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속한 도반 이야기
1
한 도반이 발우를 챙기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새 것으로 바꾸라고 한.
옻칠이 흉하게 벗겨진 그 낡은 발우였다
''새 발우를 사셨나 보죠?"
''아니오. 광정스님께 돌려주려고요."
광정스님은 며칠 전에
입적한 수계도반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도반에게서 그
발우에 대해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아. 광정스님이
주고 갔다는 그 발우군요"
''네''
"어쩌시려고요?"
''어쩐지 그 가족에게 건네주고 싶네요''
조그만 종이 상자에 발우를 넣고 있는
도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별안간 유품이 되어 버린 그 발우가
도반에겐 부담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광정은 사고를 당하기에
앞서 이미 환속한 모양이었다.
평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구렛나루가 멋있게 흘러내린 그의
훤칠한 외모가 떠올랐다.
몇몇 도반들과 함께 그의 초재를
치르기 위해 광주의 한 암자를
찾았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가
환속한 사실을 알았다
그의 아내가 우리를 맞는데 한동안
운 탓인지 눈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홑몸이 아니었다. 임신한 지 여덟
달째에 접어들고 있다고 친정어머니가
넋두리처럼 말하는 소릴 들었다.
잠시 막막해졌다.광정은 한동안
번민과 방황의 시간을 보낸 뒤에
하산을 결심했을 것이다.
그 번민의 무게에 비해
너무나 짧게 끝나 버린 그의
세속의 삶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현실이라는 커다란 화두가
그의 사상을 조금씩 희석시키고 목을
차츰 조여 들어 갔을지도 모른다.
환속.어쩌면 산을 내려간 것이
광정을 죽인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퍽 복잡해졌다.
부산 범어사에서 광정을 처음 만났다.
해인사에서 행자 생활을 끝낸 광정은
사미계를 받으려고 그 곳에 와 있었다.
수계산림이 끝날 때까지 나는 줄곧
그의 옆 자리에 앉게 되어 나보다 몇 살
위인데도 그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수계산림을 끝내고서 아직
연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팔뚝을 보며 이런 말을 했다
"이제 성불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네요. 스님''
우리 그 날 당당하게 객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헤어졌다.
그 뒤에 은사 스님 곁에 머물다가
간경한답시고 해인사 강당을 찾았을 때
우린 풋나기 수행자로서 다시 만났다.
그는 그 때 사집四集 보고 있었다.
광정은 부락 시자 소임을
보느라고 한 주일에 서너 번씩
마을을 드나들었다.
스님들의 잡무를 대신하여
우체국에 가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 먼 시골장에까지 내려가
일용품을 구입해 오곤 했다.
그러나 내가 강당 생활 한 철을
넘기기도 전에 그는 해인사를 떠났고.
그 다음 결제 철엔 봉암사
선원에서 정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지나는 말로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소식이 없어 어디
토굴에나 박혀 정진하는가 싶었다.
자주 보던 도반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흔히 두 가지로 추측하곤 한다.
토굴 정진 아니면 환속이다
광정은 출가와 환속,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출가는 인생에서
가장 큰 도박이 아닐까 싶다.
성공하면 훤칠한 대장부요.
실패하면 속가 사람보다
못한 삶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2
우체국을 다녀오는 길에 양복을 말쑥
하게 차려 입은 신사 한 분을 만났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합장을 하는 게
아닌가.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다 싶어
이리저리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대답 대신 차나
한 잔 나누자고 했다
지난해 여름 안거를 해인사
선원에서 함께 지낸 스님이었다.
승복을 걸치고 있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어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의 사연은 대강 이러했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자로
지족암 큰스님과 친분이 있었단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 지족암에서
출가를 결심했을 때 모친은
독자라는 이유로 크게 반대하였다.
모친의 심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머리도 깎지 못한 채 하산하긴 했지만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 몰래 직지사로
입산하여 몇 해 동안 연락도 없이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착실히 지냈다
해제를 하고 오랜만에 그의
노모를 찾았을 때. 사태는 출가 전
보다 휠씬 더 심각해져 있었다.
이제는 포기했으려니 싶던 모친이
출가한 아들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신경쇠약으로 거의
실명할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그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때마침 나타난 한 여인
앞에서 환속을 저울질하게 되었다.
주민등록을 퇴거하려고 왔다는
그에게 넌즈시 환속한 도반 이야기를
했더니 표정이 많이 굳어졌다.
" 스님. 저도 걱정입니다. 시은만
축내고 또 이렇게 속인이 되었습니다.
축원 좀 해 주십시오''
''그래도 당당하게 사십시오.
출가할 때의 그 용기로 말입니다''
지난날 수행자로서 그가 보여
주던 호기가 환속이라는
옷 때문인지 많이 위축되어 보였다.
현실 앞에서 점점 나약해지고
있음이 뚜렷했다.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글이 떠오른다
인정이 짙으면 도심이 엷어지나니
냉정히 하여 미련 두지 말지어다
人情濃厚道心疏
冷却人情永不顧
3
이제는 "거사"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옛 도반을 만났다.
여름 안거를 지내고 있을 때
그의 결혼 소문을 들었지만, 막연하게
환속하지 않았기를 바랐는데.
오늘 그를 만나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한 셈이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동문으로 공부하던 시절의 도반에
대한 그리움이 앞서서 그를 만난 게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승복을
입은 모습만 떠올리고 있었다.
''스님. 반갑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며
그가 막상 모습을 나타냈을 때에
우린 조금은 당황했던 게 사실이다
짐작은 했지만 머리를 기르고
속복을 입은 그의
모습이 낯설어 보여서이다.
그러나 승복이든. 속복이든
그에게는 다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함께 정진하던 시절에
손재주 좋고 부지런한 그의 덕을
본 도반이 여럿이다
이제 그는 여지없이
한 사람의 생활인이었다.
책임이란 때때로 삶을 구차하게
만든다.그와 헤어지고 나서
우린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열심히 살고 있는 그를 보아서
안심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도반을 잃었다는 어떤 아쉬움과
허전함이 앞섰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보고 싶을 때에 망설임 없이
그를 찾기란 이제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도반은 출가할 때보다 더 비장
한 결심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환속은 처음 산문을 들어설
때보다 몇 골절 더 큰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노스님들이 하는 말이 있다.
"굽은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크고 곧은 나무는 이내
목재로 잘려 나가는 것처럼.
잘 생기고 쓸모 있는이들이 하산한다
는 뜻이다.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대체로 공부 잘하는 이들이 속퇴
하는 경우가 많고 그 가운데
열에 아홉은 사랑 때문에 승복을 벗는다
언젠가 그의 은사 스님이 한 말이다
"내 얼굴은 잘 생긴 편에는 들지 않아.
젊은 시절에는 인물이 좋은
도반이 부러울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색마장도 수행에는 커다란 벽이야.
그러니까 못생긴 덕에 아무런
장애 없이 지금껏 공부한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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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속한 도반 이야기---현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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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1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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