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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참변의 실상
(육군사관학교 독립군 장군 흉상 이전에 관한 소견)
최근 육군사관학교는 교내에 있는 김좌진, 홍범도, 이회영, 이범석 등 5명의 독립군 장군과 독립운동가의 흉상을 이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육사는 "교내에는 학교 정체성과 설립 취지를 구현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 동맹의 가치와 의의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기념물 재정비 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를 반대, 규탄하는 단체들은 문재인 정부 지우기를 하려다가 우리 국군의 정통성을 뿌리채 뒤흔드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했다. 또 "보훈부 승격 이후 행보가 우려스럽다. 본연의 역할보다 가짜 유공자 서훈 박탈 논란, 백선엽 장군의 친일 행적 삭제, 홍범도 장군의 서훈을 문제 삼더니 이제는 독립전쟁의 역사까지 부정한다는 의심이 든다"며 윤석열 정부와 보훈부를 비판했다.
육군사관학교는 다시 한번 홍범도의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흉상들을 철거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런 과정에서도 홍범도를 제외한, 공산주의자로 보기 어려운 나머지 4인의 흉상들까지 철거하는 이유는 끝까지 밝히지 않아 추가로 논란이 되었다.
흉상의 다섯 인물 중 공산주의 경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은 홍범도 정도이나, 이마저도 홍범도의 일생과 역사적 평가들을 놓고 보면 단순히 공산주의 경력이 있다 수준이지 이종섭 국방장관이 문제 삼은 공산주의 세력 부역 논란에는 일절 맞지도 않은 엄청난 폄훼다. 홍범도는 광복 이전인 1943년에 별세해서 김일성의 북한 정권에 직접 가담 내지 동조할 일이 아예 없었다. 이 점에서 의열단, 한국광복군 출신이나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주로 비교 대상이 되었던 김원봉과는 사례가 다르다.
따라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공산주의와 연합했는지를 두고 위인을 재단하는 것은 매우 편협한 관점이며, 정 따지려거든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 했는가 혹은 북한 정권에 협력했는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옳다. 1945년 이전에는 자유민주주의 열강이라는 미국과 영국조차 전체주의 독재국가인 소련과 연합국을 결성하여 함께 전쟁을 치른 전례도 있다.
홍범도 장군은 간도의 대한의용군 상해파 지휘관이었으나 러시아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전환하여 러시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지원하는 이르쿠츠크파(자유대대)와 제휴하였으며, 코민테른의 지휘를 받기로 한 것은 사실이다.
또 자유시 참변의 군사재판의 재판위원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반일의 전쟁 당사국이고,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발족하기도 전이었다.
결론으로 말하면, 이번 육사의 흉상 이전 발의는 당사자들이 섣부르고 역사에 대하여 무식한 소이연에서 비롯하였다고 생각된다.
‘自由市 事變’, ‘黑河事變’, ‘아무르慘變’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혁명 이전 알렉세예프스크로 불리다가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을 지닌 스보보드니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그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 자유시 부근에는 아무르강(흑룡강)의 지류인 제야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흑하사변’이라는 용어가 나온 듯하다.
‘참변’이라는 용어는 자유시 부근의 수라젭카에서 일어난 무장 충돌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고 붙여진 용어이다. 지금은 대체로 자유시 사변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현재 7차 교육과정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모두 ‘자유시 참변’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의 상황〕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승리에는 파르티잔이라고 불리는 자발적인 민중들의 무장 부대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능숙한 민중 선동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는 민중의 무장 부대를 그들 편에 흡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무장 부대도 결국은 볼셰비키들의 민족해방 운동의 지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해방의 메시지에 혹하여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베리아 내전 시기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서 일본군과 싸웠던 러시아지역 한인 빨치산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즉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들이 시베리아 내전 시기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분적이었다.
〔간도 무장 독립군의 상황〕
1920년대 초 간도에서 활동하던 비교적 규모가 큰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 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했다. 독립군의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니까 간도 지역 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일본군의 공격과 근거지 초토화 및 보급 문제 등으로 군대 유지가 불가능해서 이미 해산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로 갈 준비를 위해 재집결을 한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사 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간도 독립군들이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오자,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 혁명군은 몰려오는 한국 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 아무르 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 부대를 즉각 무장 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취할 수 있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와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의 명령문이다. 그리고 이미 현재 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할 거면 여기로 오지 말고 만주로 가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일부 한국 독립군들은 제2군을 무시하고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의 위기라서 타 국가의 영토에 이동하는 처지이면서 일부 독립군은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시베리아 극동에 들어가려 했다.
이런 실랑이 끝에 결국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그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 받았다.
이렇게 들어온 독립군들에 대한 관리를 맡은 것은 원래 상해파였다. 이유는 상해파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의 한인부를 통해 극동 공화국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한 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시로 이동해 온 간도 독립군 상당수는 이전 재러 한인 독립군과 함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로 들어갔다.
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부대인 이만군대· 다반군대· 니항군대 ·자유대대· 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인데 이 중 니항 부대가 극동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반면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 참고로 대한의용군은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이다.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일면식도 없는 다른 군대 장교의 지휘를 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 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 만 지휘를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1921년 1월 설치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4월부로 러시아의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았다. 이러한 결정권자의 변화로 인해 한인 부대 관련 정책이 일부 바뀌면서 상황은 더욱 혼란해지게 된다.
1921년 3월,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정 의회를 조직하고 자신들 산하의 자유대대(고려혁명군)를 중심으로 한인 부대들을 통합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의 제휴를 통해 시행된 것이었다. 이후 극동비서부가 동방정책 결정권을 가지게 되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만 믿고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고 있던 상해파와 사할린부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러니 당연히 부대 통합 문제로 둘 간에 갈등이 심해졌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21년 5월에 각각 독자적인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하며, 대한국민의회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한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대강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 상해파 | 이르쿠츠크파 |
기반 단체 | 한인사회당 | 대한국민의회 |
무장 조직 |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 자유대대(고려혁명군) |
후원 세력 |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
한인 부대 통합기구 | 전한군사위원회 | 고려혁명군정의회 |
이런 상황을 거치며 당시 한인 부대들은 자연스럽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전한군사위원회 관할의 사할린부대 병력을 총 1,770명,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의 고려혁명군은 1,972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참고로 홍범도 부대는 원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소속이었다가 나중에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는데, 이 때문에 둘 사이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서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상황은 타민족 무장 독립부대를 받아들인 극동공화국 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간의 주도권 갈등이 거세지면서 사안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때 홍범도와 최진동 그리고 안무 부대가 전체 한인부대의 통합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에 힘을 실어주자 대한의용군의 상해파가 북간도로 회귀한다고 결정했다.
무장 독립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 했는데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었다. 현지 농민들에겐 무장 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할린부대는 현지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했다. 마자노프에서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립군들은 식량과 물자 조달을 위해 극동공화국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고, 이로 인하여 현지 농민과의 대립이 극에 치달았다. 현지 극동공화국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을 약탈해가는 무장 독립군에게 분노하며 현지 간부들에게 호소와 항의를 했고,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서 독립군과 현지 극동공화국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자체 식량이나 둔전 없이 이곳으로 온 독립군이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과 비우호적인 상태로 현지에 계속 주둔한다면 당연히 굶주림에 의한 약탈과 이에 따른 갈등이 쌓일 수밖에 없다. 독립군이 약탈을 안 하면 러시아 극동의 영토에서 어떻게 식량을 조달하는가?
〔사할린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해제〕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극동 공화국에서는 칼란다리쉬빌리를 파견했다.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5월 자유대대 및 현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사할린부대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칼란다리시빌리는 조선군사혁명협의회 의장과 한인부대 총사령관 직에 임명되어(하묵은 부총사령관이 되었다) 5 월 19 일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합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야심에 찬 칼란다리시빌리는 신뢰할 만한 이르쿠츠크 연대에 의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반혁명주의자들'로 신속하게 처리해버렸다.
블라고베쉔스크 인근 수라줴프카 마을에서 조지아 '권력층'의 지휘하에 만행된 이 사건으로 피살, 익사, 실종된 반란군은 400명 미만,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군' 표시를 달고 러시아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간 반란군은 900 명에 달했다. 또한 수백 명의 유격대원이 사망했다.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군대 병사들이었음으로 사망자 중 간도독립군이 대부분인 것은 맞는데 그 간도독립군인 허재욱의 의군부는 정작 전체 간도 독립군 중에서는 소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대부분 간도 독립군은 이미 수라젭카에 없었다. 상술된 대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대다수가 이미 자유대대 쪽으로 합류한 뒤였기 때문이다.
임시군정의회는 계속해서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 6월 6일 깔란다리쉬빌리가 까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깔란다리쉬빌리였고,두 명의 위원은 최고려와 유동열이었다. 극동비서부에서 전권위원으로 오홀라가 동행했다. 그는 슈먀츠끼로부터 극동공화국 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았다. 이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들은 군정의회를 중심으로한 통합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홍범도와 안무, 최진동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高麗革命軍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 간도로부터 이동해 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했다. 이는 곧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군정의회는 통합에 있어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쥘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동휘 및 한인부와 관계를 맺으며 자유시로 온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 보고서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 등이 자유시 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 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무엇보다 단일한 조직과 규율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통합은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하는‘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자기들은 “軍政議會의 本部와 某軍隊 駐屯地相距가 一百七八十里 되난지라 食料 及 諸般 供給에 對하야 運搬上 不便이 莫大함으로 該 軍隊를 軍政議會 近接 村落으로 移屯하라”는 군정의회의 명령이 정당함을 양해하고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간도에서 옮겨온 무장 부대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것은 ‘무장 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 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까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의 무장 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 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또한 마자노프에 있던 사할린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까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 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2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상해파 부대는 무장해제되었지만 현지의 관료들과 군인들에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무장해제 계획을 주도했던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상해파 부대에게 감동을 받아 무장해제를 반대하고, 무기를 돌려주기까지 한 것이다. 그 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와 재무장한 한인 유격대는 주둔지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므로 현지의 군인, 관료, 농민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칼란다리쉬빌리는 한국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부대를 가졌다. 그는 한국 민족의 팔자를 무겁게 이해하고 있었다. 네스토르는 고국 해방에 대한 한국인 전투원들의 소중한 꿈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선 흔히 독립군과 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만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현지의 관료, 군인, 주민들에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러시아 공산당의 급진파와 한인 독립군 모두가 재앙이었고, 그들을 지원한 레닌의 모스크바 정부에 항의했다.
〔군사재판과 '11월 결정서'〕
수라젭카의 진압으로 대한의용군(사할린대대) 소속 병사 약 864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르쿠츠크파의 주도로 이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이루어졌는데, 홍범도가 이때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며, 당시 발표된 상해파 규탄 성명도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27명의 명의로 되어있다.
하지만 홍범도, 최진동 등은 이후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이르쿠츠크파를 살인자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간도 독립군들은 사태 무마를 위해 이르쿠츠크파가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에서는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동휘가 1921년 11월 직접 블라디미르 레닌과 면담하여 '11월 결정서'를 도출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했다. '11월 결정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제1항에서 코민테른 국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편파적으로 원조해 충돌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또한 양파 동수로 연합 간부를 구성할 것과 상해파 인사 80여 명을 석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두 고려공산당의 각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참고로 이후에 발표된 '4월 결정서'에서도 모스크바는 상해파에 유리한 결정을 내려줬다.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
자유시 사변 이후 사건으로 중국군에 의한 김좌진 계열 군대 무장해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김좌진 계열이 김규식의 군대가 러시아 농민 4인을 총살한 사건으로 무장해제당할 처지에 놓이자 목능 현으로 도망갔다가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당한 사건이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규식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부대원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넘어갔다. 김규식은 연해주해방전쟁이 끝나가던 1922년 11월 15일경 수이푼 재피거우에서 부하 군인이 러시아인 4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적군의 반감을 사서 무장해제를 강제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부하 군인을 이끌고 서간도 안도현 방면으로 출발했다. 이 사건에 대해 김규면은 “김규식은 로씨야 농민 네 사람을 총살하면서 성명하기를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고 하고 그 즉시로 군대를 다리고 중국 땅으로 넘어서 도주하였다”고 적고 있다. 老兵 金規勉 備忘錄 ,앞의 책,180쪽.)
일본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김규식은 곧 김좌진과 합류하여 중국 목능현 八站(馬橋河)에 도착했다고 한다. 김좌진이 김규식부대에 합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김규식이 원래 軍政署軍의 장교였던 점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김좌진과 연계하여 활동하려 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이 부대는 이곳에서 중국 군대에게 강제로 무장을 해제당한 채 해산되고 만다.
즉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金佐鎭과 金圭植이 이끄는 약 400명의 부대가 1922년 12월 상순 露領 松田關으로부터 서간도로 이동할 목적으로 穆陵縣 八站子 부근을 통과할 때 그 지역 中國 保衛團이 그들을 억류하였다. 며칠 후 하얼빈 방면에서 도착한 중국군 부대로부터 다시 무장해제 명령을 받았는데 김좌진 등은 무장해제 면제와 중국령에서의 행동을 묵인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중국군대는 보위단에 편입하여 국경경비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채용할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시킨다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보위단에 입단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없어 마침내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 전부를 인도했다는 것이다. 이때 인도된 무기의 수량은 장총 약 400정, 권총 30정, 폭탄 약 300개, 기관총 3정, 군도 30본, 소총탄 약 1만 6천 발, 기관총탄 약 1만발 이었다고 한다.
무기 인도 후 김좌진은 부하 전원을 한 곳에 집합시켜 “露支領 어디에서도 무장 행위를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추세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금후의 행동은 각자의 자유에 맡긴다. 그럼에도 종래의 행동을 돌아보아 고향으로 귀향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최근 조직된 연해주한족노동회에 입회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는 것이 가하다. 또한 장래 기회가 있을 때 결속하여 국사에 분주할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고별사를 하였다.
해산된 군인 약 400명 중 250명은 연해주노동회 혹은 추풍 지방에서 농업 기타에 종사하고 약 50명은 목릉현 八面通 지방에 들어가 농가에 고용이 되고, 약 100명은 간도 지방의 家鄕으로 귀환하여 생업에 나섰으며, 12월 중순 삼삼오오 흩어진 김좌진과 김규식 기타 중요한 간부는 연해주노동회에 들어간다고 하며 노령으로 향했다고 한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부대를 이끌고 중국령으로 달아났다가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오해와 진실〕
자유시 참변으로 960여 명이 희생당했다, 무장 항일운동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사살되었다, 김구가 반공 성향을 가는 원인이 되었다, 홍범도가 '독립군 몰살'의 가해자다 등의 설이 난무한 것이 사실이다.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했다는 출처 불명의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최소 36명이다. 이건 우파 성향의 역사학자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사상자를 수십 명 단위로 본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사망자 272명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 사전의 참고문헌은 모두 2010년대 이전 과거 학설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첫 참고문헌의 경우 자유시참변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서술의 실질적인 근거가 없다고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서일, 김좌진 등 국경에서 돌아간 부대들은 애초에 자유시에 가지 않았으니 자유시 참변으로 타격을 입을 일이 없었고, 자유시에 갔던 부대들 역시 상술한 대로 홍범도, 지청천 등 대다수는 참변 이전에 이미 러시아 측에 협조하고 있어서 별로 타격을 입을 일이 없었다. 강제 무장해제를 당한 부대는 주로 허재욱의 의군부인데 이들도 수십 명 수준의 피해 만 입었다.
극동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년 7월 16-19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 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고 전했다. “충돌로 인해 부대 총인원 1026명 중 830명이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일부는 도주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한인 36명이 사망하고, 60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 실종자는 60명, 무장 해제된 자는 860명에 달했다.
게다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인 상해파의 일원이었던 계봉우 역시 후에 자신이 집필한 회고록인 <조선역사>에서 사망자가 36명이었다고 못 박았다. 이는 36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주는 주장이다.
‘상해시사변’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유념할 점은, 당시 사살된 사할린부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임시정부 명의로 설립, 운영된 군대는 그로부터 약 20년 후 창설된 광복군이고, 당시에는 광복군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시 참변은 사실상 한인 공산주의 양대 단체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vs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갈등과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사상자는 박 그리고리의 독립단 군과 허재욱의 의군부에서 많이 나왔으니, 적군(공산주의)에 가담한 한인(韓人) 독립군 간 서로 총을 겨누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라, 이 사건을 한인간 최초의 동족상잔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2017년 6월 9일, 자유시 시장과 아무르 주 부지사와 스보보드니 마을 주민, 홍범도 장군의 손녀가 참가한 가운데 자유시 참변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표지석엔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라고 쓰여있다. 위치는 스보보드니 외곽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있다.
한편 고려군정의회가 러시아의 극동공화국군, 즉 사실상 소련군을 끌어들인 이유에 말이 무성하다. 이 모든 것이 소련의 음모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는 등 소련을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참조문헌
*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 석사학위논문, 2007.
*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 나무위키. 자유시 참변; 한국 독립운동의 전투목록
첫댓글 하이고,
무슨 지랄로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땅에서 개지랄들인고.
지금 와서 언놈이 옳고 그른지 우예 아노...
쓰여진 역사에는 쓴이의 실존적 인생관, 세계관, 이데올로기 등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진정 "언놈이 옳고 그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결국 힘 있있는 자에 의해 옳고 그름이 좌우된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 뒤바뀌고 또 뒤바뀐다.
이에 역사를 왜 쓰느냐고 하면 '다시 쓰기 위해 쓴다'는 시니컬한 역사철학이 있다.
지금 도대체 우리 나이가 몇 살인가.
그런데도 우곡은, 힘 있는 자에 의해 자신의 생각이 좌우되지 않기 위해, 홍범도 장군에 관한 공부를 철저히 많이 했다.
편향이기 마련인 신문 쪼가리, 방송 쪼가리. 그것도 지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들으면서 지가 머를 확실하게 다 아능것처럼 단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꼴통'적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내가 낸데 하는 마음에서 더 찐한 꼴통들이 된다.
우리의 정신(spirit)은, 외부 힘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리지 않기 위해(꼴통이 되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정신이란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끊임없이 재점검하고, 끊임없이 공부하는 정신일 것이다.
우곡의 그러한 공부정신을 우리 모두가 본받고 존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