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33
11월6일[연중 제3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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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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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v7Tbg_sY1jM
[예수회 이헌준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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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새로운 왕국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합니다!>
예비신자들이나 갓 세례를 받은 형제자매들이 무심코 읽었을 때 꽤나 당혹스런 성경 구절들이 몇 군데 있는데, 오늘 봉독되는 복음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27절)
병행 구절이 마태오 복음에도 등장하는데, 그곳에는 ‘나보다 더’라는 표현이 추가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오 복음 10장 37절)
‘나보다 더’라는 표현이 추가되니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말씀의 진의는 부모나 가족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보다 더 그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께 삶의 최우선권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건설하시려는 새로운 왕국은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합니다. 거기서는 더 이상 그 어떤 차별도 소외도 없이 공평합니다.
“유다인도 그리스도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 펼쳐질 새로운 세상에서의 국면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 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마태오 복음 21장 30절)
결국 예수님 말씀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언젠가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든 형제자매들이 한 가족이 될 것이니, 지상에서부터 그런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 앞서 예수님을 선택하고, 그분께 우선권을 드리며, 그분 중심으로 살아가면서 언젠가 도래할 새로운 질서의 세상에 미리 맛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모든 가치들에 앞서 하느님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하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 혈연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라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둬야 하는가?’ 하는 화두를 늘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열두 사도가 새로운 예수님의 영적 가족이 된 것처럼, 오늘날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예수님께 봉헌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분의 가족으로 수용됩니다.
새로운 혈연관계가 풍성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의 영적 가족을 통해 우리는 장차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맛보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을 통해 그분의 형제가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전이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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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혹시라도 무늬만 제자,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며칠간 연이어 봉독된 복음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 잔치 초대였습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는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상의 초대장을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지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초대받은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도, 예수님의 제자직 초대에는 크게 망설입니다. 그 이유는? 소명에 응답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복음 14장 26~27절)
성전에서 봉사하던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는 자신의 부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모릅니다.” 그는 형제들과 절대 만나지 않았으며, 자식들마저 모른체 했습니다. 하느님 성전에 봉사하기 위해 가족을 칼처럼 끊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이유로 가족에 대한 모든 의무를 부차적인 것으로 격하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은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네번 째 계명을 폐기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으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셈족어의 표현으로, 어떤 사람, 어떤 대상을 의도적으로 2차적인 자리에 둔다거나 소홀히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의 진의(眞意)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불효하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형제자매들과 등지라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존재, 모든 대상에 앞서 하느님께 최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세상의 모든 질서 체계가 뒤바뀌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세상 만사 안에 첫째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인간들과 존재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그분 존재는 모든 법중에서 가장 첫째가는 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분의 크심과 완전하심, 새로움 앞에, 이 세상 모든 존재나 대상은 그림자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 안에서 예수님은 최우선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계신가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기억하고 찬미하는 기도생활, 영적생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 사랑의 실천에 최우선권을 두고 있는가요? 혹시라도 일에 대한 욕심, 자리에 대한 욕심, 부차적인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예수님은 우리네 삶 속에서 첫번째 자리가 아니라, 가장 가장 자리로 밀려나가 계신 것은 아닌가요?
혹시라도 무늬만 제자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 중독 증세, 취미활동 중독에 푹 빠져, 기도생활이나 영적 생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에는 무관심한, 짝퉁 제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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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Zbns0BK9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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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일부분만 버리기로 작정하며 시작한다면?>
오늘 복음에서 누군가의 제자가 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나옵니다. 바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소유를 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순종’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자기 소유입니다.
며칠 전에 성령 기도회 때 수원교구 윤민재 베드로 신부님이 하신 강의 중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제 기억이 올바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어떤 자매가 병자성사를 달라고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데, 재발하면 의사가 80% 이상 사망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발한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 자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에겐 누군가를 향한 깊은 미움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을 만나면 상해를 입히려고 옷에 칼도 넣고 다녔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그런 상황에선 병이 치유될 수 없을 것이라며 그 사람을 용서하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미사도 넣어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었는데, 재발한 암이 다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의사도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혈액암은 치료가 되었지만, 그분은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에게 약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수술을 한 번 더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병자성사를 다시 달라고 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약을 그냥 먹으면 되지 왜 굳이 수술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수술하려면 한 달간 무균실에 있어야 하는데 거의 죽을 고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건 아픈 게 아니니 병자성사는 줄 수 없고 안수만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분은 고집을 부리며 수술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성당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다른 성당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수술하였는데, 암이 세 군데로 전이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분은 신부님께 와서 신부님 말을 듣지 않은 것에 죄송하다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다시 병자성사를 주었고 신기하게도 그 자매는 며칠 뒤 사진을 찍었는데 암이 다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교회에 순종하는 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면 은총이 주어집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성당에 다닐 것이면 그리스도의 대리자에게 순종할 결심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 소유를 다 버릴 수 있을까요?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을 없애야 합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소유할 수 있는 주체인 내가 죽으면 됩니다. 아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악이요 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윤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려고 하면 흰 뱀 2마리가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그분의 말을 잘 들어보았습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분이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죽은 시어머니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남편입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내의 버릇을 고치도록 두들겨 패게 시켰다고 합니다. 남편은 지게 작대기로 아내를 때렸고 아내의 허리가 다쳤습니다. 아내는 남편도 밉고 시어머니도 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부님은 그분들을 용서하고 미사를 넣고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잠을 편안히 잘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된 존재이고 나의 판단은 항상 옳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진리이시고 우리는 거짓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으려면 죄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가 그분과 온전히 일치하려면, 나 자신을 죄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습니다. 만약 나에게 좋은 게 있다고 여긴다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기 제자가 되고 싶다는 이들에게 배추를 거꾸로 심고 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 사람들만을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루르드에서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구정물로 얼굴을 씻고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런 일을 시키실까요? 우리 자신의 판단은 무조건 틀린다는 믿음, 나의 스승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럴 수준이 아닌데도, 어떤 분은 저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하.사.시., 7기도, 성체조배 매일 1시간을 1년 동안 빠지지 않고 할 수 있다면 그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연히 하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언제나 옳아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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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관에 들어오려면 단지를 통과해야 하고, 단지에는 문이 있습니다. 관리 사무소에서 3달에 한 번씩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습니다. 10월 중순에 비밀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예전의 비밀번호를 눌렀습니다. 당연히 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비밀번호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을 보면 ‘비밀번호’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입니다. 컴퓨터를 시작할 때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요즘은 지문을 등록하기도 합니다. 은행 계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은행에서는 복잡한 비밀번호를 요구합니다. 대문자, 숫자, 영문자, 특수기호를 조합해서 8자리 이상으로 만들라고 하기도 합니다. 제가 자주 사용하는 아마존, 넷플릭스, 유튜브에도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메일에도 당연히 비밀번호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만드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나의 문을 지키는 겁니다. 아무나 나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나의 정보를 보호하는 겁니다. 나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겁니다.
예전에 서울의 밤거리를 밝히는 것 중에 ‘붉은빛의 네온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교회에서 십자가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의 죄를 구속하고 구원을 이루신 사건을 상징합니다. 이 상징은 신앙의 중심에 위치하며,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구속과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그 희생을 통해 인류는 죄에서 구속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는 요한복음 3:16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둘째,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구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를 통해 죄에서 벗어나지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사랑과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한 것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며, 이는 모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으로 초대하는 행위로 이해됩니다. 넷째, 승리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부활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생명과 영광을 상징하는 표식이 된 것입니다. 다섯째, 희생적 사랑과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길이 곧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자가는 신앙인이 따라야 할 길, 희생적 사랑과 헌신의 길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십자가는 단순한 고난의 도구가 아니라, 구속, 구원, 사랑, 승리, 희생적 헌신을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참된 삶의 자세를 이야기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무엇보다 겸손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중요한 것보다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의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 희생과 아픔이 있어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날 수 없어도,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된 진실과 정의를 위해서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신앙인들도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고, 기적을 행하였으며,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신앙은 은총을 받는 것이지만, 신앙은 받은 은총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신앙은 나와 내 가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연대 의식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십자가는 타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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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25-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이다. 박해 때에도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십자가였고, 우리 시대에도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기 뜻을 철저하게 끊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는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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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에서 바오로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 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 2,15).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는 윤리적으로 왜곡되고 뒤틀린 이 세상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나는 것’은 마치 동방 박사를 그리스도에게 안내한 별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비추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며(요한 17,15-16 참조),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구실을 해야 합니다.(마태 5,13-16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 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시류를 거슬러 가십시오.’ 세상 논리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고, 세상의 편협한 관점에서 자유로워져 사회의 비판적인 양심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프란치스코, 제36차 세계 젊은이의 날 담화, 2021.11.21. 참조) 부의 분배, 공무 절차, 사회 갈등, 낙태, 환경, 기후, 전쟁, 난민 등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비인간적이고 물신 주의적인 관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보통 이러한 시류 안에는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맺는 모호한 타협을 거부하고, 시류를 거스르며, 어두운 세상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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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니 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33)
1) 여기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가(신앙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자동적으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입니다. 이 말씀은 가족과 가정을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가족’은 현세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족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할 영적 동반자이고,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식구들이 구원의 반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또는 죄를 짓는 것을 본다면, 가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따라가면 안 되고,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들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선’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일을 함께 하는 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은 허무하게 사라질 육신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헛된 집착을 버리고 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2)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육신의 편안함만 찾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고, 바오로 사도의 말도 그렇고, 이 가르침들에 대해서 “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어려운 길만 알려 주신 것은 아닙니다. 좀 더 쉽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 길은 모든 것을 버려서 모든 것을 얻는 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라고 말합니다. 가지고 갈 수 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 가야 합니다. 27절의 ‘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과 33절의 ‘자기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3) ‘탑’에 관한 말씀은, “마칠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가 아니라, “끝까지 전력을 다하여라."입니다. 시작만 하고 마치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중간에 그만두는 사람은 아예 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믿음을 중간에 버린 사람은 처음부터 안 믿은 사람과 같습니다.
‘임금’에 관한 말씀은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싸우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려고(살리려고) 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이길 자신이 없어서 항복(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전쟁으로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줄 알고 우쭐대면서 감히 하느님께 맞서려고 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맞서서 자기만의 바벨탑을 쌓다가 망해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즉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바벨탑을 쌓으면서 무슨 큰 업적을 쌓는 것으로 착각하고 혼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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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공관 복음에서 제자가 되는 것을 말할 때, 공통적인 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우선 무엇이 나의 십자가인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 뒤를 따르기를 요구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쉽지 않지만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따르는 모습 안에서 제자로서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예가 들어 있습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은 공사를 마칠 수 있는지 계산해 봅니다. 탑을 완성하지 못한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전투에 나서는 임금은 상대방의 전력을 헤아려 싸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아무런 승산이 없다면 화해를 청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이 예시들은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식별이 필요하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이나 전투에 나서는 임금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루카 복음은 그것을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렇게 ‘내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것’을 지는, ‘나’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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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과 결단, 후회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결정 장애를 겪는 이유는, 어떤 선택이 후회 없는 선택일지 알 수 없거나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내가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느냐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인생을 통째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살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나의 무능과 나약함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새로운 회심과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때로 나를 너무 잘 알아서 미심쩍어 하는 가족과 같은, 가까운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면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괜찮지만, 늘 마주해야 하고, 함께 같은 공간에 살면서 서로의 약점을 뻔히 알고 있는 가족은 내게 십자가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버릴 수 없는 인연이 있고, 던져 버리고 싶은 상황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끌어안고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과 같은 인연과 인생의 십자가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바오로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때로는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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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사베리오 신부님]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가끔 젊은 친구들이 사랑 문제로 상담을 청하는 경우가 있다. 그 중,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부모들이 반대를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상담 내용도 제법 많다.
부모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상대의 경제적 능력, 학벌, 자라온 환경, 가족사항, 연령 등등 그 가지 수가 헤아릴 수 없다. 늘 자기 자식이 아깝기 마련인가 보다.
이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다룰 기회가 주어지리라 본다. 상담을 청하는 젊은이에게 일단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는가?” “그 사랑의 결과가 어떻다 하더라도 그 사랑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결심이 섰는가?” 보통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저하기보다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또 질문을 던진다. “부모님을 사랑하는가?” 역시 그렇다고 답한다. 그러면 나의 답이 이어진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 그저 다 퍼주고 싶은 것이 부모다. 그러기에 자식에 대한 욕심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반대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너의 선택이 옳을 수도 있고, 너의 예상이 빗나갈 확률도 있다.
중요한 것은 부모는 너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다. 행복할 자신이 있다면 밀고 나가라. 아니,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선택한 사랑에 책임을 지고 행복하게 살려 노력할 자신이 있다면 결혼을 해라.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는 자식이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당장은 부모에게 상처나 배신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너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부모 역시 행복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돌아간 선남선녀들이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축복 속에 결혼을 한 이들도, 그렇지 못한 결혼을 한 이들도 성공과 실패의 가능성은 똑같이 열려있다.
그만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함께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둘 사이에 넘기 힘든 난관에 부딪히는 상황이 오더라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두 사람 각자가 옳음에 의지하려는 마음이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바로 삶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사랑이고 그 사랑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시작해도 사랑으로 끝을 내기 힘든 것이 한계 많은 우리네 사랑살이다. 하물며 사랑으로 맺어지지 않는 부부의 연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결혼 이야기를 예로 들어봤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진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이다. 당신께서 맺어주신 가장 큰 인연을 버려야 한다는 무정한 하느님이 아니시다. 거짓이 아닌 진실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행복해지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욕망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많은 죄를 지어온 세상이다. 사랑은 제대로 해야 사랑이다. 서로가 아름답게 살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을 안겨주는 것이라는 진실을 기억하자. 부모든, 자식이든 행복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서로에게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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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누구든지 자기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
참으로 많은 사람이 여행을 즐기고 저 또한 여행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전과 달리 많은 사람이 국내 여행은 물론이고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이 많고, 그에 따라 텔레비전에서도 여행에 관한 프로그램이 참 많습니다. 토마스 만의 장편 「마의 산」에는 여행에 대한 유명한 글귀가 나옵니다. 『공간은 인간을 여러 관계로부터 해방시켜 주며, 인간을 원래 그대로의 자유로운 상태로 옮겨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 공간은 고루한 사람이나 속물조차도 순식간에 방랑자와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시간은 망각의 강이라고 하지만, 여행 중의 공간도 그러한 음료수인 셈이다. 그런데 그 효력은 시간만큼 철저하지 못한 반면 더욱 신속히 나타난다.』 이처럼 여행을 통한 공간의 변화는 우리의 정신에 활력을 주며, 여행을 통해 장소가 아닌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을 얻게 합니다. 결국 루카치가 표현했듯이 『소설이 자기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듯이, 여행은 궁극적으로 지금의 안일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기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행이 끝나자 길이 시작되었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길을 찾으면 그 길은 더 이상 이 세상의 길이 아니고, 그러기에 여행은 끝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식사 초대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군중들과 함께 길을 떠나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예루살렘이기에 이 여행은 여타의 다른 여행과 성격이 전혀 다른 죽음을 향한 여행입니다. 그런데 이 여행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길을 가는 데 혼자 가는 것보다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참으로 긍정적인 면이 많습니다. 저 역시도 여행에 많은 이들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단순히 여행뿐만 아니라 인생 여정에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좋은 일이라 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함께 길을 걸었던 군중들은 도대체 어디까지 예수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며, 어떤 의도에서 동행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왜냐하면 동행同行의 의미는 ‘일정한 곳으로 길을 함께 가거나 오는 것’이고, 이는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일정한 곳, 예루살렘으로 길을 함께 간다고 해서, 그들의 여행 목적이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행하는 동안 필요한 사람은 단지 함께 같은 곳을 향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꿈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 필요한 사람은 당신이 이미 시작한 꿈을 함께 공유하고 실현해 나갈 추종자입니다. 추종追從의 의미는 ‘뒤를 따라서 좇아가는 것’으로, 이는 곧 파스카의 여정을 함께 따르고 쫓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서에서 추종, ‘따라가다’의 의미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그분이 누구이신지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마르3,13참조),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꿈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끊임없이 떠나고 버려야 하는 이탈과 포기의 여정입니다. 이 여정은 장미밭과 같이 화사하고 아름답고 낭만적이 길이 아니라 가시밭을 통과해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 던져야 하는 십자가 길입니다. 이러한 여정은 일명 제자도弟子道, 곧 예수의 제자됨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과 동행으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예수님의 꿈을 함께 나누고 실천할 제자를 모집하고 선발해서 교육하는 여행인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고 모든 이를 초대하지만, 이 초대를 응답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운 과정과 기간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과 싸워야 하는 힘듦과 어려움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14,28) 그리고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14,31)라고 말씀하신 가운데서 예수님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다고 봅니다. 즉,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먼저 앉아서 헤아려보지 않겠느냐? 지극히 평범한 표현을 통해서 지원자에게 자신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리고 그 길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여러 어려운 과정을 극복할 수 있을지 먼저 심각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숙고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지원자가 참으로 깊이 마음에 새기면서, 기도 가운데 생각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33)라고 못 박듯이 표현한 추종의 기본 정신인 자기 부정이며, 이것이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제자 됨의 요건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린다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이 아니라 곧 주님을 따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십자가(=가족이나 사람과의 인연의 끈, 세상적인 욕심과 명예나 권력에 대한 욕구, 미성숙한 성격이나 기질, 고집, 교만, 이기심 등)로 작용하는 모든 것들을 버려야겠지요.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자유롭게 의연하게 그리고 꿋꿋하게 자신과 싸우면서 예수님을 끝까지 추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추종의 여정은 단지 눈에 보이는 길만이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은 내적 여정으로 이런 여정은 늘 모험과 위험함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서 참된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고, 하느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참된 자기를 만날 때만이 그 길에서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게 되고, 참 생명을 온전히 향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이 길 곧 제자 됨의 여정을 쉽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길보다 더 참된 자신을 발견하고, 진리를 만나고 그 진리가 모든 묶임에서 자유롭게 하고, 또한 생명을 충만하게 한다면 누가 이 길을 따르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따르는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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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설날에 네 살짜리 조카가 할아버지에게 두 손 모아 세배하는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손녀딸이 귀여웠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세뱃돈으로 만 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받지 않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저자인 고모는 조카에게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니 ‘감사합니다’하고 받으면 돼.”라고 말했는데 조카는 딴청을 피우다가 고모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고모, 나 저거 집에도 있거든.”
만 원짜리 지폐가 집에 있으니 받을 필요가 없다는 꼬마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린이가 행복하다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만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미사 후에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줍니다. 아이의 부모는 미사가 끝났으니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아이 때문에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사탕 받아야 한다며 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때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탕도 아닌데도, 이 사탕을 받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진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지금 우리는 과연 어떠한가요? 지금의 자리에 얼마나 만족하고 있습니까? ‘더~ 더~’를 외칠수록 하느님 나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데, 계속해서 ‘더~ 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기억납니다. 이 말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껏 살면서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집니다.
이런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주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주님을 제일 마지막 자리에 놓는다면 결코 만족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을 비롯한 모든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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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바램>
루카 14,25-33 (버림과 따름)
그때에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바램>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기꺼이
나의 것을
다 버리고
오직
당신만을
가질 수 있기를
아니
당신마저
갖지 않고
다만
당신처럼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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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먼저 추구해야 할 가치>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대립하고 등진다는 것이 아니라, 더 곰곰이, 더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탑을 세우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듯 우리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민감하게 식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식별의 결과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예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녀의 출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녀는 가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다른 것에 앞서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나 자신도 하느님에 앞서 내세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자녀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혹 남의 자녀가 출가하는 것은 환영하고 내 자녀의 출가는 막는 이가 있다면 그 집착을 버리기를 희망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소유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 충만하길 빕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 서 있을 수 있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더 챙기고 더 채우는 준비가 아니라 더 내려놓고 더 비우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그분의 능력을 감사히 만나게 됩니다. 비우는 만큼, 내려놓는 만큼 기쁨이 함께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탈랜트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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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날,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라는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것을 무엇일까요? 마치 지난 시대의 유물처럼, 케케묵은 말이 되어버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는 단지 그들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떨어진 것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신종 권위가 지배하게 된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의 권위’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게 된 것일까요? 혹 자기 자신이나 재물이나 이윤추구가 차지한 까닭이 아닐까요?
가치관이 변해버린 이 시대에 우리는 대체 어떤 이를 스승을 모시고 싶어 할까요? 또한 무엇을 배우기를 바라고 있을까요? 참된 진리를 배우고자는 할까요?
오히려 이익을 추구하는 방편을 배우고자 열을 올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대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앞세워’ 배우고자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 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짊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짊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 데 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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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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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 땅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늦가을 밤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라는 권고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의 필리비서 귀한, 아름다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뜰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대로 살 수 있음은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는 은총이 있어 이렇게 살 수 있음을 봅니다. 어떻게 살아야 이렇게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참으로 단호히 구체적 처방을 주십니다. “누구든지”로 시작되는 말마디에서 예외없이 누구나에게 적용되는 참 제자의 삶의 원리임을 깨닫습니다. 열광하면서 큰 기대를 지니고 있는 군중들에게 꿈을 깨라는 듯 찬물을 끼얹는 듯한 제자직의 필수조건입니다. 값싼 은총도 없듯이 결코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다음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첫째,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 말에는 비교급이 없기에 이렇게 말합니다만,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은 ‘목숨보다 나를 더 좋아하지 않으면’, ‘목숨을 나보다 하찮게 여기지 않으면’으로 바꿔읽어야 제대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대한 사랑을 우선순위에서 첫째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그대로 지혜가 되고, 주님께 대한 이런 열렬한, 한결같은 사랑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사실 이래야 친지들과 자신을 맹목적 눈먼 사랑이 아니라, 눈밝은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없는 무사한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바로 아가페 순수한 사랑으로 친지와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평생공부가 주님께 대한 사랑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가난하고 불쌍한 민초들에게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연민이 넘치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는 참 엄격한 잣대를 적용합니다. 자발적 기쁨으로 제 책임의 십자가를, 제 운명의 십자가를 온사랑으로 죽기까지 기꺼이 지고, 끝까지 따라야 비로소 당신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책임적 존재가 되어 당신의 제자답게 살아야 함을 봅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운명애(運命愛)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내가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합니까? 역시 이런 제 책임을 다하는 사랑, 제 운명에 대한 사랑도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에서 기인힘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수록 주님은 이런 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랑과 힘을 선물로 주십니다.
주님은 여기에 둘의 예화를 추가합니다. 당신 추종은 1회성의 이벤트도 아니고 값싼 낭만도 아니기에 과연 끝까지 주님을 추종할 수 있을런지 냉철히 그 성소를 식별하라는 취지에서 망대와 전쟁 이중비유의 예화를 드십니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감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모하게 값싼 감상으로 주님을 따랐다가 유혹에 빠져 도중하차하는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예전 성철 큰 스님의 인터뷰 기사도 생각납니다.
“백련암은 어떤 곳입니까?”
“세상을 속이는 곳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화입니다. 값싼 낭만이나 감상에 결코 착각하거나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도원 역시 깨어 살지 않으면 그대로 세속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사실 당대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버림과 따름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문자그대로는 힘들더라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무소유의 정신은, 무집착의 이탈의 정신은, 무욕의 정신은 너무나 절대적입니다. 버림과 따름 역시 한두번이 아니라 평생 여정임을 봅니다.
저의 경우는 모든 보장된 것을 다 내려놓고 수도원에 들어왔기에 마음 해이해지거나 내적으로 무너지려는 순간, “내가 이렇게 살려고 늦깎이로 수도원에 왔나?”하며 심기일전 마음을 다잡고 살아왔음도 솔직한 고백입니다. 예전 권정생 동화작가가 어느 스님의 고백을 듣던중 “그렇게 살면서 죄를 지을 바에야 절에서 나오라” 했다는 일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한두번으로 끝나는 제자직의 여정이 아니라. 죽기까지 계속될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을 한결같이 사랑해야 하고, 한결같이 제 십자가를 져야하고, 한결같이 버림과 따름에 항구해야 하는 평생여정이라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주님의 제자직 수행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시편 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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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라고 바오로는 얘기하는데 이백 주년 성서에서는 ‘의지’ 대신에 ‘원의’라고 번역하고, 이전의 공동 번역 성서는 ‘할 마음’이라고, 영어는 ‘to desire’라고 번역합니다.
제가 다른 번역을 얘기하는 것은 ‘의지’보다는 ‘할 마음’이나 ‘원의’로 번역함이 낫겠다는 제 생각을 얘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는 ‘하느님의 호의’와 ‘우리의 원의’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호의에 따라 우리의 원의를 일으키신다고 하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실제로 원의를 일으킵니까? 하느님의 호의에 따라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는 원의를 가지느냐는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모든 호의를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누가 호의를 베풀어도 거절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 많지요.
누구의 호의는 부담스럽습니다. 어떤 호의는 싫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애초부터 부담스러운 사람은 하느님의 호의를 따를 생각이 아예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의 호의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면 그것을 호의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느님은 믿어도 예수는 싫은 사람이 그럴 겁니다. 싫고 좋음을 떠나서 무관심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그럴 겁니다.
어제 복음에서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자기가 장가들어서 응하지 않고, 겨릿소를 부리러 가야 하기에 응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따르지 않는 더 큰 이유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주님을 따를 때 요구되는 것들 때문입니다. 부모 형제 자녀와 아내 곧 가족과 자신마저 미워하면서, 가진 것을 다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면서 따르는 것이니 그 호의는 더더욱 따를 원의가 없겠지요.
그러므로 당신의 호의에 따라 주신다고 하는데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겁니다.
그러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부모는 없고,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단것을 주는 것은 호의도 선의도 아니듯이 하느님의 호의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이며 그 호의에 따라 우리에게 베푸시기에 우리의 호불호가 바뀌어야 합니다.
장가가기보다 천국 가기를 더 좋아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호의에 우리의 원의를 맞추고 입맛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싫고 그래서 원치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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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와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십자가!>
오늘 복음(루카 14,25-33)은 '버림과 따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라오는 군중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이와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철저한 자기포기'가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내 것이 비워지는 것'이, 그리고 '날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것들을 비워내는 노력'이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입니다.
비워져야 할 나의 것들은 무엇일까?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미 경고한 그대로 이제 다시 경고합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결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갈라 5,19-21)
'육의 행실들'입니다. 내 안에 채워져 있는 이러한 육의 행실들이 '하느님의 나라 건설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채움'을 위해서는 반드시 '비움'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부활의 절대적 전제는 십자가(죽음)입니다. 하느님의 것들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육의 행실들을 비웁시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필리 2,16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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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 33)
채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할
비움의
시간입니다.
가볍게
내려앉는
단풍의
겸허한
모습입니다.
잠시 들렀다
가는 길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신
예수님을
우리는 잊고
살았습니다.
소유는
자기 소유를
결코
보지 못합니다.
소유를
다 버리는
것에서
다시 시작되는
생명의
삶입니다.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방향이
예수님을 따르는
올바른 방향입니다.
버리고
비워야
가볍게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절실한
우리의
기도입니다.
짧은 삶을
살면서도
버리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순리는
버리는 것이며
비우는 것이
삶의 성장입니다.
단풍잎을
떨구어 내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하나되는
행복이란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하느님과
하나되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을
향하는
날 되십시오.
+++++++++++++++
(2)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43)
살기 위해
버려야 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버리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버림으로
얻게 되는
내적자유입니다.
버리지 않고서는
신앙의 이 여정을
제대로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가르쳐주십니다.
내것이라 착각한
자기 소유를
다 버리는 것입니다.
미련과 집착 또한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버려야 얻게되는
새로운 기쁨입니다.
신앙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버리지 못한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소유를 버려야
잃어버린 길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위령성월
되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내 소유를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버리는 이 여정을
먼저 걸어가셨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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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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