명당이 머물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관련기록들 중에는 신흥사 중창을 위한 권선문(1949.1) 중에 '玉馬之南 觀音洞 新興寺는 新羅 元曉大師
創建遺址오며 麗季 指空和尙이 修練한 處이요, 李朝 四溟大師의 圓覺寺이옵드니' 에서 '李朝 四溟大師의
圓覺寺'에 의미를 두고 있으며, 보령군지(1991년)에 관음사는 '창건연대 미상이나 조선시대 사명대사가
수도하였던 사찰로 전해온다.'고 기록하고 있다.
2) 풍천임씨(豊川任氏) 족보와 사명당 ; 풍천임씨 족보에 의하면 사명당은 풍천임씨 제12세손으로 그의
고조인 임향(任珦)의 묘가 웅천읍 평리 동막동에 있다. 임향은 고려조정에서 벼슬을 하던 중 홍주로
유배 되었다가 남포현 오상동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임향의 아들이자 사면당의 증조인 임효곤은
그 때 밀양으로 유배되어 그쪽에 후손들이 퍼지게 되는데, 이 때 사명당이 밀양에서 태어나게 된다.
임향의 다른 후손들은 웅천,주산, 미산지역에 대를 이어 세거하게 되었고, 이에따라서 사명당은
자신의 고조부(임향) 산소가 있는 웅천을 다녀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3) 구전(口傳) ; 웅천읍 수부리 근처 지역민들은 사명당의 보령 방문설을 뒷받침하는 구전(口傳)들이
증언하며, 사명당의 어록집에서 '在竹島有一儒老譏山僧不得停息以拙謝之'에서 나타난 '竹島'를
월전리의 죽도로 보고 사명당이 고조 임향의 유배지를 찾아 본 흔적으로 추측하였다.
4) 필자는 맺는말; 왜 사명당의 이야기가 웅천지역에 구전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으로 사명당의
행적을 쫒아 보았지만, 유림이 아닌 속세를 떠난 불승의 흔적을 찾기엔 역부족을 느끼며, 사면당이
우리지역과 관련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나타내고 있다고 평하였다.
0. '사명대사 보령 관련설의 재검토설
1) 사명당의 임향의 현손(玄孫)설에 대하여 ; 사명당의 행장에서 부는 임수성, 조부는 임종원,
증조부는 임효곤으로 기록 되어 있으나, 고조부는 명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풍천임씨 족보에는
사명당의 고조부가 임향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사명당 계열의 조상이 생몰연대가 기록되지 않아
한 세대가 보통 20~30년이 되어야 하는데 1세대의 차이가 40년이 넘는 기현상이 나타나 신빙성이
결여된다. 또한 문중 내 종횡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항렬자의 사용이 사명당 계열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2) 임향의 묘비 검토 ; 임향의 묘비에 장자 안길계열의 후손들은 나열 되어 있지만, 차자이며 사명당의
증조부인 효곤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았음은 임향의 후손이 아니라는 물증이 된다.
3) 사명당의 행장 ; 사명당의 행장에서 고조의 이름이 명기되지 않고,풍천의 망족(望族)이란 말이 쓰여
있는데, 과연 남포현 임향의 고손자라면 망족이란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사명당의 행장이 쓰일
때에는 남포의 임씨들은 본관을 남포임씨 또는 고구임씨로 불리워지고 있었다. 이들이 풍천임씨로
본관을 바꾼 것은 1636년이고 1797년에 가서야 임자송 임자순파와 함께 대동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불조원류사명원류록(佛祖原流四溟原流錄)에 의하면 '사명대사는 서하군 임자송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으니 사명당의 계보는 임향의 아버지 자순의 계보(仲派)가 아니라 큰아버지 자승의 계보(伯派) 의
인물이다.
4) 사명당의 보령 관련성에 대하여 ; 권선문과 창건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1949년에 풍천임씨 문중
인물인 임덕호씨가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명당의 속성이 풍천임씨인 것에 착안하여 절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명대사와 원각사라는 명칭이 옛 지도나 문헌상에 나타나지 않고 사명대사가 보령을
다녀갔다는 증거가 없다.
5) 필자는 사명당의 보련 관련설은 대사의 속성이 풍천임씨라는 것과 족보에 임향의 현손으로 기록된
것에서 출발하여 보령지역 풍천임씨 정승공파 문중에서 지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과정에서 이루워진
것으로 연구에 의해 명백히 밝혀질 때 그때서야 신빙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평하였다.
0. 두 설에 대한 평가
1) '역사 왜곡'이란 사전적 의미에서 '역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해석 하거나 거짓으로 지어 쓰는
일'을 말한다.
작금에 중국에서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 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임나 일본부설' 등은 대표적인
역사왜곡이라 볼 수 있는데,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는 시간적으로 차이가 많아 그 시대를 알기
위한 노력이 한층 더 필요하다.
역사적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가설을 세우고 그 증거되는 자료를 수집하여 진실을 밝히는 경우도 있다.
가설은 전래되는 전설이나 신화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그것에서 타당성 있는 증거에 의해서만 역사로
옮겨질 수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이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기록에 의한
자료와 발굴에 의한 물적 자료 등에 근거하여 밝혀지는 것이다.
사명당이 보령에 들렀거나 수도를 하였다는 전설 또한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밑받침이 되는
자료들의 발굴이 시급하다. 사명당이 불가에 입적을 하여 수행을 하면서 전국의 유명사찰들을 들러
보았을 터이고, 성주사나 무량사, 동학사,갑사 등 부근에 유명사찰이 많은 보령에 아니 들렀다 할
수도 없다. 더군다나 세속의 종씨들이 모여사는 남포에 들렀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할 수 없다.
비록 풍천임씨 가문의 영광을 위해 후대에 작성 된 보학(譜學, 족보학) 에 의한 계보로 증거하거나
후대의 기록으로 성인화를 하였다고 하여도 분명한 것은 사명당은 임진왜란 당시에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역활을 한 인물임은 틀림이 없다.
보령지역과의 관련설 보다는 승려로써 풍전등화와 같은 위험속의 백성들을 구한 큰 스님으로 모두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인식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위치 ; 보령시 명천동 430-12 보령도서관 경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