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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와 영남대, 해부와 논단
그는“대통령의 노후를 위해 지역의 사학을 무참히 희생시키고 강탈한 세력에 의해 불행한 역사의 희생자로서...대구대학교와 청구대학의 합병으로 탄생한 영남대학교는 당시 현직 대통령과 그 하수인들이 권력을 휘둘러 만든 대학이며 이는 저희 한 가족의 불행한 역사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는 안 될 치욕의 교육비리”라고 외치며 영남대를 위해 돈 한푼 낸 일이 없는 박정희 유족들이 과거 80년대 영남대를 사유재산인양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전횡과 비리를 저질렀던 일을 역사의 심판으로 검증하자고 열변을 토하였다.
도대체 그 당시 어떤 일이 있어 청구대가 박정희 손으로 넘어가고 영남대로 재탄생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과연 누구에게 정당한 자격이 있는지 논해보자.
하지만 61년 이후 대학정비과정에서 시설이 열악한 청구대는 2년제로 격하되었고 시설재정비를 통하여 다시 4년제로 복귀하였지만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66년 경리비리가 터져 재정난은 더욱 가중됐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66년 12월 자신이 끌어들인 재단이사들에 의하여 야청은 물러나게 되었고 야청은 자신의 일기 속에 이 당시의 일을 ‘강압에 의한 퇴진’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아마 전재용의 부친인 청구대학 이사장 전기수는 이 무렵부터 청구대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청측은 새 경영진(전재용의 부친?)이 애초3층으로 짓기로 한 것을 5층으로 무리하게 올리려다가 낸 참사라고 하였고 그 붕괴사건은 일선에서 물러난 야청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건은 한 마디로 청구대의 사활이 걸린 대형참사였다. 이 문제는 누군가가 형사책임을 지어야할 문제였고 청구대의 재정은 건물붕괴와 수십 명의 사상자들에 대한 보상금으로 거덜이 날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이은상은 박정희를 만나 대강 이런 식으로 설득 간청하게 된다. “대통령을 백년 할 것도 아니고 그만두면 무엇을 할 것인가. 외국에서는 대학총장 같은 일을 많이 하던데 그런 일이 가장 떳떳한 일 같은데...” 이리하여 박정희는 곧 산산이 분해될 입장에 처했던 청구대를 맡게 되는 것이었다.
심하게 표현하면,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고 삼풍백화점 주인이 삼풍붕괴사고로 삼풍백화점을 빼앗겼으니 돌려달라는 억지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청구대 설립자 해청에게 돈을 대주며 청구대 운영 주도권을 빼앗아온 전 청구대 이사장 전재용의 부친처럼,
이런 식이면 모든 회사나 공익재단은 최초 설립자만 자격이 있고 그 후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투자를 했든 전재용의 말처럼 다 도둑놈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런 대구대와 청구대를 합병하여 67년 12월 영남대를 새로 설립한다.
이번에 전 청구대 이사장의 자식인 전재용이 영남대 비리혐의로 언론에 공개하며 한나라당 검증위원회에 제출한 자료들은 그 대부분이 지난 87년 9월부터 89년 8월까지 영남대 교수들이 재단 비리의혹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난상토론을 벌렸던 `교수협의회 2년'이란 비망록에 있는 것으로 이미 수차 조사가 끝난 사안이었다.
80년 그해 학내 구성원의 반대와 민주화로 이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1988년 11월 까지 이사로 재직하다, 학내 부정입학과 관련한 비리와 교원들의 복지기금으로 영남투자금융의 주식매출 사건 등으로 국정감사를 받게 되었고 사무처장이 관련된 부정입학건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었던 박근혜는 퇴진하게 된다.
최근의 사학법 논란은 비리여부에 관계없이 자체적 분쟁이 생기면 이런 일을 쉽게 제도화한 것이었고 한번 파견된 관선이사제도를 영구화하는 길도 터놓고 있었다. 즉 쉽게 설명하면 개인이 설립한 사학에 문제가 생기면 관선이사를 파견하는 등 개입하여 이사회를 장악하고 영남대처럼 그 길을 영구화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되면 아무도 사학을 하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사기업마저 이름만의 사이비공공성이라는 마찬가지 방법(삼성과 현대의 기부금)으로 찬탈하게 되어 나라전체가 국가경영 체제가 되고 그런 나라는 바로 다름 아닌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학에 비리가 있다면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하면 될 것이고 범칙금으로 타협하려면 정정당당히 하라. 하지만 그것을 이유로 법에 의하지 않고 재산권까지 강제로 빼앗을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부득이하여 사정상 파견된 임시이사가 몇 십 년이고 은근슬쩍 눌러앉는다면 그것이 법의 허점을 이용한 강탈이 아니고 무엇이 강탈이겠는가.
79년 10.26사건으로 졸지에 부모를 다 잃고 슬픔에 빠진 박정희 유가족들에게 전두환 정권이 배려의 차원에서 인정하고 아니 박정희의 재산이었다는 당연한 권리로 인정받아 80년 3월 영남대로 들어선다. 하지만 영남대에는 이미 79년부터 교수협의회가 조직되어 있었고 ‘구교성명서’를 발표하며 박근혜 이사장 취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80년 5월 12일 박근혜를 이사장으로 하는 새로운 영남학원 법인 이사회가 문교부의 승인을 받았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5월 14일 이를 계기로 반정부데모의 성격을 띄고 대규모 학생시위가 발생한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10만 집회시위로 경찰 수명이 사망하고 5.22전국적 봉기추진 소문 등 극도의 사회혼란으로 5.17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5.18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그 당시 풍토로 박정희의 치적을 인정하지 않았던 영남대 사건은 하나의 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정통성과 정당성을 따지는 어떤 기준점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박정희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던 그 때만 해도 홀로서기라는 사회경험도 일천하였고 사회가 대학이 자신을 대하는 이런 태도에 서러운 맘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측근에게 영남대를 맡기며 이사장이란 명함만 걸어놓고 학교에 나갈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80년 11월 반년 만에 이사장직에서 결국 물러나고 형식상의 이사자리만 걸어놓고 있었을 것이었다. 노무현이 탄핵을 받았을 때처럼 아무런 일도 안 해도 나라 일은 잘 굴러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육영재단에만 몰두하며 그런 침잠의 세월8년이 어느 순간에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당시 88년 10월 영남대 국감의 주요한 이슈는 ▲ 박 대표 등 재단의 정통성 결여 ▲ 영남투자금융의 주식매출 비리(개인적 생각-잘해야 지금의 연기금 투자차원) ▲ 재단 부동산 처분과 편취(재투자 차원으로 규명불가) ▲ 입시부정(대부분 사실) 등이었다. 결국 국정감사 한 달여만인 11월 2일, 박 대표와 구 재단은 영남대에서 '손을 뗀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영남학원은 관선이사 체제로 전환되고 민선 총장을 선출하면서 학원 민주화의 토대를 닦으며 16년간 관선이사 체체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고들 한다.
당연히 영남대 재단 이사장은 “문서상 나타나 있는 것이 없습니다.”하고 답하였다. 이것이 박정희 일가의 80년대 영남대 장악이 정통성이 결여된 불법이며 유신잔재라고 비난하는 무수한 정통성 시비논란의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이런 짓은 처음 츨발 당시의 재단출연금이 없었다는 허점만 잡은 아주 간교한 책동이었다.
사실상 지금의 영남대는 모두 박정희 정권 당시 그 기반을 닦고 구축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물러날 때를 대비하여 공개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영남대를 키운 것이었고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처럼 떳떳하게 모두 공익재단화하였으며 다른 대통령처럼 몰래 꼬불쳐두는 또는 아태재단처럼 무슨 일에 쓰는 지도 모르는 응큼함과 간교함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68년에 땅도 새로 사고 캠퍼스도 새로 짓는데 66년 9월에 대구대도 삼성으로부터 헌납받아 학생들과 학교인가권도 다 있겠다 굳이 67년에 다 망한 청구대를 탐할 이유가 있겠는가를, 오직 그럴 이유가 있었다면 기존 청구대를 보호하려는 차원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박정희의 입장에서는 청구대의 땅도 건축물인 교사도 다 필요 없었고 그곳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몸담고 있던 교수등 직원들과 학교전통을 보존해 주려는 선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대통령도 못하고 못했던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와 영남대 이런 일들을, 세계적 지도자와 비교해도 전혀 뒤질 것이 없었던 이런 가치관을, 박정희는 60년대에 벌써 이런 생각을 하였고 실천에 옮겼다고 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지금의 시각으로 봐도 놀라운 일이었고 도리어 역사의 귀감으로 삼을 만하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10.26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사건은 이런 모든 꿈을 앗아가 버린다.
이 부마사태의 시작은 5.18 광주사태보다 과격하였지만 무기고나 교도소를 습격하지 않았고 18일~20일 비상명령과 위수령을 발동하여 1500여명을 연행하는 것으로 일단 진정국면을 맞고 있었다. 처음 시작하던 박정희의 5.16혁명 때도 무혈혁명이었고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할 수 있었던 격렬한 부마사태 때도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다.
박정희가 박종규에게 써준 메모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신민당은 앞으로 질서파괴나 폭행을 수반한 불법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이 원칙을 수락하면 가처분을 백지화하고 신민당의 김영삼 체제를 인정, 대화한다. 의원직사퇴서는 반려하고 국회를 정상화한다.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구속학생과 제적된 학생의 원상회복을 고려한다.」등이 써 있었다.
75년 4월 30일 월남패망으로부터 야기된 75년5월 긴급조치 9호의 철폐는 바로 개헌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그 진정한 의미는 6.29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어리석은 김재규가 야욕이외에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박정희를 시해함으로서 두고두고 민족내부의 분열을 낳았던 5.18 광주사태라는 역사의 비극까지 일어났고 6.29선언 같은 조치가 8년이나 미루어졌던 안타까운 역사의 뒤안길이 있었던 것이었다.
88년의 영남대에서의 퇴진과 90년의 육영재단에서의 퇴진, 그리고 진보개혁세력의 박정희 공과에 대한 무차별 공격과 박근혜에게 가해온 압박은 박근혜를 담금질하고 있었다. 새장속의 새처럼 살아왔던 박근혜는 74년 육영수 여사의 서거 때의 앳된 23살 처녀에서 미숙함 속에서 숱한 난관과 부딪치며 이제는 한 나라의 대통령에 도전하는 길목에 서있게 된 것이었다.
그 속에 있었던 약간의 하자와 결점은 미숙과 경험의 과정으로 보았고 큰 문제점은 없는 듯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개인의 입장에서 주제넘은 생각일지 몰라도 가장 큰 문제점이 되었던 이 세 부분에 대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를 기준하여 저의 검증은 통과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박근혜에 대하여는 아무리 정보를 쥐고 있는 권력이라도 이 이상의 더 큰 사안은 나올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줄푸세 = 선진화 운동
줄= 정권교체 걱정 줄여 주며
푸= 승리에 대한 희망은 풀로 채워 주고 세= 한나라당 세번째 도전 3번 박근혜 입니다!!! |
첫댓글 너희들이 근혜님을 씹어도 근혜님은 꼭 대통령이 된신다...
참 고생많으셨습니다..대단합니다..잘하셨습니다.
저는 졸필이고 퍼돌이입니다^^...글끝에 신영수님이 있죠?...조독마에서 활동하시는 신영수님께 감사하세요...읽다가 보니 좋아서 퍼왔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