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형 이야기(모순편)
전문가가 관련 분야의 모든 종류의 실수를 다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 간다고 할 수 있지.
하나님께 실수를 많이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한 말 치고는 좀 수위가 높고, 위험하기까지하네. 하나님을 알기 정말 어렵다고 고백해놓고서는 또 다른 소리 하고 있어.. 그리고 형, 뉘앙스로 따지면 전문가보다는 성화된 그리스도인이 되야 좋은 것 아닌가? 그런 전문가는 왠지 선지자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고, 성경 주석연구가 혹은 여러 은사를 가진 성도 정도와 비교가 될터인데…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도와 묵상 중에 창밖의 건물을 보니 구름 같은 형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되고, 서로 모여서 춤을 추고 결혼식에 참여하는 환상을 보면서 찬송 소리가 내 심장 속에서 강력하게 반복적으로 울리는 체험까지 했으니… 게다가 흰옷 입은 성도들이 겹쳐져 백합 한 송이로 변하는 것까지 밤새 계속적으로 보게 되니… 너무나 황홀했어.
백합 한 송이는 예수 그리스도 일터이고…
그건 형이 싫어하는 은사주의에서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
형, 위태위태한데…
내가 직접 겪으니까 형용할 수 없는 신령한 감각이 생기면서 천국을 경험한다는 게 이런거구나 했어. 몇 시간 동안을 성인 남자 찬양자가 주요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을 부르고 어린아이들이 청아한 목소리로 1절을 계속 같이 부르는데 조화롭고도 기쁘기도 하고 너무 아름다웠어. 근데 정작 문제는 그 후에 있었으니…
문제라니?
그 후에 어머니가 있는 병원에 가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어. 무의식 속에서 나온 말이었는데 나도 아직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온 것이라 믿어지지가 않아.
무슨 말인데?
그건 너한테도 말할 수 없고, 그 때 알게 된 것은 내 의식과 무의식이 몸과 마음이 극한 상황에 놓여졌을 때 다르다는 거야.
소망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알게 된 것은 성령의 은사는 ‘절제’로 마무리 되어야 한다는 간명한 진리였어.
그 일로 인해 이중적이며 모순적인 나에 대해 많이 절망했고, 마음도 많이 안 좋아.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내 입맛대로의 하나님을 만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재단하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자신의 뜻과 배치되는 일이 계속되는 것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안보이게 꾹꾹 눌러 놓다가 어느 한 순간에 폭발한 것 인지…”
형은 부모님이 아프시면 너무 예민해지는 것 같아. 그리고 형 그 때는 너무 잠도 못 자고 탈진상태였잖아. 가족 구원 때문에 절박해져서 그러는 것은 알겠는데, 나아가는 와중에 기도를 그렇게까지 며칠 동안을 하는 것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병구완에서 굳이 의사 역할까지 하려고 애쓰는 것은 납득이 잘 안가. 두려움과 원망이 형의 믿음을 가로막는 위험요소가 될지도 모르는 생각이 드네.
바울이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는 의미를 나의 환상과 계시 체험을 통한 교만에 의해 알게 했어.
오히려 나의 육체의 가시 등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는 것을 온전하게 깨닫게 되었지.
근데 형 말 대로 교만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하나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뜻과 의지대로 사는 거라고 본다면 형이 교만한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해. 물론 형이 항상 기도가 약하다고 하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말이지… 동양적 겸양과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다른 것 같아.
잘할 수 있는 것을 굳이 못한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주신 달란트가 저에게는 이렇습니다’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는 게 겸손이라고 했잖아. 다윗이 노래로 하나님을 드러낸 것처럼 형도
무엇인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형은 하나님께서 형에게 준 재능을 불충분하다고 보고 감추고 갈고 닦지 않으니까 모순이 생기는 것 같아.
그나 저나 형 지난 수요예배 때 대표기도 한 내용에 대해서 이제는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되네?
나도 나름 성가대와 찬양대를 서긴 해. 부끄럽긴 하지만...
폭염과 가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도록 비를 골고루 내려달라고 했는데, 그 후 솔릭이 강력한 기세로 올라온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그 정도로 그쳐서 다행이야.
근데 결국 그 후에 호우가 와서 형의 전국적으로 골고루 충분히 비를 내려 달라는 기도는 들어주신 것이 되는데, 정작 형의 아이를 선물로 얻는 다거나, 가족구원의 진전이 없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해.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치시려는 것은 아닌가 싶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형의 기도과정 가운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법을 가르치시는 손길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느헤미야가 왕이 무엇을 원하느냐 할 때에 그 짧은 시간에 그것도 왕의 면전에서 하나님께 묵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현장을 찾고 면밀히 계획한 것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놀라워.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인 것 또한 지혜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 보여주지.
예를 들어 “들보로 쓸 재목을 내게 주게 하옵소서 하면서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한다는 대목에서 보면 느헤미야의 치밀한 계획과 왕 앞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을 알 수 있어.
그래 형, 기도와 계획과 행함이 같이 가기는 쉽지 않은데.. 기도로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서 그에 맞춰 실천 한다는 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묻는게 참 어렵고도 실천하기 힘들다 하더라고…
사실 나도 어려운 일이 닥쳐야 기도하는 경우가 많아서...
성경에 대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 물론 더 의미 있는 일일 수 있겠지만 요즘에는 형이 하고 있는 악세사리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하나님께서 형을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데에는 가족구원뿐만 아니라 또 다른 섭리가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 세상일도 다 이해 못하는데 하나님의 깊고 넓은 마음을 측량할 수 있을까?
형이 말한 ‘전문가’의 뉘앙스는 충분히 알겠는데, 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전문가가 된다는 생각은 좀 버렸으면 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이라도 조금 덜 떨어져 보여. 그리고 가족 구원 기도도 좋겠지만, 형 아이에 대한 기도와 계획과 실행’을 구체적이고 간절하게 했으면 해. 내가 너무 나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요즘에는 하루 하루를 기준으로 그날 주신 은혜의 분량만큼 잘 살아내는게 내 권리이자 의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하면서 100퍼센트를 실제로 행한 후에 그 100퍼센트를 하나님께서 다시 하셔서 나의 100퍼센트가 지워지고 하나님의 100퍼센트만이 남는게 정말 은혜라고 하던데...
그러러면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면서 느헤미야처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겠지.
99퍼센트를 하고 1퍼센트를 은혜에 맡기는게 아닌가보네. 100퍼센트를 하나님께 맡긴다는게 그런 뜻이었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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