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는 방법 가운데 반어법 또는 역설법이 있다.
자신의 의도를 반대로 표현하여 상대가 올바른 뜻을 찾도록 하는 방법이다.
불교를 단멸론이라 하는 주장이 반어법 또는 역설법의 의도가 있다면 그것을 액면 그대로 보고 비판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에이는 불교의 핵심으로 단멸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멸론을 처음 주장한 이는 반어법적으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본 자들이 불교는 단멸론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죄는 결코 작은 게 아니다.
해서 다시 묻게 된다.
단멸론이 중도인가?..
중도는 어떤 불교적인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시금석이 된다.
혹자는 중도, 그것을 이해하는 게 어려운 데 과연 그것을 시금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고 의심하는 자도 있겠다.
다행히 우리는 [유무 중도, 단상 중도, 일이 중도, 고락 중도] 라 하여 무엇을 중도라 하는지.. 알 수 있는 근거를 알고 있다.
그 중 하나인 [단상 중도]가 나오는 <잡아함. 300. 타경>을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제 자신이 짓고 제 자신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다른 사람이 짓고 다른 사람이 깨닫는다고 하면 곧 단견(斷見)에 떨어진다. 뜻에 대한 설명과 법에 대한 설명은 이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 처하여 설법하는 것이니라.
말하자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즉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발생하며, 무명이 소멸하면 행이 소멸하고 ……(내지)……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멸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그 바라문은 기뻐하고 따라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잡. 12-300. 타경(他經)>
에 보이듯 중도란 상견이나 단견이 아니라고 한다.
여기서 상견이나 단견이라고 하는 이유를 보면
" 실재 있다(존재)"를 전제로.. 그것이 항상 하는 것을 상견, 멸하는 것(없다)을 단견이라 함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연기법을 설하시니..
중도란 일체는 실재 존재가 아닌 연기 존재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에이는 일체가 연기적 존재임을 그 누구보다도 강조하고 있지 않던가!
그의 오판은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다 보면서도 [하나]를 소홀히 하고 있기에 단멸론에 이른다는 것이다.
단멸론은 중도가 될 수 없는데..
그런데.. 여기서 [하나]란 무엇일까?..
첫댓글 60701. 중도를 벗어나면 邪道가 되는 게 불교입니다.
그러기에 중도의 의미를 멋대로 해석해 자기 견해가 중도임을 증명하려고 까지 합니다.
남방불교가 나가르주나의 중론을 마구 몰아치는 것은..
중론의 중도 설명으로 보면 남방불교는 중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단멸론자인 에이가 단멸론은 중도가 아니다 라고 하면..
단멸론자는 外道가 아니면 사이비가 되지요. 외도란 불교가 아닌 것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단멸론이 불교임을 주장하려면
단멸론이 중도임을 증명해야만 하는 겁니다.
60702. 다름 사람이 짓고 다름 사람이 받는다는 것은 유물론자인가 하고 묻는데..
부처님 당신 유물론자는 적취설을 주장하며 바라문의 전변설에 대응하고 있었지요.
적취설이란 지금 여기에 생겨 있는 존재는 물질..정신인 식도 물질로 봄.. 이 결합하여 생긴 것이기에..
물질이 흩어지면 식은 따라서 흩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멸론이 됩니다. 적취설이 반듯이 단멸론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 해도..
당시 적취설은 전변설을 부정하면서 나왔기에 전변설의 윤회설을 부정하는 단멸론과 연결되었던 것이지요.
해서 [적취설= 단견=유물론]이 됩니다.
60703. 그리고 힌두교의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은 같은가 다른가 하는 문제인데..
확실한 내용은 모르지만 힌두교의 윤회설 내용은 하나가 아니라고 합니다. 곧 여러가지 윤회설이 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힌두교의 어떤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을 비교하여 같은지 다른지를 논할 수 잇습니까?..
윤회설의 핵심은 자신이 짓고 (후세에) 자신이 받는다는 겁니다.
불교는 무아인데 무엇이 짓고 받는다는 건가 하는 논란이 계속되고..
그런 가운데 아뢰야식이 나오는 게 아닙니까?..
아뢰야식은 일체를 생기게 하고 윤회의 주체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없는 무명에서 생긴 것이라 하지요.
60704.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입니다.
곧 단멸론이 아니면 상론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해서 불생불멸을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삶(=불멸)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삶이 되려면 힌두교의 브라만처럼 영원히 존재하는 무엇이 있어야만 하는데..
윤회를 말하는 남방 불교나 불생불멸을 말하는 불교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무엇을 가정하고 있던가요?..
60801. 중도란 다 알다시피 상견이 아니며 단견이 아닙니다.
불멸(=영원)이 아니고 단멸이 아니라는 겁니다.
<잡아함. 301. 가전연경>을 보면..
1) 세간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유(有)와 혹은 무(無)이다.
취함[取]에 부딪히고, 취함에 부딪히기 때문에 혹은 유에 의지하고 혹은 무에 의지한다.
..(중 략)..
2) 세간의 발생을 사실 그대로 바르게 알고 본다면 세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3) 세간의 소멸을 사실 그대로 알고 본다면 세간이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4) 이것을 두 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느니라..
고 하십니다..()()()..
60802. <가전연경> 1)에서 유는 상견에 해당하고, 무는 단견에 해당합니다.
<300. 타경>에 나오듯,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는다(自作自覺)는 것은 항상한다는 것이요,
자기가 짓고 남이 받는다(他作他覺)는 것은 끊어지는 것으로 단멸한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유나 무가 되는 이유를 취함 때문이라 하십니다.
취함이란 유가 되는 이유입니다. 무언가를 취하며 존재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취하지 않으면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존재가 생기지 않으면 '그것이 있다(유)' 또는 '그것이 없어졌다(무)' 라고 할 수 없지요.
취함이 있기에 유 또는 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60803. <301.가전연경> 2)에 나오는 세간의 발생은 12연기법의 유전문을 설명하는 거지요.
비록 무명에서 시작하기는 하나.. 취가 일어나니 존재가 생겨..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유 또는 무가 생기니..
그런 세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3)의 세간의 소멸이라 하여 언뜻 보면 단멸이나 없어진다는 뜻으로 보이니 앞에서 말한 무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 지요!!!!!
세간의 소멸이라 하지만.. 그 뜻은 환멸문이며, 환멸문이란 무명이란 존재하는 게 아니듯,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가 존재하는 게 아님을 깨달아.. 그것들이 소멸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60804.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중도]의 판단이란..
이것과 저것의 중(간)에 서 보거나 판단하는 게 아닌..
이것이나 저것이나 실재 존재가 아닌 연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서 보고 말하는 거지요.
달리 말하면
환멸문에 의한 고를 멸한 상태에서
유전문 관계를 맺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꿈인 줄 알면서 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게 되지요.
^^중도를 흰색도 검은색도 아닌 회색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분이 많습니다.
중도를 중간으로 이해하기에 단견론자들은 희론이라 폄하하고 있습니다. 몰라서 그런것인데 본인은 그것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
그들이 듣든 아니 듣든 중도가 무엇인지..
계속 설명을 해야 겠지요..^^
그러다 보면 문득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