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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1년(연산군 7년)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조부 댁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은 평생을 처사로 살면서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같은 해에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퇴계 이황을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로, 남명을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 인정하고 있다. 남명은 경의(敬義)의 실천을 생활철학으로 삼았는데, 몸가짐을 가지런하고 엄숙하게 하며 마음을 한결같이 함으로써 사사롭거나 사악한 마음이 저절로 없어지게 하는 공부가 경(敬)이며, 의로운 언행을 추구하면서 나와 남의 불의함을 제거하는 공부가 의(義)라고 했다. 그의 경의사상을 실천한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크게 헌신했는데,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망우당 곽재우, 내암 정인홍, 송암 김면이 있다.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이 61세 때부터 영면할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산을 뒤에 두고 물(덕천강)을 앞에 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남명이 산천재를 지으면서 심은 매화나무(일명 남명매)가 대문을 통해 들어오는 흉풍을 막아주고 있다. 시계 방향의 동선으로 다가가는 산천재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남명의 성품을 말해주듯 단아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다. 산천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온화한 기운이 흐르며 안산(앞산)은 일자문성(一字文星·一자형)으로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신선이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형상)이다. 안산의 좌우측에 우뚝 솟아있는 기골이 장대한 산들은 안산을 호위하고 있으며, 오래전 남명과 그의 제자들이 안산과 산천재 사이에 흐르는 덕천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 수양을 했을 법하다. 산이 있으면 생동감 넘치는 물이 있어야 명당이 될 수 있다. 산천재는 학문을 닦기에 알맞은 지기(地氣)가 뛰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지맥(地脈·산줄기)에 순행하여 내려온 곳에 자리 잡은 n형태의 ‘남명기념관’은 본관 건물 좌우측의 건물이 좌청룡과 우백호가 되어 외부의 살기(殺氣)와 흉풍을 막아주고 있다.
기념관 뒤로 100여 미터 올라가면 남명 선생이 직접 신후지지(身後之地·죽기 전에 미리 잡아 두는 묏자리)로 잡아두었다가 영면한 묘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숙부인인 은진 송씨의 묘가 있다. 차분하게 뻗어 내려온 산줄기의 가장 중심 부분에 선생의 묘가 있지만 현재의 위치보다 약간 내려온 상석과 망주석 사이가 적절한 선익(蟬翼무덤 좌우측의 터로 빗물과 흉풍으로부터 무덤을 보호함)을 확보한 혈을 품은 자리이다. 좌청룡(좌측 산)인 시무산은 너무 높고 웅장해 혈(穴·묘)을 누르지만 유순하게 끝맺음을 함으로써 별반 흠이 되지 않는다. 우백호(우측 산)는 없으나 우람한 나무들이 대신 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외백호가 보충 역할을 하고 있다. 안산은 알맞은 높이의 후덕함을 갖춘 ‘선비산(필자가 명명한 산비탈에 해당하는 안산)’이며, 조산(안산을 받쳐주는 산)은 문필봉으로 학자와 문필가를 배출하는 산인데 아마도 선생은 앞쪽의 풍광과 안산의 품격을 보고 자신의 자리로 잡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문필봉은 바위산으로 강건함을 뜻하며 선비산은 흙산으로 고결함을 의미한다.
근방에 있는 ‘덕천서원’은 남명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됐으며 교육공간의 중심 건물인 경의당(敬義堂)과 유생의 생활공간인 동·서재가 있다. 경의당은 선생의 학문 정신인 경과 의를 가르치고 논하던 곳이다. n자형의 서원과 함께 좌청룡과 우백호 역할을 하는 동·서재는 전형적인 풍수의 틀에 맞는 배치를 하고 있다. 주산(뒷산)에서 내려온 산줄기는 옹골찬 기운을 품진 않았지만 양택지(건물터)로는 알맞으며 그 산줄기 끝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서원은 수맥과 바위가 없어 음습한 기운이 감돌지 않으며 앞쪽의 시천천은 터의 기운을 강화시키고 있다. 서원 앞의 시천천과 접한 세심정(洗心亭)은 유생들이 뛰어난 산세와 물소리를 들으며 잠깐의 휴식과 마음을 닦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