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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안마도 당산나무 그늘 아래 평상의 주민들. 그들은 로저 셰퍼드에 대해 궁금해했다. 2 송이도의 아름다운 해변. 3 송이도 해변가에 쌓아둔 어구. 4 송이도에서 함께 탄 여중생 3명이 따라와 로저에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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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훈훈한 시골 인심 만끽
정상으로 오르는 그의 손에는 사슴뿔이 쥐어져 있었다. 아까 사슴을 보았다는 말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소떼를 찍은 사진을 나에게 보여주며 “많이 걷는 자만이 좋은 사진을 얻게 된다”는 철학을 피력했다.
하산하는 길에서 칡덩굴이 발목을 잡는다. 콘크리트 길이 있는 지점에도 소떼들이 모여 바다에 발을 담그기도 하며 바닷바람을 즐기고 있었다. 군사기지가 있는 뒷산을 제외하고는 산의 능선 반을 길을 내가며 하이킹한 것이다. 하이킹의 멋은 ‘작은 탐험의 새 길’에서 얻어진다. 이곳은 바다와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하이킹 코스로 추천할 만한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이킹을 제대로 하려면 이틀은 소요될 것 같다.
콘크리트 길을 따라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가 되어서다. 샤워를 끝낸 뒤에 꿀맛보다 좋은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12시 반에 출항하는 여객선이 기적소리로 10분 후 출발을 알린다. 서둘러 민박을 나오며 민박집 가족들과 사진을 함께 찍었다(안마식당 민박 서용복 010-9655-3040).
안마도를 뒤로하고 계마항으로 가는 길에 들를 송이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7월 21일 오후 2시 송이항에 도착했다. 해수욕장에서는 사람을 볼 수 없다. 23일 토요일부터 본격적인 피서객이 몰려올 것이란 섬사람의 설명이다.
한 노인네가 갓 잡은 생선으로 요리 잘하는 민박을 소개한다고 해서 따라 갔다. 숙박 장소는 식당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송이도 어업인 회관’이었는데, 이층에 콘도시설을 해놓았다. 시설은 좋은데 오랫동안 청소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관리가 안 되고 텅 비어 있었다. 숙박비 4만 원을 식당에 지불하고 방에 들려는데 종업원이 다시 와서 “식사는 손님이 많아서 못해주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돈을 돌려주고 가버렸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로저는 화가 치밀었는지 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고 소주를 마신 후 노숙을 하자고 제안했다. 나도 화가 나서 동의는 했지만, 비박준비가 안 된 나로서는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어 캠핑장을 돌보는 사람에게 밥을 사먹을 수 있는 집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 안골 마을 당산으로 함께 갔다.
당산에 모여 휴식을 취하며 술을 권하는 마을사람들-. 한편에서는 아낙네들이 반찬거리를 다듬으며 내 얘기를 경청하더니 “밥을 해드리겠다”고 하고, 또 다른 아낙네는 “그 집에서 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래서 그 집으로 짐을 옮겼다. 아늑하고 시원한 전형적인 시골집이다. 시설은 떨어져도 정감이 가는 곳이다. 민박집 주인이 사는 안방에서 식사를 같이 하며 잠만 따로 자는 독일의 펜션 같은 분위기다. 저녁식단은 아주 훌륭했다. 민어탕에 때목이(?) 생선찜, 넉넉한 반찬들, 거기에 후식으로 토마토까지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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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안마도의 여름 시골 풍경. 2 붉은색이 도는 꽃이 만발한 안마도 산릉과 바다 풍경. 3 안마도 해안가 갯바위지대를 어슬렁거리는 소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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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산신령이 우릴 돕고 있어요”
로저는 우리를 산신령이 돕고 있다고 했다. 감사해야지. 바깥 마을과 안골 마을의 인심 차이다. 이것이 전화위복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요즘 잡히는 어종은 민어이고, 조기잡이는 물건너갔다고 한다.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언짢았던 마음이 싹 가시고 기분 좋게 잠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방에는 뒤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통풍이 잘 되게 망이 쳐진 창문이 있다. 자리에 누웠을 때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들리고 창문 밖의 감나무가 달빛을 받아 짙은 녹색의 잎들을 살랑거리는 것이 마치 어릴 적 외가 초당의 뒤뜰을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돌아가신 외조부와 가족들 생각을 불러와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외조부의 무릎에서 한문과 붓글씨를 배웠던 다섯 살 적 추억이며, 열네 살 적 한국전쟁을 피해 고향가족과 생이별을 한 후에 영영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비감을 창살에 드리운 감나무가지에 달린 싱싱한 잎에 얹어 바람에 날려 보내야 했다.
7월 22일, 시원한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진다. 삼경·사경·오경 닭 우는 소리까지 듣고 뒤척이다 늦잠을 자고 말아 해돋이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오늘은 운무로 사진이 안 되는 흐린 날씨다. 앞마당 호박밭에서는 민박집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가 숨바꼭질 놀이를 한다. 뒷마당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섰고, 고추밭에 고추가 총총히 달려 있다. 이 안골 동네는 농촌과 어촌의 맛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바닷가를 걸으며 사진을 찍고 돌아왔는데 로저는 계속 잠 속에 있었다. 그동안 많은 섬 여행에서 쌓인 피로 때문인 것 같다.
아침식사에는 꽃게탕, 민어 찜이다. 후식으로는 커피와 사과가 나왔다. 로저는 마실 온 동네 할머니에게 바지를 불쑥 내놓으며 구멍 난 곳을 꿰매달라고 능청을 부린다. 안경도 없이 바늘귀를 꿰고 깨끗하게 바느질을 끝내 준 할머니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를 드리더니 로저는 또 잤다.
점심식사는 김치찌개, 이름 모를 생선 등이었다. 민박집 표재용씨(010-8960-0685) 부부에게 감사를 드리고 1시 40분 여객선을 타러 해수욕장을 지나 부둣가로 갔다. 여객선의 확성기를 통해 트로트 음악이 바다에 울려 퍼지고 여객선은 옅은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승선하자 이층으로 올라가 재빨리 바람맞이 의자에 앉았다. 송이도에서 함께 탄 여중생 3명이 쪼르르 따라와 로저에게 말을 건다. 금방 친해져서 손짓발짓을 동원해 의사소통을 꾀하는 여중생들의 용기가 가상하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와서 로저의 신발 콧등에 앉아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 버티고 있는 모습이 신기도 하다. 1시간 20분의 항해가 잠시로 느껴졌다.
계마항에 도착하자 버스정거장으로 옮겨 한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로저는 한 군인에게 담배 한 대를 구했다. 그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담배 한 대 얻어 피우면서 서로 소통의 기회를 갖는 방법인 것이다.
영광터미널 가는 버스를 탔다. 그와 헤어지기가 아쉬워 영광에서 목포까지 동행을 했다. 그는 서해 10여 섬의 사진과 자료를 정리하고 쉬기 위해 해남 대흥사 암좌로 떠나고 나는 서울행 KTX를 타고 상경, 그와의 3박4일의 안마도와 송이도 섬 여행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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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을 무렵 안마도 해변을 거니는 로저. 그는 한국 산천과 풍물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