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서너 살 어렸을 무렵 이맘때로 기억한다 감당할 수 없게 몸이 떨렸다 아마 환절기 몸살이었을 것이다 몸이 온통 불덩어리였던 나는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뒤집어쓴 채 도저히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몸이 땀으로 뒤범벅인데 어째서 그리 추웠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땀으로 흠뻑 젖은 이불이 싫어 발로 밀어내고 마구 걷어찬 내게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시며 아버지가 자상하게 말씀하셨다 "좀 더 누워 있어라 응! 고뿔에 좋은 약이 올 거다 '돌림고뿔'은 아니라고들 하니 이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물과 알약을 손에 든 어머니가 조심스레 아버지 옆에 앉으셨고 아버지는 알약 2개를 받아 나를 일으키시며 말씀하셨다 "씹지 말고 그냥 삼켜" "전 삼키는 걸 잘 못해요, 아부지" "이 약은 씹는 게 아니라더라 그러니 그냥 삼키는 게 좋을 걸!" "네 아부지, 그렇게 할께요."
하나 막상 약이 들어가자 나도 모르게 알약을 꽉 깨물었다 웬걸! 툭 터졌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상상외로 냄새가 너무 고약하여 당장에 뱉어버리고 싶었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아버지가 눈치를 채셨는지 나를 다독거리며 말씀하셨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니 좋은 약이다"
아무튼 그 쓰디쓴 약을 그래도 끝내 뱉지 않고 넘겼다 옆에 계시던 어머니가 다독거리며 나를 다시 눕히며 거드셨다 "아부지 말씀대로 통째 삼키는 약은 언제든 씹지 말고 그대로 삼켜!" 아무튼 나는 그 약을 복용한 뒤 하루를 더 자리보전하다가 훌훌 털고 벌떡 일어났다 그 뒤로 삼키는 약은 씹지 않는다
그저께 기포의 새벽 편지에서 '화두話頭'는 곧 고유명사이기 때문에 해석을 요하지 않는다고 했다가 아는 어느 선배 스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게 되었다 그 스님 법호는 밝히지 않는다 그는 내 글의 애독자로서 페이스북의 글을 읽고 개인 카톡으로 답을 보냈다 선배 스님께 더없이 감사하다
해석 안 되는 글이 어디 있느냐 모든 단어는 다 번역이 된다 뭐든 풀어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통째 삼키라고 한 알약을 씹고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곤욕스러웠지만 약을 아예 못 먹은 것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선배 스님 말씀이 옳다 모든 언어는 번역이 가능하다
단 어떤 글이든 담겨 있는 그 느낌을 통째로 전달하지 못할 뿐이다 화두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냥 '말씀' 정도로 풀어도 된다 그런데 이 선배 스님 말씀은 어조사까지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어사전이나 자전字典에서도 화두는 '말머리'로 되어 있어 '머리 두頭'자까지 푼다고 했다
검은깨黑荏子 우유를 마시다 말고 나는 엉뚱한 생각에 잠긴다 검은깨가 한자로는 흑임자다 검을 흑黑 자에 들깨 임荏 자이니 정확하게는 '검은 들깨'가 옳다 하나 이 정도는 풀이가 된다 어조사 '아들 자子'가 떠오른다 남자男子, 여자女子의 '자子'도 어조사로 많이 쓰인다
따라서 '남자' '여자'에서 뒤에 붙는 '아들 자子' 자는 말語을 돕助는 문체辭일 뿐이다 공자孔子 맹자孟子에서 뒤에 붙는 '자子'도 어조사로서 '공 아들' '맹 아들'이 아니다 굳이 푼다면 Mr. 공이고 Mr. 맹이다 남자 여자를 어조사까지 풀면 어떨까 남자는 사내 남男 아들 자子고 여자는 계집 녀女 아들 자子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남자男子는 '사내男 아들子'로 풀이하고 여자는 '계집女 아들子'로 풀까 아하! 사내 아들은 남자 쪽 아들이고 계집 아들은 여자 쪽 아들일까 달리 남자는 '사내 녀석'이고 여자는 '계집 녀석'일까 이리저리 풀어보긴 하지만 좋은 번역이라 보기는 어렵다
요즘은 국어 순화 정책에서 '계집'을 '여자'로 바꾸어 '여자 녀(여)女'로 새기고 있다 사실 어원을 생각한다면 계집은 '집에 계시다'에서 왔다 일례로 올케는 '오라비 계집'에서 오라비는 '올압'에서 오고 아버지는 '압'에서 왔듯이 말의 뿌리에는 문제가 없지만 그러나 요즘은 쓰지 않는 단어다
영어권에서는 아빠도 엄마도 첫 자 모음이 'A/ㅏ' 지만 우리나라 말글은 과학적이라 아빠/남자는 바깥 모음 'ㅏ'를 쓰고 엄마/여자는 안 모음 'ㅓ/ㅕ'를 쓴다 이처럼 알고 보면 '계집'은 '안內사람子'과 같은 말이고 '집室사람人'과 같은 말이지만 스님을 '중'이라고 칭하지 않듯이 여성을 '계집'이라 일컫지는 않는다
아무튼 '사내男 아들子'이나 또는 '여자女 아들子'보다 어조사 '자子'는 해석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통째 쓰는 게 좋다 요즘은 눈에 잘 띄지 않으나 한 때 보수 중인 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路어깨肩 없음' 푯말이 있었다 '길어깨'보다는 '어깨길'이 좋고 가장 좋은 말은 '갓길'이다 화두話頭를 '말머리'라 하니 다시 한번 화두 삼아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