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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다움을 만들어 준다
― 어느 토요일에 ―
내 고향은 창녕군 장마면 강리이다. 북쪽에는 용암산, 도로 남쪽에는 마이산과 장강골 등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이다. 상강에는 초등학교, 진료소가 있고 하강에는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등이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하강이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생활했다. 그 가운데에는 현역병으로 입영하지 못하고 방위병으로 마을 입구에 있는 중대본부에서 근무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줄곧 고향을 떠나 생활했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의 성향을 잘 모른다. 본격적으로 생활하게 된 것은 방위병으로 근무할 때뿐이다. 주 업무는 예비군 교육을 돕는 것이었다. 방위병은 현역병으로 제대한 사람들에게 조롱감이 되었다. 이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꿈도 있었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것도 모르고 ……. 어릴 적에, 자치기에 미쳐 어머니 몰래 삽작문을 나서다가 엎어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작은 자치기의 날카로운 부분이 왼쪽 눈 아래를 찔러 상처를 많이 내었다. 실명(失明)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오늘날까지 왼쪽 눈은 시력이 좋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
이런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입영대상자 신체검사 결과 4급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방위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기간이 1976년 3월3일부터 1977년 3월 말까지이었다.
학교생활만 하다가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병역의무라는 큰 굴레가 있지만, 현역병처럼 영내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분들보다는 편안하게 근무할 수 있었다.
중대본부라는 조그마한 공간이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역병은 계급으로 위계질서가 있지만, 우습겠지만 이 방위병에게도 위계가 있다. 선임자와 후임자 간의 갈등이 있었다. 그것은 학교는 선배이고 입대는 뒤에 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스스로 고된 일을 하기 싫은 데서 온 것이었다.
방위병 생활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후반기에 접어들었다. 즉 고참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부여된 임무는 업무 외에도 후임들에게 근무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1977년 1월 29일(토요일)은 초등학교 동기생이 방위병으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중대본부에서 동기생과 만나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가 근무하는데 필요한 사항과 위계를 이야기했다. 이런 점은 친구가 아니꼽지만,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으니 중대장님을 찾는 것이었다. 지금 계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000'라는 사람을 찾는다. 본인이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래요" 한다. 어쩌면 들은 목소리 같기도 했다. 잘 몰랐던 것은 오히려 '나'였다. "누구신지?", 하고 물었다. 일전에 중대장님을 찾아온 그녀였다. 눈치를 채고 놀러 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자기가 있는 쪽으로 오라고 했다. 그곳은 중대장님과 재종이 되는 분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그녀와 이 집과의 관계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곳에 도착하니 기대하지 않은 손님이 있었다. 조금은 어색한 자리이지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해서 어울렸다.
잠시 후 짜장면이 들어왔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일전에 만났을 때 농담 삼아 있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사과도 했다. 식사 후 그녀의 부탁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밖은 바람이 불고 날씨가 몹시 차가웠다. 마음이 뒤숭숭하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의 제안은 가게 뒤쪽 산에서의 만남이었다. 퇴근 후 그녀를 만나러 갔다. 가게 옆에는 진료소가 있다. 진료소 옆에 산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통해 산에 올라가려 했으나 막혀 있었다. 그래서 둘러서 지정한 장소에 갔다. 이곳에서 그녀가 오도록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 그녀는 내가 자주 드나들었던 그녀의 친척 집에서 나왔다.
나는 그 집 맞은편에 있는 이발관에 들어가 그녀의 행방을 쫓으려고 했다. 이발관 안에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있거나 이발하러 온 사람뿐이었다.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이발관을 나왔다. 그녀의 행방을 찾으려고 점심때 만났던 가게 쪽으로 갔다. 가는 길에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외사촌에게 낯선 처녀가 가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방금 올라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약속한 장소에 가서 기다렸다. 보이지 않아 조금은 당황했다.
그곳에서 내려와 가게 앞을 지날 즈음에 "발수야" 하는 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았다. 가게에서 그녀와 그녀의 의동생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려고 여기에 있었느냐고 물었다. 만약에 나를 만나지 못하면 동생이 바래다줄 것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하더니 헤어졌다. 그러고 나서 내 곁으로 왔다.
우리는 상강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는 길에 친구를 만났다. 만약에 짐승이라도 만나면 성냥불이라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담배 몇 개비와 성냥을 빌렸다.
상강 마을 제일 안쪽에 있는 서재 앞을 지났다. 서재 뒤에서 그녀는 양말을 신어야 한다고 했다. 나에게 고개를 돌려 달라고 했다. 서재 뒤에 있는 산이 용암산이다. 이산 아래 자리 잡은 마을이 상강 마을이다. 이곳은 밀양 박 씨 집성촌이다. 사람들이 고개 너머 있는 들판을 오가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을 처음 만났다.
이 길은 마을에서 내려올 때는 쉽지만 들판에서 올라갈 때는 힘겨운 길이었다. 더구나 이쪽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지게에 지고 가야 한다. 우린 고불고불한 언덕길을 내려와 우리가 부치는 논을 지났다.
우리 논은 우리 집보다 그녀 집 가까이에 있었다. 다만 가운데로 흐르는 계성천이 있어서 멀어 보이고 이로 인해 농사짓는 영역이 달랐을 뿐이다. 이 논의 위치 때문에 가정환경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돼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밀착된 상태로 걸었다.
길은 좁았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데 우리 옆을 두 사람이 지나갔다. 내가 사는 동네 사람들이었다. 또 사람들을 만나면 안 되니까 사람이 덜 다니는 길로 가자고 했다. 그녀가 안내한 길로 가게 되었다. 온실이 나열해 있는 사이로 걸어갔다. 농장 근처에 있는 곳에서 좀 쉬자고 했다. 자기와 잘 아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이라고 한다. 그래서 개울 건너 언덕에 앉기로 했다. 나는 손수건으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책이 있으니 손수건은 집어넣고 책을 깔고 앉자고 했다.
우리는 앉아서 지나간 이야기를 했다. "연애 상대자는 되어도 가정생활을 할 수 없는 여자"라고 평가한 내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상대에게 이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상대에서 오는 느낌이었을까? 아니면 직관이었을까? 듣는 쪽에서 자존심이 많이 상한 말이었다. 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내가 그만두자고 했다. 그녀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별 반응이 없었다.
길을 걸으면서 그녀가 자기 집에 어떤 남성이 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날씨도 추운데 자기 집에 잠깐 쉬었다가 가라고 했다. 남아로서 영광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망설이다가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의 집 앞에 섰을 때, 그녀가 "대문 옆에 짚을 재어 놓은 곳에서 조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하겠노라고 했다. 날씨가 춥고 몸을 가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담과 짚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서 기다렸다. 대문 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아니고 오빠가 나타났다.
그녀의 오빠는 짚을 정리 정돈하는 사람같이 행동했다. 낯선 사람이 그곳에 있으니 의외라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다가서서 장마에 사는 누구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 존함을 물었다. 융통성 없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어떻게 여기에 왔는가 하고 물었다.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서 윗마을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할 일이 없으면 볼일 보러 가라” 했다.
내가 가려고 하는데 나의 학벌을 물었다. 00대학을 다니다가 방위병 생활을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필요 없는 걸음을 빙 둘러서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영감이 스쳐 가는 싸늘한 바람과 함께 떠올랐다. 그녀가 나에게 한 이야기와 그녀 오빠가 나타난 것은 작전상 계획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집에 들어간 후 5분 내지 10분을 기다린 후에 그녀의 오빠가 나타났다.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짚을 정리할 정도로 널브러져 있는 것도 아닌데, 손질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그것도 관상대의 예보보다 더 찬 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에 밖에서 꼭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의 학벌을 묻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찬 바람을 맞으면서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주고 간 책을 들고 들길을 걸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마음을 돌려먹었다. 성냥과 담배를 빌려주었던 친구를 찾아가 성냥을 주고 버스 정류소로 갔다. 그곳에서 그녀의 의동생에게 전화했다. 통화한 후 나의 친구 00이를 만났다.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나왔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 중대장님을 만났다. 이때는 해가 기울고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이었다. 중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마침 자기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았다면서 냄비와 라면을 가지고 중대본부로 들어가셨다. 난 술이 좀 되었던 모양이었다.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는지도 몰랐으니까.
오늘 있었던 일을 중대장님께 말씀드렸다. 중대장님께서 내가 그녀에게 한 이야기, 즉 연애 상대자는 되어도 가정생활을 할 수 없는 여자라는 말씀을 꺼냈다. 그녀가 중대장님에게 "나를 꼭 갋아보겠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또 나에게 중대장님이 충고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로 간의 신상 문제 등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집에 들어온 시간은 23시 5분 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도 아프고, 술도 취하고, 시간도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 일을 결코 미루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그녀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건대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개성적으로 자랐으며, 남에게 지탄받고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했던 사람으로 생각한다. 어떤 생각이 있는지 모르지만, 줏대가 없으며, 바른 품성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자기 나름대로 첨단을 걷는 철학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하나의 허영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를 한 분만 더 만나면 나는 의처증이 생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의심할 수 없는 대상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소유할 수도 없고 소유물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미련을 두는 것보다 착오를 남기는 인간이 되는가 봐. 그러나 이상은 항상 날아간다.
1977. 01. 30.
첫댓글 좋은 동네!!!
"나를 꼭 갋아보겠다"
갋다
1. 참견하다, 애써 따지고 괴롭히다 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2. 참견하다, 껴들다, 따지고 들다의 경상도 사투리.
어학에 밝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