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紫禁城, Forbidden City)




만리장성과 함께 중국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중국 베이징 중심부에 위치한 궁궐로, 현존하는 궁궐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1421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처음 거주하기 시작해 1924년 선통제가 여기서 쫓겨날 때까지 5백년 동안 명나라·청나라 두 왕조 24명의 황제가 이 곳에서 중국을 통치했다. 높이 11m의 성벽과 너비 52m, 깊이 6m의 호성하로 둘러싸인 동서 760m, 남북 960m, 면적 720,000m², 건물 980채, 8,707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4년 이래 궁전의 기능을 상실한 뒤 1925년부터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Palace 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대중에 공개되고 있다. 1961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로 '구공(Gùgōng/고궁故宮)'이라고 부른다. 한때 고궁이라는 이름이 옛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해서 폐궁(廢宮)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공공시설의 이름에 폐(廢)자를 쓰는 건 좋지 않다 해서 고궁으로 낙점되었다.
2. 이름의 유래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의 거처가 우주의 중심인 자미원(紫微垣)에 있어 그곳을 기점으로 우주가 움직인다고 믿었기에 이를 상징하는 뜻에서 '자(紫)'를, 황제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에서 '금(禁)'을 사용해 자금성이라 명명했다. 중국어 독음으론 '쯔진청(Zǐjinchéng)'이 된다.
이런 자세한 내력을 모른 명나라 시대 유럽 선교사들은 '금할 금(禁)'자와 '성 성(城)'자를 각각 '금지된'과 '성벽을 둘러친 도시'란 뜻으로 직역하면서 서양에는 '금지된 도시'라는 뜻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영어로는 '포비든 시티(Forbidden City)'로 불린다. 그러나 이는 '금지된'에만 주목한 결과로 엄밀히 말해서 오역이다.
3. 역사
3.1. 명나라
3.1.1. 대륙의 기상
영락제는 1406년(영락 4) 자신이 중심지로 삼았던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남경의 궁전을 모방해 북경에 궁전을 짓도록 했다. 이후 1420년(영락 18)에 완공되니 그 결과물이 바로 자금성이다. 14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장인들과 1백만 명 이상의 노동력을 아낌없이 갈아넣어서 건설했는데, 여기에 소요된 자재는 중국 운남성 지역의 밀림에서 벌채한 남목(楠木)[9] 수십만 그루와 쑤저우 등지에서 생산한 금전(金磚)[10] 1억 개, 각종 유리기와 2억 개 등이었고, 기와를 만드는 도토는 안휘성 태평에서, 채화의 연료는 서남부의 각 성에서 징발했으며, 기단부와 조각에 사용될 한백옥은 50km 바깥의 채석장에서 운반했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돌은 200t에 육박했다. 이런 돌은 보통 마차로 운반하는 게 불가능해 채석장에서부터 자금성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우물을 판 다음 겨울에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뿌려 빙판을 만든 다음에야 겨우 운반할 수 있었다.
3.1.2. 잇따른 화재
이렇듯 명나라의 모든 물자와 노동력이 총동원되어 1420년(영락 18) 12월 완성된 자금성은 1421년(영락 19) 정월 성대한 낙성식을 거행했고 영락제는 황실 가족과 수많은 환관, 궁녀들을 거느리고 새로 지은 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완공 후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은 같은 해 5월에 벼락이 쳐서 자금성의 중심인 3개의 대전(大殿)을 포함한 상당수의 전각들이 깨끗하게 불타버렸다.
가뜩이나 천도에 말이 많은 상황에서 힘들여 지은 궁전이 1년도 넘기지 못하고 벼락을 맞자, 황제가 하늘의 뜻을 거슬렀다며 민심이 흉흉해졌고 급기야 다시 남경으로 환도하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어 조정이 소란스러워졌다. 영락제는 남경 천도론을 주장한 신하 한 사람을 죽이고서야 겨우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후 영락제가 몽골을 정벌하러 나갔다가 원정지에서 객사해 북경에 돌아왔을 때도 그의 관은 잿더미가 된 자금성에 안치되었다가 능묘에 매장되었으며[11], 중건이 마무리된 시점은 19년의 세월이 흘러간 정통제 때인 1440년(정통 5)이었다.
그리고 1459년(천순 3)에는 자금성 서쪽에 황실원림인 서원(西苑)을 새로 영건했는데 이곳은 오늘날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요인들의 관저 구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120여년 뒤인 1557년(가정 36)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3대전을 포함한 주요 전각들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12] 첫 번째 화재와는 달리 2번째 화재에서는 진화되자마자 바로 중건에 들어가 1561년에 공사가 끝났다.
그리고 30여년 뒤인 1597년(만력 25)에 또다시 화재가 발생해 이번에도 어김없이 3대전이 전소된 것은 물론이고 황제 일가의 사적 공간인 후3궁도 불타는 등 자금성 완공 이래 명나라 역사상 가장 큰 피해가 발생했다. 파괴된 전각 모두를 한꺼번에 지을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옥좌가 있는 정전인 태화전만은 무리를 해 간신히 중건하는데, 이를 위해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어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황제는 뭘 했느냐고? 이때의 황제는 만력제. [13]
3번째 화재로 불탔던 태화전이 중건된 건 30년이 지난 1627년(천계 7)이었다. 천계제의 재위 7년째 되던 해로 이 해에 천계제가 죽고 숭정제가 즉위해 갓 지은 옥좌에 앉았으나 20년을 못넘기고 1644년(숭정 17)에 명나라가 망했다.
이웃나라의 어느 끈질긴 근성의 사찰과 비교하면 약과일지도.
3.2. 청나라
3.2.1. 이례적인 재사용
보통 새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의 궁궐을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사실상의 관습처럼 굳어졌는데,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을 자금성에서 몰아낸 뒤 자금성을 철거하지 않고 입주해 그대로 사용했다. 물론 전각을 수리하거나 개축하는 소규모 공사는 있었지만 전반적인 구조 자체는 명나라 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때 발생한 3번째 화재 이후 40년 가까이 중건되지 못한 전각들은 강희제 때인 1683년(강희 22)에 공사에 들어가 1695년(강희 34)에 다시 지어졌고, 건륭제의 재위기간 동안 황제의 취향에 맞는 화려하고 우아한 장식이 갖춰진 전각과 화원이 다시 짓고 고쳐 짓기를 60년 내내 반복했다. 건륭제의 취향이 반영된 이 정원은 '건륭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3.2.2. 왕조의 마지막 순간
청조의 전성기였던 건륭제 사후 점차 청나라가 쇠퇴하면서 자금성의 권위에도 영향을 미쳐 1813년(가경 18) 천리교도들이 자금성에 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근위병들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친왕 시절의 도광제가 친히 총을 쏴서 천리교도 격퇴에 일조한 게 이때의 일이다.
명나라 때의 3차례 대화재 이후 청나라 때의 자금성은 큰 화재 없이 2백년 동안 무사했으나 1886년(광서 14) 광서제의 국혼을 앞두고 태화문 인근에서 화재가 시작되어 태화문과 정도문, 소덕전 등이 불타는 사건이 벌어졌다. 비록 6년 뒤에 중건되긴 했지만 황제의 결혼이라는 국가적인 경사를 목전에 두고 터진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후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려 온 서구 열강을 주축으로 한 8개국 군대에게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신해혁명의 불길이 중국을 뒤덮은 1911년(선통 4)에 청나라가 망했다.
3.3. 중화민국
1911년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마지막 황제 선통제가 퇴위했지만 자금성 안에서 거주하는 것은 허락되어 황실 가족들은 청 왕조 시절과 같은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나 1917년 장훈복벽으로 황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고, 1923년 건복궁에 불이 나더니 1924년 2차 직봉전쟁 와중에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베이징을 점령, 핍궁사건을 일으켜 선통제를 아예 자금성에서 쫓아내고 말았다.
주인이 없어진 궁전은 고궁박물원으로 개칭되어 황실의 진귀한 보물 및 다양한 궁중 유물들을 보관, 전시하는 박물관이 되었는데 1913년에 선양고궁과 승덕피서산장에 소장된 보물도 모두 자금성으로 이관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고궁박물원에 있던 수백만 점의 소장품 중 중요 유물을 골라 13,491개 상자에 나누어 일본의 침략을 피해 상하이로 옮겨졌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북경으로 돌아온 유물들은 국공내전이 격화되자 중요한 유물을 중심으로 다시 이삿짐을 싸서 1948년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공산당에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갈 때 함께 가지고 가 1965년 새로운 고궁박물원을 만들었다.
이때 대륙에서 가져온 유물들은 고궁박물원 소장품 가운데서도 가장 가치있는 엄선된 것으로, 대만에는 알짜배기가 있고 자금성에는 쭉정이만 남았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은 당시 대륙에서 이송한 게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그 숫자는 68만 2,061점에 달해 가히 세계구급(...). 수백만 점이었던 유물들이 이곳저곳으로 옮겨진 통에 상당수가 사라졌음에도 남은 게 이 정도(...).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으로 옮겨간 뒤 중국 인민해방군이 1949년 북경을 점령한 후에도 자금성은 무사했으며 1950년대 이후 수리 및 복원 계획이 세워져 국가적인 문화재로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쳐 홍위병들이 과거의 명승 유적들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반동의 폐습'이라고 외치며 닥치는대로 파괴하자 저우언라이 총리가 군대를 동원해서 자금성을 지켜냈다.
한편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자극받은 중국 정부는 자금성에 있던 기존의 소장품에 새로이 전국에서 수집한 미술품 수만여 점을 더해 이전보다 더욱 규모가 커져 양적인 측면에서는 베이징 고궁박물원도 타이완에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2011년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원 소장 유물은 약 180만 7,558건이라고 한다. 그중 국가에서 지정한 1,2,3급 문물 즉 진귀문물은 168만 4,490건, 일반문물은 11만 5,491건, 표본은 7,577건이라고 신화통신이 전했다. 비록 많은 유물이 대만으로 건너갔지만 이후 많은 문물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으며, 또 최근 국가에서 수집하거나 기증받고, 또 중국 재벌들이 자비로 환수하여 기증한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질이 대만에 비해서 낮지 않다.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의 문물이 더 우수하다하는 인식이 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원나라 시대 이전의 경우 베이징 고궁박물원이나 중국국가박물관의 것이 더 뛰어나고, 명청시대 궁중유물은 대만의 고궁박물원 쪽이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자금성은 크게 외조(外朝)와 내정(內廷)으로 나뉘는데, 외조는 황제가 국사를 돌보던 곳으로 태화전(太和殿)·중화전(中和殿)·보화전(保和殿)의 3대전과 그 양쪽에 문화전(文華殿)·무영전(武英殿)이 있으며, 내정은 황제가 휴식을 취하는 곳으로 건청궁(乾清宮)·교태전(交泰殿)·곤녕궁(坤寧宮)의 후3궁으로 되어 있다.
곤녕궁 북쪽에는 어화원(御花園)이 있고 후3궁 동서 양쪽에 황후와 후비들이 거주하던 6개의 궁이 각각 있어 동서6궁으로 칭하는데, 동6궁은 경인궁(景仁宮)·승건궁(承乾宮)·영화궁(永和宮)·종수궁(鍾粹宮)·경양궁(景陽宮)·연희궁(延禧宮), 서6궁은 영수궁(永壽宮)·태극전(太極殿)(계상궁(啓祥宮))·장춘궁(長春宮)·익곤궁(翊坤宮)·저수궁(儲秀宮)·함복궁(咸福宮)이다. 서6궁 남쪽의 양심전(養心殿)은 황제가 평소 거주하던 곳이고, 동6궁 남쪽의 재궁(齋宮)은 큰 제사를 앞두고 황제가 머물며 재계하던 장소다. 그리고 동서6궁 북쪽은 황태자의 거처, 서6궁 서쪽은 황태후와 황태자비의 거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