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Ⅱ-59]작가 황석영과 6백살 팽나무
황석영 작가가 최근 신작 『할매』(창비 2025년 12월, 224쪽)를 펴냈다는 소식을 페북에서 알았다. 작품의 무대가 군산(群山) 하제마을이고, 주인공이 6백살 팽나무(할매)라는데, 무조건 사서 읽고 싶었다. 원래가 감동을 잘 하는 편이지만, 내내 흥미진진했다. 역시 황석영다웠다. 그가 누구인가? 1943년 만주 장춘에서 태어나 우리 나이 83세.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와 동갑이니 그들은 쌍벽을 겨루는 원로작가이다. 당장 달려가 그 ‘할매’를 뵙고 싶고, 경건하게 절하고 싶었다. 하여, 군산이 제2의 고향인 마음 맞은 친구 2명에게 졸랐다. 아구탕 맛집에서 대접까지 받았으니, 나는 차에서 ‘썰’만 풀어주는 것으로 보답할 밖에.
하제, 중제, 상제, 세 마을이 군산비행장 근처에 대대로 살고 있었다한다. 그런데 비행장 미군기지 탄약고 안전거리 확보 차원과 지독한 소음 때문에 이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당제(堂祭)를 지내던 마을의 보호수 팽나무만 덜렁 남았다. 편의상 나무를 처치하려는 기관에 시민단체들이 거세게 달려들었다. ‘반골 형제신부’로 유명한 문정현(소설속 유방지거 신부)신부도 힘을 보탰다. 그 결과, 나무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24년 겨울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실제 나이는 오차범위 50년, 537살로 확인됐고,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팽나무로 소문이 났다. 군산관광포토투어로도 이름이 난 것은 ‘생각있는(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덕분이었다. 역시 ‘바보대통령’ 노무현의 생각이 옳았음을 반증하는 거다.
군산에 거처하던 작가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갔다. 그즈음, 작가는 익산의 원불교본부에서 부처의 「열반경」을 읽고 있었다한다. 이 소설은 어쩌면 황석영만이 쓸 수 있는 소재였을 듯하다. 6백살 팽나무가 지켜본 600년의 역사, 그러니까 600년의 연대기이다. 소설은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작은 새 개똥지빠귀 한 마리의 여정으로 시작된다. 시작부분에선 백기완 선생의 『장산곶매』도 났는데, 그게 아니었다. 긴 여행에 지친 철새가 죽자 팽나무 씨앗이 주검을 양분삼아 싹을 틔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팽나무는 조선 중기부터 현대에까지 굴곡진 역사를 수도승 몽각과 그로 인해 이뤄진 한 가족과 함께 온몸으로 겪어낸다. 천주교 박해와 동학농민군의 실패,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 카미카제 훈련학교, 비행장 건설로 인해 삶의 터전을 뺏기기까지 그 역사를 다 알고 있다. 덴마크의 어느 여성은 이 소설을 읽은 후 작가에게 “She(Pang Tree, Guidian Tree) knows everything”이라고 했다한다.
그렇다. 나무는 말을 못하고, 말을 안하고 있을 뿐이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읍 말목장터의 나무가 죽어버린 것을 많이 아파하는 까닭은, 김제 원평집강소의 나무가 전봉준과 김덕명 장군을 보았을 것이기에 소중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작가는 ‘할매(팽나무)’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가. 그는 ‘카르마’(Karma, 업業)를 말하고자 한다. 생명은 인간과 관계의 순환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단순한 개인의 보응(報應)을 넘어 생명과 역사가 어떻게 연결되고 이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소설은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로 대미(大尾)를 장식하는데, 이는 팽나무가 방지거 신부에게 나지막한 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인용부호(“”)가 없는 까닭은, 팽나무가 실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방지거 신부가 환청처럼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이 책에서 소설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장엄한 세계를 유감없이 펼치고 있다. 그 세계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을 향한 위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근래 ‘압도적 재미’를 표방하는 <매불쇼>가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지만, 작가의 서사(敍事)는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압권이다. 우리 모두 흙의 눈물과 바람의 순교 이야기를, 살아남은 나무 할매로부터 들어보기를 강추한다.
부기 1: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 건 무조건 민족적 경사이지만, 그보다 황석영, 조정래, 고은 중에서 누구라도 이 상을 앞서 받았으면 더 좋았을텐데라는 것은 개인적 생각이지만, 그만큼 작가의 볼륨은 크고도 깊다. 1981년 18개월만에 상병이 되어 첫 휴가를 나오는데, 부대장(공군중령. 육해공해병 연합부대)이 열흘만 다녀오면 안되겠냐고 했다. 그 금쪽같은 열흘동안 고향 모정에서 황석영의 『장길산』을 통독하고 귀대하는데,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황석영이다. 광주항쟁 직후 『시대의 어둠을 넘어 죽음을 넘어』라는 복제본을 밤새 읽으며 전율한 기억은 또 어떤가? 그는 고등학교때 이미 단편소설 <입석부근>으로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작가 최인호만큼 천재적인 문학청년이었다. 영화 <삼포가는 길>을 보셨으리라. 원작자이다.
내가 읽은 것도 <객지> <한씨연대기>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바리데기> <철도원삼대> 등인데, <무기의 그늘>은 베트남전쟁의 본질을 총체적으로 다뤄 인상깊었다. 그밖에 단편 <섬섬옥수>가 생각나고, <그곳엔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북한을 방문하여 몇 달 체류하며 북한의 실정을 가감없이 기록한 책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엊그제 <매불쇼>에 출연했는데, 열혈 문학청년이던 그도 나이를 어쩔 수 없는지 ‘노인’이 됐음을 알 수 있었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 광화문에서 광화문 여러 술집에서‘문학 떨거지’들을 몰고 다니며 ‘구라’를 펴던 작가를 여러 번 보았는데 씁쓸했다. 오죽하면 ‘황구라’라 했을까? 그런 황구라도 백기완 선생 앞에서는 기를 못폈다고 하던가. 하하.
부기 2: 1908년생 우리 할머니는 27살때 청상과부가 되셔, 재가하지 않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잘 키우셨다. 언젠가 한번 내가 "겨울 긴긴 밤을 외로워서 어떻게 보내셨냐?"고 물었다. "깜한 밤에 문고리를 걸어잠그고 무릎을 곧추세워 앉아서 바늘로 무릎을 콕콕 찔렀지"라고 했다. 두 아들의 아들딸 11명을 끔찍히 사랑해주시던 할머니를 놀리느라 "할매"라고 부르면 "할매는 서(庶)할머니를 부르는 말"이라며 눈을 부라렸다. <할매>라는 소설 제목을 보자마자, 평생을 고독한 과부로 사신 우리 할머니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