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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5월25일 목요일 [(백)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수도회] 인생의 터널 속에서 믿고 기다리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사도 18,1-8
† 복음 요한 16,16-20
◈ 오늘의 묵상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는 가끔 당혹스럽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뜻 모를 예수님의 이 말씀에 제자들은,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면서
혼란스러워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이심을 알기에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뜻 모를
말씀으로 들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이란 표현을 쓰셨을 때, 제자들은
그 ‘조금’의 시간을, 기다리는 다급함 속에서 맞는 불안감으로
체험하겠지만, 예수님의 ‘조금’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바라시는 순명의
시간이자 섭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 말로 세월의 무상함을 체험하는 인간의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부르고, 시간 속에 충만함과 영원함을 체험하게 해 주는 하느님의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세상에 매여 사는 사람은 시간 속에서
허망함과 불안감을 느끼지만,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는 사람은 시간에
매이지 않고 매 순간을 기쁨과 평화 속에 사는 충만함으로 체험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유다인의 반대를 받아도 미련 없이 다른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시간이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맡겨진 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도 매 순간을
과거에 대한 죄책감이나 후회, 상처와 미움에 빠져 살면, 시간은
우리에게 불행의 덫이 되지만,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며,
기도하고, 기쁘게 살면, 시간은 세상에서 영원을 미리 맛보는 충만한
은총이 될 것입니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주님을 통해 얻는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8,1-8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15년 전, 제가 본격적으로 자전거를 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우연히
자전거를 오랫동안 타신 분과 함께 자전거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자전거 탈 때에 내리막길보다는 오르막길이 훨씬 더 좋고,
재미있어요.”
솔직히 당시에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게 오르는 오르막길이 내리막길보다 더 좋을 수가 있을까
싶었지요. 하지만 지금 현재 저 역시도 이렇게 말하게 됩니다.
“내리막길보다는 오르막길이 훨씬 더 좋고 재미있어요.”
왜 그럴까요? 오르막길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게 페달 질을 해야만
하는데 왜 더 좋아할까요? 바로 오르막이 끝나는 길에는 반드시
내리막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나게 내려가는 내리막이 있기 때문에
힘들게 오르는 오르막길이 나쁘다거나 싫다는 식의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등산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왜 등산을
좋아하십니까? 산 정상까지 가는 그 길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그만 밑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산 정상에서 맞이하는 상쾌함과 기쁨 때문에 어렵고 힘든 길을
꾹 참고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그 맛을 깨달은 사람은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그 즐거움을 경험하기 위해서
다시금 남들이 어려워하는 길을 기쁜 마음으로 간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과 시련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기쁨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 안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조금 있으면’ 일어날 일은 당신께서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묻히시는 일만 아니라 부활도
암시합니다. 곧 이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께서 부활하신 미래의 상태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고통과 시련으로 크게
와 닿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우리 역시 삶 안에서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고되고 힘들다고 여기지만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커다란 희망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통해 얻는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하라. 실패하라. 그리고 다시 도전하라.
이번에는 더 잘 해보라. 넘어져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단지 위험을
감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이제 여러분 차례이다. 이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오프라 윈프리).
저와 오랫동안 함께 한 자전거입니다.
낙타가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그늘 하나 없는 사막에서 낙타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체질적으로 그늘 없이도 스스로 체온조절을 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대한 재미있는 글을 하나 볼 수 있었습니다. 낙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고 걷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낙타의 긴 목과 머리가 몸에 그늘을 드리워서 체온조절이
가능한 것이지요. 만약 낙타가 태양의 뜨거움을 피하려고 외면했다면
온 몸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열기에 쓰러져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태양을 피하지 않는 이 낙타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낙타의 정면승부가 낙타를 살린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을 똑바로 보고 또 그 상황을 피하지도 미루지도
않으면서 살아야 진정으로 이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쉽고 편안한 길로만 가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더 성장하는 사람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는 용기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 정면으로 부딪히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삶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통해 이를 이겨내고 정면으로 부딪힐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태양을 피하지 않는 낙타.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인생의 터널 속에서 믿고 기다리는 기쁨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인생의 터널 속에서 믿고 기다리는 기쁨
1세기말을 향해가는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큰 기대를 가졌으나, 재림이 지연되자 근심하며 혼란에
빠집니다. 이른바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16)
이제 죽음을 당하실 것이나, 머지않아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부활하시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지니고 오시는 예수님을 다시 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주어질 구원이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또한 유다인들은 현재의 사악한 시대와 다가올 하느님의 황금시대의
중간 시대를 ‘메시아의 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잘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16,20)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상황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두려움과 근심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제자들은 그저 지상에서
함께 하며 메시아의 모습을 보여주셨던 예수님과의 이별로, 이제
고아처럼 남겨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유혹, 슬픔, 비탄,
고통 그리고 혼란에 빠집니다(16,4ㄴ-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으로 제자들이 겪게 될 상실감과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곧 당신이 부활하여 오실
것이니, 신뢰를 잃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머지 않아
다시 오시어 고통스런 현실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리라는 희망을 주신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살다보면 고통스럽고 곤경에 빠질 때,
오해받고 외면당할 때, 극도의 절망감을 느낄 때 어두운 터널마저 막힌
것처럼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근심 걱정,
하느님도 예수님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고, 신앙행위마저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지요. 삶의 절벽에서 자신의 문제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보지도 믿지도 않는 신앙의 위기에 직면하곤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논리와 방식에
젖어 살아가는 이들은 나의 그런 상황을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은총의 순간이요, 사랑이신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계기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지나온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라고 말하지 말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은총의
때요, 더 큰 기쁨을 기다리는 희망의 때인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 시련, 고통은 신앙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
체험의 터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유혹, 고통, 슬픔이 현실로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희망을 지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유혹,
고통, 시련을 포함한 삶 전부가 하느님 만남의 통로입니다. 고통의 저
밑바닥에서, 삶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지금 이미’ 내 안에 참
기쁨으로 와 계신 주님을 발견하는 오늘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믿음안에서 근심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모든 순간에 함께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근심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의 길을 결코 가로막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으십시오.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 오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을 되돌려 주시는 분또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기쁨입니다.
믿음없이는 참된 기쁨을 맛 볼 수 없습니다.
다시금 우리의 기쁨을 어디에 두고 사는지를 묻게됩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기쁨입니다.
아프다고 도망칠 수 없는 우리의 기쁨입니다.
세차게 흔들릴수록 기쁨은 믿음안에서 더욱 뜨겁습니다.
우리의 근심과 아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실 주님을 믿기에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믿음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밀당'이 주는 평화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복음: 요한 16,16-20
'밀당'이 주는 평화
님의 침묵 - 한 용운 시인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입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우고는 처음 다시 읽어보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빼앗긴 땅과 민족을 되찾으려는
끈질긴 의지와 희망을 담고 있는 시라고 평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불교의 중심사상인
‘회자정리 거자필반(會者定離 去者必返)’,
즉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되고, 또 헤어졌다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된다는 믿음 안에서 쓰인 시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것이 애인이 되었건, 나라가 되었건
반드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사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라는 말은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마지막 가르침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성인들은 떠나갈 때 오히려 자신의 죽음보다는
자신을 잃게 되는 이들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제 하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는 그들을 이런 말로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관계는 밀고 당기는 ‘밀당’,
즉 ‘가까워짐과 멀어짐의 무한 반복’입니다.
즉 회자정리, 거자필반의 무한 반복인 것입니다.
사실 헤어진다는 것이 큰 슬픔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관계의 ‘원리’라면,
그래서 ‘어차피’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그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애정에 그리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헤어진 사람은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음까지
알게 된다면 큰 희망과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떠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아침에 출근할 때입니다.
정말 아이들은 아빠가 나가면 보내기 싫어서 울기도 합니다.
불안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압니다.
조금만 있으면 자신의 남편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그것도 가정에 꼭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해 나간다는 것을 알기에
그 헤어짐을 오히려 감사하게 받아들입니다.
처음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매우 불안해합니다.
헤어짐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서로를 구속하게 되어
진짜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첫사랑이 잘 될 확률이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을 하느님의 뜻에 두는 이들은 그런 관계에 자유롭습니다.
모든 인연을 만남과 헤어짐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두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관계만이 항상 희망과 평화를 간직한 편안한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만 있으면” 떠나가실 것이고,
또 “조금만 있으면” 돌아오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 조급해 하지 맙시다.
우리에겐 ‘영원’이란 시간이 있습니다.
영원 안에서 ‘조금’이란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지금 가진 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또 지금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서 희망하는 것도 포기하지 맙시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부활 제6주간 목요일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 요한 16,16-20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도들은 스스로 일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설득을 하였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을 모욕하고, 비난을 하여도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다음
기회를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불가에는 ‘염화시중’의 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제자
가섭은 잘 알아들었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연꽃만 들어도 제자
가섭은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제자
가섭은 부처님의 마음을, 부처님의 뜻을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닌 것처럼 때로 실패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아쉬움도
있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좋은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교우들과 의견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저의 생각과 저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말씀드리면, 저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그때는
마음이 후련할지 모르지만 늘 뒤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좀 더
참고 기다리면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나중에는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성령의 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령의 네 번째 은사는 굳셈입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심을 하지만 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춘잠도사사방진
납촉성회루시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봄누에는 죽을 때까지 실을
뽑는다고 합니다. 초는 재가 될 때까지 불을 밝힌다고 합니다. 공부를
잘 하는 비결은 정신을 다해서 책상에 오래 있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굳셈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박해와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쉽게 포기하는 분들은
굳셈의 은사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
중에는 ‘다음에 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이
과거가 되고, 오늘 하는 나의 행동이 미래의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다섯 번째 은사는 지식입니다. 지식의 은사는 교리와 성서의
뜻을 잘 알아듣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교리와 성서의 어떤 해설이
옳은지 그른지 분별하게 합니다. 교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관계되는지 알려 주며, 여러 종교에 대한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합니다.
교회는 배아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는 하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배아는 생명이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성체 줄기 세포에 대한
연구는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문자는 인류의 지식이 후대에 전해 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인류의 지식을 공유하고,
소통하게 하였습니다. 지식의 밭에서 진정한 보물을 찾는 식별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여섯 번째 은사는 효경입니다. 하느님을 무서워하기보다는 참
아버지로 알아 사랑하여 친밀감을 갖고, 하느님의 뜻을 채워 드리려고
힘쓰고, 어려운 때에는 자녀들이 부모를 신뢰하는 것처럼 언제나
하느님을 따르며 의지하는 은사입니다. 교회는 사회교리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임을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돕도록 이야기 합니다. 소외되거나 억울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하며, 이주민들에게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일곱 번째 은사는 두려워함입니다. 단순히 공포심을 가지고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효성 있는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을까 조심하듯, 죄를 범하여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지 않도록
하고, 우리 영혼이 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를 조심하게 해 줍니다.
초대교회에는 은수자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바람이 부는 광야에서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세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예전보다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사람들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이와 같은 은총을 잘 간직하면서 살아감으로써
신자들이 맺을 수 있는 삶의 열매를 바오로 사도는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착함, 신용, 온유, 절제입니다." (갈라 5,2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넘어야 할 산이 많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5월25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요한16,16-20)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만남은 헤어짐을 전제합니다. 평생 이별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한다 할지라도 때가 되면 이별을 감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사랑의 관계가 참되었는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잠시잠깐의 만남을 기뻐하고 어떤 이는 좀 더 오랜 만남을 기대하고
희망합니다. 기왕이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슴에 남는 만남을 이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16,20). 하고 말씀하시며 세상을 떠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게
됨을 제자들에게 거듭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권력자들은 십자가에 무참하게 처형된 예수를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겪은 후에야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체험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이 다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이해한 다음에 수용하겠다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머리가 아니라 먼저 가슴으로
따르고 비로소 논리를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 알아듣지 못해도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그때 아는 것은 이미 있었던 진리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오기까지 제자들은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어야 합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12,24).
그러므로 스승과의 깊은 신뢰를 쌓고 스승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스승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 참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승은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어서 스승입니다. 지금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여기서 기쁨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그분께서 기뻐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을 선택하게 될 때 주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제자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신앙여정도 한결같이 좋기만 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힘들고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기쁨을 희망하는 만큼
아픔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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