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6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1-6)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You have faith in God; have faith also in me.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지도자들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살리시어 예언서에 약속된 바를 이루셨다고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되며 진리와 생명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이르러야 할 최종 목적지이시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길이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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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제 하루는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요? 어제 하루 동안 한 일을 기억하려면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께 일은 더 기억하기가 어려워지고, 일주일 전에는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데 왜 기억조차 할 수 없이 흘러가고 있는지요? 전문 바둑 기사들이 바둑을 두고 나면 ‘복기’(復棋)라는 것을 합니다. 복기란 바둑의 승부가 끝난 뒤 자신이 둔 바둑이 어디에서 잘 두고 못 두었는지를 살피려고 되풀이해 보는 것입니다. 전문 기사들은 약 300여 개나 되는 돌을 놓으면서 승부를 가르는데 자신이 놓은 돌을 순서대로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요?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들은 바둑돌을 놓는 순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돌 하나를 놓을 때마다 그 돌이 바닥판에 미치는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놓은 돌을 그대로 다 기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시간도 무의미하게 보내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됩니다. 한순간 한순간 바둑돌을 올려놓듯 말과 행동이 삶과 이웃에 어떤 영향과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하고 살면 우리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지성은 살아온 시간들을 잊는다 하더라도 우리 영혼에는 거룩한 기억으로 새겨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루하루 우리를 의미 있게 살도록 하는 ‘삶의 물음’으로 이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가?’ ‘나의 판단과 선택은 진리에 가까웠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생명이 되는 말과 행동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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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활기는 나이와 무관합니다. 분명 젊은 나이건만 생기가 사그라진 노인처럼 행동합니다. 그런가 하면 얼굴에는 주름이 있고 흰머리가 성성하지만, 젊은 기운을 확확 내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젊은이건 노인이건 여자든 남자든 ‘삶의 활력’을 잃으면 시들어 버린 꽃과 진배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 안에 ‘삶의 기운’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수없이 성체를 모셨고 수없이 기도와 희생을 바쳤으며 오랫동안 믿음의 길을 걸어왔다면,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분명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인생 역시도 하느님을 향해 가고 있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습니다. 오르막만 있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오르막만 있는 인생도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내리막을 만납니다. 그러므로 ‘내리막이다.’ 하고 느끼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끄심에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활기’를 간직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은 정상에 오르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내려온 뒤’에 결정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은퇴한 뒤에 힘들게 살고 있는지요? 예수님 안에 ‘길과 생명’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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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과학에서는 모르는 존재로 규정합니다. 인간의 분석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안다고 할 때 ‘앎의 수단’은 감?都求?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감??초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강생하신 당신을 통하여 느끼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출현을 ‘육화’(肉化)라고도 합니다. 고깃덩어리로 오셨다는 표현입니다. 얼마나 구체적인 표현입니까? 성경을 중히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전남 구례의 화엄사에는 칡넝쿨로 만든 기둥이 있습니다. 칡은 덩굴나무입니다. 제멋대로 자라기에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반듯한 재목이 된 것은 커다란 전나무 옆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꼿꼿한 전나무를 닮으려다 기둥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칡넝쿨처럼 얽혀 살아야 하는 요즈음 세상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곧게 살기에는 크나큰 힘이 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나무와도 같습니다. 그러니 말씀 곁에 머물러야 곧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삼밭의 쑥대처럼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림에 재능이 없고 창의성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회사를 나가 주세요.”라는 말을 상사에게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렇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끊임없이 노력했지요. 이 사람이 바로 꿈의 동산인 디즈니랜드를 만든 월트 디즈니입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넌 음악에 별 재능이 없는 것 같아. 포기하든지, 죽자 살자 연습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겠어.”라는 말을 음악 선생님께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죽자 살자 음악을 연습했지요. 그는 훗날 세계 최고의 음악가가 된 베토벤입니다.
“너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구나. 다른 애들에게 방해만 되니 교실에서 나가는 것이 좋겠다.”라는 말을 선생님께 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가는 대신 집에서 혼자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했지요. 이 사람이 바로 1921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세계 최고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입니다.
사람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즉,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아무것도 될 수 없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존재로 살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즉,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힘이 되시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믿음을 통해서만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음을 그래서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분명하게 전해주십니다. 결국 믿음이 정답인 것입니다.
2개의 원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2개의 원석은 서로 다르게 변했지요. 하나는 광채 없이 흐릿하게, 또 하나는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흐릿한 돌은 겨우 8번 깎였고, 빛나는 돌은 800번 이상 깎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빛나는 차이를 보였던 것이지요. 우리 인생도 더욱 더 빛나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무수히 깎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이렇게 깎여 나갈 때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 보다 더 고통과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 빛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고통과 시련에 좌절하기 보다는 딛고 일어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소중한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삶의 의미보다 삶 그 자체를 더 사랑해야 한다(도스토옙스키).
내일에 대한 믿음
-엄기선 신부-
언제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집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것은 평화를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조금만 이상해도 전전긍긍하는 우리들 모습을 보고 믿음을 심어 주신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실까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을 살펴봅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삽니다. 사회적인 악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고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죄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얽매여 신앙인으로서의 도리를 못한다면,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미래의 불안을 떨쳐야 합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오늘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면 하느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하느님께 신뢰가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어지는 시간이라는 선물 앞에 오늘 하루도 살아 볼 가치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그리고 오늘을 하느님 은총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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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 박동순 신부-
진리가 아닌 것을 믿고 생활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후회가 되겠습니까 ? 생명을 잃을 뻔한 사람이 생명을 되찾았을 때, 그 사람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남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 얘기고 나 자신의 얘기입니다. 길은 목적지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지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생명입니다. 모든 길은 예수님을 통해서 가야 하고, 모든 진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얻을 수 있고, 모든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 아버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그 길의 목적지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을 알려주시고, 그 길이 되어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던 분입니다. 하느님한테서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온 우리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도록 그 길이 되어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끝없이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사셨고 십자가의 길, 영광의 길을 걸으며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김찬선신부-
“형제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어제에 이어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유다인들에게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뽑으시고 들어 높이시고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주시고 판관을 세워주시고 왕을 세워주셨음을 얘기하고 이제 구원자 예수님을 주셨음을 얘기합니다.
바오로가 얘기하고픈 것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좋은 것을 주셨고, 좋은 것 중에서도 좋은 것인 구원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아끼고 아끼던 것을 아낌없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되게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얘기들이지만 그중에서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한 형제를 크게 실망시킨 애깁니다. 그 형제는 저를 무척 사랑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형제에게 주는 것도 없고 해주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보답이 없는데도 그 형제는 저에게 꾸준히 잘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형제가 싹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저에게 아주 쌀쌀맞게 대하고 아예 피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영문을 몰라 “왜 저러지?”하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가장 아끼던 것을 저에게 주었는데 저는 그것을 다른 형제에게 준 것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애착하지 않는다는 가난 차원에서 또는 형제애를 나눈다는 차원에서 형제들이건 신자들이건 저에게 주신 것을 제가 소유하지 않고 바로바로 더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형제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매우 서운했던 것입니다. 얼마라도 간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었어야 했는데, 적어도 아끼던 것을 준 것임을 알아주기라고 했어야 했는데 저는 정말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주 나쁘고 못된 놈이었습니다.
오늘 바오로의 말씀도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구원의 말씀을 알아보지 못하였음을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보물을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버리고, 은총을 알아보지 못하고 악처럼 단죄하고, 생명을 알아보지 못하고 죄처럼 죽여 버립니다.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나에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지금 나에게 전해진 말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하고, 이 시간 괴롭다고, 그것은 형편없다고, 그 말은 쓰다고 오히려 타박하고 흘려버리고 버려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돼지들에게는 더 이상 진주를 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버린 돌 모퉁이 돌 삼으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돼지로 여기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오히려 당신 아드님처럼 모퉁이 돌로 삼으시겠답니다.
길은 꽃을 보고 찾는 게 아닙니다!
- 반명순 수녀-
본당에 부임한 후 며칠 안 되어 가정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동행하던 신학생이 “수녀님께서 어제 다녀오셨다니 집은 금방 찾을 수 있겠지요 ?” 라고 묻기에 그 근처에 꽃이 많이 피어 있던데, 곧 찾을 수 있다며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막상 집 부근에 도착하자 도통 가름할 수가 없었습니다. 몇 번이고 여기냐고 눈빛을 마주하는 신학생에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길모퉁이를 돌아서는데, 그곳에도 흐드러지게 핀 꽃무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나, 여기도 꽃이 있네.” 나의 경탄과 놀라움에 기가 막힌 신학생이 점잖게 한마디 합니다. “수녀님, 길은 꽃을 보고 찾는 게 아닙니다!”
나의 수도 삶에서 ‘길’ 은 화두였습니다. ‘생명의 길을 어디로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 하는 게 열병같이 따라다녔습니다. 찾고자 했던 관계의 길은 난해했고, 사랑의 길은 모호했으며, 진리의 길은 거칠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상처를 받고, 상처를 입히기도 하며, 못다한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옳다고 여기며 걸어온 길의 끝에 서서 이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 이 길이 주님께서 앞서 가신 길입니까 ?’ 하고 되묻기도 했습니다. 사도 토마스가 예수님과 동반했던 수많은 시간의 끝에서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듯이, 제가 잃었던 막다른 길에 서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는 이정표를 보았습니다. 제가 찾던 길은 지식 속에도, 권위와 인정 안에도, 명예와 재화의 한가운데도 있지 않았습니다. 너무 작아 보이지 않았던 형제 · 자매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작은 일들, 보잘것없어 지나쳤던 사건들 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인도되는 것이며, 그분 안에 머물 때만 생명과 진리의 빛 안에서 걸어갈 수 있음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아는 길만이 길이라고 고집하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을 표지판으로 삼고 제가 모르는 다른 길을 따라 나의 이웃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이 자기 친구와 함께 백화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운 경영학을 통해서 백화점 경영을 누구보다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이 둘이 맡은 일은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글쎄 어떻게 보면 하찮다고 말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안내를 맡게 된 것입니다.
친구는 크게 실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회사의 경영진을 탓하면서 곧바로 백화점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백화점을 그만 둔 친구와 달리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일을 했습니다.
‘물론 내가 배운 것을 펼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오히려 엘리베이터를 안내하면서 고객들의 구매심리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이 백화점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미국에서 ‘백화점 왕’으로 불리는 페니입니다.
하찮은 일을 맡음으로 인해 실망과 절망을 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이라는 말을 하면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위치를 의미 있는 자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역시 이 ‘하지만’의 신앙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의 일이 너무 힘들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이를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실 거야.”
“병원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 하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거야.”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거야.”
이러한 ‘하지만’의 신앙을 간직할 때 고통과 시련을 올바르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하지만’을 잊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즉, ‘하지만’ 이전의 말만을 즐겨 함으로써 불평과 불만만 간직합니다. 이러한 불평과 불만을 통해서 고통과 시련을 이겨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평과 불만 안에 주님의 자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불평과 불만의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하지만’의 신앙을 갖고서 철저히 주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의 신앙으로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은 회초리가 아닌 시간으로 인간을 단련시킨다.
주님의 문
-박민서 신부-
우리는 많은 문들을 지나갑니다. 방문, 현관문, 식당문…. 이 문들의 특징은 밖에서도 안에서도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가는 구원의 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문과는 다릅니다. 구원으로 가는 마음의 문은 고리가 안에 있어서 밖에서 두드릴 수는 있어도 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열어야만 열리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내가 열어야만 열릴 수 있지만 항상 열려 있는 문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 향하는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를 향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아기가 자궁 안에서 10개월 동안 기다리다가 자궁 문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올 때 엄마의 도움도 받지만 전적으로 자신이 온 힘을 다하여 자궁 문을 나오는 과정을 갖게 됩니다. 나오는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고통과 두려움을 겪게 되지만 그 과정을 통과하면 밝은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는 엄마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그때 아기와 엄마의 고통은 경이로운 감탄과 축복과 은총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과정이 고통일 수 있지만 그 너머 나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또 그렇게 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도 지금 겪고 있는 고통 속에 숨지 않고 스스로 고통의 문을 열고 나와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용서합시다.
-김기현신부-
살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의 결과가 나쁘게 예상될 때 마음이
산란하고, 중요한 시험이 다가올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또 가까운 사람들과 다툼이 있을 때 마음이 산란합니다. 이
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이 산란해 질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관계에서 주고받는 갈등과 상처가 가장 크고 많으
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것들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가 있
습니다.
바람을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풍차를 만들 수는 있다.
파도를 멈출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배의 돛을 조정할 수는 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가? 없다. 하지만 용서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고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어떻게 용서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
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음주운전자로 인해 남편을 잃고 오랜 세월 분노와 슬픔으로 살
았던 부인이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러진 팔이 붙는 것과 같
아요.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팔이 붙기는 하지요. 하지만 뼈가 제대로 붙지 않아 팔이 비뚤어지게 되죠. 또 팔이 너
무 약해져서 조금만 충격을 받아도 다시 부러지게 되지요. 용서하지 않고 그냥 방치된 상처는 아물긴 아무는데 뒤틀
리고 나약한 내면세계를 만들 뿐이지요.” 이처럼 용서는 시간만 지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그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용서하기로 결심하기가 힘든 대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작업으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
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종이란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신앙심이 깊고 착실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
이가 고3 때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불량배들이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습니다. 인종의 부모님은
열심한 신자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안 가해자 학생의 부모들은 여러 차례 인종이의 부모님을 찾아와 예수님 이름을
들먹이며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인종이의 부모님은 자기 아들을 죽인 학생들을 용서하기가 정말 어려웠지
만,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절대 당신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할 뿐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당신들을 보면 무척 괴롭
습니다.” 이렇게 정말 하기 어려운 용서를 신앙 행위로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이러한 용서를 하고 나서 특별한 체
험을 하게 된 점입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용서한 바로 그 주간 주일미사 중에 아들이 주님 품에 안긴 것을 환시로 본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고 나서 인종의 어머니는 비로소 가해자 학생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 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용서는 곧 화해다.’ 라는 생각입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나 혼자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화해는 쌍방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
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실수 하는 것이 있습니다. 굳이 상대방을 찾아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라고 말했
다가, 더 큰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이 같은 공동체 자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아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
니다. 오랫동안 그 자매를 멀리했는데, 우연히 그 자매와 함께 기도회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봉사자끼리 사
이가 안 좋은 것이 마음에 걸려 그 자매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우리 서로 용서하고 앞으
로 잘 지내도록 합시다.” 라고 말했더니,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래, 당신 잘못을 당신이 알겠지?” 하더랍니다. 그래
서 그 자매는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용서했다고 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과 반드시 관계를 재
계하고 찾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화해는 용서가 이루어진 다음에 생각할 문제이고, 쌍방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 부분
입니다. 어느 한 쪽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마음을 열지 않고 있을 때는 아직 화해할 시기가 아닐 수도 있습
니다.】(‘미움이 그친 바로 그 순간’ 참조)
오늘은 나와 나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화병에 걸리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살아가기 위해서 ‘용서하는 일’에
초점을 맞춰 봅시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양승국신부-
<내가 누구냐?>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재판을 받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됩니다. 일선 파출소를 거쳐 경찰서로 넘어간 아이들은 검찰로 넘어가게 되고 구치소와 소년분류심사원을 거치게 되는데, 다 합해서 짧게는 한달, 길게는 두세 달 가까이 걸리기도 하지요.
전혀 와보지 않았던 낯선 곳들을 전전하면서 아이들은 나름대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불안하고 답답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도 한 아이를 법정에서 데리고 나왔는데, 아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우선 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지요.
먼저 아이를 음료수 자판기 앞으로 데리고 갔지요. 시원한 음료수를 하나씩 뽑아든 우리는 잠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말을 건넸지요.
"반갑다. **야! 그 동안 고생 많았지? 어디 아픈 데는 없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집에 가면 지낼 만 할거야."
즉시 아이의 얼굴이 편안해지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 우리 교육자들, 부모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안심시키는 사람이어야 되겠구나. 이 땅에서 팍팍하게 청소년기를 보내느라 갖은 스트레스로 맛이 간 아이들이 마음 편히 기대고 쉴 수 있는 고향의 언덕 같은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겠어!" 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한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이 양반이 틈만 나면 <나는 간다. 머지 않아 곧 떠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데...혹시라도 예수님이 먼저 떠나시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거지? 저분은 그간 우리의 중심이자 희망이었는데...저분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끝장나는 것 아닐까?"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던 제자들을 흔들리는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위로의 말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너무 그렇게 걱정들 하지 말거라. 내가 있지 않느냐? 내가 누구냐? 내가 나 혼자만 잘먹고 잘 살겠다고 너희들을 버리고 떠날 사람 같으냐? 기억하거라. 이별은 잠시란다. 내가 먼저 가는 이유는 너희를 위한 명당자리를 잡기 위한 것이란다. 너희가 안심하고 푹 쉴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서 선발대로 약간 일찍 떠나는 것이란다."
이렇듯 우리의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안심시키시는 분,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안전과 평화와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분,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기서 웅장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바로 밑을 작은 배로 건너게 되었지요. 작은 배는 거친 급류 속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습니다. 그 여행객은 불안해하며 난간을 꽉 붙들고 서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머릿속은 온갖 상상으로 가득 찼거든요.
‘만약 이 배가 사공의 실수로 급류에 휘말린다면 어떡하지?’
그 동안 다른 승객들은 장엄한 폭포의 모습에 연신 감탄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여행객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 남자는 여행객이 왜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는 듯 했어요. 그는 여행객의 손을 잡아끌어 노를 젓는 사공 옆으로 가서는 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노를 저으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배가 뒤집히거나 사람이 다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아직까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지만 늘 조심하려고 합니다.”
사공과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남자가 여행객에게 조그만 소리로 말했습니다.
“당신은 혹시 노를 저을 줄 압니까?”
그러자 여행객이 말했습니다.
“아니오, 저는 전혀 할 줄 모릅니다.”
“당신이 저 사공보다 노를 더 잘 저을 수 없다면 사공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여행을 즐기십시오.”
이 여행객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사공의 실수 때문에 급류에 휘말릴 수 있다는 생각, 더군다나 자신은 노를 저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더 노를 잘 젓는 사공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서 여행을 즐기면 그만인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면서, 우리가 늘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끊임없는 걱정과 의심으로 불안해합니다.
그냥 노를 젓는 사공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여행을 즐기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길인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지금이라는 현재를 주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의심하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믿음만이 우리의 인생길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말을 공손하게 하고 표정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전혀 비용이 드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의외로 큰 이득을 가져오게 된다.(뤼신우)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양승국신부-
<빛나는 작은 길>
아주 크고 사납고 나이도 먹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그래서 사는 것도 지루해 보이는 큰 개와 인형같이 작고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도 모르고,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한 새끼 강아지가 있다면 아이들은 어느 쪽으로 달려가서 놀겠습니까?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들은 작고 어린 강아지 쪽으로 달려가겠지요.
살레시오 회원으로 살아가면서도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잘 성장해서 체격도 이젠 당당하고, 공부도 곧잘 따라가고, 제 갈 길을 잘 가고 있는 아이와 어린 시절부터 못 얻어먹어 체구도 또래 아이들과 크게 비교될 정도로 왜소하고, 자주 아프고, 늘 뒤처지는 아이가 있다고 할 때, 먼저 시선이 가는 쪽은 어느 쪽일까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당연히 덜 떨어진 아이에게로 시선이 먼저 가겠지요.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잘나고 똑똑해서일까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업적 때문일까요? 우리의 성공, 승승장구해온 빛나는 삶 때문일까요?
제 생각은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나약함, 우리의 한계,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의 결핍은 하느님의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를 향한 한량없는 하느님의 측은지심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둘러봤습니다. 결핍, 작음, 나약함, 연약함, 소박함...이런 단어들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물질만능주의, 성장제일주의 경제우선주의 구호에 파묻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홀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좁고 작은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작은 모습으로 오셨고 인간으로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겸손의 삶을 일관되게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젖어들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가난과 소박함을 바탕으로 한 무소유의 삶, 영적 삶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지칭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을 총해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그 길, 오늘 우리의 묵상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길은 작음과 겸손함, 한없는 자기낮춤, 가난을 배경으로 한 빛나는 작은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전삼용신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미국을 방문하고 계셨습니다. 한 여인이 마더 데레사를 찾아와 하소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의 삶은 너무 권태롭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어요.”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대답하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오면 제가 진정한 삶을 드릴게요. 죽기 전에 한 번 꼭 방문해 주세요.”
그 여인은 인도로 갔고 마더 데레사와 함께 고통 받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하였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다 보니 그 여인에게 다시 삶의 의욕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있는 곳에 오시면 삶을 드리겠다.’는 의미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길을 아는 사람만이 길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또한 길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길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자신이 그 길을 이미 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공자님도 세상의 많은 위인들이 이 길을 찾으려 수없는 수련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찾은 길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세상 어떤 누구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자신이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외에 어떤 누구도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이르는 길을 놓으셨는데 하늘로부터 내려온 이 외에는 하늘까지 이르는 길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친구 신부님과 함께 바티칸 성당 꾸뽈라(성당 위 둥근 돔)에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꾸뽈라 안에 계단이 뱅글뱅글 있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대 바벨사람들은 하늘까지 이르는 탑을 쌓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땅에서부터 시작해서는 절대 하늘까지 다다를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내가 있는 곳까지 내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잇는 길을 만드시는 방법은 바로 세상 육체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셨던 하느님이 땅까지 이르시기 위해 땅의 육체를 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시기에 부정한 육체를 취하실 수 없어 태초부터 마련하신 성모님의 순결한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한 인간으로서 하늘까지 닿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육체를 드림으로써 하느님을 당신 품 안에 품으시고 하느님과 한 몸이 되셨습니다. 유한한 육체에 무한이 들어오셨고 죽어야할 운명 안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한 몸이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야곱은 베델에서 꿈에 이 신비를 보게 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다리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사다리를 통해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당연히 그 사다리가 닿았던 땅을 거룩하게 축성합니다. 그 땅이 바로 성모님이고 지금의 제대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매일 성체를 영하면서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원하신 육체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당신 영원성에 참여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길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과 한 몸을 이루심으로써 그 길을 만드셨고 인간은 하느님과 일치하면서 그 길을 따라 올라가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어떤 누구도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고 당신을 통한다는 말은 당신과 한 몸이 된다는 뜻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뜻은 성체만 영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까지도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짧은 묵상>>
얼마 전에 ‘신데렐라 언니’라는 드라마를 처음 부분만 조금 볼 수 있었습니다. 문근영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데 어머니는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못해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는 신세였습니다. 문근영은 이런 어머니가 싫어서 기회가 되면 혼자 도망치려고 합니다.
문근영 어머니는 어떤 기회로 부자 홀아비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와 혼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딸을 데려오라고 전에 살던 집으로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 사람들은 중간에 도망치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잡아서 문근영을 데려옵니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는 문근영을 어머니는 간신히 설득시킵니다.
만약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조금도 없었다면 그는 새 아버지가 있는 큰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결혼도 딸을 위해 희생하며 하는 것임을 믿게 하고, 또 앞으로는 결코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 결국 그들은 함께 새 집에서 살게 됩니다.
물론 아주 세속적인 내용이지만 오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도움을 줍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성자께서는 당신 죽음으로 마리아를 낳고 또 그를 통해 교회를 낳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고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아버지는 당신 뜻에 순종하는 아들을 사랑하여 아들에게 무엇이든 다 주고 싶습니다. 아드님은 부활하셔서 아버지께 돌아가 교회를 위한 하느님나라의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아버지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기에 성자의 후손들인 교회를 위한 자리를 내어주십니다. 그리고는 당신의 대리자들을 사람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러나 그 대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파견자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서 성자께서 마련해놓으신 영원한 거처로 들어갈 수 있고 그 파견자들을 믿지 않고,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으로 거처를 마련해 놓으셨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인데, 결국 그 곳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분과 그 분이 파견하신 이들을 믿고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당신을 믿고 따르도록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A Patre ad Patrem
-김찬선신부-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별을 선언하시며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는 그 길을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솔직하고 정확한 토마스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른다고, 그래서 당연히 그 길도 모른다고 고백합니다. 사실은 토마스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대개 토마스 아니면 필리보가 나서기에 다른 제자들은 몰라도 내색하지 않고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어쩌면 이 제자들과 같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다니! 자식이 가면 어디로 가나, 아비 있는 곳으로 가지!”하고 제법 아는 체하지만 사실은 이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지 우리도 확신 못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토마스의 이런 대답에 주님께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당신이 분명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고, 지금 마침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나 있는 길을 따라 가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당신이 아버지께로 가심으로서 당신이 길을 마련하시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을 가는 중에 누가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병원 가는 길이라고 말하는 거와 같이 당신이 지금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더 나아가 당신이라는 길을 통해야지만 아버지께 갈 수 있다 하십니다.
수도생활 문헌, “Vita Consecrata(Consecrated life, 축성생활)”는 우리의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표현하는데, 그 여정을 “A Patre ad Patrem"이라고 요약합니다. “From Father to Father”,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께로”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은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여정인데 이 여정을 먼저 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길 삼아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길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갑니다. 이 길은 우리를 잘못 인도하는 법이 없어, 다시 말해서 가는 법을 참되게 알려주기에 진리이시고 이 길을 따라 가면 우리는 살 수 있기에 생명이십니다.
성녀 글라라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유언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우리에게 남깁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뷴의 연인이요 모방자(His lover and imitator)인 우리 사부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며 가르쳐주었습니다.”
가는 길을 모를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고 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고마운데 글라라에게 있어서 프란치스코는 먼저 이 길을 가며 길을 가르쳐주는 길잡이였습니다. 우리도 서로 길잡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 서동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4,1)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토마스 사도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가는 길을 제시해 주시는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이십니다. 예수님은 계시해 주시는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이를 실천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2ㄱ.3)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는 조선 정조 시대 저암 유한준의 말은 신앙인인 우리가 하느님과 만나는 과정을 잘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했음에도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난 후에 그분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의 의미를 깨달은 다음, 예수님이 주님이며 세상의 구원자임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신앙의 여정에서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더욱 간절히 찾고 그분을 만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온전히 봉헌한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진리요 생명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이웃과 세상에 말과 행동으로 전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지금 당장 바꾸세요
-정병덕 신부-
요즈음 저는 담배를 안 피우지만, 예전에는 상당한 양의 담배를 피우던 골초였지요. 그래서 제 곁에는 늘 담배 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그 담배 냄새가 너무 싫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을수록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요. 그래서 어느 날 저녁 잠들기 직전에 다짐을 했습니다. “내일부터 담배를 끊는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타협을 하게 되더군요. “하루아침에 담배를 어떻게 단번에 끊니? 천천히 줄이자.” 하지만 이렇게 하면 평소와 똑같이 담배를 피우게 되고 그러면 절대로 담배를 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바로 지금부터 담배를 절대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렇게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화를 갖겠다는 것은 서서히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끊는 것처럼 단번에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한 우리들에게 주님은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타협하고 싶을 때,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서, 내게 필요한 변화를 지금 당장 단번에 이루도록 해보면 어떨까요?
3V이신···
- 김연희 수녀-
길을 걷다가 언뜻 고개를 돌렸는데, 한 마트의 상호가 눈에 띄었다. ‘3F-Friendly, Fresh, Fun’이라고 쓴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2년 전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에서 실시한 ‘여성 리더십’에 대한 강의가 생각났다. 21세기 리더십을 3F로 정의할 수 있는데, 여기서 3F는 ‘Fiction, Feeling, Feminine’이라고 했다. 과거에 평가받지 못한 덕목이었으나 이 3F가 없으면 현대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이렇게 중요한 몇 가지 삶의 원칙을 단어의 머리글자로 요약해서 기억하기 좋게 하는 것이 유행처럼 보인다. 3M, 3S 등등.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셨던 예수님이 ‘V’ 모양으로 손을 올리시고 “나는 3V다.” 하며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본다. 오늘 복음에 앞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스승의 말씀을 중단시키며 조금은 엉뚱하게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13,36) 하고 물었다. 토마스 사도도 덩달아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하고 질문한다. 토마스 사도가 이해했던 물리적 의미의 길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영적 의미로 답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느님께 다다르는 길이라고 하시며 그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길(Via)·진리(Veritas)·생명(Vita)은 그리스도께서 중개자요 계시자요 구원자이심을 가리키는 가장 중요한 의미로 깊숙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한다. 평소 자주 바치는 기도를 이 순간 마음 모아 다시 기도한다.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오직 당신만이 저의 길이시고 진리시며 생명이십니다. 아멘.’
- 송제호 신부 -
벌써 이 달도 반이 넘어 버렸습니다. 어떤 분이 말씀하시길 인생은 나이만큼 세월이 지나가는 것 같답니다. 40대는 40키로로, 50대는 50키로로, 60대는 60키로로..... 그래서 어떤 때는 인생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제로서 이분들한테 뭔가 가슴을 시원 하게 하는 그런 것을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한계를 느낍니다.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요. 그래도 굳이 고민 하자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신학생 시절에 몇몇이서 잘 모르는 곳에 등산을 간 적이 있었는데 길을 아는 사람은 없고, 일단 왔으니 가보자 해서 갔는데 전혀 엉뚱한 곳으로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미리 산에 대해 지도도 몇 번이나 살펴보고,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인솔자로 해서 따라 산을 올라갑니다. 우스개 말로 어느 장군이 “나를 따르라”해서 군사들이 고생 고생해서 산 정상에 올라갔더니 ‘이 산이 아닌가보네’했다는 말처럼 우리네 인생길도 사실은 잘 모르지만 도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산을 할 때나 바다에서 배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와 나침반이 꼭 있어야만 합니다. 이 나침반은 한 쪽은 반드시 북쪽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곳을 기준으로 위치를 파악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나침반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 본당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께 ‘지금까지 사시는데 어떤 것이 가장 행복하십니까?’라고 여쭤봤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 뭐 특별히 행복한기 있습니까? 그냥 자식들 위해서 열심히 살고, 그 자식들이 지 앞가림하면서 잘 살아주먼 그기 행복한 거지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요. 그러면 과연 우리 인생길의 나침반은 무엇일까요? 살아가야 하니까 돈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또 자식이라고, 건강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그런데도 막상 주변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돈이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건강해도 행복하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시거든요. 우리 인생의 이런 고민은 결국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나침반이 언제나 북쪽을 가르키기 때문에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것들도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문제는 입으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갈팡질팡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이런 우리를 대변하듯이 예수님께 “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답변을 주십니다.
길이신 그리스도
-오상선신부-
출장이 유난히 잦은 나에게 어떤 자매가 <신부님, 운전을 좋아하시나봐요?>라고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 길을 좋아하지요.>라고 답했다. 수도생활 여정 안에서 줄곧 떠나지 않는 나의 테마는 <길>이다.
얼마전에는 10여년 전 양로원 할머니들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다녔던 비포장길을 다시 가본 적이 있다. 이제는 너무도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언제 지나쳤나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때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비가 온 뒤면 버스가 패인 웅덩이를 피해 곡예 운전을 하고 한시간쯤 여정을 마치고 나면 마치 말을 탄 듯 속이 확 뒤집어 지는 체험도 하였었는데...
그 당시에 그 비포장길은 나에게 길에 대한 많은 묵상꺼리를 제공하였었다. 우리 인생살이, 수도생활의 여정도 바로 이런 비포장길이라는 것, 때론 웅덩이도 있고 큰 돌멩이도 있어 피해 가야 할 때도 있고 느리지만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 고속도로는 절대로 아닐 것이라는 것, 이 길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었고, 바로 <그리스도 그분>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도 유난히 시골길을 즐겨 찾는다. 갈수록 도로확장으로 인해 오지길이 없어지는 아쉬움을 느끼면서...
길을 걸을 때마다, 길을 달릴 때마다, 그림 속에 있는 길을 볼 때마다, <길이신 그분>을 만난다. 그분이 나의 길이다. 그분이 나를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시는 안내자이다. 나는 그 길을 즈려밟고 가기만 하면 된다. 그 길이 없다면 나는 길없는 길을 무작정 헤메야 한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건는다. 노랫말처럼, 무작정, 정처없이 걷는 나그네 길이 아니고 그분과 함께 그분을 밟고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희망의 길이다. 이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이 많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선물이다. 이렇게 함께 길을 걷는 도반들과 그분을 즈려밟고 하느님 나라로 향해가는 이 발걸음이 어찌 무거울 수 있으리오?
고속도로를 경쟁하면서 쌩쌩 달리는 것보다 느리지만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도반들이여, 오늘도 함께 걸읍시다. 길이신 그분과 함께 그분을 살며시 즈려밟으며...
아버지께 가는 길
-김찬선신부-
오늘은 말 장난 같은 나누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잘 곱씹으면 의미가 없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디로 가는 길이예요 하고 질문을 받습니다. 그때 우리는 “학교에 가는 길입니다.” “시장에 가는 길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저도 거기 가는 길인데요.”하고 그 사람이 또 대답하면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하고 우리가 또 대답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학교로 가는 길, 시장에 가는 길이 됩니다.
신앙적으로 바꿔서 어디로 가는 길인지 질문을 받는다면 우리는 모두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니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주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 위에 선 사람입니다.
또 그러니 우리는 길 위에 선 사람이고 우리는 아버지께 가는 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라디오에서 하나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사연은 아파트에서 아래층과의 심한 갈등을 적은 것으로, 자기 집 자녀들의 발걸음 소리가 너무 크다고 매일 같이 올라오는 아래층 주인아저씨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아파트에서 산 적이 있어서 그 감정이 이해됩니다. 그런데 과연 해결책이 있을까요? 아이들 발에다가 쿠션을 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참 뛰어노는 아이들을 꼼짝도 못하게 묶어 놓을 수도 없고……. 다시 집을 공사해서 방음처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법이 없지요. 방음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아파트 시공사를 원망하는 수밖에…….
그런데 어제 미사하면서 어떤 소리를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 소리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였습니다. 그것도 성당 안에서가 아니라, 성당 밖에서 나는 아주 시끄러운 소리였지요. 성당 바로 옆에 초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그 초등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나 봅니다.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선생님의 큰 목소리, 그리고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성당 안으로 크게 들려왔던 것이지요. 하지만 미사 하는데 전혀 분심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동감을 느끼게 되더군요.
사실 큰 분심꺼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좋게 그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들려오는 소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될 때를 떠올려 봅니다. 분명히 내 마음의 상태가 부정적이고 안 좋았을 때였습니다. 반대로 내 마음의 상태가 평온하고 긍정적일 때에는 어떠한 것도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변화시키기란 쉽지가 않지요. 그리고 단번에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변화시키기 힘든 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할 때, 그리고 주님의 뜻인 사랑을 이 세상에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들은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마음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지금 현재 내 곁에서 울리고 있는 각종 소리들을 들어봅시다. 그 소리가 과연 어떻게 들리는지요? 시끄러운 잡음과 같은 소리도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천사의 소리로 울려 퍼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소리가 내 입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아버지 중의 아버지
-김동하 신부-
‘고향’ 하면 도시보다는 시골을 먼저 떠올립니다. 시골에는 맑은 하늘이 있어 구름과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정겨운 흙길이 있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씨를 지닌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골이야말로 몸을 놓고 마음을 풀기에는 알맞은 곳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시골 같은 고향을 우리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성령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1코린 6,19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에 마음은 영원한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다 지치거나 힘이 들 때에는 하느님께서 계시는 영원한 고향인 마음을 둘러보아야 합니다. 마음에 떠 있는 말간 구름이나 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펼쳐진 풋풋한 흙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보고 마음을 걸을 수 있을 때 아버지 중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만나 무거운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생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흘러가는 돌멩이
-고진배 수사-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나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유기서원 기간을 마감하면서 종신서원을 준비하는 피정을 했습니다. 종신서원 후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냇가의 작은 돌멩이'로 살아가자. 냇가 한귀퉁이에 그리 크지도 않고 잘생기지도 않은 돌멩이가 있었습니다. 햇빛이 비칠 때면 뜨거워졌고, 어둠이 깔려 기온이 내려가면 추위에 떨었습니다. 어느 날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흘러와 주위를 덮더니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그칠 것 같던 소나기가 바람을 타고 더 거세게 퍼붓더니만 냇물은 금세 물이 불어 급류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돌멩이도 급류에 휩쓸렸습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급류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급류를 타고 굴러가는 돌멩이는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튀어나온 모서리가 깨어지고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면서 함께 흘러가는 돌멩이들과 부딪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돌멩이는 그 물과 함께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듯이 낮은 곳을 향해 하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굴러갔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부딪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깨어지지 않아도 되는 저 넓고 깊은 바다였습니다. 그 넓고 깊은 바닷속은 수많은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답습니다. 어떤 폭풍우에도 끄떡없는, 그야말로 아늑하고 평화로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 이 세상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꿈꾸며 염원하는 천상나라였습니다. 돌멩이가 가고 싶어했던 바로 그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자 하는 자리는 우리가 염원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가야 할 자리이며 우리가 가야 할 자리입니다. 그 길은 부딪치는 아픔이 있고, 깨어지는 슬픔과 서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늑하고 평화스러우며 행복한 자리입니다. 누가 그 자리를 마다하겠습니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정현진 신부 -
오늘 복음에선 토마스 사도가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란 이처럼 진리를 찾아나서고 참된 생명력으로 이 세상을 살리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젊은 사람들은 힘든 일을 싫어하고 나이가 들수록 돈 안되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야한다는 것, 또 진리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교회가 걸어야할 유일한 길이고 그리스도인의 유일무이한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걸어가겠다는 것은 힘도 들고 돈도 안되는 길입니다. 귀찮기도 하고 언제나 손해만 보는 듯한 이 길이 우리가 살아내야만 하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진리를 구하는 길입니다.
갈수록 편리해지는 세상에서 애써 힘들고 돈도 안되고 손해보는 듯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편리를 찾아가려 한다 하더라도 인생이란 처음부터 편안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힘겹고 고통스럽고 후회스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곤 합니다. 때로는 열정적으로 성취감 속에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힘겨운 괴로움 속에 살아가기도 합니다만 지난 세월도, 자신의 업적도, 모아둔 재산도 결국엔 공허함만을 남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삶이 늘 그러했듯이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홀로 걸어야하기 때문에 외롭기까지 한 길입니다. 바보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진리를 찾는 삶입니다. 정호승씨의 ‘수선화에게’라는 유명한 시가 있죠.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또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말도 합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외롭고 힘겹지만 그래도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 진리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진리을 찾아 사는 것,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외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풍요롭고 화려해 보이기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풍요로움과 화려함 속에 가려져있는 공허함을 항상 느끼면서도 더욱 큰 풍요로움을 얻으려 하기만 합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의 삶은, 또 주님께서 가셨던 그 길을 걸으려는 우리들의 삶은 화려하고 풍요롭기보단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힘겹고 귀찮지만,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외로운 길을 가야하지만 우리의 삶은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홀로 걸어가셨던 그 길이, 예수님의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항상 남아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길벗(道伴)" -이수철신부-
신자들의 고백을 듣다 보면,
‘사는 것이 재미없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처음 호기심에 재미있게 읽던 책도
중반 넘어서는 뻔히 짐작되는 내용에
재미를 잃고 대충 책을 넘기듯,
우리의 삶이라는 책도
읽어갈수록 재미를 잃어가는 게 보편적 현실 같습니다.
바로 영성생활의 위기를 반영합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재미없는 삶이
우리를 타성에 젖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삶의 의미도 서서히 퇴색되어 가면서
소리없이 스며드는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비인간화의 추세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새삼 수도영성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이며,
하느님을 찾는 일이 수도자의 일이라 합니다.
매일 수도자는 무엇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이며,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자가 수도자라는 말도 있습니다.
수도자(修道者),
구도자(求道者),
공교롭게도 가운데
‘길’ ‘도(道)’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길을 닦는 재미로,
길을 찾는 재미로 살아가야 하는
영적 인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 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주님의 길을 잃어,
주님의 길이 보이지 않아 산란해 지는 마음이요,
하느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믿을 때
밝아지는 길눈에
선명히 나타나는 주님의 길이요 내적평화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방황은
생명의 아버지께 가는
진리의 길이신 주님을 잃어버림으로 시작됩니다.
우리의 참 기쁨이자 재미는
하느님을 찾아 주님과 함께 길을 갈 때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고정불변의 객관적 길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을 찾는
길눈 밝은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길입니다.
냉담으로 믿음 약해지면
시야에서 사라지는 주님의 길이기에,
날마다 새롭게 찾아야 하는 주님의 길입니다.
새삼 길벗, 도반(道伴)의 고마움을 깨닫게 됩니다.
혼자 가는 인생길 너무 외롭고 쓸쓸하기도 하여,
유혹도 많고 중도에 포기하기도 쉽고
길 잃어버릴 위험도 큽니다.
마라톤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함께 어울려 뛸 때
동료 주자들의 격려에 힘입어
중도 포기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길 벗,
길동무,
도반 있어 아버지께 가는 길 재미있습니다.
길벗과 함께
하느님을 찾아
주님의 길을 걷는 재미로 사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주님을 찾는
도반들인 형제들이, 공동전례가 한없이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부활시키신 주님이
우리의 참 좋은 길벗입니다.
보이는 길벗들 다 사라져도
보이지 않아도 영원한 길벗,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부활하신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삶의 이정표와도 같은 미사를 통해
하루의 길을 환히 밝혀주시고,
친히 우리의 길벗이 되고자 오십니다.
아멘.
주님 안에 모두 한 형제 -경규봉 신부-
바울로는 유대인들을 형제라고 부르며 구원의 말씀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지도자들은 예배 때마다 예언서를 읽지만 예언서의 올바른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 구세주로 이해하지 못하고 처형하였다. 이는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이며, 예수님을 처형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도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미 예언하신 하느님의 뜻이었다. 예수님의 처형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며, 이는 곧 구속사의 핵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예수님을 처형한 유대인들이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셨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정당하고 올바른 것임을 인정해 주셨다.
따라서 바울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이단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믿어온 그 하느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성취된 소식이다. 바울로와 사도들은 이 모든 것의 증인이며,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와 무지를 벗겨주고자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울로는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는 시편(2,7)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곧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세상에 오신 메시아임을 선포한다.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주재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사람들이 서로 믿음이 다르고, 그래서 그분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라도 그분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분 앞에서는 인종도, 신분이나 지위도, 성별의 구분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사람이 그분께는 소중한 존재이며,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한 형제이다. 사람을 구분하고 편을 가르는 것은 사람일 뿐, 그분은 편을 가르지도 않으시며, 차별대우하지 않으신다. 그
래서 그분 안에 살고, 그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분처럼 사람을 구분하여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모든 이를 형제로 대하고, 사랑으로 맞이한다. 그 어떤 죄나 허물과 잘못, 부족함이나 연약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1고린 13,7)
예수님께서도 결코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대우하지 않으셨으며, 모든 이를 사랑으로 감싸셨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창녀나 세리뿐만 아니라 불구자나 죄 많은 여인까지도 예수님은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사도 바울로 역시 예수님처럼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고, 사랑으로 감싸며 끌어안는다. 사도 바울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다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인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것은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라고 그들을 두둔한다. 그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소중한 형제이며, 하나임을 선포하며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 그들은 주님을 처형했기에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아야 하는 형제임을 선포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편을 가르고 구분을 한다면, 그래서 우리와 다르다는 까닭으로 그를 기피하고 단죄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안에 그들을 감싸고 형제로 대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에 너무 부족하다.
오늘 주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그래서 나와 전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박아미 수녀-
◆오래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다. 신학원론 수업에 들어온 교수 신부님이 학생들을 향해 주먹을 내미시며 “여기, 내 손 안에 묵주가 있습니다. 믿습니까?” 하셨다. 뜬금없는 질문에 웃기만 하는 학생,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학생, 장난기 어린 말투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학생 등 일순 강의실은 술렁거렸지만 학기 초라 서로 서먹해서인지 이내 조용해졌다. 그러자 신부님은 주먹을 펴서 묵주를 보여주시고 다시 움켜쥔 다음 “내 손 안에 묵주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습니까?” 하셨다. 그러자 강의실이 떠나갈 듯이 모두 힘차게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아뇨. 여러분은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내 손 안에 묵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야지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신부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던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그 이후로 결심했던 것 같다. ‘믿음은 일종의 도박이다. 그래, 용기를 갖고 온전히 투신해서 믿음의 고지에 다다르도록 하자!’ 그러나 수도 삶이 깊어갈수록 신부님이 일깨워 주신 믿음에 대한 개념에는 변화가 없지만 믿음 앞에 취하는 나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내 의지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에서 믿음의 대상인 그분께 더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결심하게 된다. 그분께서 비춰주시는 만큼만 내디디며 믿음의 길을 가자고…. 믿음의 길에서 때론 토마스와 필립보같이 우문(愚問)을 던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의 가난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면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 자신에 대한 커다란 신비를 현답(賢答)으로 선사해 주신다. 토마스와 필립보의 질문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는 ‘길·진리·생명’이라는 예수님의 자아 계시적 선언을 듣거나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적인 내재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겠는가.
침묵
-노성호 신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가던 길을 잃고 헤매게 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자신이 쌓아놓았던 업적, 수많은 사람들과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 온갖 정성과 성의를 아끼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 등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을 체험하게 되는 날이 바로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때입니다. 이러한 때 침묵할 수 있다면…. 어느 날 좀 여유 있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른 때보다 목적지를 향해 30분 정도 서둘러서 출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린 눈으로 길이 막히게 되었고, 약속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지긴 했지만, 순간 ‘조급해해도 소용없다. 어차피 길은 막히는 것이고 약속 시간에 늦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진정시키면서 정신적인 짐이라도 덜자’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조급해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에 양해를 구하고, 느긋하게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늦기는 했지만,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었지요.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데, 그 당시에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렵고 정신적인 압박감에 시달리면서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차피 좀 늦더라도 약속 장소에는 갈 수 있는 것이고,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늦을 것이라는 것을 상대방도 알고 있는데, 괜히 혼자서 끙끙거리며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관건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자연스럽게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 있는가’이겠지요. 침묵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만큼 빨리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 나갈 수 있겠고, 그렇지 못하면 침묵하는 연습을 조금 더 해야겠지요.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양승국신부-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 인간>
3년 남짓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던 예수님에게 있어 제자들은 늘 안쓰러움,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큰 마음먹고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승의 정체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한쪽 발은 육의 세상에 다른 한쪽 발은 영의 세계에 들여놓은 어정쩡한 상태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온전한 투신, 완벽한 자기이탈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제자들 내면 깊숙한 곳에는 다양한 근심걱정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한곳에 정주(定住)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활에서 오는 불안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집요하게 그물망을 좁혀오는 바리사이들의 존재도 큰 위협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이 좋은 선택이었는가 하는 의문도 꼬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내면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불안감에 떠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른 무엇에 앞서 ‘믿음’을 지닐 것을 강조하십니다. 타성에 젖은 믿음, 막연한 믿음, 물에 물 탄 것 같은 미지근한 믿음이 아니라 제대로 된 믿음, 강렬한 믿음, 진심이 담긴 믿음을 요청하십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불안정한 존재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끊임없이 방랑하는 존재,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로 묘사합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역시 인간에 대해 ‘본질적으로 근심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근심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동안에야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안셀름 그륀, ‘다시 찾은 마음의 평화’, 성바오로 참조)
결국 근심은 자기 존재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가지는 현실적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상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가게 되는 근심 걱정, 그 앞에서 결국 해답은 마음 크게 먹은 일이더군요. 대범해지는 것입니다. 관대하게 마음먹는 일입니다. 최종적으로 주님께 항복하는 일입니다. 그분 손길에 우리 존재 전체를 내어맡기는 일입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이 다가와도 ‘하늘아래 별 일이 다 생기지’ 하며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주 맞이하게 되는 실패나 어려움을 당연시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존을 위한 염려에만 얽매이지 말고, 인간의 실존을 가능하게 했고, 인간을 잘 알고 계시며 인간을 위해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믿음으로 자신을 내맡기는 작업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결국 끊임없는 근심걱정, 갖은 고민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은 그간 집중되었던 우리의 시선을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오 6장 33-34절)
우리의 최종적인 지향, 궁극적인 관심이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을 가지고 나 자신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면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흔들릴 것입니다. 우리 삶 전체는 온통 걱정에만 사로잡힐 것입니다. 늘 나 자신의 안전만을 추구하니 항상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시선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많은 것이 순식간에 해결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나 자신에게서 해방되니 마음이 편안해질 것입니다. 그토록 나를 짓눌렀던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니 삶은 장밋빛으로 변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노력하십시오. 잔잔한 호수처럼 완벽한 평화,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평화.
결국 그런 평화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데서 출발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봉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이기양 신부-
어제 있었던 예비신자 교리 시간에 질문을 하나 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정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화, 또 건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여러분의 삶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화목과 평화, 또 건강이나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기며 살아가지만 사회의 흐름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정이 평화롭습니까? 유사이래 지금처럼 많은 가정이 파괴된 때가 없고, 마음의 평화를 원한다고 하지만 이 시대처럼 불안해하고 초조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도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역사이래 오늘날처럼 수명이 연장된 때도 없는데 유난히 건강 조바심을 내는 시대가 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생각으로는 중요하다고 꼽고 있는 가정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화가 실은 반대로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가정의 화목을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역사이래 지금처럼 불안하고 갈증에 허덕이며 우울증으로 자살율이 매년 최고조로 갱신되는 때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왜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덕목과는 반대로 가고 있을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돈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지요. 부자가 되면 가정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돈을 많이 모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치료를 잘 받으며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살아가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돈만을 쫓다가 결국 가정을 파괴시키고 건강을 해친 후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요.
돈이 모든 것을 가져와 주리라고 믿고 그나마 있던 평화와 건강마저 없애가며 추구했지만 얻은 것은 더 큰 공허감뿐이었습니다.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에 기대를 하고 살아온 것이지요. 가정이 중요하고 평화가 중요하고 건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돈 때문에 가정을 파괴시키고 돈 때문에 건강을 해치고 돈 때문에 불안해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목적과 방법이 전도됐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사막 한복판에 커다란 잎을 가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이 나무 바로 옆에는 조그만 샘이 하나 있었는데 근방에 우물이나 오아시스가 없기에 그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는 더 없는 휴식 장소이자 목을 축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지요. 그러나 뜨거운 사막에서 생명의 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이 샘은 주인이 있었습니다. 샘의 주인은 나그네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받고 물을 마시게 해주었는데, 사람들은 너무나 목이 마른 나머지 돈을 주고서라도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샘을 둘러보던 주인은 나무의 커다란 잎마다에 이슬이 송송 맺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인은 생각했지요.
?나무에 웬 물이지? 만약 나무가 없다면 나무가 흡수하고 있는 물이 모두 샘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샘물은 더욱 불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물을 먹어 돈을 잘 벌 수 있겠지!?
샘의 주인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이슬인지 깨닫지 못하고 나무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생각과는 달리 나무를 베어버린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샘물은 바싹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햇볕을 가려주고 모래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를 잃은 샘에서 물이 솟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지요. 태양은 더욱 뜨겁게 내리쬐어 샘을 마르게 했고 나무와 샘이 없는 그 샘터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샘물 주인은 더 많은 돈에 욕심을 부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고, 곧 당신이 모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시대는 ?나는?이 ?예수님?이 아니라 ?돈?인 것 같습니다.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가 된 것이지요. 이렇게 살다보니까 모든 것이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가정도, 이웃 간의 관계도, 형제 간의 관계도, 또 지금까지 누려왔던 마음의 평화와 건강 등 모든 개념이 무너져내린 것이지요. 부모 자식 간에는 분명히 효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돈이 끼어 들면 남남처럼 지내게 됩니다. 형제 간에도 이웃 간에도, 스승과 제자 간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우리 시대는 모든 것이 풍요로워졌지만 가장 불안하고 목마르며 절망의 끝인 자살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정이 화목하고 마음에는 평화가 있으며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여기서 ?나는?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어야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 되시면 자연히 우리 삶은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 자식 간에 효가 바탕이 되지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 ?부모에게 효도하여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효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을 따르며 사는데 어떻게 돈 때문에 형제와 등지고 살겠습니까? 또 가난한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어떻게 이웃 사랑을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늙는 것에 초조해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고 영생을 믿지 않으면 아무리 백 년 이백 년을 살아도 불안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겁날 수밖에 없지요.
우리 시대의 이 혼란스러움이 다시 평화롭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14,6)
예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면 다른 것들도 자리잡아 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도 ?예수님이 삶의 중심?이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 사는 것은 ?돈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혼란과 불안, 파괴와 절망, 우울증은 끊이지 않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14,5)하고 묻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그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고 우리가 원하는 참된 평화와 화목, 건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 하느님이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길 없는 길
-강영구신부-
10년 전쯤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을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대학교수가 선승(禪僧) 경허(鏡虛)의 발자취를 뒤쫓는 내용입니다. 오도(悟道)의 경지에 도달한 경허(鏡虛)는 환속하여 박란주(朴蘭舟)라는 이름으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사라집니다. 그는 선승(禪僧)이기도 했지만 괴승(怪僧)이기도 합니다. ‘길 없는 길’을 혼자 걸었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은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나라가 있습니다. 눈 밝은 사람이 그 길을 봅니다. 그 길을 본다고 다 그 길을 걷지 않습니다. 길 없는 길, 예수의 길은 좁은 길이며 험한 길(마태7,13-14)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길은 사랑과 자비의 길이며 용서의 길입니다. 그 길을 걸으려면 자기 포기의 길도 걸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길을 보기는 하지만 자기의 길을 고집하고 자기 길을 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길이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 길을 발견한 눈 밝은 사람이 그 길을 걸어 도피안(度彼岸)합니다. 거기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나 그 나라를 누립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자신이 ‘길 없는 길’을 걸어 스스로 길이 되었습니다. 당신도 예수의 길을 걸어 아버지 나라에 도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먼 훗날 누리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합니다.(一明)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걸어갈 길이다. -박상대 신부-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이제 곧 세상을 떠나야 함을 내다보시고 사랑하시는 제자들만 따로 데리고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후 손수 그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특별한 사랑을 행하셨다. 이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까지 겸손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고, 서열(序列)에 관계없이 '모두가 서로를 마땅히 섬겨야 함'을 엄중하게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을 토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도 선포되었다. 이 계명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 안에서 세상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을 이어갈 제자들의 사명은 분명해졌다.(요한 13장)
그러나 예수님의 고별식(告別式)이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지만은 않는다. 스승을 팔아 넘기게 될 가리옷 사람 유다는 사탄의 굴레를 쓰고 이미 그 자리를 떠났다. 제자단의 으뜸인 베드로조차 목숨을 바쳐서라도 스승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지만 하루 밤을 넘기기도 전에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할 것이라는 예언을 마음에 새겨야 했다. 사태가 이쯤 되었다면 고별식장의 분위기는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다. 여기까지가 요한복음 13장의 흐름이다.
고별식장의 삼엄한 분위기는 모두를 걱정과 불안으로 몰아간다. 당장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대체 스승은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제자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드디어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진다: "너희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마라." 걱정이나 불안에 듣는 약은 딱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동시에 희망이며 신뢰심이다. 그러나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 제자들의 걱정과 불안이 제거될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통상 무지(無知)에서 불안과 걱정이 싹트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설명을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가심'은 잠시의 이별이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집, 즉 하느님 나라에 모두를 위한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시는 이별이며, 있을 곳이 마련되면 다시 와서 모두를 데려가실 때까지의 이별이다.(2-3절)
예수께서는 이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4절)고 제자들의 '앎'(지식)을 전제하신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동반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토마스가 나서서 "우리는 당신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5절) 라고 반문한다. 토마스는 아직도 불안과 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과 '그 길'에 대한 자신의 앎이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표시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곳은 아버지가 계신 곳이요,
그 길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밝혀주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예수께서 가실 곳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이란 아버지 자신을 말한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닌 아들의 고향이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아들 외에는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곳에 친히 가서 제자들의 집을 마련하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그렇다. 이 말씀은 비유법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에고 에이미'(나는 ~이다) 도식을 사용한 자기계시인 것이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지식이 부족해서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불식(拂拭)시키셨다. 믿음에 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만큼은 아니다.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음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 예수님 스스로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하느님의 집 통과코스 : 길->문->집 †
오늘 복음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고하는 말씀에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장담하던 베드로뿐만 아니라 수난을 예감하는 주님의 유언 같은 간절한 당부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깊은 불안과 걱정에 잠겼음에 틀림없습니다.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한복음 사가는 이처럼 예수님의 자기 정체성, 자기인식을 다른 여러 표현을 빌려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오늘도 '길, 진리, 생명, 나를 통하여..."라는 말씀을으로 성서 전반에 예시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다른 여러 사람들이 보다 깊이 이해하고 믿게 하려는 요한사가의 의도라고 봅니다.
오늘복음의 주제는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다양한 문회적 충돌,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확실한 일들이 연이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명분을 납득되지 않는 전쟁이 자행되는 국제관계나 세대를 거쳐가며 부담을 져야만 하는 조국 분단의 굴레 같은 정치적 상황, 직장 안의 인간관계와 거취 문제, 업무 수행에 따른 결정 방향 등의 사회적 상황 그리고 취직·결혼·건강·장래 진로 등에 관한 개인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길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 종종 부딪치게 됩니다. 이러한 불안과 걱정에 싸인 우리에게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시는 말씀은 놀라운 충격이면서 동시에 커다란 위로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복음에서 우리에게 아버지의 집에는 우리가 자유롭게 거처할 방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예비해 주신 방이 바다와 같이 무척 넓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사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집(방)은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성공과 실패,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의 구별을 뛰어넘어서 어떠한 처지의 인간이라도 모두 받아주시는 집입니다. 다시말하면 넓은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품. 방이 많은 아버지의 집은 스스로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독히 미워하는 나의 원수까지도 머물 방이 있는 넉넉한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1요한 3, 20) 요한 복음사가가 전하는 ‘방이 많은 집’ 소식은 우리의 근심을 덜어주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믿고 의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하느님을 믿고 의탁한다고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 초대받고, 또 초대받은 집으로 가야 하는 길을 잘 모릅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토마스 사도가 대신 질문해 줍니다. 오늘복음에서 토마스는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우리 주변에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때에 주님께 가는 네비게이션을 개발하여 판매하면 큰 돈을 벌 것인데..., 주님께서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네비게이션을 주지 않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즉, 주님을 보는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네비게이션 기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집을 가기 위해서 주님이라는 네이게이션을 보고, 그대로 따라가면서도 전혀 체험하지 못한 처음의 네비게이션을 보고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제데로 잘 가고 있는건지, 잘못가고 있는 건지 불안하고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에게 우리가 잘가고 있는건지 물어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묵상하는 이유는 토마스의 질문이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주님의 말씀에 연이어 질문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 토마스는 '길을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 길을 지금 따라가고 있는데, 이게 맞는건지 틀린건지 의문에 빠진 것입니다'...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간간히 의문과 불안에 빠지는 경험을 했듯이 토마사도 그런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토마스의 신앙은 오늘복음의 길에 대한 확인도 그렇지만, 지난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해야지만 마음이 열리는 '확인의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이 '확인 신앙'에 대해 이런저런 찬반의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확인 신앙'이란 완전한 확신을 얻기 위한 철저한 신앙관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느체하다가 돌뿌리에 걸러넘어지는 자들보다는 토마스적 확인신앙이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빠른 지름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온전한, 완전함, 무결점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따라서 적당히 대강대강 믿는 척하는 신앙생활 보다는. '아는 것도 돌다리를 두드라고 가라'는 속담과 같이, 하느님의 길도 곧바로 가는 길(첩경)을 가기 위해 돌다리를 두드리면서 가는 훈련과 습관도 필요합니다.
외방선교회 정 신부님의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얼마 전에 네비게이션(navigation)이 생겨서 자동차에 장착을 하고 안내를 받으며 어느 성당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미리 목적지를 입력하고 예비 운전을 한 뒤 길을 떠났다.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놀라움과 신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놈 참 똑똑한 길 안내자라는 생각을 하며 흐뭇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의문이 생겼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첫 길이라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미씸쩍은 마음에 그만 안내대로 움직이지 않고 길을 벗어났다. 그러자 곧 기계는 삑삑삑... 비상신호를 보내더니 먹통이 되어 버렸다. 물론 내가 자의적으로 생각했던 그 골목은 막다른 길이어서 성당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차를 되돌려 길을 잘못들은 지점에 돌아왔을 때에야 기계도 다시 작동을 시작했다. 기계는 기계라고 치부하면서도 그래 너 안내 받으며 갈게.... 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그 놈 참 기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한번쯤은 경험한 일화입니다. 비록 기계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길을 안내해준다고 하면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고 가다 어느새 불안하고 미씸쩍어 안내길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길을 간다면,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게 되거나, 다시 그길로 돌아오기 위해 몇번을 우회하면서 어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집에 대한 믿음이 약한 사람들, 미씸쩍어 하고, 또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단호한 고별사를 하십니다. "나(주님)를 믿고 또 아버지를 믿어라."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나(주님)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또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의 집을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집으로 가기 위해 통해야하는 곳(주님)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려면 무엇을 거쳐서(통해서, 따라서) 가야 합니까? 바로 길입니다, 길을 따라가야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으로 가려면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길은 바로 주님이신 것입니다. 또 길을 따라 마지막까지 걸어가면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난복음에서 "나는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을 '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집으로 들어가게 하는 인도자, 즉 길이요 문인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버지 하느님께 인도하는 목자이시며, 중개자이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아버지를 위해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낮추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하고는 질적으로 다르신 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집이기는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거처하기 때문에, 길을 통하여 집 앞의 문 까지 양들을 인도하시고 나서, '내 집이다'라고 하지 않고, 이곳이 바로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소개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부장문화 유교문화권에서는 손님에게 집을 소개할 때 그렇게 했습니다.주님은 그렇게 아버지를 공경했습니다. 철저히 율법을 준수한 분이십니다. 모든 고난의 일은 당신이 직접하시고, 모든 영광은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겸손의 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복음은 그동안 주님의 공생활 기간 중에 많은 복음과 기적을 보고도 아직도 믿음이 약한 사람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미씸쩍어 하거나, 불안해 하거나, 또 잘 알지 못하고 믿으려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시는 고별적 말씀의 하나입니다. 토마스는 주님께서 주신 네비게이션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과연 이것이(주님의 말씀) 하느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제대로 안내할 수 있을까? 혹시 잘못되어서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잠시 의심을 가졌을 때 마음이 불안하고, 길을 잃고 헤매었듯이...... 주님에 대한 나의 지식과 믿음도 지금까지 그러했음을 솔직히 반성해 봅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나를 추스려봅니다. 나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의 바탕위에 그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따라가고 있는가?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저는 당신과 함께하는 하루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속이고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드러내는 척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당신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스스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바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의지력이 있다고 해도 이루어지는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지요. 더 깊이 제 내면의 소리를 들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듣습니다. 끝도 없이 모순된 생각과 감정, 의견에 휩싸여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흘려버리고 맙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려 합니다, 평화를 주시는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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