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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에 잠든 '다른 시간' 깨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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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성자(聖子)’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희생’이나 ‘노스탤지어’ ‘혹성 솔라리스’ 등을 보려고 몇 번 시도한 적은 있지만, 세 편 모두 중간에 잠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물과 바람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들만을 포착해내는 듯한 그의 영화는 스토리는 고사하고 어느 한 대상이나 인물에 집중하기 힘들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30분 이상 잠이 들었거나 적어도 두 세 번 쯤 ‘빨리 감기’ 버튼을 눌렀다는 공통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서 얘기를 한다는 건 나로선 주제넘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몇 개의 크고 작은 이미지들로만 뇌리에 남아있는 그의 영화들이 늦가을의 스산하고도 너그러운 풍광들 속에서 불현듯 되살아나는 것을 목도하며 자꾸만 입(보다는 마음)이 근질근질해지는 걸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무모함을 무릅쓰고, 타르코프스키에 대해서 쓴다.
그랬더니, 시간이 약간, 마치 타르코프스키가 빚어낸 풍경들이 그랬듯, 일상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속도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건 일상보다 빠르거나 늦다는 것으로는 완전한 설명이 불가능한, 분명하게 이질적인 ‘다른 시간’이다.
지구의 특정한 시간대와 공간을 배경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타르코프스키가 ‘봉인’한 시간은 내게 대기권 바깥의 다른 별의 생태학으로 여겨진다.
지구에 출장 온 어느 다정다감한 외계인의 시선인 양 낯설지만, 그 낯섦은 세계의 다채로운 표면들을 명료하게 응집된 정신의 소실점 속에 투과시켜 인간의 보편적 심성과 그 속에 숨겨진 신성(神聖)을 물질화하려는 특별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낯설게 여겨지는 건 인간 본연의 숭고와 겸양을 새삼 확인한 자의 수줍고도 자기반성적인 알러지 반응 같은 건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건 현세의 인류가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자연적 감성과 숭고의 윤리를 내팽개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부드러운 고발이나 진배없다. 때문에 나는 그의 영화를 보며 잠들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부끄럽지만은 않다.
Kozena Magdalena, Mezzo Conductor : Marek Stryncl Performer : Magdalena Kozena BWV244 Matthew Passion 39 Aria Magdalena Kozena
내가 보건대,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이기주의와 비참과 공포로부터 눈을 감고(또는, 눈을 감음으로써 더 명징하게 응시하고) 보다 깊고 따뜻하고 보편적인 세계의 흐름에 동참하라는 의도에서 그토록 느리고, 텅 비어있고, 고요한 세계를 창조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 환한 적막과 느린 호소를 마주하면서 잠들지 않는 건 지나치게 뻔뻔한 자의식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나를 잠들 게 하는 건 내 속에 잠들어 있는 어느 ‘착한 괴물’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알게 모르게, 자의든 타의든 유기해버린 그 ‘착한 괴물’의 잠을 깨우면서 바로 그것이 진짜 너 자신이 아니겠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질문은 묵묵한 침묵 속에서 살랑거리는 작지만 투명한 바람소리를 닮았다. 잠이 든 나는 이승의 번다한 지층 아래로 흐르는 특별한 적막과 만난다. 그의 영화는 백일몽처럼 드리워지는 이 세계의 보다 높고 푸른 궁륭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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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내 영화들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란 인간은 비어 있는 세계의 지붕 밑에 외롭고 고독하게 동떨어져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와 미래로 연결된 수많은 끈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소위 세계와 인류의 운명과 연관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위의 문장은 타르코프스키의 자서전 ‘봉인된 시간’(김창우 옮김, 분도출판사)에서 발췌한 것이지만, 그의 문장을 그의 영화에 대한 주해나 알리바이로만 읽는 건 그다지 옳지 않다. ‘봉인된 시간’은 대개의 예술가 자서전이 그렇듯, 자신의 예술과 삶 전반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모종의 자기현시나 과장이 없다.
적어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 ‘마법의 등’(민승남 옮김, 이론과실천사)이 편집증적인 자기해명과 분석으로 인해 한 편의 치밀한 심리극을 연상케 한다는 점과 비교했을 때 타르코프스키의 담백하고도 진솔한 고백들은 놀라울 정도로 냉철하고 품이 크다.
그는 스스로를 응시할 때조차 자기 자신 너머에 있는 세계 전체의 보편성을 향해 시선을 ‘롱테이크’한다. 때문에 그의 발언들을 통해 정작 듣게 되는 건 한 개인의 삶에 관한 특별한 존재증명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의 구성원리와 인류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섬려한 재고이다.
그 재고의 방식은 한없이 길게 이어지는 수평의 대지 위를 느리게 조망하는 듯한 그의 영상들처럼 나직하고 넓다. 그건 그가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얘기한 ‘시적 고리’와도 유사하다.
‘시적 고리’란 이성적 논리체계를 초월한 시적 이미지들 사이의 고리를 의미한다. 멈춰있는 듯 보이는 대상이나 공간은 그러나 전혀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은 저마다 자기 나름의 시간을 품고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숨죽인 시간 깊숙이 잠행하여 사물의 숨겨진 본성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기나긴 침묵 속에서 비로소 풀려나오는 새로운 시간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게 새로 탄생한 시간은 통상적인 일방향의 흐름에서 이탈해 저만의 독자적인 생명력을 드러낸다. 한없이 정지된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더 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속 깊은 말을 풀어내는 듯한 타르코프스키의 예술적이고도 인간적인 특징은 그의 자서전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시적 고리’란 그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기술적 원칙을 넘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투영이나 다름없다.
Angela Kazimierczuk, sop.
Christoph Spering, Cond
Das Neue Orchester
Chorus Musicus Koln
In the arragement made in 1841 for St. Thomas's Church, Leipzig
by Felix Mendelssohn Bartholdy
대개의 자서전들이 출생부터 만년까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씌어지는 것과는 달리 ‘봉인된 시간’은 예술창작과 관련된 생각들을 에세이형식으로 풀면서 그 배면에 깔려있는 자신의 삶을 은은하게 밝힌다. 그런 점에서 ‘봉인된 시간’이 씌어진 방식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형식과도 일치한다.
타르코프스키 스스로도 ‘한 인간의 미학적 친화력은 때때로 예술 작품 그 자체에 관해서보다 오히려 자
기 자신에 관해서 훨씬 더 많이 이야기하곤 한다’고 쓰고 있듯, ‘봉인된 시간’은 예술의 궁극이 삶의 궁극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묵직하게 증언하고 있다.
아울러 그 증언이 경직된 주장이나 열렬한 호소가 아닌, 크고 깊은 시선과 오래도록 곰삭은 체온으로 인화해낸 삶의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물이란 점에서 타르코프스키가 가진 설득력의 농도는 더 짙어진다.
적어도 내 경험 상, 예술의 궁극을 얘기하며 삶의 본질을 꿰어내고 삶의 벌거벗은 진실을 통해 보편적인 신성을 실질적으로 감득하게 한 예술가의 글은 ‘봉인된 시간’이 유일하다.
10여 년 전 처음 읽은 이 책은 아직도 내게 섬뜩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자기가책과 그 누구보다도 온화하고 따뜻한 숨결을 동시에 일깨워준다.
그건 흡사 삶의 분방한 오욕에 지칠 대로 지쳐 잠이 든 이마를 자근자근 짚어주는 크고 부드러운 손과도 같다. 열에 달뜬 마음엔 서늘한 바람으로 스미고 차갑게 경직된 몸엔 따뜻한 햇살처럼 감기며 주위를 둘러싼 모든 풍경들을 불현듯 개안한 눈으로 다시 보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영화를 보며 잠이 드는 건 문명이 유발한 현세의 안구건조증이 다소나마 치유되며 발생하는 일시적인 장애일지도 모른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아무래도 그 길고 긴 러닝타임만큼이나 장기복용해야 할 듯하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잠은 현실의 바깥이 아니라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이 세상의 더 깊은 속이다. 그 깊은 세계의 더 투명한 표면을 바라보며 나의 감은 눈은 더 커진다.
타르코프스키는 그 둥그런 우물 속에 ‘내’가 아니라 '세계‘가 들어차게 한다. 그 무심하고도 투명한 화면을 보며 잠결에 느꼈던 부양감이 비몽사몽의 환각이 아님을 지금도 믿는 한, 그의 영화는 분명 이 세상이 감추고 있는 차원 높은 진실의 ‘봉인’임에 분명하다.
봉인이 풀리는 순간, 세상은 분명 그 이전과는 다른 생명력으로 새롭게 번창할 것이다. 잠 속의 세상이 잠 밖의 이면이듯, 이 세상은 여전히 다른 세상의 이면이다.
Anne Sofie von Otter, Alto
Avec Michael Chance, cond.
English Baroque Soloists
Dirige par John Eliot Gardiner
'영화의 구도자'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1932-1986)의 영화는 취향이 맞지 않으면,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다가 이내 잠이 들어버리고 맙니다.^^ 한 장면을 길고 오래 촬영하는 롱테이크 기법을 고집스레 사용하면서 물과 바람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만을 포착해내는 듯한 그의 영화는 스토리는 고사하고 어느 한 대상이나 인물에 집중하기 힘들게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유작인 영화 <희생>은 1986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 국제영화 비평가상, 예술 공헌상, 기독교 심사위원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했고, 영화 제작사는 망했습니다.
영화만이 명화로 남았습니다.
스페인어 자막본입니다.
“아주 먼 옛날, 한 수도원에 늙은 수도승이 살고 있었단다. 이름은 팜베였지. 그는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산에 심었단다. 그리고 제자 조안 코롭에게 말했지. 나무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매일같이 물을 주도록 해라. 어쨌든 조안은 매일 이른 아침 물통에 물을 담아 산에 올라가서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수도원으로 돌아오곤 했지. 그렇게 3년 동안 물을 주던 어느 날 그는 나무에 온통 꽃이 만발한 것을 발견했단다. 끝없이 노력하면 결실을 얻는 법이지. 만약 매일같이 정확히 같은 시간에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늘 꾸준하게, 의식과도 같이 말이다. 그러면 세상은 변하게 될 거다.” 전직 교수이자 연극배우인 알렉산더는 죽은 나무를 땅에 심으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의 아들 고센은 어찌 된 일인지 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문을 닫아버린 아들에게 ‘말’을 한다. 어떤 일이든지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이날은 알렉산더의 생일날이다.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이자 의사인 빅터와 마을의 우편배달부 오토가 그의 집을 찾는다. 친구,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때,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알렉산더는 전쟁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의 아내는 공포에서 오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발작한다. 전쟁에서 핵무기가 사용되고, 그것이 지구에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구의 종말을 막기 위해 지금까지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알렉산더는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오! 주여! 이 암울한 시대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저의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포기하겠습니다. 집도, 사랑하는 아들도 버리겠습니다. 평생을 벙어리로 살겠습니다. 제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 어제 혹은 오늘 아침과 똑같이 모든 것을 되돌려 주소서. 그리고 저의 이 끔찍한 두려움을 없애 주십시오. 내 모든 것을. 오!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키겠습니다.” 알렉산더는 신에게 약속한 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기 위해 집을 불태운다. 알렉산더는 만약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세상이 오늘과 다름없이 평화롭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신에게 약속한다. 이때 우체부 오토가 알렉산더를 찾아온다. 그리고 가정부인 마리아와 동침을 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이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마리아를 찾아간다. 그리고 매우 의미심장한 얘기를 들려준다. “어머니의 집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했지. 몇 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황폐한 정원에도 나름대로 아름다운 무언가가 있었소. 지금은 그게 무언지 알 것 같아. 날씨가 좋은 날이면 어머니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서 정원을 내다보곤 했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원을 청소하기로 했소. 전체를 내 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거요. 꼬박 2주 동안 절단기와 낫을 들고 정말로 바쁘게 일했소. 그리고 일이 다 끝난 다음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지.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자연미라고는 전혀 없는 너무도 추한 풍경이었소.
폭력이 휩쓸고 간 현장이었지.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었소. 내 여동생이 어렸을 때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자른 적이 있는데, 집에 돌아온 그녀를 보고 아버지가 울었던 기억이 나오. 정원과 마찬가지 경우라고 할 수 있지.”
마리아와 알렉산더
여기서 알렉산더의 말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가 얘기하는 어머니의 정원은 이 세상이다. 인간들은 나름대로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신이 보시기에 그곳은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린, 자연미라고는 전혀 없는 황폐한 세상이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세상을 바라보며 신이 슬퍼하고 있다. 아름다운 머리를 잘라버린 여동생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울음을 터트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신은 황폐하게 변한 이 세상을 버리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안 알렉산더는 울면서 신에게 매달린다. 그러다가 마리아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마리아는 처음에 동침하자는 알렉산더의 청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가 권총으로 자살을 사도하려고 하자 마침내 그의 요구를 들어준다. 두 사람은 절실한 마음으로 인류 구원의 의식을 치른다.
그런 다음 알렉산더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린다. 자신이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하고, 가족과의 인연뿐만 아니라 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집에도 불을 지른다. 그런 완벽한 희생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불타는 집을 보고 알렉산더의 가족들은 절규하고, 알렉산더는 앰뷸런스에 실러 간다. 그렇게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한 알렉산더는 세상과 결별한다.
알렉산더의 희생으로 지구 멸망의 위험은 지나갔다. 또다시 펼쳐진 아름다운 세상. 알렉산더의 아들 고센이 죽은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그때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알토 아리아 ‘나의 하느님. 눈물로서 기도하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울려 퍼진다.
죽은 나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같이 정성껏 죽은 나무에 물을 주던 고센에게는 변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센은 죽은 나무 아래 누워서 이렇게 속삭인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지요?”
매일 나무에 물을 주는 고센.
<희생>은 시적 상징과 이미지로 충만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세 명의 동방박사가 마리아의 품에 안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는 장면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과, 바흐의 <마태 수난곡> 중 알토 아리아 ‘나의 하느님! 눈물로서 기도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나오는데, 두 가지 모두 희생과 구원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바흐의 음악으로 시작해 바흐의 음악으로 끝난다. 바흐가 살던 시절, 독일의 여러 교회에서는 매년 성 금요일이 되면 그리스도의 수난을 소재로 한 수난곡을 연주했다고 한다.
수난주간이 되면 다른 모든 음악 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는 수난곡을 듣는 것이 유일한 음악 행사였으며, 따라서 이 곡에 쏠리는 사람들의 기대도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에서 칸토르(합창단 총감독)로 일하고 있었던 바흐는 1729년 4월 15일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작 <마태 수난곡>을 초연하게 된다.
<마태 수난곡>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대한 음악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모두 2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에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것에서부터 최후의 만찬, 예수의 예언,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거쳐 예수가 체포를 당할 때까지의 이야기가 1부이고,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는 때부터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는 장면과 유다의 죽음, 빌라도의 심판, 사형선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숨을 거두는 예수, 무덤에 묻히는 예수까지의 이야기가 2부에 해당된다.
바흐는 3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이 인류 최대의 드라마를 기악 반주를 동반한 합창과 독창, 중창으로 펼쳐 보였다. 모두 78곡, 전곡의 연주시간만 해도 3시간에 달하는 대작인데, 성 토마스 교회에서 처음 연주되었을 때에는 중간에 목사의 설교와 기도 순서가 있었기 때문에 연주시간이 약 5시간 정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영화에서 이 노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알렉산더의 기원과 눈물을 상징한다.
그는 눈물로서 신에게 호소했고,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둔감해져있습니다.
내가 아닌 나에 갇혀 있습니다.
주위를 볼 줄 모릅니다.
그것의 시작은 저부터입니다.
이것의 매듭을 푸는 일 역시 내 안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아침 자신의 집 앞을 나오며 타르코프스키의 영상을 느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이런 일에 진심으로 마음을 내어 같이 마음 아파하고, 한 마디 소망의 기도를 던질 수 있는 일...
어쩌면 그것이 타르코프스키가 우리에게 말한 ‘믿음과 확신’의 영상언어 였을지 모릅니다.
영화에 쓰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