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제봉 기슭에서
사월 끝자락 정기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오후의 여가 사간을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다 산행을 나섰다. 그간 봄부터 겨울 사이 잘 가지 않은 방향을 잡았다. 집에서 101번을 타고 대암고등학교 근처 내렸다. 대암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들지 않고 성주동 아파트단지를 돌아갔다. 용제봉과 상점고개로 가는 등산로를 따라 걸었다. 평일임에도 몇몇 산행객들이 오가고 있었다.
지난겨울 불모산 숲속 길을 걷느라고 한 차례 다녀간 길이었다. 이제는 용제봉 기슭으로 오를 참이다. 봄이 되면 북면 작대산이나 구룡산으로 들어 취나물이나 바디나물을 좀 뜯었다. 우리 집에서 일용할 찬거리로 삼고 친구나 지인에게도 나누기도 했다. 취나 바디는 용제봉에도 자생하나 여러 산행객들이 오르내려 내가 채집해 갈 양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용제봉을 찾지 않았다.
아침나절까지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이번 비뿐만 아니라 올봄 들어 비가 잦은 편이다. 미세먼지와 황사가 나타나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날도 많았다. 이맘때면 송홧가루도 분분히 흩날리는 때다. 이런 것들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비가 자주 내려 고마울 따름이다. 봄비는 지표면의 건조지수를 낮추어주어 산불 예방에도 일등 공신이다. 올봄에는 아직 대형 산불이 없어 마음이 놓인다.
나는 달라졌을 용제봉 식생이 궁금했다. 용제봉과 상점 갈림길에서 용제봉을 택해 숲속으로 들었다. 희미한 등산로 따라 산비탈을 올랐다. 십여 년 전 나는 불모산이나 용제봉으로 올라 산나물을 마련해왔다. 그런데 근래는 그곳을 찾아가질 않았다. 그 이유는 불모산터널이 생겨서이고 성주동에 많은 아파트와 주택이 들어서면서 그곳 주민들이 용제봉 기슭으로 많이 오르내려서이다.
용제봉은 내가 여름이면 가끔 찾는 산기슭이다. 청청한 여름 숲에 들어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세상사 번뇌를 잊고 무아경에 빠져들었다. 계곡엔 평소에도 흐르는 계곡수가 제법 되는데 비가 내려 물소리가 철철 들려왔다. 바위틈으로 하얀 포말을 이룬 물줄기가 길게 이어져 흘러 내렸다. 물이 많지 않으면 계곡을 따라 오르면서 취나물이나 머위를 뜯을 수 있은데 그러지 못했다.
오래 전 용제봉 계곡에서 봄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계곡 아래쪽에서 취와 머위를 찾아 뜯고 있을 때였다. 내가 뜯는 취나물이 금방 누군가 뜯어간 흔적이 보였다. 곁에는 사람이라곤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잠시 뒤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마리 고라니가 풀을 뜯고 있질 않은가.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계곡을 빠져 되돌아 나왔더랬다.
요즘 용제봉은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르내려 노루와 고라니들은 더 깊숙한 숲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멧돼지도 마찬가지다. 산에서 진정한 주인들은 그 녀석들인데 순진하게끔 주인인줄을 잊고 인기척이 있으면 언제나 그들이 먼저 놀라서 달아나기 예사다. 이날 내가 숲속에서 덩치 큰 네 발 짐승은 만나질 못했다. 들머리서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바위틈서 촐랑대더니 보이질 않았다.
나는 남들이 잘 오르지 않은 희미한 등산로 따라 올랐다. 고압선 송전탑이 용제봉에서 대암산으로 건너갔다. 나는 그곳에서 지난해 가을 다래를 좀 따서 담금주를 담가 먹은 바 있다. 다래나무는 암 그루와 수 그루 각기 다르다. 다래열매는 당연히 암그루에만 열린다. 다래나무는 은행나무와 마찬가지로 바람이 인연을 맺어준다. 그래서 꽃이 피어도 색깔이 화려하지도 향기롭지도 않다.
다래나무 군락지는 누군가 다래 순을 따 간 흔적이 보였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니 다래 순이 쇠어가고 있었다. 조금 더 위로 올라 보드라운 다래 순은 몇 줌 땄다. 배낭을 가득 채울 일도 없었다. 우리 집에는 작대산에서 뜯어온 산나물이 아직 있어 필요하지 않았다. 용제봉을 내려오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얼굴을 뵙자던 예전 근무지 동료와 연락이 닿았다. 다래 순은 그에게 안겨주었다. 16.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