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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릉(景陵)
헌종과 효현왕후·효정왕후의 능
경릉은 제24대 헌종(1827~1849)과 안동(安東) 김씨 효현왕후(1828~1843), 계비 남양(南陽) 홍씨 효정왕후(1831~1903)를 모신 능이다. 헌종은 요절해 익종으로 추존된 문조의 아들로 왕가의 정통성을 한 몸에 안고 태어났으며 4세때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급서하자 바로 왕세손에 책봉되면서 6세 때부터 강연을 열어 왕자 수업을 받았다.
8세 때 할아버지인 순조가 사망하자 1834년 왕위에 오른 헌종은 조선의 왕 중 가장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할머니 순원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헌종은 15세 때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면서 국왕으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헌종의 외가인 풍양 조씨 세력이 헌종의 권위를 이용해 안동 김씨 세력에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다. 이로 인해 삼정이 문란해지고 계속된 홍수로 백성은 큰 고통을 받았다.
친정에 나선 헌종은 유력한 가문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대로 국정 운영의 주체가 되려고 노력했다. 『국조보감』 증수를 위해 정조, 순조, 익종에 대한 『삼조보감』을 찬집했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는 등 상당한 문화적 업적을 이루었다. 현종은 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글씨도 잘 썼는데 특히 예서에 뛰어났다. 헌종의 노력이 유력한 가문의 이해를 조정하고 견제하는 수준을 넘지는 못했지만 학자들은 헌종에게 '미완의 문화 군주'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안동 김씨 김조근의 딸인 효현왕후가 10세의 나이에 왕비에 책봉된 것은 당시 수렴청정하던 순원왕후 김 씨가 자신의 친정 쪽으로 국혼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성품이 조용하고 온화해 언제나 예법에 맞는 말만 했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불과 여섯 해 만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 세도를 이어가려는 안동 김씨 세력의 의도에 차질이 생겼다.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는 남양 홍씨 홍재룡의 딸로 14세에 왕비에 책봉되었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대비의 칭호를 받았으며 철종 8년(1857) 왕대비가 되었다. 왕비의 간택은 일반적으로 전국의 16세 이하,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가문과 이 씨가 아닌 규수 중에서 추천을 받아 행해진다. 추천받은 규수를 대상으로 3번의 심의를 거쳐 3명을 최종 선발하는데 이 중 한 사람만 왕비가 된다.
헌종의 후사를 잇지 못한 것은 효정왕후도 효현왕후와 동일하다. 이에 헌종은 주부 김재청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고 그녀가 경빈 김 씨다. 그런데 헌종은 김 씨를 통해서도 후손을 얻지 못했다.
광무 1년(1897)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효정왕후도 황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동구릉에 안장된 왕비 중 살아서 황후에 책봉된 유일한 인물이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 봉분이 헌종의 능이고 중앙이 효현왕후의 능, 오른쪽이 효정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목릉과 숙종의 명릉처럼 왕과 함께 원비와 계비를 한 곳에 배치했다. 하지만 목릉과 명릉이 동원이강 또는 변형된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조성된 반면, 경릉은 3개의 봉분을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한 후 나란히 옆으로 배치한 삼연릉으로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형태다.
경릉은 영조 대에 홍계희가 왕명을 받들어 영조 34년(1758)에 편찬한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해 마련했는데 기본적으로 단릉에 준했다. 세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을 터서 연결했지만 각 능 앞에 혼유석을 따로 마련해 혼유석과 고석이 다른 능보다 많은 것이 특징이다.
능 앞의 3단은 2단으로 줄여 장명등과 문·무인석이 한 단에 마련되어 있다. 문·무인석은 선명한 눈꺼풀, 눈동자를 비롯해 입술선이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등 다른 능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색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조각을 가늘게 해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눈동자 등의 세부 표현은 섬세한 편으로 18세기 이후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무인석의 갑옷 묘사는 상당히 장식적으로 투구 앞의 마크는 태극 모양이다. 정조가 건립한 사도세자 융릉의 무인석 투구 앞면 이마 가리개에는 원형 속에 만(卍) 자가 있으며, 인릉 것에는 3개의 원형 볼, 수릉 것에는 십자형 세곡 수 모양이 새겨져 있다. 정조 때 장용영, 순조 때 총리영, 헌종 때 총위영, 이후 철종 때 총융청 같은 왕의 근위대 마크로 추정하는 의견도 있다.
조선 시대 왕릉에는 고려 시대 왕릉과 달리 거의 모든 왕릉에 피장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표석이 있다. 1393년 정숙왕후(조선 태조의 증조모)의 숙릉에 처음 능표를 세웠다. 그러나 이후에는 극소수의 능에만 표석을 건립했고 1674년 우암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효종의 영릉에 표석이 새롭게 세워졌다. 그 후 고종 대에 이르러 거의 모든 능에 능표가 세워졌다.
경릉의 능표는 1843년 효현왕후가 사망했을 때 명칭만 새겨 처음 세웠다가 1849년 헌종이 사망하면서 내용을 추가해 고쳐 세웠으며, 1903년 계비 효정왕후가 죽자 이듬해에 또다시 문안을 크게 수정해 건립했다. 현재 정자각 우측에 있는 능표는 1908년에 건립한 것이다.
헌종(憲宗)
풍양 조씨의 세도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다
출생 : 1827년(순조 27) 07월 18일
사망 : 1849년(헌종 15) 06월 06일
본명 : 이환(李奐)
본관 : 전주(全州)
목차접기
외척 풍양 조씨의 보도 속에 즉위한 헌종
천주교 탄압과 이양선의 출몰
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외척 풍양 조씨의 보도 속에 즉위한 헌종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였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이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씨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되었다. 조만영의 아들이자 신정왕후의 오빠인 조병구, 조득영(趙得永)의 아들 조병현(趙秉鉉) 등이 조인영과 함께 헌종 시대의 세도정치를 이끌었다.
헌종은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며 궐의 아름다운 궁녀들과 모두 관계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사는 없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가 1843년(헌종 9)에 죽자 이듬해 홍재룡(洪在龍)의 딸 효정왕후(孝定王后)를 계비로 맞이했다. 이 밖에 두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이들 모두 후사를 잇지 못했다.
천주교 탄압과 이양선의 출몰
헌종이 즉위한 시기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한 때였다. 18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들은 무역과 포교를 빌미로 동양에 대한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잦은 이양선의 출몰에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조정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한 풍양 조씨 세력은 척사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주도했다. 물론 헌종도 이에 동조했다. 헌종은 1839년(헌종 5)에 조인영이 지어 올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반포했다. 〈척사윤음〉은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고 그에 반하는 서학(천주교)은 사학(邪學)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척사귀정(斥邪歸正)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39년(헌종 5)에 시작해 1840년(헌종 6)까지 프랑스 인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해 천주교도 70여 명을 처형한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이러한 척사귀정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 세력을 함께 제거하고자 했다. 이때 이러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천주교 박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에도 헌종과 풍양 조씨의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846년(헌종 12)에 프랑스 해군 함장 세실(Cécille)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 충청도 홍주에 위치한 외연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에게 전달할 국서를 가지고 있었다. 국서의 내용은 기해박해 때 프랑스 인이 처형된 것에 대한 항의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협박이자 문호 개방에 대한 압력이었다. 세실은 국서를 조선의 왕에서 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외연도의 지방관과 주민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실은 국서를 두고 떠나면서 다음 해에 다른 군함이 답변서를 받으러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내용은 곧바로 헌종에게 보고되었다. 헌종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과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의논했다. 헌종은 이를 청나라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으나 권돈인은 앞서 기해년에 프랑스 인 신부를 죽인 일도 보고하지 않은 마당에 이 일을 보고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번 사술(邪術)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불랑선(佛朗船, 프랑스 배)이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라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천주교를 더욱 탄압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어 헌종은 당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사학 죄인 김대건(金大建)을 효수에 처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은 기해박해 때 처형된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사제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헌종은 세실 제독의 군함 출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김대건과 여러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천주교는 고단한 조선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듬해 프랑스의 군함 글로아르 호가 세실 함장이 전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며 조선의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군함이 전라도 만경의 고군산열도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고, 선원들은 고군산도에 약 1개월간 머물다가 중국 상해에서 빌려 온 영국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행여 후환이 있을까 우려해 대책을 마련했다. 결국 세실이 보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그간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 프랑스 선박의 동정과 기해년에 프랑스 신부를 죽인 사실 등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청나라 예부에 전달했다. 청나라에서 이 문서를 프랑스에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문서는 조선이 서양에 보낸 첫 외교문서였다.
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조병구는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수레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만 수레가 뒤집어져 조병구는 땅에 머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외척 세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헌종이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왕실에는 그의 뒤를 이을 6촌 이내의 친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남은 친족들도 신유박해로 모두 죽고 없었다. 이것은 500년 가까이 이어 온 왕실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헌종 사후 그 후사를 잇는 일은 흔들리는 왕실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이것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세력 다툼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죽자마자 옥새부터 찾았다. 그리고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全溪君,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의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결국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간 셈이었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역병이 돌아 삶의 터전을 버린 백성이 수없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민란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층은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효현왕후(孝顯王后) - 안동(安東) 김씨
출생 : 1828년(순조 28)
사망 : 1843년(헌종 9)
경력 : 조선 제24대 헌종의 비
본관 : 안동(安東)
요약 : 조선후기 제24대 헌종의 왕비.
본관은 안동(安東). 영돈녕부사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 김조근(金祖根)의 딸이다.
1837년(헌종 3)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嘉禮)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후 병으로 죽었다. 1851년(철종 2) 경혜(敬惠)·정순(靖順)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端聖)·수원(粹元)의 존호가 더해졌다.
시호는 경혜정순단성수원효현왕후(敬惠靖順端聖粹元孝顯王后)이고, 능은 경릉(景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정왕후(孝定王后)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출생 : 1831년(순조 31)
사망 : 1904년 1월 2일
경력 : 조선 헌종 비(妃)
요약 : 조선후기 제24대 헌종의 왕비. 계비.
판돈녕부사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왕비가 되었고,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죽자 왕대비(王大妃)가 되었다. 딸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 이다.
경릉(景陵)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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