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 날짜 : 2024년 3월 5일(화)
김수영 생가 터
위치 : 서울시 종로구 종로 96 (종로2가 56-6)
YBM어학원 앞 횡단보도 옆 녹지
표석 글 : 이곳은 시인 김수영(1921~1968)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처음 연극을 하다가 1946년 잡지『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 『달나라의 장난』 (1959년), 시 「거대한 뿌리」(1964년) 등이 있다.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터에는 ‘YBM 어학원’이 들어서 있다
♤ 종로구 옛집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267, 종로 6가 116)
생가인 관철동에서 첫 돌이 채 지나지 않아 이사온 곳으로 200여평 규모의 큰 기와집이었으나 그가 12세 때 걸린 뇌막염의 치료비로 이 집은 처분되었다(종로6가 116)
1935년에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면서 떠날 때까지 14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집 뒤채에는 그의 고모가 살던 약 40평 가량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이 김수영이 성장한 곳이다(종로6가 117)
그가 훗날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곳도, 일제 말기에 만주로 갔다가 해방 후 돌아와 산 곳도 바로 이 집이다
♤ 도봉동 본가 (서울시 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 도봉동 107-2)
한국전쟁 뒤인 1954년 무렵 선영(고조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등이 묻혀 있었다)이 있던 이곳(약 3,000평 중 약 500평이 군부대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약 2,500평을 1필지로 하여)으로 옮겨와 살았다
서울시 마포구 구수동에 분가해 살고 있던 김수영은 어머니를 위해본가에 병아리 700여 마리를 분양하여 기르도록 하는 한편 수시로 찾아와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본가 터에 양계장 축사와 집필실(조그만 기와집)만이 김수영의 주거지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남아 있다
집필실로 사용하던 곳(외딴집 - 흑염소 전문음식점)
양계장으로 사용하던 곳(광흥 돌핀 셔터 - 샷시 제작 등)
♤ 구수동 옛집터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198, 구수동 41-2)
1956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양계업을 했다
그 터엔 재개발로 어느 시기?인가 영풍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968년 6월 15일 밤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길에 마포구 구수동에서 인도로 뛰어든 좌석버스에 치여 서울 적십자 병원으로 급히 후송되었지만, 이튿날인 16일에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이 언저리 어디쯤에서 끔찍한 일을....)
♤ 한국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조선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했다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되었다
1950년 결혼한 부인(김현경)은 조선인민군에 징집된 사이 아들을 김수영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김수영의 선배(?)와 새로이 살림을 차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나와 부인에게 찾아갔지만 거절당하면서 다시 한 번 깊이 절망하지만 결국 몇 년뒤 같아 살게 되고 김수영이 새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한다
김수영의 시 '너를 잃고' 육필원고 - 김현경이 이종구와 살던 1953년의 작품 / 김수영은 '너는 억만개의 모욕이다'라고 표현했다
1990년대 초 김수영의 어머니가 죽자 남은 식구들이 의논하여 선영의 묘들을 파 화장하고 산골(散骨)하였다
그에 따라 김수영의 묘도 개장하여 시신을 수습하여 화장한 뒤, 묘 앞에 있던 시비를 1991년 4월에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산구역 내 도봉서원 앞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그 아래 유골함을 만들어 묻었다
따라서 현재의 김수영 시비(詩碑)가 곧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 김수영 문학관 (서울시 도봉구 해등로32길 80, 방학동 498-31)
도봉구에 거주하였던 시인 김수영의 시문 및 시학의 세계와 그의 작품들을 주제로 업적을 기리기위해 서울시 도봉구청에서 도봉구 공립문학관으로 설립하였다
2013년 11월 27일에 개관하였으며 서울특별시 도봉구청에서 관장하며, 도봉구립 작은도서관과 강당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