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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회개하라
겔 18:21-32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26 만일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그로 말미암아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요
27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28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29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 아니냐
30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그것이 너희에게 죄악의 걸림돌이 되지 아니하리라
31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3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겔 18:21-32 / 그러나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제 잘못을 뉘우쳐 모든 범죄에서 손을 떼고 내게로 돌아와 내 모든 계명을 지키며 올바른 생활을 한다면 그런 사람 역시 죽지 않고 당연히 살아남아야 옳다. 22) 그는 이미 삶의 참된 길로 가고 있으므로 이제까지 저질렀던 온갖 죄악 때문에 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23) 아무리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죄값을 받아 죽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기쁠 줄 아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오히려 악인이 자신의 흉포한 길에서 돌아와 살아 남는 것을 볼 때 진실로 기뻐한다.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24) 그러나 의롭게 살던 사람이 죄에 빠져 악인과 똑같이 불의한 짓을 한다면 그가 과연 그런 짓을 하고서도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가 과거에 아무리 깨끗한 생활을 하였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는 끝까지 내게 충성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등에 죄악의 짐을 짊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25) [기회는 또다시 있다] 그런데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서 우리를 징벌하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라. 내가 부당한 일을 하였느냐? 오히려 부당한 일을 한 것은 너희가 아니냐? 26) 만일 이제까지 올바르게만 살아가던 사람이 그 옳은 길을 떠나 점점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다가 죽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아라.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값을 받아 죽음에 이른 것이다. 27) 그러나 또 죄에 빠져 지내던 사람이 죄악에서 손을 떼고 돌아서서 계속 의로운 생활을 하면 이로써 그는 자신의 생명을 건져낸 것이다. 28) 자신의 더러운 생활을 스스로 깨달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는 당연히 살아남아야 될 사람이다. 29) 그런데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서 부당하게 일하신다!'라고 떠들어 대니 이스라엘 족속들아, 나와 너희 가운데 어느 편이 더 부당한 것이냐? 30)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저질러 놓은 행동의 결과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모든 죄악에서 떠나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돌아오너라. 스스로 죄악에 걸려 넘어지지 말고 돌아오너라! 31) 너희는 과거의 모든 죄악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라! 이제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들이 마셔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을 작정을 하느냐? 32) 비록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죽는다 한들 그의 죽음을 어찌 내가 기뻐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살아 남을 수 있도록 죄악에서 떠나 돌아서거라! 나 주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도리어 너희들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시며 돌이켜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돌이키면(21-24) 악인일지라도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율례를 지키면 죽지지 아니하리니 그가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만일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 떠나 범죄를 행하면 지금까지 행한 공의는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죽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까지의 공로나 업적 그리고 베푼 선행의 많고 적음에 대한 평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오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회개에 대한 성경적 올바른 이해입니다.
주의 길이 불공평한가(25-29)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하여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오히려 너희들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고 두 번이나 반문하십니다(25, 29).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이 그 공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심판 받는 것은 그 행한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 것이며, 악인일지라도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고 반드시 살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회개는 지식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뉘우치며 눈물을 흘리는 통회가 아니라, 그 뉘우침에 상응한 구체적 행동입니다. 바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악한 길에서 돌이켰느냐에 대한 분명한 삶의 청산이 뒤따라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라(30-32) 하나님의 진심은 당연히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악인을 심판하시기를 좋아하시는 고약한 분이 아니시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심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지금까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라고 말씀하시며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마침내 독생자를 보내셨고 무능하여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적용: 진정한 회개를 통해 변화된 생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돌아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공평한 세상에서 살고싶어 합니다. 공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공평하게 대우받기를 바라는 대로 내가 먼저 솔선한다면 모두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공평하게 하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바로 ‘나 자신’을 한 번 더 스스로 헤아려 봅시다.
< 설 교 >
공평하신 하나님
에스겔 18장 25절 / 이한규 목사
작년에 한국 총회가 생기면서 나도 교회 문제에 공정한 판결로 직접 관여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교회 분쟁은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요새 계속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 편은 승복이 힘들고 상처가 될 텐데 잘 처리할 지혜를 주소서.” 이번에 판사의 고충이 좀 더 이해되었다. 판사는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 그런데 양심은 주관적인 것이기에 시대정신을 고려하지만 시대정신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에 누구나 승복할 판결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또한 변호사의 능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것도 공의에 의문을 품게 한다.
판사도 사람이기에 잘못된 판결을 내릴 수 있고 바른 판결을 내려도 소송에서 진 편은 억울한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 억울함을 줄이려고 생긴 제도가 배심제다. 배심제는 무작위로 뽑힌 보통 시민의 참여로 운영되는 재판이기에 밀실에서 판사와 검사와 변호사가 짜고 치는 게임이란 인식과 불신을 줄여 재판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시대정신과 보편가치와 상식에 조금 더 근접한 판결을 추구하지만 감정적인 대중주의로 흐르기 쉽다. 특히 전문지식이 필요한 재판에서 배심원은 변호사의 화려한 언변에 휘말리기 쉽다.
예를 들어 성범죄 재판에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꽃뱀으로 몰아 가해자를 무죄로 만드는 데 휘말리거나 반대로 여성단체의 압력과 여자의 눈물연기에 넘어가 인민재판처럼 무죄인 남자를 유죄로 만드는 데 휘말릴 수 있다. 때로는 명백한 범죄도 피고가 불우하게 자랐다거나 정신병이 있다는 이유로 무죄로 선고할 수도 있다. 살인해도 돈을 엄청나게 쓰면 변호사가 각종 사연을 다 발굴해 무죄를 받아낼 가능성이 큰 것이 배심제의 약점이다.
또한 소리가 높은 압력단체에 굴복해 잘못된 판결을 내릴 가능성도 커진다. 압력단체의 정의는 선택적 정의인 경우도 많고 그 소리도 그 단체의 존재 부각과 관련된 사람이나 외침을 선별해 대변하는 소리인 경우가 많다. 소외자의 상처를 이용해 이익과 영향력 증대를 추구하는 압력단체의 확증 편향성이 심해지면 진상규명, 팩트체크,, 해명기회도 외면한 채 막무가내 식의 주장을 펴는 압력단체에 휘둘리기 쉬운 것도 배심제의 약점이다.
물론 공의롭지 못한 편향적인 판결을 확증 편향성 판사도 내릴 수 있다. 배심원의 감정적인 대중주의도 위험하지만 판사의 편향적인 양심주의도 위험하기에 점차 정보통신이 발달하고 시민의 보편지식이 많아지면서 오판 위험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배심제를 채택하는 나라가 많아지고 있다. 결국 배심제는 최선이 아닌 차선의 판결제도이고 판사 개인의 확증 편향성을 막는 측면에서는 차악의 판결제도인 셈이다.
양측의 주장과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면 다 만족한 판결을 내리기는 더 힘들다. 법과 양심을 따라 판단한다는 말도 판사 양심대로 얼마든지 판결이 달라진다는 뜻이기에 판결에 승복하기 어려운 때가 많다. 그래도 사회의 근간 시스템이 유지되려면 승복해야 한다. 문제는 외적인 요인에 좌우되는 불의한 판결로 인한 상처가 사회적으로 계속 누적되어 하늘에 사무칠 정도가 되다가 임계점을 넘으면 사회적인 대변혁이 반드시 생긴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를 주름잡는 한 로펌이 있다. 언뜻 보면 그 로펌 권력이 점차 무한대로 커져 대통령 권력도 넘을 것 같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특정 세력이 계속 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도 용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뢰인의 힘과 로펌의 실력에 의해 의와 불의가 뒤바뀌는 상황이 주는 사회적 상처가 계속 누적되면 언젠가는 사회적인 대변혁이 일어나 있는 사람이 순식간에 다 잃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부조리한 사회상 때문에 누적된 상처가 부분적으로 치유되는 정신적인 희년 상태가 정권 교체 상황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정권은 없기에 실정하거나 오래 정권을 잡으면 시민의 상처와 불만이 누적되어 점차 변혁의 임계점을 향하게 되어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권력을 잡은 정권이 불의와 부조리로 인한 시민의 상처를 얼마나 더 해소시켜주느냐 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상으로 인한 상처도 크지만 억울한 판결로 인한 상처는 훨씬 크기에 판사는 최대한 정당하게 판결해야 한다. 때로는 부당한 판결과 조치로 너무나 억울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 그 마음을 어떻게 위로받는가? 하나님의 공평하고 공의로운 심판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런 믿음으로 한과 상처를 극복하고 새롭게 일어서서 공평한 세상을 꿈꾸며 나아갈 때 꼭 필요한 인식이 공평과 평등의 차이에 대한 인식이다.
성경에 ‘평등’이란 단어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공평’이란 단어는 무수히 나온다. 하나님은 획일적인 평등보다 의로운 공평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기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을 똑같이 축복하는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 많이 하고 영과 진실로 예배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을 심은 대로 축복하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똑같은 행복의 기회와 가능성을 주지만 행복의 열매는 심은 대로 주신다. 남에게 준 것을 내게 주지 않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남에게 주지 않은 것을 내게 준 것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공평을 확신하라.
< 공평과 관련해 필요한 태도 >
하나님은 내게는 ‘이것’을 주고 남에게는 ‘저것’을 주시는 식으로 다양하게 주셨기에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다. 평등과 공평을 오해하지 말고 하나님이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닌 공평하신 하나님인 것을 더 감사하라. 성도는 공평과 관련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1. 자기 길을 살피라
본문 25절과 29절은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공평하지 않는 길로 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공평하지 않게 여길 때가 많다. 게임에서 자기 반칙을 봐주지 않는다고 심판을 불공평하다고 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어떤 것을 해주거나 자기편만 무조건 들어주길 원하지 말라.
가끔 이런 식의 간증을 듣는다. “어느 날 지방에 갔다가 예배에 늦어 시속 160km로 달려왔는데 하나님이 사고도 막아주고 교통경찰의 손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주책없게 “할렐루야!” 하고 습관적으로 외친다. 하나님은 그런 “할렐루야.”를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지만 내 불의를 무조건 두둔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게임을 운영하고 법 집행은 똑같이 하시면서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게임은 공정히 이끌지만 게임 후에는 자녀에게 “수고했다.”고 하시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신다. 문제는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내가 불공평한 길을 가는 것이다. 내가 공평하지 않은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공평을 의심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대개 말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적절하지 않은 말은 다섯 마디도 많고 불평하는 말은 한 마디도 많다. 불공평하다는 불평이 많은 것은 내가 지금 공평한 길로 가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내가 불평이 많다는 느낌이 들면 가장 먼저 자기 길부터 살피라.
2. 현실만 보지 말라
어려운 현실만 보고 삶을 불공평하게 여기지 말라. 눈에 보이는 현실이 최종 결과는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더 큰 것이다. 현실의 작은 전쟁에서는 실패해도 인생 전체의 큰 전쟁에서는 승리하라. 눈앞에 펼쳐진 실패는 영원한 성공을 위해 잠시 등장한 엑스트라다. 거짓말도 못하고 순해빠져서 잘 당하고 편법 대신 정도만 걷다가 어렵게 사는 성도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하나님은 ‘순해 빠진 삶’이 ‘손해 보는 삶’이 아님을 반드시 증명해주실 것이다.
눈에 보이는 기적을 추구하면서 “왜 남은 표적이 많은데 나는 표적이 없을까?” 하고 불평하지 말라. 표적을 좋아하면 영혼이 타락한다. 표적을 잘 일으키는 목사를 시기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친히 말씀한 것이다. 마태복음 12장 39절에서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했다. 기적을 찾아 헤매는 모습을 예수님은 그 마음이 신랑이신 예수님보다 다른 것으로 향해 있는 영적인 음란으로 보신다.
어떤 때는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 문제 하나 해결하고 귀신 하나 내쫓은 후 일곱 귀신이 들어와 교만해지고 남의 영성을 낮게 여기고 교회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불행한 사람이다. 체험이 있어서 마음이 높아지기보다 차라리 체험이 없이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 낫다. 표적을 너무 추구하지 말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씨를 뿌리는 일에 힘쓰라.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 때 하나님이 진짜 표적을 주신다.
3. 비교의식을 버리라
비교의식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거나 교만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나만의 특징과 장점과 행복의 조건을 주셨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한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란 사실만은 굳게 믿으라. 부모는 아이들에게 같은 선물을 사줄 때도 있지만 더 큰 기쁨을 주려고 나이와 성향에 맞게 다른 선물을 사줄 때가 많다. 그때 자기가 받은 선물이 맘에 안 든다고 불평하면 부모는 자기의 공평한 마음을 몰라주는 자녀의 철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도 내가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 그처럼 마음 아파하실 것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불편한 몸으로 태어나거나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사람의 행복 지수가 더 높다는 통계도 많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찾는 마음도 또 다른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또한 현재는 내가 부족하게 보여도 천국에서는 더 칭찬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다. 평생 약한 몸으로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오면 하나님은 “수고했다!”고 크게 위로해주실 것이다.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없으면 어때! 내게 이것이 있잖아!” 하는 배짱을 가지라. 내게는 나를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 어떤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나처럼 큰 죄인을 끝까지 품어주고 사랑해주시니 나를 특별히 사랑하는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은 하나님 같다.”고 대답했다. 마음의 부자다. 내게 없는 것으로 비교해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마음의 부자가 되라.
4. 공평을 힘써 이루라
세상이 불공평한 것 같으면 내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내 것을 나눔으로 공평을 이뤄가라.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탄식만 하지 말고 내 것을 나누면서 공평한 사회를 꿈꾸며 나아가라. 탄식하면 그만큼 늙지만 꿈꾸면 그만큼 젊어진다. 지금 나보다 힘든 사람이 많다. 평생 장애로 사는 사람도 있다. 진정 공평을 원하면 나보다 잘난 사람을 생각하며 “왜 공평하지 않을까?”라고 하지 말고 나보다 힘든 사람을 생각하고 그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라.
가끔 <월새기> 문서선교를 위해 모르는 사람이 헌금하거나 무명으로 헌금하면 더 감동이 된다. 좋은 일을 통해 누군가를 감동시키면 하나님도 감동하신다. 늘 분수에 맞게 살되 선교와 구제를 위해서는 분수에 넘치게 살라. 어떤 성도는 선교와 구제를 위한 재정을 조금 줄이고 교회의 부족한 부분부터 먼저 채웠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각한다. “우리도 쓰기에 부족한데 저렇게 선교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어떤 성도는 자체 교회 건물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런 꿈이 늦어져도 선교와 구제를 미루지 말라. 그런 식으로 미루면 선교와 구제는 늘 후순위가 된다. 하나님은 교회가 “건축을 잘 하느냐?”보다 “선교를 잘 하느냐?”에 더 관심이 많다. 내 형편만큼 남의 형편도 살피려고 할 때 하나님은 내 꿈도 귀하게 보신다. 내게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힘써 나누는 삶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사는 성도의 마땅한 도리다.
주의 길이 공평치 아니한가?
에스겔 18:25-32 / 피영민 목사
서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조심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기본 구원에 관한 말씀인지, 건설 구원에 관한 말씀인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기본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 사함을 받고 칭의를 얻고 하나님과 화친하는 3대 축복을 얻는 것입니다. 기본 구원은 사람이 천국 걸 것인가, 지옥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착하게 산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본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건설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건설 구원이란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구원의 터 위에 공력을 건설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공력을 많이 건설하면 상을 받게 되고, 공력이 없으면 손해를 입게 됩니다. 건설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의와 선을 행하며 사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상을 받고, 내세에서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의와 선을 행치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현세와 내세에서 상을 받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학자들은 때로 칭의, 성화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구분하지만 부산에서 목회하시다 소천하신 백영희 목사님이 사용한 기본 구원, 건설 구원이라는 용어가 훨씬 유익하며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기본 구원과 건설 구원을 그림처럼 보여 주는 말씀이 고린도전서 3장 11절로 15절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본 구원의 터 위에 공력을 쌓아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이나 은으로 쌓아가서 불로 하나님이 테스트해도 타지 않아 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 같은 공력을 가지고 간 사람은 다 타버리게 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갈 사람이 되었다고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터 위에 건설을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공력을 건설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건설 구원입니다. 건설 구원은 상급을 받을 것인지, 손해를 받을 것인지를 결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살 것이다, 죽을 것이다는 표현이 나오면 기본 구원인지 건설 구원인지 판단해 보아야 합니다.
에스겔 18장에는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살 것이며, 악을 행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다. 선을 행하다가도 악을 행하면 죽을 것이고, 악을 행하다가도 선을 행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만약에 이런 표현들이 기본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이해가 된다면 사람의 기본 구원은 행위로 받게 된다는 행위 구원설적인 이단 사설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 교리에 어긋되고, 모순되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표현들을 건설 구원의 측면에서 이해하면 전혀 모순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예표 적으로 보면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기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신약 시대로 말하면 교회를 예표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잘못되었습니다. 두 돌비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우상을 사랑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학대하고, 속이고, 부도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가 죽고 망하는 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한 때는 B. C 593년인데 이미 그때는 3차 포로로 끌려갈 것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이라도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이제는 포로로 되지 않고 살려 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멸망했습니다. B. C 598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이스라엘은 파괴되고, 백성은 포로 되었습니다. 그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이 속담을 퍼뜨렸습니다. 그 속담이 에스겔 18장 1절로 3절에 기록되었습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을 예레미야 선지자도 말을 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29절입니다.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바벨론에 끌려가는 유다 백성이 우리가 포로가 된 것은 조상을 잘 못 만나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은 이런 속담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3절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속담을 퍼뜨리는 것은 성경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비의 죄를 갚되 삼사대까지 갚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푼다는 출애굽기 20장 5절로 6절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아버지가 죄를 지어서 우리가 삼사대까지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은 삼대 밖에 안 주시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천대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벌주시는 것보다 축복을 주시는 것이 훨씬 많은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부모의 죄가 환경적으로 자식에게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많으니까 부모에게 경성 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우상 숭배하면 손자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삼사대가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말씀하시는 것이지 자식이 죄를 짓고 그 죄에 대해서 벌 받는 것을 가지고 부모에게 핑계 대고 원망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책임 전가와 핑계 대고 원망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취했던 첫 번째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죄를 조상에게 전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18장을 보면 건설구원의 원리를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Ⅰ. 의를 행하는 의인은 현세와 내세에 상급이 있다. (18:5-9)
하나님의 자녀가 의를 행하고 의인으로 살면 그 사람은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데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는 것에 대해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평치 않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복을 받고 싶으면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Ⅱ. 의인의 아들이라도 악을 행하면 현세와 내세에 손해가 있다. (18:10-13)
하나님께 축복받은 의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가 의를 행한 것을 본받지 않고 악인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하고 타락하고 악을 행하며 산 아들은 복을 받지 못하고, 현세와 내세에 상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징계와 인생의 갖가지 손해를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아비는 의인으로서 복을 받았는데 자식은 악인이 되어서 망하게 되는 경우를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 8절에 보면 침례 요한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롭게 살았지만, 어찌 너희가 아브라함이 행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레위기 10장을 보게 되면 아론은 모세의 형이며, 의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택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의 아들이 넷 있었는데, 첫째 아들인 나답과 둘째 아들 아비후는 악한 자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명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을 하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의인으로 대제사장이지만, 아들은 불에 타 죽은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은 의인이었습니다. 삼백 명의 용사를 데리고 미디안 군대와 전쟁을 했는데, 미디안 군대 십삼만 오천 명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9장 5절을 보면 기드온의 아들 가운데 첩의 아들 아비멜렉이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왕이 되려고 이복형제 칠십 명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모두 죽였습니다. 얼마나 악한 사람입니까? 기드온은 훌륭한데 첩의 아들 아비멜렉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아비멜렉은 한 여자가 망대 위에서 맷돌 위짝을 던져 두개골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아버지 기드온은 의를 행하며 복을 받았지만, 아비멜렉은 악을 행하여 큰 손해를 받아 생명을 잃었습니다.
사무엘상 8:3에 보면, 사무엘은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그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악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 사무엘의 뒤를 잇지 못하고 백성의 배척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의인인데 아들은 악인인 대표적인 인물이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군대가 십팔만 오천 명이 침공했을 때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고 천사를 보내서 하룻밤에 물리치게 하시고 승리를 주셨습니다. 유다를 구원한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을병에 걸렸을 때에도 기도했는데 십오 년의 생명이 연장되었습니다. 생명이 연장이 된 지 삼 년 만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때에 므낫세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므낫세는 이사야를 톱으로 잘라 죽인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므낫세는 자신도 망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망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의인이면 아버지의 복을 받는 것이고, 자식이 악을 행하면 자식이 그 악을 따라 벌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Ⅲ. 악인의 아들이라도 의를 행하면 현세와 내세에 축복이 있다. (18:14-20)
악한 아버지의 아들이 의롭게 삽니다. 그러면 아들이 복을 받고 살게 됩니다. 부모의 악이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악과 상관없이 악한 부모의 자식이 의롭게 살면 그는 자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에스겔 18장 20절입니다.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악인의 아들 가운데에도 훌륭한 의인이 있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첫 번째 왕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고도 두 번이나 말씀을 거역하여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게는 요나단이라고 하는 훌륭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인격, 믿음, 의리에서 훌륭했습니다. 요나단이 블레셋을 자기 병기 든 소년 한 명을 데리고 가서 물리쳤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입니다. 사울의 집안이 망해도 요나단과 그 집안은 대대로 돌보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들 므비보셋은 다윗이 왕실에 불러서 먹게 하고 땅도 주고 하인도 주어 잘 살게 하였습니다. 악한 아버지에게도 선한 의인이 태어날 수 있고, 악한 아버지가 태어난 선한 의인이 선을 행하게 되면, 그는 아버지의 악과 상관없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은 공평한 길입니다.
므낫세 왕은 히스기야의 아들입니다. 선한 아버지를 두었지만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므낫세에게 요시아라는 손자가 있었습니다. 요시아는 8살 때에 왕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어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열왕기하 22장 2절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어린 사람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살면 의인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죄악을 따라 살면 악인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요시아 왕은 지금도 유다 역사 가운데 구약의 종교 개혁가로서 기억되고 있는 인물입니다. 구약의 마르틴 루터는 요시야입니다. 므낫세의 손자입니다. 므낫세의 아들은 아몬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의인의 아들 악인이 아니라 의인의 아들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의와 선을 행하고 살면서 복을 받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모두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Ⅳ. 악인이 돌이켜 의를 행하면 그 시각부터 축복이 오고, 의인이 돌이켜 악을 행하면 그 시각부터 손해가 온다. (18:21-24)
악인이 돌이켜 의를 행하고 살면 하나님이 그때부터 그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행한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잊어버리시는 것입니다. 현세에도 내세에도 복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악인일지라도 돌이켜 의를 행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의를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 악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과거의 의에 대한 이자는 없습니다. 10년 전에 예수 잘 믿었다고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거나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의인이 돌이켜 악을 행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의에 대한 상급도 없어집니다. 행한 악에 대해 징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인생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핑계 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났다는, 아내를 잘못 만났다는 핑계 대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기본 구원받은 백성이 현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나 상급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누구에게 책임 돌릴 것 없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악이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에스겔 18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독생자 예수를 죽게 할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축복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에게 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의를 행하며, 선을 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중국집이 있는데 사찰 집사님은 팔보채를 드시고, 장로님은 짬뽕을 드십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오토바이 타고 배달 나갔습니다. 여러분, 직분 가지고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한 선과 의를 하나님이 보시고 상급과 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향해서 1, 2차 포로로 끌려갔지만 지금 이 순간이라도 돌이켜 의를 행하면 3차 포로로 끌려가는 일은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에서 돌이키면 살려 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배반하여 B. C 587년 3차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기본 구원은 우리의 행위,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기본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건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복 받을 만한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행동 하나라도 복 받을 행동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도 복 받을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결 론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의롭다고 해서 다른 가족 구성원이 저절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도 각각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도 하고, 진노를 당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패망케 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본 구원의 터 위에 악과 죄에서 돌이켜 선과 의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금, 은, 보석으로 공력을 쌓아 축복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껴질 때
겔 18:25-32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껴질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껴질 때” 여러분!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계속해서 평등과 공평의 차이점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평등과 공평이란 단어들은 우리들 생활 속에서 서로 비슷한 말로 많이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단어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린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그림을 접하게 되었는데 평등과 공평의 차이점을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얼마전 SNS에서 본 그림 두 장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 그림들은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아주 명확하게 구분해서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진 게시) 두 개의 비슷한 그림이 있습니다. 두 개의 그림엔 담벼락 너머로 벌어지는 야구 경기를 구경하려는 가족 세 명이 보입니다.
한명은 아빠로 보이고 6학년쯤 돼 보이는 큰아들과 유치원쯤으로 보이는 막내아들이 나란히 서서 야구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 세 명은 키 차이가 나고, 담벼락은 키가 큰 아버지 빼고는 아들 둘의 시야를 막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두 그림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그림은 세 명 모두가 똑같이 같은 사이즈의 상자 한 개를 밟고 올라 서 있습니다.
결과는 아버지는 아주 여유 있게 야구 경기를 볼 수 있게 되고, 큰아들은 간신히 볼 수 있게 되고, 막내아들은 상자 위에 올라서도 여전히 볼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이렇습니다. 키가 큰 아버지는 그냥 서서 야구 구경을 하고 있고, 큰아들은 상자 하나 위에 올라서서 있고, 막내아들은 상자 두 개 위에 올라서서 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는 세 명이 다 야구 구경을 볼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개의 그림 중에 어느 것이 평등(Equality)을 이야기하고, 어느 것이 공평(Equity)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 그림, 세 명 모두 상자 하나 위에 올라간 그림은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세 명 모두에게 똑같은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각각 개인의 차이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과는 각각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그림은 공평을 이야기합니다. 개인의 차이에 맞춰서 주어지는 기회가 달라집니다. 얼핏 보면 균등해 보이지 못할 수 있지만, 그러나 후에 모두가 다 같은 결과물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공평이란 말이 평등이란 말보다 더 좋습니다. 평등은 모두에게 ‘균등한 기회’라는 허울 좋은 말로 또 다른 불평등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성 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정의당이 발의한 ‘차별금지법’ 통과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 무슨 말입니까?
앞으로는 동성애가 합법화 된다는 얘기요, 강대상에서 기독교만이 구원받을 유일한 종교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기에 이는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는 동성애를 금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차별금지법’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에스겔서 말씀을 다시금 묵상하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은 '획일적인 평등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을 원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성도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들이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지만 장성하면서 발길을 끊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하지만, 그 때마다 아들의 논리에 자신이 압도당하고 만다는 겁니다.
“진정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라면 왜 태어날 때부터 불구자가 있게 하는가?” “정말 하나님이 정의의 신이라면 어떻게 이 땅에 불의가 기승을 부릴 수 있는가?” “정녕 하나님이 전능의 신이라면 어찌 이 땅에 그토록 숱한 재난이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아들의 반론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목사님은 그 분께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장을 드렸습니다. “만약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린다면 아드님의 주장이 백 번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이후에 다른 삶이 있다면 아드님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불구의 몸으로 태어났기에 한평생 영원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불의한 자로 인해 고통받기에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다면, 재난을 당했기에 비로소 영원에 대해 눈 뜨는 자가 되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서 영원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아드님에게 신앙을 권유하려 하시지 말고, 머지않아 반드시 관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일깨워 주십시오!
언젠가 아드님이 죽음이란 남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것임을 인식하게 될 때 그는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발 이 세상 것 가지고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든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것 가지고도 공평하게 하시지만 특별히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공평하심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에게는 '이것'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것'을 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각 사람마다 다양하게 주셨기에 세상은 더더욱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이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닌 공평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가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전혀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질 바로 그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만 할까요?
1.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살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살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끼십니까?
물론 평등과 공평을 오해할 때도 그렇게 느끼지만, 자기 자신이 공평하지 않은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실상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공평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과 29절은 계속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대표적으로 25절 말씀만 함께 읽습니다. (시작)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대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불공평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해 주기만을 바라고, 불공평하게도 하나님께서 자기편만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게임을 하는데 반칙을 하면서 심판이 봐주지 않는다고 심판에게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면 될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반칙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식의 간증을 듣습니다.
"지방에 갔다가 예배에 늦어 시속 160km로 달려 왔는데 하나님께서 사고도 막아주시고, 교통경찰의 손에서도 지켜 주셨습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면 저는 열이 받는데, 어떤 분들은 "할렐루야!"라고 습관적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런 '할렐루야'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지만 자식의 불의를 무조건 두둔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게임을 운영하시고, 법 집행은 똑같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룰입니다. 이처럼 게임을 공정하게 이끄시지만 게임이 끝난 후에는 자녀들에게 ‘수고했다!’고 해 주시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늘 항상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불공평한 길을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할진대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심하거나 불평하는 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삶의 태도가 삶의 높이를 결정하고, 말의 태도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말은 다섯 마디도 많은 것이고, 불평하는 말은 한 마디도 많은 것입니다.
사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내가 지금 공평한 길로 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하는 분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길을 살피는 일입니다.
자기가 엉뚱한 길로 가면서 마치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처럼, 또한 삶이 자기를 속이는 것처럼 그렇게 불평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기도가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까지 하나님 책임으로 돌리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한과 욕심이 가득 들어 있는데 어떻게 기도가 됩니까? 우리 머리속엔 세상적인 일들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기도가 됩니까?
그런데도 자기는 심지 않고 거두려고만 하고, 그러다가 거둘 것이 1도 없으면 결국 불평하는 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의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의 의부터 의심하십시오. 하나님의 공평하심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심하려면 자기 자신의 공평하지 못한 태도부터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 하나님을 공평하지 않다고 하니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억울하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억울하게 하면 우리가 진짜로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하신 분인 줄 믿으시고, 우선 먼저 자기 자신의 길을 온전히 살피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눈앞의 현실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현실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때로 우리는 눈앞의 어려운 현실만 보고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눈 앞에 펼쳐진 어려운 현실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최종 결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 눈에 보이는 현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사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작은 전투에서는 실패할지라도 인생 전체의 큰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 눈 앞에 펼쳐진 실패는 영원한 성공을 위해서 잠시 등장한 ‘깜짝쇼’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솔직히 저는 목회자로서 가끔 너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에수 믿는 사람이기에 거짓말도 못하고, 순해 빠져서 당하기만 하고, 편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정도만을 걷다가 그만 어렵게 사는 성도들을 볼 때 마음이 미어집니다.
그러나 현실만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지만 저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순해 빠진 삶'이 결코 '손해 보는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증명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가끔 어떤 분은 "왜 다른 사람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데, 왜 나는 아무런 표적도 나타나지 않을까?"라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서 너무 표적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찌 보면 영혼이 타락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은 표적을 잘 일으키시지 못하니까, 표적을 일으키시는 목사님을 시기해서 저렇게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표적을 좋아하면 영혼이 타락한다는 것은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표적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 보면 그들의 마음이 신랑이신 예수님께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다른 데를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 주님은 영적 음란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눈에 보이는 표적만 보고서 수평으로 비교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심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기적적인 그 무엇'을 찾으려는 본능이 강해져서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나는 가만히 있고 환경만 기적적으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상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서 귀신 하나 내쫓고 문제 하나 해결한 후에 도리어 일곱 귀신이 들어와서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표적을 찾으려는 마음을 버리시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에 더욱 애쓰고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비로소 진짜 하나님의 표적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기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더욱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직하게 자기 영혼을 지켜서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고, 마침내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고서 인내하면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끝까지 지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적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떤 자매가 치한에게 폭행당하는 다급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 현장에서 막아주시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겁쟁이이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곁을 떠났습니다.
물론 그 자매의 상처가 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반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영원한 상처는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 상처를 영원한 상처로 인식하는 불신앙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가 뭐라 해도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답답한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상처입은 치유자이신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현재를 용단해서 다시금 힘차게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3. 남과의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남과의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은 살아가면서 잃을 때도 있고,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에 집중해서 살면 그 인생은 더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늘 언제나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이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비교의식에 빠져서 열 받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남과의 비교의식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의 온갖 불행은 비교의식에서 생겨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과의 비교의식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의 특징을 주셨고, 나만의 장점을 주셨으며, 나만의 행복 조건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한지는 우리는 명확히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대해 늘 항상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조금 없으면 어떻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아닙니까? 요즘 겁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휴대폰을 쓰면서 전자파 때문에 치매 걸릴까봐 겁나고, 자동차 시동을 걸 때 급발진 할까봐 겁납니다.
이런 수많은 겁나는 환경 속에서도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인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너무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조금 배짱을 가지십시다! "없으면 어때? 내게 이것이 있잖아!" 이런 배짱이 필요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릴 너무나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어떤 분이 하나님은 정말이지 평등하지 않다고 말해서 그 이유를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자기처럼 잘못이 많은 사람을 이토록 끝까지 품어주시고 사랑해 주시니 하나님은 자기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평등하지 않은 분!"이라는 겁니다.
정말이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제발 내게 없는 것으로 비교하며 불평하지 마시고,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부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우리가 불행하게 보일 수 있어도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 택함받아 영원한 하늘나라가 이미 예비되어 있기에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한 분 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나는 진정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남과의 비교의식은 버리고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온 세상에 힘차게 선포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맛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 불공평을 치유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불공평을 치유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제발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탄식만 하지 마시고, 내 것을 나누어 주면서 공평한 사회를 향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탄식하면 그만큼 늙어져 가지만, 꿈을 꾸면 그만큼 젊어져 갑니다. 1971년에 선포된 유엔 장애인 권리 선언에는 이런 글이 있다고 합니다.
"장애인에게는 우리보다 우선적으로 배려 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에게는 장애인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의무가 있다."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무보다 권리를 앞세우며 살아가지만, 여기에 있는 저와 여러분만이라도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축복의 문을 활짝 열어주실 것이요, 이 세상은 더욱 공평한 아름다운 세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제아무리 소중한 하늘의 만나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출16장)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서 공평한 세상을 이루어 가는 초석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내게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받고 사는 저와 여러분의 마땅한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릴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게 하시기까지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셨기에 공평하고, 공평하지 않고를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받을 것을 다 받은 사람이 어떻게 공평함을 논하며, 불평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함에도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에게는 더 마음에 드는 것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다면 이 어찌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있습니다. 31절과 32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죽을 자가 죽는 것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정말 공평하십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고, 죄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을 자가 죽는 것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죽을 자가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죽을 영혼을 살릴 수 있도록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저와 여러분이 감당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그렇습니다. 죄와 심판에 대하여 공평하신 하나님에게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님 앞에 나와서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것! 오직 이 길 밖에는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죄악을 버리고 우리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함으로써 공평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저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힘써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을 한 영혼이라도 더 주님께로 인도함으로 공평하신 하나님 마음을 진정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삶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때
겔 18:25-32 / 김근중 목사
천 명 정도 되는 교회를 담임하는 두 분의 목사님이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사례비를 똑같이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가 다 같은 하나님의 종이니까 똑같이 평등하게 사례를 받는 것이 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성도들은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은 부교역자와 사례를 똑같이 받아!"라는 말을 단골메뉴로 삼아 교회를 홍보합니다.
반면에 조 목사님은 부교역자보다 2배 정도의 사례비를 받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조 목사님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그렇게 사례비 차이를 두는 것이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즉 수십 년 동안 교회를 개척하고 섬겨온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의 사례비에 차이를 두는 것이 공평한 것이지 부교역자와 사례비를 똑같이 받는다는 것은 '선전거리'는 될 수 있어도 공평한 처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강조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례비를 똑같이 받는다고 선전하는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 다른 보통 사람들을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 비겁한 일이고, 또한 평등과 공평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부교역자와 똑같이 사례비를 받는 김 목사님이 부교역자보다 사례비를 2배나 받는 조 목사님보다 훨씬 더 성자 같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이 받는 수많은 보조 사례비(사택비, 사택관리비, 목회비, 심방비, 도서비, 보험비, 차량비, 교통비, 강사비, 자녀양육비 등)를 생각하면 실제로 두 분 목사님이 받는 사례비는 비슷합니다. 결국 부교역자와 똑같이 받는다는 말은 선전용이라는 오해를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간혹 교회도 마케팅이 필요하고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지만 역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인 것 같습니다.
조 목사님과 식사를 마치고 교회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통해 성경검색을 해보았습니다. 도대체 '평등'이란 말이 성경에 몇 번 나오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에 '평등'이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공평'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공평'이란 말은 무수히 많이 나왔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하나님은 '획일적인 평등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평을 원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기도 많이 한 사람과 기도 적게 한 사람을 똑같이 축복해주시는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기도 많이 한 사람을 더 축복하시고,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더 축복하시고, 하나님을 위해 힘써 헌신한 사람을 더 축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행복의 기회와 가능성을 주시지만 행복의 열매는 우리가 심은 대로 주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분은 "저 사람에게 주신 것을 나에게 주시지 않았다"고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시지 않고 자신에게 준 것은 왜 생각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기회는 똑같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있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인정하고, 또한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와 돌보심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은 몇 미터 떨어진 용변기에 앉기 위해서도 온 몸이 부르르 떨리고, 땀이 범벅이 되고, 용변을 극도의 인내로 참으며 엄청난 사투를 벌인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 말을 하려면 온 몸 전체의 힘을 목에 싣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야 간신히 띄엄띄엄 그 말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시에서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삶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때 필요한 태도
하나님은 나에게는 '이것'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저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처럼 각 사람마다 다양하게 주셨기 때문에 세상은 더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평등하신 하나님이 아닌 것을 더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오해는 대개 평등과 공평의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가끔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는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요? 이 시간에 4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자신의 길을 더욱 살펴야 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게 느껴집니까? 평등과 공평을 오해할 때도 그렇게 느끼지만, 대개 자신이 공평하지 않은 길을 갈 때 더욱 그렇게 느낍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공평하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과 29절에서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찌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대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불공평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기만을 바라고, 불공평하게 하나님께서 자기편만 들어주기를 원합니다. 게임을 하는데 반칙을 하면서 심판이 봐주지 않는다고 심판에게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면 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반칙적인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식의 간증을 듣습니다. "지방에 갔다가 예배에 늦어 시속 160km로 달려 왔는데 하나님께서 사고도 막아주시고, 교통경찰의 손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면 어떤 주책 맞은 성도들은 "할렐루야!"라고 습관적으로 대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할렐루야'를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지만 자식의 불의를 무조건 두둔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정하게 게임을 운영하시고, 법 집행은 똑같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룰입니다. 그처럼 게임을 공정히 이끌지만 게임이 끝난 후에는 "자녀에게 수고했다!"고 해 주시고,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불공평한 길을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말을 버리십시오. 삶의 태도가 삶의 높이를 결정하고, 말의 태도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적절하지 않은 말은 다섯 마디도 많은 것이고, 불평하는 말은 한 마디도 많은 것입니다. 사실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것은 내가 지금 공평한 길로 가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불평이 있는 분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자기 자신의 길을 살피는 일입니다.
자기가 엉뚱한 길로 가면서 마치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처럼, 또한 삶이 자기를 속이는 것처럼 불평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심지어 어떤 분은 "기도가 안된다!"고 하면서 기도가 안되는 것까지 하나님 책임, 목회자 책임으로 돌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한과 욕심이 들어있는데 어떻게 기도가 됩니까? 머리에는 인어 아가씨나 야인시대 들어가 있는데 어떻게 기도가 됩니까? 그처럼 자기는 심지 않고 거두려고만 하고, 결국 거둘 것이 없으면 불평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려면 자신의 정의부터 먼저 의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평하심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려면 자신의 태도부터 의심해야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하나님을 공평하지 않다고 하니 하나님께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더 이상 하나님을 억울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억울하게 하면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어찌 하나님의 도움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 현실만 보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때로 눈앞의 어려운 현실만 생각하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현실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최종 결과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더 큰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작은 전쟁에서는 실패해도 인생 전체의 큰 전쟁에서는 승리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눈앞에 펼쳐진 실패는 영원한 성공을 위해서 잠시 등장한 엑스트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가끔 너무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거짓말도 못하고, 순해 빠져서 당하기만 하고, 편법을 사용하지 못해서 정도만을 걷다가 어렵게 사는 성도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현실만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저는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순해 빠진 삶'이 '손해 보는 삶'은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해주실 날이 온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 보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은 "왜 다른 사람은 표적이 많이 있는데 왜 나는 표적이 없을까?"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너무 표적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영혼이 타락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은 "우리 목사님은 표적을 잘 일으키시지 못하니까 표적을 일으키시는 목사님을 시기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구나!" 하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표적을 좋아하면 영혼이 타락한다는 것은 저의 말이 아니고 주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2장 3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사람들이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기적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분의 마음을 깊이 들어가 보면 신랑이신 예수님께 마음이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다른 것을 향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주님은 영적 음란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표적만 보고 수평으로 비교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심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삶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기적적인 것'을 찾으려는 본능이 강해져서 말씀으로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는 않고 나는 가만히 있고 환경만 기적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래서 우상에 빠지고 유혹에 빠지고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기적적인 체험을 통해서 귀신 하나 내쫓고 문제 하나 해결한 후에 일곱 귀신이 들어온 분들이 있습니다. 교만해지고, 판단하고, 교회와 교회 리더를 우습게 여기니 차라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습니다. 그처럼 체험이 많아 높아지신 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순수한 여러분들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어려울수록 표적을 찾으려는 마음을 버리고 공평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더욱 씨앗을 뿌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비로소 진짜 하나님의 표적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기가 어려울수록 더욱 정신을 차리고 우직하게 내 영혼을 지켜서 기필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고, 마침내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믿고 기다리십시오. 아무리 다급해도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자매는 치한에게 폭행 당하는 그 다급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서 막아주시지 않았다고 겁쟁이이신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곁을 떠났습니다.
물론 그 자매의 상처가 크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도 '뺨 한 대 맞은 사건'으로 작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품에 안길 수 있는 반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상처는 없습니다. 문제는 상처를 영원한 상처로 만드는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과거의 상처를 믿음으로 극복하면 상처 이상의 기쁨과 행복과 영원한 축복이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3. 다른 사람과 비교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잃을 때도 있고, 얻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에 집중해서 살면 그 인생은 더 어렵게 됩니다. 받은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이 의도적으로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닌데 스스로 비교의식에 빠져서 열 받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비교의식은 나를 왜소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나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사실 우리의 온갖 불행은 비교의식에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비교의식을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만의 특징을 주셨고, 나만의 장점을 주셨고, 나만의 행복을 조건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한지는 우리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 줄 때 같은 것을 사 줄 때도 있지만 아이들에게 더 기쁨을 주려고 나이와 성향에 맞게 다른 선물을 사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대개 좋아하지만 가끔 한 아이가 자기가 받은 선물이 맘에 안 든다고 삐치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부모의 공평한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께서도 불평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처럼 마음 아파하시지 않겠습니까?
장애로 태어난 것이나 배고픈 나라에 태어난 것 자체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나라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더 높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적은 것에도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하는 환경은 또 다른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는 내가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천국에서는 더 칭찬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평생 장애자로 살면서도 행복하게 살다가 천국에 온 사람을 하나님은 "수고했다!"고 크게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이제는 주어진 현실에 대해 조금 더 감사하며 사십시오. 조금 없으면 어떻습니까? 지금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지금 겁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하철 타기가 겁나고, 한강 다리 건널 때마다 겁나고, 백화점 무너질까봐 겁나고, 큰 건물에 들어가기가 겁이 나고, 내가 먹는 소고기가 광우병에 걸린 소가 아닌가 겁나고, 내가 먹는 식품이 유전자 변형 식품이 아닌가 겁나고, 내가 먹는 게가 중국산 납 꽃게가 아닌가 겁나고, 휴대폰 쓰면서 전자파 때문에 치매 걸릴까 겁나고, 자동차 시동을 걸 때 급발진 할까봐 겁납니다. 그런 수많은 겁나는 환경 속에서도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너무 없는 것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조금 배짱을 가지십시오. "없으면 어때! 내게 이것이 있잖아!"하는 배짱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있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신앙이 좋은 분은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자기처럼 잘못이 많은 사람을 이렇게 끝까지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시니 하나님은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는 공평하지 않으신 하나님 같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 마음이 부자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내게 없는 것으로 비교하여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을 인해서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의 부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이 힘들어할 때 누군가 위로해줍니다. "집사님! 힘들지요! 저도 마음이 아파요!" 그때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로 "그래도 행복해요!"라고 대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부자인지 모릅니다. 사람의 눈에는 우리가 불행하게 보여도 우리 자신은 행복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행복은 행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지 않고 행복하게 생각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불행하게 여겨도 "하나님은 참 공평하셔!"라고 감탄하고 감사하며 최선을 다할 때 공평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에게 행복의 조건을 주실 것입니다.
4. 사회의 불공평을 치유하는 길잡이가 되어야 합니다.
삶이 불공평한 것 같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보고 낙심하지 말고, '내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내 것을 나누어주어 공평함을 이루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탄식만 하지 마시고, 내 것을 나누어주면서 공평한 사회를 향한 꿈을 꾸십시오. 사람은 탄식하면 그만큼 늙어가지만 꿈을 꾸면 그만큼 젊어져갑니다.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평생 장애로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진정 공평한 것을 원한다면 우리보다 잘난 사람들을 생각하며 "왜 공평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매달리지 말고 우리보다 힘든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971년에 선포된 유엔 장애인 권리 선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장애인에게는 우리보다 우선적으로 배려 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에게는 장애인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할 의무가 있다." 본능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무보다 권리를 앞세우며 살지만 여기에 계신 여러분들은 권리보다 의무를 먼저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이고, 사회는 더욱 공평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아무리 소중한 하늘의 만나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출 16장)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나눔과 섬김'을 통해 공평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은 조금만 생활이 어렵다고 하나님의 공평을 의심하고 불평하는 일이 아니라 공평한 사회를 꿈꾸며 최선을 다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입니다.
선교와 구제에 들어가는 재정을 조금 줄이고 자체 성전을 빨리 가지고 싶다는 꿈을 가진 분들이 있음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쓰기에 부족한데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사는 주제에 저런 식으로 하면 건축은 언제 하나?" 하고 투덜대는 마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빨리 자체 성전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건축이 늦어져도 선교와 구제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미루면 선교와 구제는 언제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건축을 잘 하나?"보다 "선교를 잘 하나?"에 더 관심을 가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민감하기보다 어려운 자의 형편에 더 민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살필 때 공평하신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의 꿈도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내게 있는 것'으로 힘써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사는 우리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자녀를 키울 때 인간의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사랑을 주고 키웁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자녀가 자라서 갱단의 멤버가 되어 사람을 죽이고, 길거리의 창녀가 되어도 부모는 여전히 그 자녀를 누구보다 귀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매일 술을 끊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고 밤마다 때리고 칼로 위협해도 자식을 사랑하고 남편이 불쌍해서 집을 떠나지 않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 마음이 수천 배로 증폭되어 우리에게 향해진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셨기 때문에 공평하고, 공평하지 않고를 따질 것도 없습니다. 받을 것을 이미 다 받은 사람이 어떻게 공평함을 논하며 불평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께 더 맘에 드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면 그런 모습이 어찌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모든 불평을 멀리하고 공평하신 하나님의 뜻을 좋아 나보다 힘든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쳐서 의와 공평이 넘치는 사회를 이루는 초석의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에스겔 18:30-32 마가복음 1:14-15 / 이성희 목사
서론
인류 문명을 발전시킨 발명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 종이, 전구, 나사, 도르래, 페니실린, 달력, 바퀴, 나침반, 우산, 거울 등을 통하여 인류의 문화와 과학과 삶이 발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가장 탁월한 발명품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우개라고 합니다. 지우개는 모든 것을 다 지워버릴 수 있는 기적을 이루는 탁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여 우리 자신의 죄를 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지우개의 역할을 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지워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얼마나 말끔하게 지우느냐 하면 기억도 아니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공책에 무엇을 썼다가 다 지워도 약간의 흔적은 남지만 하나님은 흔적도 남기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지우개 역할 때문에 우리의 회개가 가능합니다.
이사야 43:25에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지워도 흔적을 남기고, 잊어도 다시 기억해내고, 용서해도 섭섭함이 남아 있지만 하나님은 말끔히 잊으신다는 말입니다.
출애급기 34:7에는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고 합니다. 악과 과실과 죄는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용서하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끔히 용서하실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하시고, 진실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는 말이 13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말씀하시면 회개할 마음도 생길 터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똑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른 용서의 장치를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때 한 번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지금도 계속 용서의 기도를 드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회개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깨닫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최고의 품격은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으로, 무한한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런 무한한 하나님 때문에 회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합니다. 들음입니다. 복음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회개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입니다. 결국 우리가 회개해야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회개란 말은 히브리어로 ‘테슈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이 두 말은 똑 같이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합니다. 열심히 진행하다가 완전히 U턴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회개는 내적 가책이 외적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 아닌 것에서 완전히 돌이켜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복음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회개는 필수입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복음을 제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5에는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하나님의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긴급성(urgency)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하나님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복음으로 가는 나라를 말합니다.
“때가 찼고”라는 말은 하나님의 경륜에 따른 구속사의 결정적인 시점을 맞았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카이로스’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어날 결정적 기회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절호의 기회라는 뜻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의 꽉 찬 시간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틀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오차가 많고 시간을 맞추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인공위성 나로호를 보세요. 몇 번이나 발사를 연기했지만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발사시간을 맞추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행기도 연발, 연착을 자주 합니다. 저도 여러 번 비행기가 연발하여 고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엔진의 유압장치 고장으로 여러 시간을 늦게 출발한 적도 있고, 심지어 그 날에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하여 호텔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에 온 적도 있습니다. KTX가 출발이나 도착 시간을 정확하게 맞춘다고 하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장이 날 때도 있고 저도 가끔 타보면 서울역에 정시에 들어온 적은 제 기억에 거의 없습니다. 꼭 몇 분 연착합니다. 사람은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정확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of God)이 도래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시간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공간적인 개념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보는 것이 신학적인 개념입니다.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이 눈앞인데도 사람들은 환락에 빠져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멸망당하는 도시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시대에는 홍수로 멸망하실 시간이 눈앞인데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세상 쾌락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탈출해야 합니다. 경고의 나팔이 울리면 얼른 방주에 올라타야 합니다. 그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모세가 애급에 가서 백성들을 이끌어낼 때에 출애급을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왜 못하였는지 아십니까? 구원에 배제된 사람이 왜 생기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생깁니까? 광고시간에 졸아서 그렇답니다. 세례요한을 통해서 광고하고, 예수님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광고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광고를 안 듣고, 조롱하고, 외면하고, 결국 구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느 학자가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을 조사하여 발표하였습니다. 첫째는 끊임없는 복음전파의 열정을 가진 교회입니다. 둘째는 복음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설교하고 전파하는 교회입니다. 넷째는 예배의 역동성을 가진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는 교회는 복음의 핵심을 알고 가지고 있는 교회이므로 성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다음 첫 번째 순교자인 스데반은 사도행전 7:56에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숨을 거두기 전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못 박는 자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사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므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으면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보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1900년 중국 베이징과 화북지역에서 대대적인 서양을 반대하는 반양운동(反洋運動)인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의 제일 큰 피해자는 화북지역의 개신교와 천주교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에서는 주교 5명, 신부 48명, 신도 18,000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개신교에서는 목사와 선교사 180명, 신도 5,000여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이 때 기독교 선교사였던 존과 베티 스탬은 공산당 호송병에게 이끌려 처형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구경꾼들 이 그들에게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고 묻자 존은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늘나라로 갑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복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위대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종래 하나님의 나라로 갑니다. 우리 모두가 죽음도 두렵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1:15 하반절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니라”고 합니다. 회개의 선포는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전파한 메시지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복음이 동일한 것은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증거입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요한은 예수님의 복음의 선구자였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시적으로 작용합니다. 회개하는 순간 믿음을 가지게 되고, 회개하는 순간 믿음의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믿음을 가지며, 회개하면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신약을 기록한 헬라어는 죄라는 단어가 여럿이 있습니다. 첫째,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는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둘째, ‘파라바시스’라는 단어는 선을 넘어갔다는 뜻으로, 정도를 걷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파랖토마’라는 단어는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력을 상실하여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넷째, ‘오훼일레마’라는 단어는 빚이나 채무를 뜻하며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죄는 바로 이 단어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여럿인 것은 죄의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죄란 여러 모양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죄라는 단어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께 항상 반대하고 저항하는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어떤 모양이든 회개하면 사함을 받습니다.
시편 6편, 32편, 38편, 51편을 ‘회개의 시편’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51편은 대표적인 회개의 시편입니다. 51편 2절에는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라고 합니다. 7절에는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고 합니다. “깨끗이 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벼운 세탁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 탕탕 두들겨 심하게 얼룩진 때를 씻어낸다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다윗은 “깨끗이 하다”라는 말을 둘째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씻어내야 함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시편 51:10에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회개의 시에서 천지창조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만 인간의 죄를 정하게 하며, 하나님만 인간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열왕기하 20장에는 히스기야에게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하니라”고 합니다.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내어놓고 회개하는 심정을 아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회개는 모범적이며 온전한 회개였습니다. 그의 회개는 ‘지정의’의 회개입니다. 세 번째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지적인 회개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집에서 뛰쳐 나왔습니다. 의적인 회개입니다. 그리고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정적인 회개입니다.
영국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베드로가 흘린 눈물의 연못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실망시킨 것을 깨달을 때마다 계속 불어나 바다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실망시킬 때마다 눈물의 회개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강도는 딱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평생 십일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 동안의 경건시간을 가진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선행을 베풀지도 않았고, 찬양과 예배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회개의 행위로 깨끗이 사함을 받고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의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에게도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와 있습니다. 회개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건강은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웃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인간의 뇌는 진짜로 웃는 건지, 가짜로 웃는 건지 모른다고 합니다. ‘잘 웃는 방법 따로 있다’라는 글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는 더 크게 웃자, 둘째는 작은 부분을 놓치지 말고 웃자, 셋째는 시간이나 양을 정해놓고 웃자, 넷째는 웃음 친구를 만들어 놓고 웃자, 다섯째는 스마일 라인을 정해놓고 웃자, 여섯째는 가족과 함께 웃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 이야기를 하는 의사가 있습니다. 암전문의인 이병욱박사는 ‘울어야 산다’고 합니다. 그는 살고 싶으면 많이 울어야 한다고 하면서 울 기회만 있으면 만들어서 울어라고 권합니다. 그가 말하는 일곱 가지 눈물의 법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조건 울어라, 둘째는 무시로 울어라, 셋째는 무수히 울어라, 넷째는 무릎을 꿇고 울어라, 다섯째는 무안을 당하더라도 울어라, 여섯째는 무차별적으로 울어라, 일곱째는 무엇보다 먼저 울어라고 합니다. 이 둘을 합치면 이런 말이 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웃다가 울어라.” 웃기만 해도 안 되고, 울기만 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웃기도, 울기도 다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는 것, 통회하고 자복하는 것은 신앙의 단계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복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바른 복음의 삶이 되지 못합니다. 수도사들은 처음 수도사가 될 때의 맹세를 매일 아침 합니다. 이것을 ‘영속적 회심’(perpetual conversion)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재회심’(reconversion)입니다. 이미 회개하였지만 매일 새로워지는 거듭남의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 베드로는 “내 발은 못 씻기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기지 않는다며 너와 나는 관계가 없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발뿐만 아니라 온 몸도 씻겨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발은 매일 씻어야 합니다. 이미 거듭났지만 매일 거듭남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면 한번으로 용서 받지만 우리의 회개는 한 번만 해서 될 것이 아닙니다. 영속적인 회개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짓고 살기 때문입니다.
결 론
미하일 이바노비치 안이라는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3세가 있습니다. 그는 구소련의 전설적인 축구영웅입니다. 그의 기록을 보니 정말 축구를 잘 했습니다. 그는 1979년 26세의 나이로 아깝게 비행기 공중충돌 사고로 죽었습니다. 어느 방송에서 그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였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에 해설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는 것은 이유가 없지만 아파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사는 것은 이유가 없다고요?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아무 이유 없이 사는 것입니까? 큰 일 날 소리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이미 나를 가지시고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나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란 회개를 통한 정결한 삶을 살 때에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우리 죄를 말갛게 씻김 받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처럼 ‘지정의’의 회개를 하고 복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명의 영이시여, 온 세상을 살리소서
겔 18:30-32 / 이상호 목사
마음, 영, 새로움
새해가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2009년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새로워진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날짜만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새해는,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생각, 새로운 결심, 새로운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이 없다면 아직도 묵은 해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밀턴(John Milton ; 1608∼1674)은 “마음이 지옥을 천국으로 바꾸고, 천국을 지옥으로 바꾼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문제는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일본의 경제주간지인 〈닛케이 비즈니스〉가 ‘기업 100년사’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 100대 기업을 선정해서 25년 단위로 흥망성쇠를 추적한 결과에 의하면, 한 세기가 지나도록 계속해서 성공한 기업은 17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개 25년 만에 망했다고 합니다.
성공했다 할지라도 새로이 개척하고 개혁하며 그 성공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빌게이츠는 “생존과 쇠퇴를 가르는 조건은 바로 ‘자기변혁(Renewal)’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쇠퇴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보십시오. 1960년대에 10대 재벌이었던 기업 중에서 지금까지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은 삼성과 LG 둘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근래 다 망했습니다.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근래에도 외환위기를 맞아 재빨리 구조조정을 한 회사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회사도 있습니다. 그래서 30대 재벌 중 대우를 포함한 14개 재벌이 망하거나 소유주가 바뀌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변혁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월이 가고 세대가 바뀔수록 자신을 새롭게 재무장해야 합니다.
미국의 MIT대 교수인 루디 돈부시는 한국의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한국 경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국경제는 금융시스템과 재벌구조, 관료제도 등에서 혁명적인 변화(Revolution)를 이루어야만 한 번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없으면 한국은 성장하지 못하고 희망이 없다. 과감한 개방을 하고 국제화를 추구해야 한다. 기업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여러 가지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관료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한국은 관료수가 너무 많다. 10분의 1씩 자꾸 줄여 나가야 한다.”
여러분은 한국 경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통령이 “구조조정, 구조조정” 하고 외치지만, 그 결정은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국민들이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적용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망한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결단을 가지고 새해 우리 인생을 새롭게 전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 한 진정한 사회개혁은 없습니다. 사회만 구조조정을 할 것이 아니라, 개인도 구조조정을 하고 변화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달라져야 합니까? 우리 인생에 있어서 구조조정은 무엇입니까?
본문 배경 설명
에스겔 18장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유다 백성들에게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구원과 회복의 복을 받으라고 전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을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느부갓네살 왕이 통치하는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다 백성들이 1, 2차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은 그발강가에 정착하여 유프라테스강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는 대규모 공사에 동원되어 노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절망과 탄식 소리가 나왔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속담을 들어, 이 고통은 조상들의 범죄 때문이라며 오히려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유다 백성에게 임한 심판은 각 개인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니 조상 탓하며 핑계하지 말고, 회개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돌이켜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조상 탓을 합니다. 부모 탓을 합니다. 정치가 혼란에 빠진 것도, 경제가 불경기에 처한 것도 다 남의 탓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잘못한 것도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도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회개하고 마음에 새로운 각오를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신도주일을 맞이하여 ‘생명의 영이시여, 온 세상을 살리소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30)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심판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각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기 인생을 책임지고 자기 죄 값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한 대로, 하나님은 공평하게 심판하십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누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탐욕과 교만과 불신앙에서 방탕과 타락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곧 죄로 인해서 다시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의를 되살리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도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容恕)하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회개란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시 34:18).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잠 28:13). 용서해 주십니다(사 55:7). 또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욘 3:10). 성령을 주십니다(행 2:38). 잘못되고 비뚤어진 삶을 버리고 깨끗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마귀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탐욕과 교만과 불신의 유혹, 시험을 주어서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시작은 보여주지만, 끝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미끼를 이용해 고기를 낚는 낚시꾼과 같습니다. 강태공은 날카로운 낚시 바늘에 잉어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아주 싱싱한 지렁이를 꽂습니다. 잉어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러운 지렁이를 보자마자 한입에 덥석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낚시꾼에게 잡혀서 죽게 됩니다.
지렁이를 삼킨 결과가 무엇입니까? 탐욕과 불순종의 결과가 무엇이며, 부정부패, 정경유착, 죄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자로 ‘죄(罪)’는 ‘넉 사(四)’자 밑에 ‘아니 비(非)’자를 씁니다. 동서사방이 다 안된다는 것입니다. 중국 사람은 ‘죄’를 그렇게 이해한 것입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가도 안되고, 서쪽으로 가도 안되고, 남쪽으로 가도 안되고, 북쪽으로 가도 안되고, 이것저것 다 해도 안되게 하는 것이 바로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죄는 인간을 망하게 만듭니다. 파괴시킵니다. 방탕하고 타락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이 가득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에 외항선을 타는 마도로스 집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집사였지만 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오게 되었을 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그가 이미 심각한 암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3개월 남았습니다. 간에도 위에도 폐에도 암세포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는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이 집사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살았는데, 앞으로 3개월 후면 나는 죽는다. 그렇지만 지옥에 갈 수는 없어. 3개월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의롭게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고 그때까지 전도하지 못했던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3개월 후면 죽네. 그러나 죽으면 반드시 천국과 지옥이 있어. 자네도 예수 믿고 천국 가게.”
술 마시고 방탕하게 살던 사람이 전도를 하니까, 친구들은 점점 감동을 받고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수십 명을 전도했습니다. 그는 비록 3개월밖에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 내 전도에 결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면서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1년이 되었습니다.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던 사람이 계속해서 3년간 전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암으로 죽지 않고 그 후로도 30년 동안 더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헌신했습니다.
죄 값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병으로 암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충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용서하십니다.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2.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 마음, 영, 새롭게 함, 변화(:31)
우리는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내 인생을 망치고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죄에서 벗어나, 이제는 몸과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이스라엘 족속아, 이제 너희는 더 이상 죽을 생각하지 마라. 어찌하여 너희가 죽고자 하느냐? 왜 절망하느냐? 왜 포기하느냐? 왜 자살하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삶을 보장해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시편 51편 10절에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創造)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새로운 영을 주시옵소서. 성령을 주셔서 저를 새롭게 만드시고 저의 인생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저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사오니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에스겔 36장 26절에는 “또 새 영(靈)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새 영, 곧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면 돌같이 딱딱하게 굳은 마음도 부드럽게, 온유하게, 새롭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강퍅한 마음, 교만한 마음, 불순종하는 마음,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 모든 불의한 마음이 녹아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변화된 마음을 가지고 로마서 12장 2절의 “너희는 이 세대(世代)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이 세대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교만 속에 삽니다. 탐욕 속에 삽니다. 이기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어 탐욕과 교만에 빠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세상 사람들을 따라 가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심령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됩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삼상 10:6).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시 51:10).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사 40:31).
마음과 영이 새로워진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 주부가 인생살이가 불안하고 두려워 점쟁이를 찾아다녔습니다. 그것도 매주 한 번씩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점치러 가기 전날 밤이면 혹시 불길한 점괘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점을 치고 난 후에도 나온 점괘 때문에 불안해서 밤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점을 치러 다녔습니다. 매주, 점괘 때문에 운명이 흔들리는 점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주부는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점을 안 쳐서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전에 점쟁이한테 다닐 때는 갈 때도 불안하고 올 때도 불안했었는데, 지금은 교회 다니니까 갈 때도 기쁘고 올 때도 기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오면 마음이 기뻐야 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고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는 사람, 점치러 가는 사람, 교회에 가는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비교해 보면, 그래도 교회에 가는 사람의 얼굴이 제일 훤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의 말씀과 축복이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슴속에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32)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부유함을 주시고, 기쁨과 행복을 주셔서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국기에 별이나 십자가가 있는 기독교 국가는 다 잘삽니다. 복지국가입니다. 잘 먹고 잘살고 다른 나라를 도와줍니다. 기독교는 축복의 종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살리는 역사, 생명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비록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면, 비록 잘못했다 할지라도 바로잡고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도 기독교 국가만 되면 하나님께서 살려 주십니다. 1천만 기독교인이 2천만이 되고, 2천만에서 4천만, 대통령부터 온 국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크리스천이 된다면, 정경유착은 떠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넘쳐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는 “우리 나라에는 교회도 많고 기독교인도 이렇게 많은데 왜 부정부패가 그리도 많습니까?” 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네 명 중에 한 명만 교회에 나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머지 세 명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죄악에 빠져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네 명 중에 두 명이 교회에 나가고, 네 명 중에 세 명, 네 명 중에 네 명이 모두 교회에 나가게 되면, 정의와 정직과 성실과 의가 나타나서 한국도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전도하면 나라가 삽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마음을 실천하며 말씀대로 살면 우리 나라도 선진국가가 될 것을 믿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1장 15절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도박꾼들은 다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꺼번에 돈을 벌어서 횡재하려는 욕심 때문에 자기 재산과 인생과 가정을 파괴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본분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과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혹시 “왜 악한 사람, 죄인이 버젓이 살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벼락을 치든지 해서 혼을 내시지 않고.”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도 회개케 하기 위해서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살기를 더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신 5:29). 올바로 살고(왕상 3:10), 정직하게 살기를(대상 29:17) 원하십니다. 형통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시 35:27). 하나님은 성도가 부자 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잠 10:22). 화목하게 사는 것(골 1:20),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딤전 2:4), 멸망하지 않고 죽었을 때 천국 가는 것(벧후 3:9)을 원하십니다.
뱀 중에는 아스피스라는 아주 작은 뱀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뱀에게 물리면 기분이 아주 좋아져서 잠이 스르르 올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분이 좋아져서 자다 보면 죽게 됩니다. 처음에는 기분 좋게 잠이 들지만, 결국에는 온 몸에 독이 퍼져서 생명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순간적으로는 좋고 기쁘고 쾌락을 느낄지 모르나, 결국은 거기에 빠져서 죽게 됩니다. 악한 마귀 사탄은 우리에게 와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 교회에 나가지 말라. 충성하지 말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 네 욕심, 네 욕망, 네 뜻대로 살아라.” 하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말이 좋은 것 같지만, 그대로 하면 할수록 멸망과 죽음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짐승하고는 다릅니다. 자동차도 길이 있고, 비행기도 항로가 있고, 심지어 천둥오리도 그들이 날아다니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도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인생의 길을 정하셨습니까? 어떤 방향으로 나가시겠습니까?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축복의 길이 있습니다. 성공의 길이 있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결과를 생각하며 길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방탕하고 타락했던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용서하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인간에게는 포기가 있지만, 하나님께는 포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과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마음을 새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맺는 말 :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하여서,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를 체험하고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우리는 이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인생을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엽같이 둥둥 떠내려가는 인생에는 파멸과 멸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웨터 수출사업을 하다가 파산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절망과 허무를 느꼈습니다. ‘인생이 이런 것인가? 아냐, 뭔가 있겠지.’
그런데 마침 전도를 받아서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 나가서 은혜를 받아 마음에 평강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교회에 잘 나갔는데, 3년째 되던 해에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다름 아닌 십일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데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니까 그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 교회 안 나가. 하나님 안 믿어!’ 그는 교회를 뛰쳐나가 3년 동안 다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내가 그만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인가보다. 징계를 받아 마땅하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야.’
그는 다시 교회에 나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내의 중풍병을 고쳐주시고 반신불수에서 일어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간절히 회개하고 기도할 때 몸이 뜨거워졌고 성령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내와 함께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부부가 3일 동안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하나님의 치료와 능력이 나타나서 아내의 몸은 중풍으로 인한 마비 증세가 풀리고 정상적으로 피가 순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게 된 아내는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십일조는 시험이 아니라, 축복이구나. 축복의 씨앗이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재물의 축복을 주시는데 나는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는 뒤늦게 하나님께 감사하며 십의 이조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축헌금도 드리고 열심히 헌신, 봉사, 충성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새 집도 허락해 주시고, 그가 원하던 사업도 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그 가정에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 때문에 시험에 드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각오를 하고 새로운 축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흥하기를 원하십니다. 병들어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십니다. 형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작년 보다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갑절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가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아서 기적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