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7 : 가톨릭 청년 운동
최석우 안드레아(한국교회사연구소장, 신부)
3·1운동의 가장 큰 영향은 일제로 하여금 그간의 ‘무단정치’(武斷政治)에 종지부를 찍게 하고 한국민에게 좀 더 자유를 허용하는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정책상의 전향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었다. 물론 정치 단체까지 인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결사의 자유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각종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그중에서도 애국 청년 단체가 가장 많았다. 이것은 당시 청년들의 활동이 가장 컸고 또 대중에 미치는 영향도 컸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 애국 청년 단체 다음으로는 종교 관계 청년회가 제일 많았다. 그것은 종교 단체에서도 청년 활동이 활발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청년 활동은 자연 천주교회에도 영향을 미쳐 천주교회 안에서도 청년 활동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이에 교회 당국에서는 보다 효율적인 청년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본당 중심의 청년회들을 교구 차원에서 통합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리하여 서울교구에서는 ‘경성교구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가 1922년에, 2년 뒤에는 대구교구에서 ‘남방 천주교 청년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서울교구에서 본당 차원의 가톨릭 청년 운동이 시작된 것은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컨대 평양본당에서는 청년들이 교육사업을 목적으로 1906년에 청년회를 조직하고 기명학교(箕明學校, 성모보통학교의 전신)를 설립했었다. 또 같은 무렵 황해도 신천(信川)에서는 가톨릭 청년들이 ‘일신회’(日新會)란 청년회를 결성하고 애국 청년 운동을 전개 했었다.
한편 대구교구의 청년 운동은 비록 교구는 늦게 시작되었을지라도 서울교구에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활발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대구에는 이미 1910년경부터 청년회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1911년 교구가 창립되자 초대 교구장인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는 청년 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나타내고, 종래의 청년회를 ‘명도회’(明道會)로 개편하고, 정규적인 주일 집회를 직접 주재했으며 또 본당지부의 결성도 추진시켜 나아갔다. 또 그는 독립된 청년회관으로 ‘명도회관’을 신축, 연구실 체육실 오락실 등도 갖추게 하였으며 또 양악 취주 악대를 만들어 정년들의 직접 연주로 전례에 장엄성을 더하게 하고 또 테니스 코트를 만들어 체육을 장려하는 등 획기적인 사업을 통해 대구 지역 사회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또 1920년에는 근로자 청소년을 위해 ‘해성여자야학’까지 경영하였다.
1922년 크렘프(Krempft, 慶) 신부를 지도 신부로,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을 당면 과제로 내세우며 발족한 경성교구 청년회 연합회는 산하 18개의 청년회와 1천 18명의 활동회원, 2백 69명의 협조단원, 79명의 지원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회원의 수로 보면 좋은 성과였다. 그러나 아직 조직적인 활동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활동이라야 연합회에서는 서울, 평양, 진남포 등을 순회한 정도였고 또 본당에서도 강연회, 연극 등을 통해 본당 사업을 좀 돕는 정도였다. 그러나 서울의 종현과 약현 본당 청년들의 활동은 이 시기에 있어서도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1925년의 대홍수로 서울은 3분의 2가 물에 잠겼고 20만 명이 넘는 수재민이 생겼다. 이때를 당하여 두 본당의 청년들은 수재민들을 찾아 식량과 약품을 나누어주었고, 또 각 신문사의 후원을 얻어 적극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해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서울교구 당국은 청년 운동을 발전시키려면 회원의 수보다는 회원의 질을 높이는 일, 특히 정예를 양성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또 그것은 당시 공립학교의 물질적 교육에 대항하고 개신교의 학교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가톨릭에는 아직 청년 정예를 양성할 만한 고등교육기관이 없는 실정이어서 그 묘책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던 중, 뜻밖에 경영난에 처한 일본인의 한 중등교육기관을 매입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 봉래정(蓬萊町)에 있던 이 학교는 1920년 이래 일본인이 경영해 온 3년제 상업학교로서 교명은 소의 학교(昭義學校)였다. 서울교구에서는 3만 원의 부채를 안고 1922년 이 학교를 인수하고, 새 학제에 따라 5년제 갑종상업학교로 개편하는 동시에 교명도 남대문상업 학교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듬해 처음으로 3년제 졸업생 26명을 배출하였다.
남대문상업학교는 서울교구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3만 원의 부채까지 갚아야 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애당초 신자들이 1만 원이란 거액의 모금을 약속했었으나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였고 그래서 교구에서 해마다 3천 원의 경상비를 지원해야 하였다. 그러는 동안 프랑스 정부로부터 보조도 있고 해서 점차 재정난을 극복하고 마침내는 확고한 기반 위에 서게 되었으며, 미구에 취직률이 가장 높은 명문 상업학교로까지 발전하였다(현재 동성중고등학교의 전신).
또 서울교구에서는 남대문상업을 인수함과 동시에 서울의 가톨릭 청소년들을 수도의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구한다는 목적에서 남녀 기숙사도 계획하게 되었다. “경향잡지”를 통해 기숙사의 기금을 위해 교우들의 협조를 호소하였던 바 의외로 기부금이 답지하였다. 이에 교구 당국에서는 종현 성당 구내 인쇄소에 2층을 올려 성가 기숙사를 신설하고 50여 명의 학생을 기숙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명동 수녀원에서도 따로 여자 기숙사를 마련하고 26명의 여학생을 수용하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족 언론기관의 탄생은 천주교 청년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왜냐하면 천주교에서도 곧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언론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구교구에서는 1927년 청년회장 최정복(崔正福) 그리고 이효상(李孝祥), 서정섭(徐廷燮) 등 청년회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청년회 기관지로서 “천주교회보”를 그해 4월에 창간하였다. 대구교구 당국에서는 그 인쇄를 허가했을 뿐더러 1931년에는 교구 기관지로 인정함으로써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이리하여 그 장래가 매우 유망시되었다.
한편 같은 해 7월, “천주교회보”의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는지 서울교구 청년연합에서도 “빛”이란 월간지를 발간하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빛” 지도 청년회장 박준호(朴準鎬)를 위시하여 정지용(鄭芝溶), 김 교주(金敎周) 등 가톨릭 지성인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편집되고 있었기 때문에 독자들도 많아 이 신문 또한 그 발전이 유망했었다.
그런데 1933년 주교회의는 ‘가톨릭 액션’에 관한 교서를 발표하고, 그 가운데서 교회 출판물에 언급하면서 각 교구 차원의 출판물을 통폐합하여 전국적인 차원에서 새로운 청년 잡지를 발간할 계획을 발표하게 되었고,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나 “빛” 같은 교구 차원의 출판물은 자진 폐간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리하여 이 두 회보는 자진 폐간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계기로 하여 ‘가톨릭 액션’의 일환으로 특히 전국 가톨릭 청년 연합회의 결성 문제가 거론된 것 같다. 그러나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는 전국 연합회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모든 단체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데,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희박하고 따라서 아직은 본당 단체들만이 가장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드망즈 주교는 “천주교회보”가 실제로 본당간의 유대 구실을 하고 있으며, 또 그 신문이 거의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전국적인 유대 구실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하였다.
주교회의에서 가톨릭 지식 청년을 상대로 계획하고 편집 중이던 “가톨릭 청년”은 1933년 6월에 월간지로 창간되었다. 이 잡지는 종교 잡지로서의 면목이 뚜렷하였고 또한 종합교양지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내용과 체제 면에서 당시 대표적인 월간지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이 잡지는 가톨릭 문학의 발전과 민족 문화 창달에도 기여하였다.
1930년대는 공산주의에 대한 교황의 회칙이 나올 정도로 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이 심각했었다. “가톨릭 청년”은 그러한 위협을 한국에서도 정확히 인식하고 이에 대비하여 당시 청년들을 올바른 사상과 주의로 계몽하고 인도하려 했다는 데에 또 하나의 시대적인 공헌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한국 교회는 이미 1920년대에 민족주의자들에 의한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속지 말도록 경고했었다. 이러한 경고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연길교구 간도 지방의 피해 상황과 함께 멀리 소련, 멕시코, 스페인 등지로부터도 잔학한 교회 박해가 알려 짐으로써 한국에서도 더욱 현실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인식 아래 “가톨릭 청년”은 가톨릭 청년들에게는 현대 청년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구미 사상에 치우치고 있어서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경고하였고, 젊은 성직자들에게는 현대 청년들이 공산주의를 유행병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만큼 그 사상을 학문적으로 철저히 연구하여 그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그 정체를 밝혀주어야 할 것을 권고하여 마지않았다.
끝으로 오늘의 가톨릭중앙의료원의 전신인 성모병원이, 사실은 서울교구 청년들의 제기로 시작되었고 또 결실을 보게 되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에서는 성대한 기념 행사는 물론이요 기념 사업에 있어서도 한국 공의회의 개최, 한국 교회 지도서의 편찬, 교리서의 개혁 등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병원 설립만은 그 많은 기념 사업 증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교구 청년연합회에서는 자체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유별나게 기념 병원 설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청년회에서 발표한 설립 취지서를 보면 그 목적이 우선 숫적으로 크게 증가를 보여온 성직자, 수녀, 신도들의 불편을 덜어줄 의료기관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현실적인 필요성과, 또 그러한 일은 궁극적으로 자선과 복음 전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구해줄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곧 모금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신자들의 호응도는 의외로 높았다. 그것은 청년들의 판단이 당시의 교회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기금 모집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어려웠던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교우들의 성금만으로 병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고, 교회당국의 어떤 용단이 없이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서울교구에서 그러한 용단을 내리게 되었고 또 그러한 용단을 내릴 만큼 기회도 좋았다. 즉 종현성당에 인접한 거리에 일본 병원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팔리게 되었다. 이에 서울교구에서는 서둘러 그 병원을 매입하고, 필요한 시설을 갖춘 후 1936년 5월에 개원하였다. 이렇게 연합청년회가 제기한 기념 병원은 5년 만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성모 병원은 다른 종교 단체의 의료기관에 비해 그 설립이 훨씬 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 만에 서울 시내에서 굴지의 병원으로 발전하였고, 또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병원이란 좋은 평판까지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