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도 인터뷰 from 책 <90년대를 빛내 명반 50>
디씨의 luv-dydwjd 님이 올린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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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심심해서 타자연습 하는 겸 올립니다.
오타가 심심찮게 많으니 양해바랍니다.
명반: 필자 중 한 명인 나는 당신보다 한 살이 어리다.
참고로 청소년기에는 서초동 삼익 아파트에 살았다. 청소
년기를 같은 동네에서 보냈는데.... 그 당시에 당신은 이른바
노는 청소년 정도로 보였다. (웃음)그러한 생각은 당신이
현진영의 뒤에서 춤출때 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당시 춤추는 아이들은 대부분 별 생각이 없는, 지금의
b-boy들과는 달리 음악보다는 노는 데 괌심 많은 아이들로만
생각되어졋으니까. 우선 뮤지션이 아닌 청소년 시절의 당신의
생각과 경험들에 대해 듣고싶다.
이현도: 우선 나는 아직도 노는 데 관심이 많다. (웃음)
나의 청소년기는 한마디로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가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엉뚱하거나 생소한 것들이었다.
물론 지금은 사람들의 인식이 그나마 많이 넓어 졋지만, 예를 들어
요리사, 정밀 모형 제작, 힙합 등 이런 것들이 87년 당시 한 남자
중학생의 장래 희망이라면 모두들 의아해 했었으니까. 그리고 88년도였나?
찟어진 청바지와 귀걸이 때문에 경찰과 시비가 붙은 적도 있다.
명반: 본격적으로 뮤지션 또는 음악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물론 데뷔는 알려진 바와 같이 현진영의 백댄서와 작곡가였을 테지만.
이현도: 현진영과 와와를 하면서 어는 순간 나의 안무에 음악을 맞추고 싶어졌다. 늘 음악에 안무를
맞추다가 '이럴 땐 이런 비트가 이렇게 나오면 이 춤이 더 멋있게 보일텐데....'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집에 있는 피아노를 두들겨-연주보다는 두들겼다는 표현이 맞다-보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물론 피아노 소리 대신 신디사이저의 음을 대입시키면서 말이다.(웃음) 그때가 아마 91년도
였을 것이다.
명반: 듀스 1집은 속된말로'장난이 아니었다'. 힙합이라는 장르를 한국에서 댄스 음악이라는
흐름안에 어떻게 펼쳐 보일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보여준 쾌거였다. 물론 2집은 더 경악스러웠지만.
신해철의 말을 빌면 당신은' 아이돌 스타이면서 음악성을 갖춘 희귀한 음악인'이었다.
힙합은 지금이야 대중적인 포맷이지만 당시에는 인디한 장르였다.
힙합이 자신의 음악의 뿌리로 자리 잡은 계기는 무엇인가.
이현도: 하하하 해철 형님이야말로 그 '희귀한 음악인' 이 될 수있도록 길을 열어준 선배이다.
여담이지만 와와 활동 당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형에게 늘 막연한 질문 -악기나 음악에 관한-을 해댔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말할까 하던 형의 남감한 표정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초등학교 4학년때 - 아마 그래미
시상식이었을 것이다- 허비 행콕의 rock it 퍼포먼스를 보고 그 소리와 비주얼, 브레이크 댄스에 매료 되었다.
그 이후로 라디오로 afkn을 쉬지 않고 들으며 그 노래와 비슷한 전자 드럼위주의 그루브가 있는 음악을 -
지금 생각하면 r&B펑키 였다-을 찾아 듣기 시잣했다.
그러다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 run dmc의 랩을 보고 듣고는 춤을 시작했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명반: 다른 대중음악도 비슷하지만 힙합이나 댄스음악은 마땅히 배울 곳도, 가르쳐줄 사람도, 장비도,
노하우도 부족한 그야말로 낯선 장르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모듈이나 시퀀스를 다루는 법, 리듬을 찍어내느 법,
컴퓨터 작업 등 어느 것 하나 아느 것 없이 비닥에서 시작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어떤식으로 이 낮선 힙합을 공략해 나갔는가.
이현도: 말을 하면 할수록 복잡해질 뿐이다. 일단 결론은 '하면 된다' 라고 밖엔..... 에를 들면
그림을 꼭 배워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운전을 꼭 배워야 운전을 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이론' 이란 것이
많은 도움을 주고 습득의 지름길 이겠지만, 정말 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그것에 빠져 산다면 언젠간 이룰 수 있다.
나의 경우엔 처음 건반을 사고 거의 1년 동안 하루 9시간 정도를 그 앞에 앉아서 살았었다. 처음엔 '카피&페이스트' 기능
조차 몰라서 노래의 처음부터 끝가지 하이햇(드럼의 한 부분, 여기서는 전자 음원으로서의 드럼을 뜻함-필자주) 을 일일이
'리얼 타임' 으로 찍었던 추억(?)이 있다.(웃음)
명반: 2집에서부터 당신은 한국 음악사상 유례가 없는, 믿기지 않는 음악적 대폭발을 일으킨다.
평균 8개월마다 앨범을 하나씩 내놓았고, 전부 완성도가 뛰어났으며, 매 앨범마다 점점 더 좋아졌다.
이러한 왕성한 창작력과 넘치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현도: 살며, 놀며... 이런저런 모든 게 창작의 원동력이 된다.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음악과 문장이
머리를 스칠때가 있어서 그것들을 모아서 한 곡으로 완성을 시킨다.
내게 있어서 그것들을 모아서 한 곡으로 완성을 시킨다. 내게 있어서 '아이디어'는 열심히 구하면 어느 순간 답이 떠오르는 것,
뭐 그런거다 하지만 막연하게라도 난 늘 음악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일종의 직업병 이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난 남들 놀때 그 아이디어로 일했다.(웃음)
명반: 놀라운 점은 그 당시 당신은 유행처럼 번지던 활동 중단이나 공백기간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방송도 하고, 콘서트도 하고, 심지어 쇼 프로도 나가면서 활동 중단 없이 2년간 세 장의 앨범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는 훌륭했다. 결코 넉넉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이런 왕성한 창작 활동이 가능했는가?
이현도: 난 내음악이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건 겸손도 아니고 욕심도 아니다. 이보다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늘 한다. 이런 마음가짐이 더 좋은 트랙을 만드는 동기가 되고 있다. 듀스 활동 당시에는 정말 음악을 만드는 동기가
되고 있다. 듀스 활동 당시에는 정말 음을 만드는 것이 내 삶의 90% 였다. 육체적으로 너무 고된 시기였지만
열정으로 버텨냈던 것 같다.
명반: 듀스가 한창 인기를 모르 당시 서태지와 많이 비교가 되었다. 성숙치 못한 평론 문화의
장르의 몰이해에서 오는 비교였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아류라는 식으로 언론에서 묘사되기도했다.
당시 그런 평가를 받은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었는가. 아직도 서태지는 시대의 아티스트로 추앙받는 데 반해
듀스는 좋은 댄스 음악을 했던 팀 정도로 평가절하되는 면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책은 그러한 평가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은 욕구가 담겨 있디고 볼 수가 있다.
이현도: 창작자로서, 그리고 혈기왕성한 20대로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과소평가와 평론의 탈을 쓴 궤변에 왜 아쉽지 않았겠는가?
한때 열 무지 받았었다. (웃음)아직도 기억하는 건 tv 프로그램에서 힙합 음악의 제작 과정을 잠깐 보여주기 위해
드럼 머신을 연주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바로 다음날'이현도는 드럼을 손으로 치더군요' 라느 비판이 올라온 적이 있다.
아마도 록 음악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뭐 이것 말고도 기가 막힌 경우가 허다하지만 지면 관계상...(웃음)
하지만 이제느 그런 모든 가치 없는 비판에 많이 익숫해져 있다.'숙명'이라면 숙명이겠거니, 한다.
서태지씨와의 비교에 대해선...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다. 우선 우리는 서로의 음악을 인정하고 좋아헸다.
그리고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9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라느 평가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찌 됐건, 그들은 90년대 우리들이 이끌어낸 대중문화혁명의 선봉이었다.
듀스의 업적에 관해서는 내 자신의 이래저래 많이 말하는건 좀 어색하다. 잊히든, 재평가를 받든 그것은 전적으로
대중의 몫이라고 말하겠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재평가의 선상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지 않나? 이 사실만으로 난 만족한다.(웃음)
명반: 우리느 당신의<rhythm light beat black>과 <force deux>를 모두 90년대의 명반 50에 선정했다. 소감을 듣고 싶다. 이 두 앨범 중 선호하는 앨범은 어는 쪽인가 그리고 자신의 90년대 음악 작업 중 이 두 앨범을
선택한 것에 동의하는가.
이현도: 선호한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다. 모두가 아쉽고 모두가 애착이 간다. 다만 3집으로 인해 음악을 더욱 다각도로
아해할 수 있었기에 그 계기를 마련해준 3집을 꼽고 싶다. 그리고 2집이 빠져서 아쉽지만
위에서 말했듯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다. 두 앨범이 선정돤 사실이 무척 기쁘다. 영광일 따름이다.
명반; 'rhythm light beat black'이라느 이름은 어떻게 짓게 괸 것인가? 우리의 해석은 '리듬 라이트'는 미국 힙합과의 비교이고,
'비트 블랙' 은 한국 댄스 음악과의 비교라고 생각했다. 즉, 한국형 힙합을 내세우는 당신의 절충주의를 담은 이름이 아니었나.
이현도: 거의 맞았다.(웃음) 우선 '리듬' 과 '비트'는 동의어라고도 할 수 있다. '라이트'는 멜로디와 가상의 대중성을 상징하고,
'블랙'은 사운드와 곡의 편곡 방법에 있어서는 오리지낼러티를 추구했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하여 절충주의라는 결론이 맞다.(웃음)
명반: 또 하나의 놀랍고도 흥미로운 당대의 진짜배기 뮤지션들, 특히 록 음악계의 실력자들인h20, 한상원, 크래쉬 등과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교류가 많지만 당시 힙합퍼들으 록 음악은 전혀 딴 나라의 음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록커들이 가지느 힙합에 대한 편견도 많았을 것 같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지 이현도라는 뮤지션이 보여준 신뢰감 때문이었나?
이러한 팀들과의 작업이 가능하기까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현도: h20 형님들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졸랐다.(웃음) 그리고 한상원 형님은 '봄여름가을겨울'
형님들의 소개로 만나게 되어서 도움을 청했는데, 너무나도 쿨하게 응해주셨다. 원래 힙합을 거슬러 올라가면
훠크를 만나게 된느데 그 원류의 마스터인 상원 형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 그분 의 칭찬과 격려에 무척
고무되었던 기억이 난다. 크레쉬는 93년에 우연히 같은 무대에 서게 되었는데, 그 밴드의 음악을 듣고 나와 성재는
소위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날 즈음 안흥찬 씨가 우리 대기실로 찾아와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이유는 친구들이 나와 자기가 닮았다고 했다나?(웃음) 첫마디를 "음악 예술이에요", "정말 닮았네요" 로 시작해서
우리는 친분을 쌓게 되었고 그때부터 "한번 조인(join)해요" 라고 만날 때 마다 서로 이야기만 하다가
결국 2000년에 [이면]이라는 곡으로 공동 작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와 함께한 위의 아티스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만큼 자신과 다른 분야 역시 존중하고 수용 할 줄 아는 마인드였다.
그 역시 내가 그분들에게 배운 것 중 하나이다.
명반: <rhythm light beat black>에서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하면서 공부하는 느낌이었다면, 3집은 그 실험들을
완벽하게 체화시킨 느낌이었다. 본토인 미국에서도 찰아볼수 없는 이현도만의 스타일이 응축된, 최고의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1,2집 <rhythm light beat black>과 비교해도 3집의 색은 훨씬 어둡고 단단하고 낮고 진지하다.
이현도: 이미 2집 이후 나는 연예인의 삶에 지쳐 있었다. 또한 나는 음악을 만드는 그 자체에 더욱 몰두하고 싶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속고, 이용당하고 있는 나 자신을 알아버렸다. 아무래도 이러 상황에서 느낀 감정이 3집에 많이 반영되었다.
[메시지]는 그때의 나를 잘 나타낸 곡 중 하나이다. 이와는 상관없이 사운드적인 측면에선,
처음으로 본고장인 미국에서 모든 음악 작업을 마쳤고 나 역시 프로듀서로서 한 단계 더 도약을 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 예전 앨범보다 더욱 안정된 사운드를 3집에서 얻을 수가 있었다.
명반: 3집 <force deux>에서 개인적으로 공을 들였던, 혹은 힘이 들었던 곡은 어떤 곡이었는지 궁금하다.
히트는 하지 않았지만 애착이 가거나 했던 곡이 있었나. [반추]와 같은 곡은 굉장히 실험적인, 그러면서도 난해하지 않은 명곡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현도: 정말로 모든 곡에 공을 들였다. 왜냐하면 특히 3집은 타이틀곡과 나머지가 아닌,
하나의 앨범 그 자체로 작업을 했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들었던, 그리고 가장 애착가이가는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굴레를 벗어나]이다.
명반: 비트가 강하고 베이스 음이 강한 음악이 듀스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지만 r&b, 슬로우 잼 류의 곡들에서도
당신의 재능은 발휘되었다고 본다. 3집의 [다투고 난뒤], [사랑하는 이에게] 같은 곡이 그렇다.
이런 곡들을 꾸준히 만들어낼 생각은 없는가.
이현도 : 물론 있다. 조만간 슬로우 잼 위주의 프로듀서 앨범을 발매할 예정(아마도 friends vol.1)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제작자들은 내게 아직도 '듀스'풍의 비트를 우선 원한다. 그건 대중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예로 김범수의 [바보 같은 내게] 란 곡은 정식 프로모션을 하지 않았음에도 좋아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대부분이 내가 그 곡을 썻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웃음)
명반: 당신에게는 아픈 부분일 수 있겠지만 이후 몇 년간의 작업-김성재 do1,2 집 등-은 3집의 완성도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한
느낌이 든다. 동의 하는가?
이현도: 동의하진 않지만 반박하지도 않겠다. 나의, 혹은 듀스의 음악을 정말로 진지하게 감상한 당신이 그렇게 느낀다면
그 의견을 존중하고 싶다.
명반: 그러한 매너리즘에서 탈피하기 위한 작업이 한상원과 함께한 <do funk>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듀스 시절부터
단초는 보였지만 갑자기 funk를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현도: 갑자기 훵크가 나온 건 아니다. 훵크는 힙합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힙합은 본래 훵크의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다.
3집 역시 힙합보다는 훵크라고 말할 수 있는 트랙들이 많다. 물론'정통 오리지날 올드 스쿨 훵크'에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힙합과 마찬가지로 훵크 또한 그 갈래가 너무나 많다. 3집의 모토는 '원류로의 희귀'이다.
힙합으로 눈을 떠서 훵크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바로 3집이고 디오훵크는 그 '연장선'이었다. 덧붙인다면,
내가 추구한 훵크는 물론 초창기의 그것은 아니었다. 70-80년대식의 전자음이 많이 가미된 훵크라고 하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명반: 한 가지 안타깝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점은 최근 당신의 작업들, 그러니까 완전힙합, 힙합구조대 등에서 당신은
'정통 힙합은 이런거다'라는 걸 소개하는 데 너무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당신이 힙합을 소개 한것은 맞지만
애초에 들려준 것이 정통 힙합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묘한 한국적 힙합의 결과물에 대중들은 열광했고 음반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정통을 소개하는 작업은 필요하고, 힙합 신의 맏형이 된 당신의 책임감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듀스 3집에서 완성된 당신의 '한국적 힙합, 혹은 뉴잭스윙'은 사라졌다는 점은 아쉽게 생각한다.
이현도: 듀스 해체 이후부터 대중가수의 입장과 상업적 인 성공에 대한 부담감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었던 음악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고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난 음악도 하고 싶었다. 맏형의 책임감은
내 앨범 제작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뉴잭스윙'만을 게속하기에는 세상에 멋진 음악들이 너무나 많다.
또한 이제는 음악에 춤추기보다느 내 음악으로 사람들을 춤추게 만들고 싶다.
명반: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비로 동료였던 김성재에 대한 질문이다. 음악적인 질문이니 양해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듀스에서 김성재와 당신의 역활, 특히 창작에 있어서의 역할 분담과 리더의 조력자로서의 역활 분담에 대해 듣고 싶다.
적어도 듀스라는 팀은 이현도와 김성재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이현도: 그렇다. '듀스'라는 말 자체가 '둘'이라는 뜻이다. 우리 둘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듀스' 일 수 있다.
고1때 처음 만나서 우리는 줄곧 함께였다. 어떤 부분에서선 가족조차 해줄 수 없는 것을 성재가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 이전에 친구였기 때문에 누가 누굴 리드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서로 의지하고 모자란 부분을 보완 해주는 관계였다. 듀스를 하면서 안무, 의상, 디자인, 음악의 아이디어까지 정말
성재 덕을 꽤 많이 보았다. 그 당시 듀스는 듀스 가방 , 힙합 체크 남방 증 많은 패션 아이템을 유행시켰다.
이 모든 게 성재의 아이디어였고 지금도 때때로 성재의 남다른 패션 감각에 깜짝 놀라곤 한다.
10년지 지나서도 사진 속의 성재는 여전히 패셔너블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내가 유행시킨 건 '빨간 야구 모자' 하나밖에 없다.(웃음)
명번: 다른 음악인에 대한 평가는 민감한 사안이지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한때 음악 선배, 동료, 그리고
경쟁자로서 현진영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이다. 현진영은 한국 힙합의 개척자로서 어김없이 자신의 이름을 서슴없이 내밀고 있다.
뮤지션으로서의 현진영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다. 또한 그의 음악이 한국의 힙합신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이현도: 뮤지션으로서 내가 본 현진영 선배는 성취욕이 대단한 사람이다. 신인 시절 댄스 가수에서 아티스트로
거듭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던 그 모습은 내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론 현진영 2집이
힙합이란 단어를 사용한 한국 최초의 메이저 앨범이었다.
명반: 인텨뷰를 마무리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듣고 싶다. 90년대, 당신과 수 많은 음악인들이 활동하며 질 높은 음악들을
양산했던 그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때의 음악들 그리고 그 시절의 거장들이 왜 이렇게 빨리 소모되고 침묵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지나간 시기를 그리워하는 것 이상으로 다가올 시대에 걸맞은 새롭고 창조적인
작업을 해나가는 것은 음악인로서의 책임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현도: 90년대는 그야말로 대중음악의 지각 변동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댄스 음악의 전성기가 도래하면서 힙합, r&B, 하우스 뮤직
등등 그 당시까지도 생소했었던 여러 장르의 음악들이 한국화되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을 다진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시대를 풍미한 하나의 아티스트로 평가받는 것은 내겐 정말로 무한한 영광이다. 하지만 나 역시 필자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내 음악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다.
늘 매순간을 사는 마음가짐으로 음악을 하겠다. 그렇지 않다면 도태되어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대중 역시 그런 노력의 산물을 좀 더 애정을 가지고 받아들였으면 한다. 실력이 없어서 외면당하는 것은
책임을 물을 수 없지만, 좋은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의 열정을 꺽는 것은 때로는 대중들의 책임이 크다.
대중에술인들이 대중의 심판을 받느 것은 숙명이다. 하지만 대중도 훌륭한 작품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야할 최소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특정 아티스트들이 일구어낸
90년대 한구 음악의 혁명 이상의, 더욱 거대한 문화 발전을 우리 모두 누리게 될 것이다.
명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어렵게 어렵게 이제야 인터뷰가 성사되어 더욱 반갑다.
이현도: 답변이 늦어져서 미안하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후배라니... 누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웃음) 암튼,
이렇게 철들어서 서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놀던 동네형' 이 만든 (웃음) 듀스의 음악을
이렇듯 존경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첫댓글 '스레바 데키루'식의 인생이네..이거 읽으면서 듀스앨범 하나씩 사서 들을 때의 감회가 소록소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