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희덕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 꽃과 분홍 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 꽃과 분홍 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서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저녁이 오는 소리 가만히 들었습니다.
흰 실과 검은 실을 더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문학과 사회>(199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여성적, 고백적, 성찰적, 관념적, 인식론적
◆ 특성
① 일상적 소재를 통해 관념적 주제를 형상화함.
② 사람의 마음을 사물에 빗대어 나타냄.
③ 어떤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과정을 나타냄.
④ 경어체를 사용하여 여성적 어조를 형성함.
⑤ 복숭아나무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의미 체계를 획득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 쉽게 볼 수 없는 타인의 복잡한 마음 상태
* 복숭아나무 → 타인, '나'가 관계할 대상
*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 대상에 대한 거리감
*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 대상에 대한 편견
*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 교류나 소통을 시도하지 않는 행위
* 수천의 빛깔 → 대상의 진정한 모습, 복숭아나무의 진실(본질)
*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 대상에 대한 이해의 시작
*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은 그 나무 →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싶은 나무의 모습
* 그 여러 겹의 마음 → '수천의 빛깔'과 동일한 함축적 의미
*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 데 → 대상의 본질을 아는 데
*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 시간의 흐름을 구체화함.
*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 외로운 노년의 모습으로 형상화함.
* 복숭아나무 그늘 → 나와 대상 사이의 진정한 이해와 소통과 조화(합일)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공간
* 저녁 → 적대적 자아가 사라진, 조화와 어울림의 시간을 의미함. 죽음을 맞이하는 시간
◆ 제재 : 복숭아나무
◆ 주제 : 복숭아나무(타인)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조화
[시상의 흐름(짜임)]
◆ 1 ~ 6행 : 대상에 대한 편견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
◆ 7~12행 :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
◆ 13~16행 : '나'와 대상 사이의 이해와 조화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화자가 '복숭아나무'라는 대상을 이해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데,
처음에 화자는 복숭아나무가 너무나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것이라는 편견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지나치기만 한다.
하지만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읽은 후 그 그늘 속에 들어가 복숭아나무의 외로움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되는데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의미하는 그늘은 화자와 대상인
복숭아나무 사이의 완벽한 이해와 조화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공간으로 작용하고 있다.
◆ 더 읽을 거리 : 유재천
최근의 정보 이론들은 전달 과정에서 대화 상대방 간에 주고 받는 정보가 동일하지
않다는 근거들을 보여주고 있다. 즉, 수신자는 송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능한 경우는 송신자의 코드와 수신자의 코드가
정확히 일치할 때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상황은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다.
송신자와 수신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가진 체험, 독서량,
언어에 대한 경험은 전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자가 전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나 읽은 책을 기억 속에 떠올릴 때도 시간적인 경과로 인한
코드의 차이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18세에 읽은 '국화 옆에서'와 40대에 읽은 '국화 옆에서'가 결코 같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 자체는 동일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코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화 과정에서 이해란 상대방의 코드를 자신의 코드로 번역해
낸 결과로 얻어진다. 이 과정에서 정보는 질적으로 변화되며 새로운 정보는 자아의
구조를 변경시키고 사물과 세계를 해석하는 새로운 코드로 작용한다.
새로운 정보와 기존의 코드가 합쳐지면서 새로운 전체를 형성, 기존의 코드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인간을 그가 가진 언어 능력과 문학 능력에 의해 정의한다면
새로운 정보를 주고 받는 과정에서 우리의 자아는 끊임없이 재구조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는 복숭아나무라는 텍스트에 대한 시인의 해석
과정을 담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복숭아나무라는 낯선 텍스트를 접한다.
복숭아나무의 코드와 시인의 코드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시인은 복숭아나무가
너무나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멀리 지나치기만 한다.
둘 사이의 만남이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코드에 접근하게 된다. 즉 복숭아나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겹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복숭아나무의 코드를 시인의 코드로 번역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복숭아나무의 마음을 읽은 시인에게 그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며
그 그늘 속에 들어가 복숭아나무의 외로움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된다.
이 번역 과정에서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아의 질적인 재구조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시에서 복숭아나무는 어떤 사람과 비유되어 있다. 그것은 첫 행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복숭아나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물이나
복숭아나무가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음을 가진 복숭아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사람에 비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숭아나무는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 이야기가 된다. 시인은 복숭아나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은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어떤 사람 곁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오는 것처럼 한 가지 색깔이 아닌 흰색과 분홍색,
두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아마도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
즉 나무 그늘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변덕스러움과 까다로움을 지녔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그 사람과 멀리 지나치기만 했을 뿐 어떤 마음의 교류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시인은 복숭아나무의 눈부신 빛깔 때문에 그 나무가 흰색과 분홍색
두 가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 수천의 색깔들이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게 된다. 두 가지 색깔을 가진 것으로 본 것은
시인의 기존의 코드에 의한 해석이다. 복숭아나무의 눈부신 빛깔을 보는 순간
시인의 코드는 질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복숭아나무의 코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복숭아나무가 수천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피우고 싶은 빛깔이
많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을 낳는다. 둘 사이의 대화와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시인은 자신의 편견 때문에 그 마음을 읽는 데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멀기만 했던 그 사람에 대한 접근을 시도한다.
'흩어진 꽃잎들', '저녁이 오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이 시의 인물은 청춘을
다 보낸 노년의 인물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그 그늘 아래 쉬면서 그에게 다가오는
어둠을 본다. 복숭아나무의 세계를 의미하는 그늘은 이제 두 코드, 즉 시인과
복숭아나무로 형상화된 인물 사이의 완벽한 이해와 통합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나희덕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를 읽으면서 정현종의 '노시인들, 그리고 뮤즈인
어머니 말씀'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김광섭 시인의 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기념하는 시제(詩祭)에서 즉흥적으로 쓴 시로 알려진 이 시는, 당시 30대 젊은 시인
정현종과 70대 노시인의 관계를 상상해 보게 한다. 아마도 필자의 짐작으로
그 당시 정현종 시인이라면 평소에 김광섭 시인을 선배 시인 정도로 생각했지
시인으로서 존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제에서 정현종은
노시인에 감격하여 즉흥시를 쓰게 된다. 이 시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오오 노시인들이란 늙기까지 시를 쓰는 사람들, 늙기까지 시를 쓰다니!
늙도록 시를 쓰다니! 대한민국 만세(!)"라는 감탄사가 붙은 구절이다.
「고통의 축제」라는 시집을 낼 당시 젊은 정현종 입장에서 생은 그야말로 고통스런
축제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 고통과 절망감 때문에 시를 썼고 그러던 중
우연히 김광섭 시인과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 70이 되기까지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을 보고 그 나이까지 절망적인 세상을 바로 살기 위해 시를 쓰고 있다는
것에 시인은 놀라게 된다. 여기서 시인은 그들이 시를 쓰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용기가 아닌가. 이 세상에 노인들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젊은이들에게 삶에 절망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현종이 김광섭 시인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생에 대한 깨달음과 연민, 그리고 노시인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는 설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 앞에서 본
부모의 엄격한 얼굴보다 쓸쓸한 뒷모습을 발견할 때 인간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부모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내 세계를 넓혀가는 것이다. 부모뿐이겠는가?
모든 인간 관계가 그러하고 시가 그러하다. 시는 이해하려고 해야지 비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를 고집하고 시가 나에게 다가오게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사물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그들에게 가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미성숙한 어린애일 뿐이다.
[작가소개]
나희덕 (Ra Heeduk) : 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66년, 충청남도 논산
소속 : 서울과학기술대학교(교수)
학력 :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박사
데뷔 : 1989년 중앙문예 '뿌리에게' 등단
수상 : 2019년 제21회 백석문학상
경력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나희덕(羅喜德, 1966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2001년~2018년)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2019~)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