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바람 부는 길 같은 흔해빠진 낯선 이야기 당신 피부처럼 맑고 당신 눈동자처럼 검고 당신 입술처럼 붉고 당신처럼 한번도 본 적 없는 이야기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 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끝이 없는 이야기 흔들리는 구름처럼 불안하고 물고기의 피처럼 뜨겁고 애인의 수염처럼 아름답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이야기 실험은 없고 실험정신도 없고 실험이란 실험은 모두 거부하는 실험적인 이야기 어느날 문득 무언가 떠올린 당신이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이야기 어젯밤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내일 밤 내가 당신 귀에 속삭일 이야기인 줄도 모르고
깊은 밤 붉은 구름들이 몰려왔다
새들이 하늘을 온통 뒤덮으며 무리 지어 날아갔다
뜨거운 빗방울들이 도시의 모든 지붕을 소리 없이 조금씩 녹였다
물속에 잠긴 사람들은 따뜻한 꿈을 꾸었다
태어나는 꿈 죽어가는 꿈 모두 따뜻했다
태양과 달이 물속에서 그들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들의 몸은 녹아가고 사라져가는데
꿈은 녹지 않아 도시는 여전히 튼튼하게 서 있었다
태양은 지지 않고 어둠은 걷히지 않고
물결은 그들의 살갗을 어루만졌다
그들은 눈 뜨지 않았고 울지도 웃지도 않았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슬펐다
그러나 아침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는 일이 더 슬펐던 것을 기억했다
붉은 구름들은 사라진 도시 위에 오래 머물렀다
사라진 도시 위에 밤마다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다
서로의 도시를 침범하지 않은 채
서로의 꿈을 들여다보지도 못한 채
새로운 도시 속에서 지느러미를 단 아이들이 태어났다
붉은 구름은 아이들을 녹이지 못했다
그사이 새들은 다시 날아왔고 식물들이 자랐으며
사람들은 눈을 감고도 도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붉은 구름이 사라지고 나서도 오래
도시가 사라진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물속은 더없이 맑고 투명했고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헤엄쳤다
키 큰 나무들이 아이들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수만 가지 아름다운 이름들로 불러주었다
정수리의 태양이 일순간 검게 변해 흘러내리는데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을 나뭇잎처럼 똑똑 따는데
나쁜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데
잠옷 차림의 나는 운동화 끈을 씹으며 다리 위를 걸어간다
이곳은 마녀의 젖꼭지처럼 추워*
잠옷 속에서 얼음 손가락들이 들어왔다 이내 녹아지고
다리 위로 계절들은 달려가고 애인들은 흩어지고
나는 열두 살 때 입었던 잠옷을 입은 채로 다리 위를 건너간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동전들
늙은 개가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작은 눈 안에서 나는 개와 입맞춘다
청소부의 커다란 빗자루가 내 맨발을 부지런히 쓸어내린다
강물 위로 물고기의 붉은 눈알이 떠오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자장가를 부르며 나는 다리 위를 걸어간다
바닥에 흘러내린 검은 태양이 자꾸만 내 뒤를 따라온다
다리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다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아무도 타지 않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려갔다
눈먼 사람들이 지팡이를 짚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새들도 따라 날았다
달려오던 트럭에 그림자 하나가 치었다
습관적으로 신호등이 눈을 감았다
녹색 곰팡이들이 사방에서 쓸쓸히 피어났다
쇼윈도 안에선 폭 넓은 치마가 백 년째 불타고 있었다
불 속에서 늙은 배우들이 연극 연습을 했다
아무도 불을 끄지 않았다
누군가 공원 벤치에 앉아 죽은 태양이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 태양의 붉은 피가 반짝거리며 죽은 자들의 이마를 찔렀다
묘비명들이 희미하게 짖어댔다
잠든 아이들만이 거리를 기웃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에 사람들이 하나 둘 잠들었다
죽은 태양의 유령이 거리를 뒤덮었다
죽은 자들이 눈을 비비며 일어섰다
잠든 아이들의 눈꺼풀 속에서 검은 태양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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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은 /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