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경기도는 서울인 한양과 지방, 양반과 상사람의 문화를 소통시키고 화합시키면서 이 양자를 잘 버무려 스스로의 문화를 키워왔다. 경기도 문화의 정체성은 ‘소통과 화합’에 있다. 전통의 음악과 연희뿐만이 아니라 무속을 포함한 민속에서도 경기도의 문화가 소통의 문화, 화합의 문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사회적 분열과 구성원 간의 갈등을 풀어낼 묘책을 찾기 위해서는 경기도의 참모습을 재조명하고 확립하는 것이 급선무이라 하겠다. 이렇듯 경기도에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초석을 다지는 일은 경기도의 정신적 뿌리를 바로 찾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기나긴 여정의 첫 번째로 반구정을 찾았다. 반구정(伴鷗亭)은 조선 초 네 명의 임금을 섬긴 청백리 황희정승이 치사(致仕) 후에 갈매기와 벗하여 여생을 보냈다는 임진강변의 정자다. 반구정에 올라 황희정승이 앉았음직한 그 자리에서 분단의 철책을 짊어지고 부절히 흐르는 임진강을 보았다. 꼭 달팽이 같다. 저 짐을 덜어 줄 수 없음이 민망하여 임진강을 바로 볼 수가 없다. 그래도 임진강은 민족적 갈등을 지긋이 눈감고 서해 어디쯤에선가 한강과 만날 것이다. 만나서는 천수만도 거치고 기름범벅인 태안도 들르고 남해를 돌아 동해를 돌아 한반도 방방곡곡의 사연을 어루만질 것이다. 그쯤 나의 생각도 흐르다 개자리(방촌)마을 늙은 정승과 만났다.
황희(黃喜)는 공민왕 12년(1363년) 개성에서 판강릉부사인 황군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 되던 1376년 음직(蔭職)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고, 스물한 살에 사마시 합격하였으며, 스물 셋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스물일곱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한 것이 스물여덟이었다. 그러나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였다. 이에 고려의 유신으로 남기를 바란 의기로 뭉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었다. 조선 태조의 회유와 억압에도 의기를 꺾지 않고 미동도 없이 두문불출하던 72현은 두문동에서 황희만을 조선조정으로 보내었다. 이렇게 두문동의 고려유신들이 젊은 황희를 출사시킨 것은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굴원의 어부사 中>”란 어부의 말에 깨달음을 얻었던 굴원의 바로 그 마음이었던 것이리라.
본시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탓도 있겠으나 서른여덟의 나이까지 근 십년간은 면직과 복직을 거듭하면서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그러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능력이 인정되었고 병권을 국왕에게 귀속시키는 등의 공적을 쌓으면서 태종의 신임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였고 이에 폐서인이 되어 교하지방으로 유배된다(1418년). 그러나 다시 귀양지는 남원으로 옮겨졌다. 1422년(세종 4년) 복직되었으며 환갑의 나이에 강원도 관찰사로 민심을 수습하고 행정을 안정시켰으며, 64세 되던 해(1426년) 이조판서와 우의정, 이듬 해인 1427년에 좌의정에 올랐으나 그해 9월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반구정에 머물다, 1431년 69세에 영의정으로 나라의 부르심을 받는다. 이로부터 18년간(1449년까지)을 영의정으로 세종을 보필하였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으며 조선을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이렇듯 18년간이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관직에서 무탈할 수 있었던 것은 황희정승이 어질과 깨끗한 관리였으며, 원칙과 도덕을 중시하는 청백리였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황희정승이 오늘 날에도 국가적 지도자와 관리의 귀감이 되고 있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그 바탕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1382년 20세) 황희는 적성(현 파주시의 지명)에서 송경으로 가다가 밭을 가는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검정소와 누렁소 두 마리로 밭을 갈고 있었다. 노인이 쉬는 참을 빌어 황희는 노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노인장 어느 소가 밭을 잘 갑니까?” 그러자 노인이 황희의 귀에다 입을 대고는 “○○빛깔의 소가 낫고 아무 빛깔인 소가 못하오”하고 말하였다. 황희는 아니 왜 그런 말을 귀엣말로 하는가를 물었다. 노인은 “짐승이 비록 사람과 말을 통하지 않지만 사람의 말의 좋고 나쁨은 알아듣는다”고 말하였다. 이에 황희는 크게 깨달아 더욱 과묵하고 침착하며 신중하게 처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 속담에 ‘황희 정승네 치마 하나 가지고 세 어이딸이 입듯’이란 말이 있다. 이는 황희정승이 얼마나 청렴하게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황희정승이 초가에 살았고 비가 샐 정도의 누옥이었다는 이야기는 황희정승의 청렴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소 과장되게 전하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아무튼 황희정승이 청렴한 관리의 표상이었음을 입증하는 이야기들은 다수가 전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광대 바우쇠의 이야기가 있다.
세종대왕께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영남 ‘우미골’의 광대 바우쇠가 줄타기 묘기를 벌이던 도중에 허리에 맨 붉은 비단끈을 양쪽 엉덩이에 번갈아 갖다 대며 말하기를 “이로 말할 것 같으면 황희 정승 댁 속곳춤이라……” 하면서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묘기가 끝난 후 세종대왕께서 바우쇠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바우쇠가 대답하기를 “황정승 댁은 하도 가난해서 속곳 하나를 두고 하루는 마님께서 입고 나가시고, 다음날은 아가씨께서 입고 나가신다”고 하였다. 이에 이러한 속담이 생겨났다. 속담의 근거는 다음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황희정승의 딸이 시집을 가려는데 혼수가 없어 이를 세종께서 하사하셨다는 이야기도, 황희정승의 겨울관복이 한 벌이라 세종께서 관복을 하사하셨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편 황희정승의 부인은 ‘남근 목거리’를 하고 다녔다는 일화가 있다. 당상관 부인들의 모임에 다른 정승판서들의 부인들은 호사스러운 패물을 하고 나왔다. “나는 당신들과 같이 값나가는 보석은 없으나, 우리 집에서 제일가는 보물을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이다. 이게 우리 영감의 것하고 같은 크기인데 필요하면 빌려주겠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용재총화’에 전한다.
황희정승의 셋째 아들인 수신(守身)이 기생과 사귀어 관계를 끊지 못하자 어느 날 선생이 관복을 갖춰 입고 문밖까지 나와 아들을 맞이했다. 수신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그 까닭을 묻자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나도 너를 손님으로 알고 이렇게 맞이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수신은 이로부터 기생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황희정승은 청렴하였으며 도덕을 중시하는 분이셨다.
황희정승은 또한 인간평등을 몸소 실천한 인도주의자였다. 인권을 중시하여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신분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였다. 황희정승은 집에서 부리는 노비 가운데 학문에 자질을 보이는 자를 면천시키고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재물을 내리곤 그의 신분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게 했다고 한다. 후에 과거장에서 그 노비가 인사를 하자 모른 체 하였다. 그 뒤 그를 불러 “앞으로 절대 나를 아는 체 말라”고 호통하였다. 그의 출신이 알려져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배려에서였다. 한편 노비의 신분으로 정4품의 관직에 오른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을 등용시킨 것도 황희정승이었다.
다음의 일화들이 황희정승의 인간적 면면과 그 구체적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손님이 찾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 아이들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황희의 상투와 수염을 잡아당기고 상 위에 놓인 음식까지 마구 집어먹는 게 아닌가! 그런데 황희는 아이들을 나무라지 않고, “아이고, 이놈들 보게. 손님이 계시니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하는 것이다. 손님이 비꼬듯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하였다. 그러자 황희는 “아까 그 놈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다네.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이”하고 대답했다. 손님은 종의 자식까지 친부모처럼 자상한 그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복했다고 한다.
또 하루는 당대 명필 이석형이 황희의 집에 들렀는데, 황희가 책 한권을 꺼내며 새로 표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조금 후에 한 아이가 방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그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황희는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데 가서 옷을 갈아 입혀 달라고 하거라”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나가고 조금 있다가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를 죄를 청하였다. 오줌을 싼 아이는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하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의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후손들에게 ‘노비(奴婢)도 하늘이 보낸 똑같은 사람’임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하며, 관청 여종에게 산월(産月)과 산후 100일간의 출산휴가를 주는 것을 제도화 하였다고 하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권력자로서 신분적 차별을 넘어 인간적 평등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한 선각자였음이 명백하지 않은가?
인간평등의 인도주의자! 청백리의 표상! 황희정승이 갈매기와 벗하여 여생을 보낸 반구정과 영당은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에서, 묘는 탄현면(炭縣面) 금승리(金蠅里)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