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8일 새벽 이한림 1군 사령관은 박정희 소장의 지시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로서 쿠데타군은 군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8일 오전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장면의 미국인 정치고문 도널드 위터카에게서 장면의 은신처를 전해 듣고 카르멜 수녀원을 찾아갔다. 장도영을 따라 중앙청으로 간 장면 총리는 金永善 재무장관, 太完善 상공부 장관, 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 등 국무위원들과 마지막 각의를 진행했다. 오후 2시 이미 선포된 비상계엄령의 추인과 내각 총사퇴를 의결한 다음, 장면은 의결서를 가지고 대통령 윤보선의 재가를 받기 위해 청와대로 갔다. 이로서 민주당 정권은 법적으로 소멸되었다.
이 시각 미국 대사관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 : 1970년대 초 한국대사로 부임, 유신선포와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음, 이후 미국무성 차관보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담당) 정치 담당 참사관은 매카나기(McConaughy) 미 국무성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에게 한국의 장면 내각은 이미 치명적인 강타를 맞고 산산조각이 났다는 전문을 보냈다.
5․16 쿠데타가 사전에 미국과 공모한 것이라는 추론은 오래된 것이며 자칭 한국의 진보 세력들은 명백한 사실로 인식하며 선전해 왔다. 그러나 당시 취재 기자들은 쿠데타 세력과 미국과의 첨예한 갈등을 보았다. 이러한 갈등은 2년 간의 군정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국제기구소위원회(Subcommittee on International Organization)가 1978년 10월 31일 발간한 한․미 관계 조사보고서(Investigation of Korean-American Relations)는 이 쿠데타가 미국과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본 小위원회는 CIA가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주장에 대해 조사했다. 모든 주장을 조사할 수는 없었다 할지라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 본 소위원회는 한․미 양측의 많은 관리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을 지적한 사람은 없었고 모두 UN사령부와 국무성이 쿠데타에 대해서 보인 원초적 적대감에 대해서 언급했다. 한 前職 미 관리(주: Gregory Henderson, 5․16당시 미 대사관 문정관, 한국정치를 역사적 전통에 입각해 분석한 명저『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의 저자)는 “여타 미 대사관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CIA는 이전의 민주당 정부를 지지하며 폭력적인 계승자를 의심과 반감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인상을 자신이 받았다고 증언했다. The subcommittee looked into allegations that the U.S. CIA had supported the coup. While it was not able to investigate all allegations, it found no evidence to support this theory. The subcommittee interviewed a number of officials on both the Korean and U.S. sides. None indicated any U.S. involvement and all commented on initial hostility of the U.N. Command and the Department of State to the coup. One former U.S. official testified that he had formed the impression that "[the CIA] like the rest of the Embassy supported the anterior Democratic regime and regarded its violent successor with suspicion and antipathy." 》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던 5․16 쿠데타의 성공은 한 마디로 기적이었다. 미국은 장면 정권을 수호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해 왔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완강한 거부로 실패했다. 장면 정권은 성립하자마자 미국의 요구대로 일본과 교섭, 5․16이 날 무렵에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거의 성사시켰다.
또한 장면 정권은 1961년 2월 8일 ‘제 2의 태프트-가쓰라 협정’이라고 불리는 굴욕적인 ‘한미경제원조협정’에 서명했다. 협정의 제 3조 1항은 ‘원조자료 사용에 있어서 한국정부는 미국 당국자들에게 사업 및 그 계획과 관계기록을 제약없이 재검토할 것을 허용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 7조 7항은 ‘원조계획의 전부 혹은 일부는 미국정부가 사정의 변경으로 인하여 同계획의 계속이 불필요하거나 또는 부적당하다고 결정하는 경우에는 미국정부에 의하여 중단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내정간섭의 소지가 명백했다. 당시 한국정부 예산의 50%이상이 미국의 원조로 충당하고 있는 만큼, 이러한 조항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의 내정을 무제한 감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조계획을 임의로 중단할 수 있어 한국정부에 대한 강력한 통제권을 합법적으로 갖추는 것이었다. 이 조약에 반대하여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시민과 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여기에다 장면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이 끝까지 저항했던 환율인상 등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했다. 미국은 대한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 화폐의 가치 절하를 요구했었다. 장면정권은 1달러 당 650환이었던 환율을 1961년 2월에 1달러 당 1,300환으로 올렸고, 따라서 미국은 원조액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국회에서까지 ‘민주당 정권이 미 대사관을 제 2의 조선 총독부화 시켰다’는 비난이 공식 제기되었다. 장면 정권이 얼마나 미국의 뜻에 충실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이었다.
1961년 1월 Kennedy 행정부가 공식 출범하자 對韓 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백악관 안보팀에서 나왔다. 이들의 견해는 對韓 정책을 주도하는 국무성의 시각과는 상반되었다.
‘어쨌든 미국에 껄끄럽기 짝이 없던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는데 국무성도 한 몫을 했고 미국에 고분고분하면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장면정부가 들어선 것 아닌가. 장면 정부가 당 내분으로 지도력이 흔들리긴 했지만 최근 지도력도 회복하고 있다. 지속적 원조와 함께 미국이 적절한 정치, 경제적 지원만 해준다면 한국은 그럭저럭 제 갈 길을 찾아갈 것이다.’ 이것이 장면정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백악관 안보담당팀에 대한 미 국무성의 반응이었다.
미국 정부 내에서 장면 정권이 지나치게 무능하므로 미국의 섭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1961년 3월에 나온 Farley 보고서로부터 시작된다. Hugh D. Farley는 국무성 소속 ICA(국제 협력단)의 한국 지부 중견 간부로 기술 자문역이었다. 25쪽으로 된 이 보고서는 장면정권이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하다고 평가했으며 적절한 조치가 없으면 수개월 내에 무너질 것으로 예견했다. 팔리는 “미국의 대한 정책을 실행하는 USOM(대외원조기구)도 명확한 지도 노선이 없어 이 같은 붕괴를 막기에 역부족”이라면서 “미국이 4월 이전에 관료조직 대신에 전권을 가진 별도의 대규모 고문단을 파견해 한국을 개혁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보고서를 읽은 케네디 대통령은 CIA와 국무성에게 한국에 대한 정밀 평가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했고 국가안보회의(NSC)에게는 6월까지 새로운 對韓 정책을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새로운 대한 정책이 세워지고 있는 시점에서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팔리의 견해는 5․16이 발발했을 때 정권을 수호하려는 노력을 민주당 정권이 전혀 하지 않자 한국시간으로 5월 16일 밤에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잠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장면 정권이 스스로 쿠데타 진압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정리된 것이다. 5월 17일 장면이 그린 대사에 보인 태도는 미국 정부가 장면 정권 포기 결정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정권 담당자들의 행방이 묘연하고 유일한 헌법기관인 한국의 대통령까지 진압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이 직접 진압한다면, ‘장면 정권은 미국의 괴뢰정권’이라는 공산권의 선전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부담이 되었다. 국가위기나 변란시에 국정 책임자의 자세가 얼마나 정국을 변화시키는지 5․16은 잘 보여준 셈이다. 장면 정권의 몰락을 분석해 보면 쿠데타에 의한 ‘타살’이라기보다는 ‘자살’에 가깝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격렬한 당쟁을 하다가 동반자살한 셈이다.
지금까지 5․16 군사 쿠데타의 불법성과 주도 세력을 비난하는 견해는 너무나 많이 나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진압이 용이했던 이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시도조차 안 했던 장면 정권(민주당 신파), 더 나아가 민주당 전체에 대한 책임추궁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민주주의는 집권층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 민주정이 아니더라도 모든 국가의 헌법은 정권 담당자에게 국헌의 수호를 요구하며 이들은 취임식에서 헌정을 수호하고 국민의 복지와 안녕을 위해 진력할 것을 맹세한다. 쿠데타가 불법이라면, 그리고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국민에게 불행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면 장면 정권의 죄상은 어느 정도가 되는가. 더구나 윤보선은 쿠데타 이후 1962년 3월 22일 사임할 때까지도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5․16 이후 이른바 ‘민주화 투쟁’을 해온 한국의 야당들은 모두 민주당의 계승자들이었다. 이들이 5․16을 비난하면 할수록 그들의 죄과가 크다는 것을 주장하는 셈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일반 국민과 학생들이 궐기해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성립되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민주당은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성명 하나만 내고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까지 방관자로 있었다). 부정선거는 민주헌정을 파괴하는 행위요 군사 쿠데타도 불법이다. 국민들은 피를 흘리며 부정에 항거하는데 그 덕으로 집권한 정치 세력은 쿠데타를 진압 시도도 하지 않고 수배된 범죄자처럼 도주를 한다. 이승만 정권 당시 대표적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과연 집권 자격이 있었는가. 국헌 수호 노력을 하지 않은 점만으로도 제 2공화국은 반역죄를 지은 것이다(이 죄상에 대해 법의 심판은 물론 없었다).
[전두환 집권을 막을 방법이 없었던 80년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마저 95년에 전두환 일당과 더불어 구속되어 내란죄로 단죄를 받았다. 소위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럴 자격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장면정권이 친일파 정권이라 할 정도로 친일 행적을 한 자들이 많았던 것이 어쩌면 쿠데타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선 首相 장면(張勉)부터 보면 그는 1931년 이후 8․15 해방 직전까지 서울 동성(東星)상업학교 교장이었다. 1938년 2월 9일 경성(京城)연합청년단장 마에다(前田昇), YMCA 대표 윤치호(尹致昊) 등 약 10명의 협의로 조선지원병제도 실시축하회가 결성되었다. 이때 발기인이 73명인데, 장면과 조종국(趙鍾國)이 카톨릭 측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이 축하회는 신궁봉고제(神宮奉告祭), 대축하연, 기(旗)행렬, 경축탑(慶祝塔) 설치 등의 축하행사를 주관하였다.
1938년 10월 20일, 장면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산하의 ‘비상시 국민생활 개선위원회’ 제 1부 위원 44명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 위원회는 조선 총독부의 강력한 방침으로 제 1부 의식주, 제 2부 의례(儀禮)․사회풍조, 제 3부 부인생활에 관해서 내핍․근로 기타 전시생활개선운동을 주관했던 기관이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은 1938년 11월 1일부터 43명으로 구성된 ‘비상시 생활개선 순회강연반’을 전국 13개 도에 파견했다. 장면, 고에즈까(肥塚正太), 유형기(柳瀅基), 조동식(趙東植) 4명이 강원도 순회강연반이었다.
1939년 5월 중순, 명치정(명동) 성당은 동 교회 이사 아 라리보 주교 및 장면 등의 지도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였다. 이 형태를 전국에 확대시키기 위해 이들은 같은 해 5월 14일 명치정 성당에서 지방 성당 대표 60여 명을 포함한 카톨릭 교도 1천 여명의 참석으로 국민정신총동원 카톨릭 경성(京城)교구연맹을 결성하였다. 이사장은 아 라리보 주교, 이사 노기남(盧基南)․구로까와(黑川米尾) 등 5명, 간사는 장면․이와다니(岩谷二郞)를 합쳐서 7 명이었다.
장면은 이승만 정권 시절에도 2대 국무총리를 지낸 바 있다.
장면 정권의 실력자 박순천은 3․1운동에 참가한 뒤 오사카 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가 수배 인물임이 밝혀져 1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1940년 12월 15일 결성된 황도학회(皇道學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황도정신의 체득과 보급을 목적으로 했던 이 단체는 1941년 1월 14일 이후 하루 2시간 주 4일 개강으로 대화숙(大和塾)에서 황도강습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1년 7월『춘추(春秋)』에 박순천은 시국논문「조선의 남편과 아버지에 소(訴)함」을 발표하였다. 박순천은 1942년 1월 5일 조직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隊)에 지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또 박순천은 1941년 12월 27일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주최 결전(決戰)부인대회에 연사로 출석했다. 지도층 여류인사 8명이 강연한 이 연설회에서 박순천의 강연 제목은「국방가정」이었다.
해방 후 60년대까지는 친일 경력이 있는 자가 국회의원이 된 예는 여당, 야당 그리고 무소속 등 모든 정치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부는 그 이후에도 국회의원이 되었다.
장면 정권 9개월 동안 장관 35명 중 60%인 20명에게서 친일 경력이 발견된다. 일본에 협력하고 빌붙었던 자들이 새로운 강대국인 미국에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대 한국 야당이 친미 사대적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장면 정권이 가장 친미적 정권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장면이 5․16이 났을 때 군부대로 달려가 진압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헌법수호의 의무나 정권을 팽개치고, 처음에는 미국 대사관으로 나중에는 외국인 수녀원으로 도주하는 추태를 벌인 것도 어떻게 보면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장관들도 도주하기 바빴다. 부흥부 장관 주요한은 5월 18일 아침 장관들을 대표하여 윤보선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윤보선은 장도영에게 부탁하였고 장면 정부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방송이 나갔다. 이 방송을 듣고 장관들은 중앙청으로 나와 마지막 국무회의를 가지고 사퇴했다.
이 같은 현상과 대조적인 것이 구한말 김홍집의 인간 드라마이다. 주지하다시피 김홍집은 갑오개혁에서 총리로 친일․개화정책을 주도하였다. 아관파천으로 친러파 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역적으로 몰려 체포령이 내려졌다. 흥분한 군중들이 몽둥이로 그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군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달려왔다. 김홍집은 “조선의 총리로서 동족에게 맞아 죽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남의 나라 군인에게 구차하게 구원을 받을 생각은 없소!” 라며 일본의 도움을 거절하였다. 김홍집은 타살되었고, 시신은 개 끌리듯 종로까지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했다. 여기에서 김홍집의 친일․개화정책이 최소한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 아님은 알 수 있다.
민주당 정권에서 수상과 장관의 60%가 친일 경력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5․16은 무혈 쿠데타였다. 박정희 소장은 처음부터 피를 흘리지 않으려 했다(실제로 사망자는 거의 없었다). 군사쿠데타라고 해도 쿠데타군이 김홍집을 습격하던 군중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리는 없다. 민주당 정권의 행동에서는 아무런 대의와 명분을 찾을 수 없다.
친일은 한 시대의 민족의 비극이었다. 누구도 과오를 저지를 수 있으며 그 과오를 들추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해방 이후 태어나서 친일파가 될 기회가 원천적으로 없었던 이들이 핏대를 올리며 친일파를 규탄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으면 친일파가 되지 않고 모두 이봉창, 윤봉길 의사 같은 애국자가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국의 엘리트 계층 중 부일 경력자는 좌우익을 막론하고 상당수였다. 그들이 과오를 씻을 기회를 갖기 위해서도, 능력을 신생 조국을 위해 발휘하기 위해서도 요직에 앉을 수는 있다. 국민이 선택하든, 집권자가 선택하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 장면정권도 그들의 친일행적이 단순한 한때의 과오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속성에 근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장면 정권이 존속했더라면 민주주위와 시장 경제의 발전이 병행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라면서 ‘아쉬움 사관(might have been view of history)’에 사로잡힌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정권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과연 민주주의와 국가안보도 달성하고 경제성장도 할 수 있었을까. 장면정권도 여러 가지 국가발전계획을 작성했지만 계획이 실천은 아니다(1999년 현재 장면의 수제자가 집권중이니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잘 발전하는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헌정수호의 의무가 있는 대통령과 수상이 헌정파괴 행위인 쿠데타를 진압하기는 커녕 동조하거나 도주한 사실, 오히려 외국인에 불과한 주한미군 사령관이 진압에 노력했던 희극적 상황에 한국민주주의의 비극이 있었다(이후 장면은 정계를 떠났으나 윤보선은 두 번이나 야당 단일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여기서 역사에 묻는다. 장면 정권은 절대 빈곤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꽃피웠을 정권이었는가,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야 마땅할 집단이었는가.
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를 다룬 서적이 이전에 비하면 ‘쏟아져 나온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왔다. 이들 책의 대부분은 역사서가 아니라 정치 신화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들이 스스로 옳다고 믿는 확신의 강도는 일본 극우파보다 더 했다. 신화는 낭만성이 있고 인간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나 이 책들의 정서는 ‘저주’와 ‘증오’ ‘열등감’ 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군부에 책임전가를 하는 것이 이 책들의 공통된 내용이다. 이러한 인쇄물들이 ‘참된 역사’라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선전되는 현실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군 출신을 비롯한 각 정치집단은 비난이나 공적에 있어 각기 정당한 제 몫을 찾아야 한다.
5․16 군사 쿠데타에 비교해 볼 때 1973년 9월 칠레의 군사 쿠데타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철저하게 미국의 주도로 기획․수행되었다는 점, 무혈 쿠데타였던 5․16에 비해 제 3세계에 있었던 모든 쿠데타 중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점, 헌정 수호를 위해 대통령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 등….
“만약 아옌데가 승리한다면, 이번이 마지막 선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1970년 칠레의 치열한 대통령 선거운동 기간 중 유력한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의 정적들이 한 예언이었다. 아옌데는 사회당, 공산당, 및 여타의 급진세력과 일부 기독교 민주당원의 연합전선인 인민연합(Unidado Popular)의 후보였다(칠레 공산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는 아옌데 단일 후보를 위해 사퇴했다. 네루다는 다음해인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여 칠레 문인으로는 여류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Gabriela Mistral에 이어 2번째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아옌데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그의 목표는 “칠레적 방식”에 따라 사회주의를 합법적, 평화적으로 달성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국민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고 아옌데는 선언했다.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상류층 출신인 아옌데는 초기 정치생활을 철저한 헌정수호로 일관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칠레 공산당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는데 소련권의 공산주의와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는 철저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를 한가지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표명했다.
“우리는 소련을 모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방법을 모색하려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스스로 최선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와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자주 독립을 바랄 뿐입니다. 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저서를 읽었지만 링컨이나 제퍼슨, 워싱턴의 책도 읽었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외세에 대항해 투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국을 건설한 인물들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투쟁을 잊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투쟁의 내용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아옌데는 1945년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래 25년 동안 계속해서 상원의원으로 일했다(1968년 상원의장에 선출). 이 기간 동안 그는 보건 후생과 女權에 관한 많은 법률입안과 의회통과에 주력했다(그는 의대를 나왔으며 정치입문 때까지 의사로 일했다).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의장인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내의 소위원회인 ‘40인 위원회’가 주도하였다. 1970년 3월 25일 40인 위원회는 ‘아옌데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한 작전’에서 CIA가 수행하려는 ‘선전 및 기타 행동’계획을 승인했다. 선거가 있기 3개월 전인 1970년 6월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이자 국가안보회의 의장인 헨리 키신저는 아옌데 후보의 당선이 예견되자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우리들은 어느 한 나라가 그 국민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공산화되는 것을 결코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CIA는 40인 위원회의 작전 명령에 따라 선거를 앞두고 칠레에서 대규모 선전 캠페인을 벌였다. 아옌데의 승리가 ‘종교와 가족생활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음을 경고하는 편지와 전단이 살포되었고 신문이나 방송광고를 통해 이들 내용이 전파되었다. 또한 아옌데가 승리하면 경제파탄이 올 것이라는 루머를 전국에 퍼뜨렸다. 미국 정부는 아옌데의 상대 후보자들에게도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선거 강령을 보면 아옌데 후보의 강령은 ‘농업 개혁, 구리산업의 국유화, 의료혜택의 향상’이 주된 슬로건으로 기독교 민주당 라도미로 토믹(Radomiro Tomic) 후보의 강령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토믹은 우익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그가 기독교 민주당 후보가 되자 1964년 선거에서 프레이 후보를 당선시켰던 중도-우파연합은 깨어졌다. 우파인 국민당은 1958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표 차로 아옌데 후보를 이기고 당선된 전직 대통령 호르헤 알레산드리(Jorge Alessandri)를 후보로 내세웠다.
드디어 1970년 9월 4일, 3파전의 선거에서 아옌데 후보는 36.6%의 득표로 근소한 차로 1위가 되었다. 보수파 후보인 전직 대통령 호르헤 알레산드리는 35.3%, 집권 기독교 민주당 후보인 토믹은 28.1%를 얻었다.
과반수를 획득한 후보가 없었으므로 칠레의 대통령 선거법에 따라 대통령 지명을 위해 10월 24일 상하양원 합동회의가 소집될 예정이었다. 의회가 최다 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지명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은 9월 15일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10월 24일로 예정된 칠레 의회에서의 아옌데의 대통령 당선 인준을 저지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위해 CIA는 칠레 의원들을 매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작전「트랙 Ⅰ」의 실패).
그러자 닉슨 행정부는 칠레 주재 미국대사 에드워드 코리(Edward Korry)를 시켜 현직 칠레 대통령인 에두아르도 프레이(Eduardo Frei)에게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만약 아옌데가 집권할 경우 미국은 칠레와 칠레의 국민들에게 가난과 비참함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그러나 프레이 대통령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중도 노선인 프레이 대통령은 1964년 칠레 사상 최다 득표인 56%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다. 그의 슬로건은 ‘자유속의 혁명’이었으며 그의 공약은 가난한 국민에게 국가의 부를 더 나누어주는 개혁을 제도화한다는 것이었다. 프레이 정부는 칠레에 진출해 있는 미국 동광(銅鑛)회사의 주식 51%를 매입하였고, 광대한 대규모 농장을 소작농에게 분배해 주었다. 비록 평화적인 혁명에 대한 프레이 대통령의 희망이 6년 임기가 끝날 때까지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진보에의 기대가 커졌으며, 그러한 기대가 아옌데의 당선을 가져온 것이다.
한편 헬름즈 CIA 국장은 닉슨과 키신저의 지시에 따라 정예요원들을 뽑아 특공대를 조직했다. 그리고는「트랙 Ⅱ」라는 작전명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는 공작을 했다. 이 작전은 윌리엄 로저스(William Rogers) 국무장관과 국방성 장관, 40인 위원회, 코리 칠레주재 미국 대사도 모를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에 칠레 육군참모총장 르네 슈나이더 장군이 방해 인물이었다. 슈나이더 참모총장은 헌법에 충실하고 청렴결백하기로 이름이 난 장군이었다. 슈나이더 장군은 권력의 순조로운 이양을 돕겠다고 공언했다. 게다가「트랙 Ⅱ」작전의 칠레 책임자로부터는 칠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뜻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CIA는 칠레 군부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고 있는 美대사관 무관인 폴 위머트 대령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위머트 대령은 슈나이더 참모총장 암살을 위해 首都인 산티아고 지역 사령관인 카밀라 발렌주엘라 장군, 그리고 1969년 군사 반란을 주장했다가 슈나이더 참모총장에 의해 예편된 로베르토 비옥스 예비역 장군과 비밀 접촉을 가졌다.
10월 22일 아침 8시경 슈나이더 참모총장이 출근길에 무장괴한들로부터 총격을 받고 산티아고 군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흘 후 사망했다. 그는 140여 년의 칠레 역사에서 최초로 암살된 군고위 장교가 되었다. CIA의 헬름즈 국장은 이 소식을 듣고『정말 잘해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아옌데 당선자의 대통령 인준과 취임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슈나이더 참모총장의 피격은 칠레를 일대 혼란 속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었으나, 프레이 대통령이 기민하게 대처해 위기를 넘겼다. 슈나이더 장군이 저격당한지 몇 시간 후 프레이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과 경찰군에 24시간 비상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지시했다. 10월 24일 의회의 최대 정당인 기독교 민주당 의원들도 인준투표에서 아옌데를 지지하는 등 의회는 153대 35로 아옌데의 당선을 확정했다.
11월 3일 살바도르 아옌데는 세계 최초로 자유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연설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제국주의적 착취를 타도하고, 독점을 없애며, 진정한 그리고 충분한 토지 개혁을 실시할 것이며, 또한 은행 및 금융을 국유화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임기가 시작되자마자 아옌데 대통령은 모든 관공서에 대통령의 사진을 붙이는 관례를 없애라고 지시하였다. 그러한 관례는 민주국가보다는 왕국에나 어울릴 무용한 격식이라고 일소에 부쳤다.
새 행정부의 개혁은 처음에는 대성공이었다. 1971년 초까지 식량생산은 대폭 증가했으며 공업생산은 14.6% 증가했다. 실업율은 8.3%에서 3.9%로 떨어졌고 인플레이션도 연간 35%에서 22%로 하락했다. 영아 사망률도 11%로 낮아졌다. 1971년 4월 지방선거에서 인민연합은 49.7%의 지지를 얻었다.
20세기의 칠레 경제는 미국에의 종속으로 특징지워진다. 칠레에 진출한 미국기업은 110개였으며 그중 가장 큰 것이 다국적 구리기업이었다. 구리는 칠레 총 수출액의 80%를 차지했다. 이는 구리광산을 장악하는 자가 칠레를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1970년 당시 칠레 구리생산의 80%는 미국이 차지했다. 1971년 11월 11일 칠레 의회는 지하자원의 국유화 개정안을 담은 개헌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아옌데 대통령은 이 헌법 개정을 ‘칠레 제 2의 독립’이라고 논평했다. 미국의 동광 회사들은 이미 칠레로부터 과다한 부를 가져갔다는 이유로 가지고 있던 광산 소유권 49%를 무상 몰수당했다.
미국 정부는 경제적 압력으로 아옌데 정권을 위기에 몰아 넣고 군사 쿠데타로 전복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국적 기업인 세계적 통신회사인 ITT의 경영진은 칠레 경제를 파탄시키기 위한 18개항의 프로그램을 작성, 백악관에 보냈다.
미국은 전략물자로 비축해 두었던 구리를 국제시장에 대량 방출, 구리 가격을 절반 이하로 폭락시켜 칠레 경제에 큰 타격을 가했다. 미국 수출입 은행과 세계은행은 칠레에 대한 차관 공여를 끊었다. 1년도 안돼 칠레에 대한 단기 차관은 2억2000만 달러에서 4000만 달러로 격감되었다. 칠레의 외환 보유고도 3억 700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로 줄었다. 동시에 미 국방성은 칠레의 군부와 긴밀한 접촉을 계속하면서 군사장비구매와 훈련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미국의 경제제재 조치로 칠레 경제는 위기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자본 도피가 계속 늘어났고 자본가들이 투자를 꺼려 생활필수품 공급부족 현상까지 생겼다. 미국의 곡물 판매 거부로 식량마저 부족해졌다.
경제위기가 지속되자 그 동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중산층도 아옌데 정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1972년 10월 전국적으로 파업이 일어나 국가 전체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CIA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 칠레 국민들의 불만을 선동하고 나왔다.
1972년 12월 4일 아옌데 대통령은 유엔 총회에서 미국의 횡포를 지적하며 국제사회의 도움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70년 9월 4일 선거에서 승리한 바로 그날로부터 우리를 노리는 막강한 외부 세력의 영향력을 피부로 느껴왔다. 그 세력들은 민중이 선거를 통해 자유롭게 선택한 정부의 출범을 저지하고 또 그 새로운 정부를 호시탐탐 쓰러뜨리려 노력했다. 또 우리를 이 세계로부터 몰아내려고 하는 조치를 우리는 보아 왔다. 그 조치는 우리 경제를 질식시키고 우리의 주요 수출품인 구리 무역을 마비시키고자 했으며 우리 정부가 국제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게 봉쇄했다.”
1973년 봄, 의회선거에서 CIA는 칠레야당에 선거자금을 지원했다. 경제적 곤궁과 미국의 야당 지원에도 불구하고 아옌데의 인민통일연합은 44%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 선거 당시보다 더 많은 지지를 얻었다.
아옌데 정권에서 프랑스 대사로 일했던 파블로 네루다는 건강 악화로 사임하고 72년 11월 귀국했다. 네루다는 미국 닉슨 행정부의 대 칠레 경제봉쇄에 항의해 73년에 마지막 시집『닉슨 살해 권고와 칠레 혁명 찬가(Incitación al Nixonicidio y alabanza de la Revolución Chilena)』를 발표했다. 이 시에서 네루다는 칠레 민주주의를 계획적으로 압살하고 있는 미국정부, 특히 그 공적 대표자로서 미국 대통령 리차드 닉슨의 범죄를 고발하고 군사 쿠데타를 예고하는 사건들을 일일이 지적했다.
1973년 7월 CIA는 화물트럭회사에 자금지원을 하며 파업을 선동했다. 트럭회사들이 다시 파업을 하여, 철도망이 발달하지 않은 칠레의 운송체계가 마비되었다. 일종의 자본가 파업이었다. CIA는 칠레에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이를 막을 방법은 군사 쿠데타밖에 없다고 떠들었다. CIA는 이 같은 선전 캠페인을 위해 별도로 1백만 달러를 투입했다.
1973년 6월 29일 산티아고 기갑 연대의 일부 병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칠레 대통령 관저인 모네다(La Moneda)궁을 포위했다. 격렬한 전투가 몇 시간 동안 전개된 후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42년 만에 발생한 군의 정부 전복시도였다.
[쿠데타가 빈발하는 여타 중남미 국가와는 달리 칠레는 헌정을 잘 지켜왔다. 1930년 이래 지주․자본가, 온건 중도 계급, 사회주의에 경도된 노동자 계급의 3부류가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분점했다. 대체로 단독 정권은 드물었고 중도+우익 또는 중도+좌익식의 연립정권이 많았다]
군부 내의 압력으로 카를로스 프라츠(Carlos Prats) 3군 총사령관이 8월 23일 사임하고 육군참모총장이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Ugarte, 아옌데와 같은 항구 도시인 발파라이소 출신, 칠레정치에서 지역색은 거의 영향력이 없다)가 8월 24일 3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쿠데타 발발 18일 전의 일이었다.
73년 8월 파블로 네루다는 전기작가 마르가리타 아길레와의 인터뷰에서 칠레 정세를 다음과 같이 진단하였다. “칠레로서는 지금이 비통한 순간이다. 그것은 나의 서재에까지 침입하고 있으며, 이 위대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칠레는 포화와 총성없는 조용한 베트남이다. 다른 한편 국내외에서 칠레를 향해 가능한 모든 무기를 쓰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전쟁을 하고 있다.”
9월 4일 인민연합 정권이 100만 군중이 모인 집회를 열었다. 네루다는 이 자리에서 내전의 위협을 물리치자고 호소했다.
분열과 혼란은 아옌데 대통령에게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야당의 협조를 얻어 난국을 타개하려 했으나, 이들은 군부의 향배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국가가 위기 속으로 침몰하자 정권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생각했다. 국민투표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지지할 경우 의회는 해산되고 총선이 실시된다. 이 선거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대다수가 자신을 지지하는 국회를 배경으로 통치할 수도 있고, 자신을 탄핵할 수 있는 적대적인 의회에 포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위기는 민주적 절차로 해결될 수 있다.
1973년 9월 7일 아옌데 대통령은 ‘배반의 장미’ 3군 총사령관 피노체트를 비롯한 군 수뇌부를 만나 그들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대통령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곤경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은 후 4일 후에 국민투표 실시안을 공표하겠다고 밝혔다. 군 수뇌부는 대통령과의 회동이 끝난 후 다시 모였다. 그들은 이제 9월 11일이 되면 국민들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된다고 수긍했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는 헌법에 의한 해결이 아니라 군사 쿠데타였다.
1973년까지 칠레 군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은 확고히 형성되었다. 미국은 1952년에 체결된 상호원조협정에 따라 21년간 칠레 장교들을 훈련시켰다. 훈련은 대부분 파나마 운하 지역에서 실시되었는데 이곳은 중남미 전체를 담당하는 미군사령부나 다름없었다. 운하 지역에는 모두 14개의 미군기지가 있었고 미국 남부사령부 관할이었다. 이들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린 베레로 알려져 있는 제 8특수군단의 훈련기지인 굴릭 기지였다.
1970년대 초에 칠레군은 4군으로 구성되었는데 3만 명의 육군, 미 해군 파견본부가 있는 발파라이소에 사령부가 소재한 1만 5천명의 해군, 9천명의 공군, 그리고 3만 명의 국가경찰군(Carabineros) 등이었다. 아옌데 대통령 재임기간 중 미국의 칠레에 대한 경제 원조는 10분의 1 이하로 격감한 반면 군사원조는 급증했다. 파나마에서 훈련받는 칠레군의 수도 2배로 증가했다. 닉슨 정부는 칠레 군부에 대한 지원을 증가함으로써 칠레군 내부에 아옌데 정권에 대해 독립적이면서도 그를 적대하는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칠레 군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미국이 미는 우익 성향의 구스타보 레이그 장군이 1973년 중반 공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8월 24일 3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한 피노체트는 1936년부터 군에 복무했다. 피노체트의 군 경력 중 미국 주재 칠레 대사관의 무관이었던 점과 1965년과 1968년, 1972년 등 세 차례에 걸쳐 파나마 운하의 미군 남부 사령부를 방문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피노체트가 3군 총사령관이 된지 몇 일 후 역시 미국이 후원하는 세자르 멘도사 장군이 경찰군 사령관이 되었다. 1973년 8월말에 이르러서 아옌데 대통령에 충성하는 군부의 실력자로는 라울 몬테로 해군참모총장만이 남게 되었다.
쿠데타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9월은 쿠데타를 일으키기에 이상적인 시기였다. 미국․칠레 해군은 14년 동안 연합작전이라는 연례군사훈련을 치러 왔다. 칠레 군부는 연합기동훈련을 앞두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1973년 9월 9일 일요일 미 해군의 유도미사일 순양함과 구축함 2척, 잠수함 1척이 칠레 북부지방에 정박했다. 미국 정부는 쿠데타가 순조롭지 않을 경우, 미 해병대도 쿠데타에 동원할 예정이었다. 이날 밤 3군 총사령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육군참모총장 세르히오 아레야호, 공군참모총장 구스타보 레이그, 해군참모차장 호세 토리비오 메리노(발파라이소 칠레 해군기지 사령관)는 “D데이는 화요일, H아우어는 06 : 00”이라고 쓰여 있는 간단한 메모를 교환했다.
9월 10일 월요일 밤 라울 몬테로 해군참모총장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9월 11일 육군․해군․공군․경찰군이 모두 가담한 4군 합동 군사 쿠데타가 발발했다. 새벽 무렵에는 군 병력이 주요 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칠레 전역에 걸쳐 처형이나 체포할 명단이 작성됐다. 대체로 저항은 경미했으나 수도 산티아고는 달랐다.
9월 11일 오전 9시 대통령은 칠레 국민들에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이것은 유언이 되었다. 군 병력은 신속히 움직여 칠레 전역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도로를 차단했으나 산티아고에 있는 마가야네스(Magallanes) 라디오 방송국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국민 여러분들에게 연설하는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쓰라린 마음으로 연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칠레의 군인 으로서 맹세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도덕적 형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그들은 힘이 있고 나를 부술 수도 있지만 사회의 전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국민들은 역사를 창조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들이 정의라는 위대한 희망에 대한 해설자에 불과했던, 그리고 헌법과 법률을 준수하리라고 약속했던 사람에게 항상 보여 준 충직함과, 여러분이 임명한 사람에 대한 신뢰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나는 언제나 여러분 곁에 있을 것이며 내 기억은 언제나 그러할 것입니다. 나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을 믿습니다. 누군가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 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 여러분들과 함께 믿습니다. 칠레여, 영원하라!
반란군은 연설이 끝난 후 대통령에게 투항한다면 가족과 더불어 해외 망명을 가도록 조치하겠다고 제의했다.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반란군 수뇌부는 오전 11시 공군이 대통령 관저를 폭격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통령이 경호원들에게 떠나라고 했으나 아무도 가지 않았다.
정오를 몇 분 앞두고 대통령 관저에 공군의 폭격과 탱크를 앞세운 반란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경호원들뿐 아니라 아옌데 대통령 자신이 자동 소총을 들고 전투원이 되었다. 대통령과 42명의 경호원들은 2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대통령 관저의 참호로 밀렸다. 모네다 궁의 대부분이 연기와 화염에 휩싸였다. 오후 2시 로베르토 가리도 대위가 이끄는 반란군 선발대가 모네다 궁 2층에 있는 접견실을 장악했다. 로베르토 대위는 접견실 건너편에 있는 작고 다부진 느낌을 주는 사람에게 난사했다. 6발이 복부를 관통했다. 대통령 주치의 엔리크 파리스 박사는 대통령 서거를 확인하고 시신에 칠레 국기를 덮었다. 전투는 이후에도 40분 가량 지속된 끝에 경호원 전원이 전사했다.
피노체트는 다음날인 9월 12일 칠레는 ‘내전 상황’이라고 선언했다. 사실 통상적인 군사 쿠데타는 아니었다. 공군이 아옌데 지지자가 많은 산티아고의 빈민가에 폭격을 하고 육군이 탱크를 몰고 쳐들어가 노동자와 빈민을 무차별 학살했으니 말이다.
쿠데타가 일어나기 1주일 전 미국 정부는 30만 톤의 밀을 판매하라는 칠레의 긴급요청을 묵살했었다. 그러나 쿠데타가 성공하자 백악관은 2450만 달러의 밀을 칠레에, 그것도 외상으로 판매하도록 승인했다.
칠레를 장악한 군사 평의회는 중남미에서 전무후무한 공포정치를 폈다. 3년 동안에 인구 900만 명의 나라에서 13만 명이 구금되었고 이중 1만 5000~3만 명이 살해되었다. CIA는 피노체트에게 그들이 작성한 ‘좌익명단’을 넘겨주어 대량 학살을 도왔다. 파블로 네루다는 1973년 9월 23일 사망하였다. 사인은 ‘암’이라고 발표되었으나 진상은 불확실하다.
칠레 군부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 가운데는 미국인, 스페인인, 프랑스인 등 외국인도 있었다(이것은 1998년에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체포되는 이유가 된다). 칠레에서 활동 중이었던 미국인 찰스 호먼과 프랭크 테루기는 쿠데타 직후 실종되었다. 이들은 아옌데 정권을 지지했으며 아옌데 정권의 정책을 옹호하는 간행물을 발행하고 있었다. 이들의 실종을 다룬 영화 ‘실종(missing)'은 1982년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반대자에 대한 인신비방과 모략도 횡행했다. 모략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만 이중에는 너무 저질이라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것도 많았다(군사 평의회는 아옌데 대통령이 반란군에 피살된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아옌데 대통령이 재임 중에 고급 위스키를 많이 마셨고 미국 포르노 잡지를 애독했으며 첩을 여러 명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빨치산이 되기 위해 직접 군사 훈련까지 받았기 때문에 국정운영을 할 시간이 없어서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고 떠들었다). 의회와 모든 정당은 해산되었고 선거도 없어졌다. 계엄 포고령만으로 국가가 운영되었다.
칠레의 정치인이나 국민들 중 군이 헌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군부의 집권의지를 오판한 야당들은 쿠데타를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었다). 칠레에서 선거를 통해 들어선 사회주의 정권이 독자적으로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간다면 중남미 국가 모두가 칠레의 예를 따르려 할 것이고, 이것은 미국에게 견딜 수 없는 타격이 된다. 좌익 성향의 정당이 집권할 수 있는 칠레의 정치구조를 미국은 뿌리부터 제거하려 한 것이다. 형식은 칠레군의 궐기였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주권국가 침공, 국가 원수 살해, 그리고 유서 깊은 민주적 헌정질서 파괴였다. 칠레 군사 쿠데타의 배후 연출자였던 미 국무장관 키신저는 바로 이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피노체트는 교대로 군사 평의회 의장직을 수행하겠다는 반란군 수뇌부의 약속을 깨고 다른 3군의 참모총장을 숙청했다[다음에 정권을 넘겨 주겠다는 약속은 밀약이든 공약이든 지켜진 예는 세계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두환이가 태우에게 정권을 이양한 것은 그간의 우여곡절은 어떻든 간에 특기할 일이다. 그렇다고 두환이를 ‘신의의 사나이’라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1974년 6월 군사 평의회 의장에서 스스로 대통령이 된 피노체트는 이후 군복을 입은 채로 육군참모총장, 3군 총사령관, 대통령직을 겸임하면서 칠레를 통치했다. 1988년 예상외의 국민투표 패배로 피노체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98년 3월까지 육군참모총장과 3군 총사령관직을 유지했다. 피노체트는 군에서 퇴역한 그 다음날 종신 상원의원이 되었다(칠레에서 상원의원은 불체포 특권을 지닌다). 피노체트는 1998년 10월 영국에서 살인죄로 구금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