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당시 일본에 살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쓴 글이다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친분이 있었고 다른 기독교다이묘들과도 친한 사이였다. 일본의 고위층에서 본 조선수군에대한 시각을 보여준다
또한 서양인의 입장에서 봤으므로 해군=사략선=해적선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조선 해적은 조선수군을 말한다
출처는 디펜스 코리아 이정훈님 글
위가 루이스 프로이스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루이스 프로이스 지음 / 국립진주박물관 편집 / 오만 옮김 / 장원철 옮김)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일본군이 부딪친 두번째 난관은 조선군이 궁여지책으로 서로 단결하여서 연합군을 편성, 수많은 배에 승선하여 공격해온 사실이다. 그들의 배는 견고하고 높았으며 무기, 탄약, 식량을 가득 싣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를 휘젓고 다니면서 해적질을 하였는데 일본배를 발견하면 곧바로 습격하고 약탈하였다. 조선군은 일본군보다 해전에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많은 손해를 입혔는데 이러한 일본군의 재난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양군이 최초로 바다에서 맞부딪친 전투는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관백의 두 지휘관 곧, 가토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의 아명) 와 이와노쿠니의 영주인 다른 한 사람은 바다에서 조선인이 일본군에게 끼쳤던 막대한 손해를 보고서 가지고 있던 300척의 함대를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회전에 필요한 무기, 탄약을 적재하고서 유능한 정예 병력을 승선시켰다. 그들은 수많은 총포, 창, 활과 화살을 휴대하였다. 이렇듯 일본군은 자신들의 우수한 장비를 믿고서 약간의 배 밖에 보유하지 않은 조선의 해적을 찾아서 출격하였다.
그런데 이전부터 조선인은 일본배를 찾는데 혈안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조우하자 큰소리를 지르고 기뻐하며 배를 몰아 일본함대를 공격했다. 조선의 선박은 크고 튼튼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본배를 압도하였다. 우선 조선 수군쪽에서 화기에 의한 공격이 있었는데 이것이 일본인들을 몹시 애먹이고 괴롭혔기 때문에 일본인은 조선인들의 이 성가신 접근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바다쪽으로 멀리 나아가는 전술로 응전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노를 저어 함께 달아날 수 없게끔 튼튼한 갈고리가 달린 쇠사슬을 위에서 집어 던졌기 때문에 일본 배들은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 해전이 몇시간동안 지속되면서 일본군은 의기소침해지고 전황은 이미 그들에게 불리하게 되었다. 이 해전에서 도라노스케 측의 장수 한 사람이 전사하였다. 그는 대단히 용감한 전사로 그의 용기와 뛰어난 전술 덕택으로 시고쿠(四國)라 불리는 영국(領國)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관백이 매우 총애하는 심복이었다.
이와노쿠니의 다른 장수도 패배를 당하고나서 자신들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적의 손에 사로잡히기 전에 할복하기로 했다. 이 싸움에서 조선인들은 70척의 일본배를 빼앗고 병사 대부분을 살해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목숨만 건지고서 도망쳤다.
여타의 많은 일들을 열거하는 것은 그만 두겠는데 일본군은 해전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고 적을 격퇴하기 위한 화기가 부족하여 바다에서는 언제나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군선이 해전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프로이스는 당시 일본수군을 지휘하던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경우와 착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댓글 조선수군의 넘치는 접전 능력은 허나 판옥선위에 승선에 있을때만이라는 것으로 국한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군은 수성에선 사자불릴 만큼 뛰어났고 이는 수전에서 판옥선이라는 대형함으로써 역시 수성전과 비슷한 양상을 뛰며 접전능력 향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러나
난중일기 기록에도 나와있듯이 판옥선위로 일본왜병 한명만 올라와도 조선군의 동요가 심했다고 합니다. 이는 수성시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미친척하고 달려드는 왜병에비해 조선군은 그것이 좀 부족하긴 했나 봅니다. 그렇지만 임란당시 야전승률이 오히려 조선군이 높은 것을 봤을때 조선군이
핱바리 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군이 일본 사무라이와 칼 싸움하기가 쉽지 않았겠지...
전 조선의 수군이 약했다고 말한적이 없구요. 일본 사무라이요? 진짜 개가 웃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일본 사무라이는 영화나 만화책을 덥는 순간 잊어주시와요. ㅋㅋ 일본 사무라이 사진들 찾아보면 보실수 있을겁니다. 말 그대로 원숭이 수준...(아~ 그리고 제말은 쪽수에서 밀렸다는거죠.)
전혀요. 이미 2백년간 전국시대를 통해 실전으로 거듭난 왜군과 사무라이 계급은 2백여년간 평화시기에 찌든 조선군의 그것보다는 정신상태나 실전경험등에서 월등했습니다. 쪽수요? 2천 왜군에게 5만이상의 조선군이 깨진 용인전투는 무엇으로 설명하시겠습니까? 신립의 경우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