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35
11월8일[연중 제3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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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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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lQW8NPVjG7A
[인천교구 전호준 스테파노(청수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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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초기 교회 이방인들의 사도요 최고 목자였던 바오로 사도의 삶과 신앙이 얼마나 열정적이고 충실했으며, 모범적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특별히 첫 번째 독서 필리피서는 그런 바오로 사도의 위대함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회심 이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그는 매사에 다른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내걸며 복음 선포에 매진했지만, 자신의 의식주는 스스로 일을 해서 해결했습니다. 천막 짜는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동시에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목자로서 교우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과 당당함이 돋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포하는 말씀과 그의 구체적인 삶의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생활은 조금도 따르지 않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했다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콧방귀를 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하게도 언행일치되는 그의 강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의 서한 한 구절 구절에는 당당함이 잘 묻어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필리 3,17)
사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구절을 묵상해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는 구체적인 삶이 그랬기 때문에, 그리도 당당히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당당함 뿐인가요? 바오로 사도가 초세기 이방 교회의 지도자로서 얼마나 교우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배려했는지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교우들을 대하는 사목자로서의 자세가 세상에 둘도 없이 자상한 친 아버지 그 이상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보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존재 자신의 기쁨이요 화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표현을 들은 초세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진심과 사랑이 가득 담긴 그런 표현들은 힘겨웠던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내게 맡겨진 양들을 어떤 마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는 하루가 되길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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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cYWT0w8p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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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가 박해 당하면 우리 신자들은 나를 숨겨줄까?>
오늘 복음은 약삭빠른 집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재산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청하는 이들을 당신 집사로 삼으십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을 청하는 신앙인들입니다. 성령으로 이뤄지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는 곳에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수많은 다양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약삭빠른 집사처럼 된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당신 집사로 계속 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기 전의 집사처럼 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사제가 되어 보니 신자 중에서도 성령의 은총을 약삭빠르게 잘 사용하는 집사가 있는가 하면 낭비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이 이 일을 더 할 수 없을 때 드러납니다. 만약 제가 사제를 더는 하지 못하게 될 때 저를 맞아줄 신자들이 있을까요? 갑자기 자신이 없어집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는 신자들이 대부분 성직자를 죽이기 위해 찾았습니다. 그만큼 은총의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 이유는 중세 교회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 있습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에 ‘종교 재판관’ 부분입니다. ‘대심문관’이라고도 불립니다. 대심문관은 당시 종교 재판으로 사람들을 화형에 처하는 엄청난 권력을 지닌 고위 성직자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상으로 돌아오시다가 대심문관을 만나 갇혀서 재판받는 형식을 취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마지막에 대심문관에게 마치 유다가 당신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입을 맞춥니다. 이 상징적 행위는 목매달아 죽은 유다처럼 종교가 죽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의 죄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빼앗기는커녕 그것을 더 늘렸고, 인류의 영적 왕국에 영원히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자유로운 사랑을 바라시어, 사람이 자유롭게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유혹당하고 포로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가 바로 예수님처럼 해야 했습니다. 자유가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라 고마워서 자유롭게 자신을 받아들일 친구를 사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심문관은 종교는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종교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고 통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빵에 대한 유혹을 이긴 것을 비난하면서 중세 교회의 부유함을 통해 인류를 교회가 배를 불리게 만드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자유를 우리 발 앞에 놓고 우리에게 ‘우리를 너희의 노예로 삼아 먹이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자유와 빵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자비는 행사되어서는 안 되며 종교 재판처럼 종교가 강한 힘으로 그들의 자유를 빼앗아 줄 때 그들은 신비로운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들이 쫓겨났을 때 자신들을 자유롭게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닌 자신들에게 완벽히 통제되는 사람들로 만들려는 시도이고,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일부 성직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을 관리하는 집사는 자신이 사제라면, 만약 사제 옷을 벗었을 때 자신을 맞아줄 사람들을 만드는 사람과도 같아야 합니다. 만약 자유를 빼앗는 존재였다면, 그들이 그를 맞아들여야 하는 자유를 갖게 되었을 때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그를 받아줄 리가 없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성직자들이 얼마나 신자들에게 못되게 굴었는지 오히려 그들을 찾아내어 신자들이 죽이려 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를 생각해 봅시다. 박해 받는 땅에 처음으로 들어와 미사와 고해성사를 해 주었습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우리 신자들의 노력은 대단했습니다. 평신도 최인길은 주문모 신부가 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사제복을 입고 대신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쫓기는 주문모 신부를 목숨을 다해 보호한 강완숙 골롬바도 있습니다. 그가 체포령이 발효된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수많은 가족이 다 위험할 수 있어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목숨을 걸고 은총을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신자들도 주문모 신부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평신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은총을 받으니 은총의 관리자입니다. 박해 시대가 되었을 때 자신을 숨겨줄 친구를 그 은총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청지기만이 끝까지 주인이 칭찬해주며 자신의 집에 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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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현대인들과 고대인들은 ‘역사(歷史)’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건(Fact)에 대한 기록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합니다. 저도 역사를 배울 때, 연도와 사건을 주로 배웠습니다. 조선의 건국, 한글 창제, 임진왜란, 국권피탈과 같은 사건을 연도와 함께 외웠습니다. 그 뒤로는 숫자를 먼저 외우곤 했습니다. 삼일절 만세, 팔일오 광복, 사삼 제주 항쟁, 육이오 전쟁, 사일구 혁명, 오일륙 군사 쿠데타, 오일팔 민주화 운동, 육십 시민 항쟁, 육이구 선언과 같은 사건과 날짜를 외우곤 했습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에게 역사는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교회의 전례도 사실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12월 25)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춘분 이후 첫 보름달 다음 일요일)을 축으로 전례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에 4주 동안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할 전에 40일 동안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회개하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고대인들에게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적 사실(fact)보다 그 사건에 포함된 진실(truth)이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실이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였는가“의 육하원칙에 따라서 정확하게 진술하거나 기록하는 것을 말하며, 진실이란 사건의 의미와 그 파급 효과를 말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역사 기록은 정치나 종교의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이어야 했고, 따라서 과거에 대한 편견 없는 공정한 평가란 그들의 역사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역사 기록은 성경의 다른 기록들처럼 저자의 신학 사상과 메시지를 선포하고 전달하는데 이용됩니다. 구약성서의 역사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기 위해 이민족들의 손에 넘깁니다. 어느 정도 벌이 충족되거나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백성은 다시 평화를 찾습니다. 지도자가 죽으면 백성은 또다시 우상 숭배에 빠져들어 똑같은 역사를 반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우리 신앙인들은 현실의 짧은 삶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아주 작은 것들을 충실하게 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첫째, 기도입니다.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자주 하면 기도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차를 타면 간단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안전 운전에 큰 도움이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둘째, 선행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보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도 좋지만, 보답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는 선행을 하느님께서는 더 좋아하십니다. 셋째, 성사 생활입니다. 자주 미사에 참례하고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말씀의 양식과 성체를 함께 받게 됩니다. 혼인성사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은 하느님의 커다란 축복입니다. 내 마음에 쌓인 죄와 분노, 미움과 시기들은 고백성사를 통해서 버려야 합니다.
기도와 선행 그리고 성사 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나 못 하므로 하느님께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나의 신앙도 키워나가도록 해야겠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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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6,1-8: 약은 집사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다.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도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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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약은 집사의 비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집사의 행위는 그 목적과 과정과 결과 모두 부당해 보이고, 이 부당한 행위에 대한 부자 주인의 칭찬에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재산 사용에 관한 가르침으로 다가가 본다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집사는 우리를 뜻합니다.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재산을 관리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산과 능력은 우리 것이 아니라,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잘 관리하고 적절하게 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산을 아무 계획 없이 그대로 두거나 자신만을 위하여 쓰는 것은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재산은 그분의 영광과 세상을 위하여 쓰여야 합니다. 집사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재산을 가지고 자신을 위하여 쓰다가 쫓겨날 위기를 맞았지만, 나중에는 이웃을 위하여 쓰면서 칭찬을 받고 그 자리에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약은 집사에게서 주님의 재산을 잘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곧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고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재산이 그렇게 쓰이기를 바라십니다. 집사에게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당장에는 집사에게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그 재산의 원주인인 부자에게 더 고마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은 이들은 은혜를 베푼 이에게 먼저 고마워하겠지만, 결국 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께 찬미를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선행으로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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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집사(관리자)입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1ㄴ-8)
1) 어떤 부자가 집사에게 ‘해고’를 통보한 일은, 루카복음 12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집사 일을 청산하라는 주인의 통보는,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하느님의 통보와 같습니다. 그런데 ‘청산’하라는 말은, 장부를 정리하라는 뜻이기도 하고, 장부 정리를 할 시간을 주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기회를 준 것입니다.>
‘오늘 밤’에 목숨을 되찾아 가겠다는 통보도,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적어도 몇 시간은 주셨음을 나타냅니다.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지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처럼 미리 통보를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채로 살다가, 갑자기 떠나는 것처럼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장부 정리는, 즉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과 시간’을 정하는 것은 주님의 권한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늦출 수가 없습니다.(루카 12,25) 우리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곧바로 응답해야 합니다.
2) 비유의 표현만 보면, 집사는 단순히 ‘먹고 살 길’을 찾으려고 장부 조작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쫓겨나게 된 사람이 장부 조작을 통해서 더 많은 낭비를 하는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현보다는 뜻을 생각하면, 집사의 행동은 ‘잘못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일 수 있고, 단순히 먹고 살 길만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처벌을 피하려고 노력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명기에 ‘이자에 관한 규정’이 있습니다. “너희는 동족에게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돈에 대한 이자든 곡식에 대한 이자든, 그 밖에 이자가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도 되지만, 너희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고 꾸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 손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이다."(신명 23,20-21)
비유에 나오는 집사를, 자기 마음대로 주인의 재산을 가지고 고리대금 사업을 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거슬러서 이방인들과 동족들 모두에게서 높은 이율의 이자를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부당하게 받은 돈은 자기가 차지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을 줄여 준 일은, 동족들의 이자는 없애 주고, 이방인들의 이자는 깎아 준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인에게 무슨 이익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명예를 사람들로부터 얻게 될 것입니다. 빚진 사람들은 빚이 줄어들어서 좋아하게 될 것이고, 집사 자신은 주인의 처벌도 피하고, 사람들의 환심을 얻어서 먹고 살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었으니, 집사가 한 일은 ‘잘못을 고쳐서 바로잡은 일’, 즉 ‘선한 일’이 되었습니다.
3) 그러나 집사가 한 일을 ‘회개’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집사의 모습 자체가 회개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영리함’과 ‘신속함’입니다. 동시에 예수님 말씀은, “먹고 사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너희는 왜 이렇게 굼뜨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는 모습은, 세속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을 영리하고 신속하게 하는 것보다 더 지혜롭고 더 신속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집사(관리인)입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인생 전부, 목숨까지도...... 누구든지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인생 전부를 주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내 인생은 분명히 ‘주님의 것’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믿고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나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잘 사는 것은 나의 책임이고, 또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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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만 들으면 신자들 가운데 꽤 많은 사람이 당혹스러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협잡꾼’ 또는 ‘사기꾼’처럼 묘사된 집사의 모습을 주인이 칭찬하는 것으로 비유가 마무리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저자는 신자들에게 ‘협잡꾼’이 되라는 것일까요? 이 비유는 신앙 공동체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요?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뜻의 고사성어 ‘견지망월’(見指忘月)은 본질을 꿰뚫어 이해하지 못하고 부수적인 것에만 집착한다는 의미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를 듣는 우리도 ‘견지망월’의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에서 ‘협잡꾼’의 모습 그 자체를 신앙인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은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라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곧 세속적 이익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는 비유 속 집사의 모습 그 자체가 신앙인의 본보기로 제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자녀들이 그처럼 부정한 일조차 약삭빠르게 처리하는데, 하물며 빛의 자녀들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 실현에 훨씬 능숙해져야 한다는, 공동체를 향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천사 같은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죄인들의 공동체, 자신의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공동체, 성령께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 주시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는 복음 정신을 실천하는 데에 얼마나 능동적이며 적극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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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어떤 부자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집사를 해고하려 하자 그 집사가 묘수를 냅니다. 그가 적극적으로 결백을 호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낭비에 대한 소문은 얼마간 사실인가 봅니다.
그의 계획은 집사 자리에서 쫓겨났을 때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주인에게 빚진 이들을 불러 그들의 빚을 주인과 상의도 없이 감해 줍니다. 빚이 경감된 이들이 집사의 월권 사기 행각을 알고도 동조한 거라면 공범이 되겠고, 주인의 자비로 받아들여 감사했다면 주인을 위한 그들의 축복이 하늘에 올라갔겠지요.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루카 16,8)
주인은 제 재산에 손실을 입게 된 것도 모르고 오히려 집사를 칭찬합니다. 낭비에 손해까지 끼친 이를 칭찬하는 주인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럿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거짓과 사기가 미화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 주신 비유 속 집사는 이 세상 자녀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본받고 교훈 삼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영악하고 이악스럽게 영리할 뿐,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셈법과 계산, 처세술이 능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비유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마치 숨은그림찾기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로 주인의 모습에서입니다. 집사에게만 집착하면 찾기 어려운 사랑이지요.
처음 집사가 낭비한 재산은 아마도 그 집사 자신을 위해 쓰였겠지만, 해고 통보 뒤에는 타인을 위해 쓰여집니다. 물론 이 역시 집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니 순수한 동기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이 덕을 본 건 사실이지요.
주인은 제 재산의 손실보다 가난한 이들의 무게가 덜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비록 집사의 얕은 꾀에서 나온 처사였지만 그 혜택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갔기에 주인은 흡족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자녀와 빛의 자녀를 대비시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19-20)
오늘 집사는 시종일관 자신만을 위해 계획하고 움직입니다. 자신을 하느님 자리에 두고 우상처럼 섬기는 세상의 자녀답게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자신의 안위와 이익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좋게 돌리는 분은 주님이시니, 과연 한수 위에 계십니다.
빛의 자녀는 세상의 자녀들처럼 잇속에 영리하지는 못해도 지혜롭고 슬기롭습니다. 지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이기에 세속적 이치에 밝은 계산속으로는 범접할 수 없지요. 다만,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이 모든 걸 쓰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빛의 자녀들의 헌신 못지않게 세상 자녀들의 열매도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쓰고 계십니다.
세속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빛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고 싶은지,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어차피 우리는 그분의 도구로 쓰일 운명이니까요. 하늘의 시민, 빛의 자녀답게 주님의 충실한 집사로 그분의 집을 살피고 돌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목소리를 빌어 주님께서 벗님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의 화관인 여러분, ... 사랑하는 여러분!"(필리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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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16,8)
수도원에 살다가 세상으로 되돌아간 형제들의 어려움은 비록 수도원에 살았던 그 기간이 길었든 짧았든 간에, 그 시간과 관계없이 세상의 논리, 풍조를 따라가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하더군요. 그만큼 수도 생활을 맛본 사람들에게는 세상적인 처세술이나 대인관계를 닮고 적응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지금껏 자신이 지키며 살아왔던 삶의 원칙이나 가치를 버려야 하는 어려움과 함께 그리고 시쳇말로 그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 자신을 속여야 하고 부정직한 것을 보고도 눈을 감지 않고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고 토로하더군요. 물론 어떤 점에서는 사제였고 수사였다는 점이 취업이나 사업에 도움도 되겠지만, 반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기”(16,8) 때문일 겁니다.
상식적으로 오늘 복음을 읽었을 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집사의 어떤 처신이 주인에게서 칭찬받을만한 행동이었는지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비유는 어떤 부자가 고용한 집사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낭비한 것이 드러나자, 재산 장부를 정리하고 청산한 후 퇴출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집사의 자리에서 어느 정도 여유를 누리며 살아 온 그는 돌연히 닥친 퇴출을 앞두고 미래가 걱정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관리하던 부자의 재산 내력, 채무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묘안(?)을 생각해내고 일사천리로 일을 해치워 나갑니다. 그 집사가 생각해 낸 미래 대책이란 곧 퇴출 후에도 자기를 후하게 대접해 줄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재산이 아님에도 부자에게 빚을 진 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풀고 탕감해 줌으로써 훗날에 그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줄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도 정부의 관료들이 퇴임 이후 관련 기업의 임원으로 다시 취업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전관예우!) 그래서 집사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빚을 탕감해 주는 방법을 택했나 봅니다.(16,5~7) 이를 알게 된 주인은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일 처리하는 집사의 모습을 알아보고 그의 불의한 행동을 알면서도 그가 영리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을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비유의 가르침은, 우리 역시 우리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이용해서 미래에 닥칠 위험을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자신 앞에 닥친 위기 상황을 맞아 망연자실 넋을 놓고 기다리는 소극적인 처신이나 마음 자세보다 오히려 집사처럼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지혜롭게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순발력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성을 우리 역시 본받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집사는 자신이 지금껏 해 온 자리에서 배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절묘한 방안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집사는 주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비록 부정직한 방법을 택하긴 하였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법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도 역시 이 점, 곧 미래를 준비하는 영리함을 칭찬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 집사와 같이 부정직한 처신을 본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언제 닥칠지 모를 위기나 퇴출을 준비하며 살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그 미래를 위한 준비는 곧 주님께서 주신 세상 재물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이라고 봅니다. 복음의 교훈은 한 마디로 세상일에는 이렇듯 철저하게 약삭빠르게 준비하면서,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는 어찌하여 ‘머뭇거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껏 살아 온 삶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미래(=개인적인 죽음/심판)를 위한 준비에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여기서부터 착실히 준비하는 게 가장 영리하고 현명한 삶의 자세이나 처신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약삭빠른 영리함은 닮을지라도 부정직하고 불의한 점은 닮지 말자고요. “주님, 미래를 위한 준비는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함을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제 삶의 매일 매 순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가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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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수많은 나라를 전쟁으로 정복했고 여러 번의 공격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 뒤에 그가 한 것은 무엇일까요? 불로장생의 영약을 찾았습니다. 비슷한 영약이 있다는 희미한 소문만 들려도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문제는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처형당했으므로, 그 특사들은 소식을 끊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불로초를 찾지 못한 그가 선택한 것은 진시황릉입니다. 황제는 무려 70만 명을 동원해 시안에 도시 하나 크기의 무덤을 건설합니다. 무덤에서는 흙으로 만들어 구운 병사와 말 모형이 7천 점이나 발견되었습니다. 황제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호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죽지 않으려 했고, 또 죽음을 대비했던 그 역시 기원전 210년, 49세의 나이로 죽고 맙니다. 역설적인 것은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먹은 온갖 독성 물질 때문에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꾸준히 복용했던 것이 ‘수은’이라고 하지요. 이 수은에 장기간 노출되면 우울증, 의욕 상실, 졸음 등 정신장애를 동반하고,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상실 등으로 이어집니다. 진시황제가 말년에 보였던 모습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옳을까요? 아닙니다. 죽음 역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하지 않은 이유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을 잘 사는 것입니다.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갈 때, 죽음 이후의 미래도 의미 있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을 소홀히 하면, 죽음 이후의 미래는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재산을 낭비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에게 쫓겨나게 되자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몰래 깎아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가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합니다. 바로 현재를 늘 미래와 연결해서 생각하고 판단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을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이 될까요? 미래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만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미래의 하느님 나라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욕심 채우는 것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음 너머의 세상을 위해 지금을 잘 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영리하게 대처했다고 칭찬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하늘 나라의 가치와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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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더욱 더>
루카 16,1-8 (약은 집사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더욱 더>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까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가지려는 마음보다
더욱 더 간절한
나누려는 마음을
가시 돋친 말보다
더욱 더 부드러운
북돋우는 말을
잿빛 웃음보다
더욱 더 정감어린
새하얀 웃음을
어두운 눈빛보다
더욱 더 깨끗한
맑은 눈빛을
밀쳐내는 손짓보다
더욱 더 따뜻한
보듬는 손길을
앞서려는 발걸음보다
더욱 더 부지런한
함께 딛는 발걸음을
살려는 삶보다
더욱 더 뜨겁게
살리려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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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리한 선택>
앞날을 미리 준비한다는 것은 현명합니다.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배려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공하려면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온갖 정성을 쏟는 것보다 하늘의 영광을 헤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영생, 천상 행복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그가 정직하지 못해‘해고 통지’를 했습니다. 해고 통지를 받은 집사는, 고민 끝에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리라는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한편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의 혜택이 돌아갔으니 다행스럽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그 권력에 기대어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은 하늘 앞에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영리함을 발휘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녀는 세상의 것에만 영리하면 됩니다. 현세적인 이득이나,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 자녀 교육이나 재산의 축적과 같은 일을 위해서는 위장전입이나 탈법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니 말입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자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병역면제를 받은 것을 보면 참 약삭빠릅니다. 유전 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듯이 재물은 사람을 부리고 그래서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죽는 줄 모르고 죽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몇 년이나 갈까요? 하늘과는 멀어집니다.
세상일에도 온갖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 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 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고정되어 있습니다. 빛 속에 거니는 사람이 어둠을 전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님께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시선을 헛된 것에다 둘 수 없습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따라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주님 마음에 들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는 수동적인 삶이 아니라 제 삶을 일구는 능동의 삶입니다.
사실“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세속 일도 중요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일,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의 가치는 이 세상 안에서 실천해야 할 삶의 원리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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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 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 몫을 더 챙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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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떻게 하지?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진저,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하오나, 주님!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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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歸家)의 여정>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뻣노라.”(시편122,1)
오늘 화답송 후렴시편성구는 제가 10년전 2014년 산티아고 순례 여정시 가장 많이 바쳤던 기도문이였습니다. 800km 2000리! 산티아고 대성전에 이를수록 더욱더 힘차고 빠르게, 나는 듯 걸었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만추의 밤하늘의 별들이 참 맑고 밝게 빛납니다. 우리 모두 별처럼 깨어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여전히 계속되는 기도의 계절, 공부의 계절 11월 위령성월입니다.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묻게 됩니다. 허무로 끝나는 죽음의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중인 우리들입니다.
11월 위령성월,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하루하루 선물인생,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잘 추스르라는 옛 어른의 지혜로운 말씀도 새롭습니다.
“인간에게 쓸모없는 감정은 없다. 단지 다스리지 못하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다산>
“어진 이는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이는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논어>
참으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을 진지하게 맞이한다면, 어질고 지혜롭고 용감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읽은 수녀들에게 주신 교황님 말씀이 참 신선했습니다. 흡사 교황님 자신을 두고 하는 말씀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슬픈 성인은 또 하나의 슬픈 성인일 뿐이다. ‘거룩함은 언제나 기쁘다(Holiness is always joyfull)’. 마음으로부터 솟아나는 미소를 지녀라. 거짓이 아닌 진실하고 충만한 미소를.”
어떻게 하면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고 아름답게,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오늘 복음은 너무나 유명한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실직할 위기에 처한 불의한 집사의 나쁜 행실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미래를 대비한 민첩하고 슬기로운 대처방식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급기야 불의한 집사는 기름 백 항아리 빚진 이에게는 쉰으로, 밀 백섬 빚진 이에게는 여든으로 탕감해줌으로 미래를 대비합니다. 뜻밖에 부자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를 상징하는 너그러운 주인은 뜻밖에 불의한 집사의 행위를 묵인해 줍니다.
아마도 그는 속으로 스스로 알아서 살길을 찾아낸 불의한 집사가 고마웠을지도 모릅니다. 부자 주인에게 그만한 손실을 충분히 감수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새삼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부자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결론이 화두처럼 우리에게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세상 자녀들의 악한 행실이 아닌 그의 위기시 대처방식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세상 자녀들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민첩하고 슬기롭게 살라는 주님의 바램입니다. 어떻게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귀가의 여정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고맙게도 제1독서 필리비 서간의 바오로 사도가 그 답을 줍니다. 우선 속화된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생각없이, 영혼없이, 의식없이 육적 욕망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완전히 구제불능의 가치전도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다음 이어지는 말씀같이, 하늘의 시민답게, 가을 밤하늘의 별처럼 빛의 자녀답게, 슬기롭게, 아름답게, 기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새삼 지상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본향의 하늘나라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본향집을 향한 ‘귀가의 여정’중인 우리들이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정화, 성화시켜 주시어 우리의 비천한 몸도 서서히, 점차적으로 주님의 영광스런 몸으로 변모됨을 깨닫습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니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시편1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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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나는 십자가의 원수? 벗?>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바오로는 오늘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 언급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라! 십자가의 원수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원수가 있다면 십자가의 벗도 있나요? 십자가의 원수와 벗에 대해 생각하니 반성부터 됩니다.
저의 주보인 레오나르도 성인이 지금의 14처 십자가 길을 널리 보급한 분이기에 저는 수련 때부터 십자가 길에 대한 신심이 있었고 자주 십자가 길을 하였고, 적어도 한 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는 십자가의 길을 했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의 길을 거의 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예전의 저는 십자가의 벗이었고, 지금은 십자가의 원수인가요?
그런데 이런 지금의 제가 무척 부끄럽긴 해도 십자가의 원수는 아닙니다. 십자가를 원수로 제가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가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지 않으면 나는 십자가의 원수가 아닌 건가요? 사람 간에 관계를 예로 들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나는 그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그는 나를 원수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장난삼아 개구리에게 돌을 던질 때 나는 개구리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개구리는 나를 원수로 생각하지 않을까요?
같은 논리로 나는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지 않지만 나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원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 삶 그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도 이런 뜻에서 십자가의 원수, 그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또는 이 세상 즐거움이랄까 쾌락이랄까 이런 것들을 즐기는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아무튼 종합하면 나는 십자가를 원수로 여기지 않지만 실제로는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 또는 ‘그들’이라고 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마침 금요일이네요. 그리스도 십자가의 벗이 되겠다는 뜻으로 오늘은 제가 오랜만에 십자가 길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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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16,8ㄴ)
<영리한 대처>
오늘 복음(루카16,1-8)은 '약은 집사의 비유'입니다. 복음 중에서 오늘 복음이 인간의 지혜 안에서 볼 때, 가장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비유(比喩)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함'입니다.
따라서 비유에는 그 본질적인 뜻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문자적 의미로만 말씀을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약은 집사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줍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처신한 집사를 주인이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보면 오늘 복음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이라면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겠다고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약은 집사의 비유 안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은 '영리하게 대처하자.'는 것입니다. 곧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 세상 것에 영리하게 대처한 집사처럼, 우리도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영리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리한 대처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회개요, 나눔이고, 보다 더 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질은 잘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본질이 십자가 뒤에 숨겨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믿지 말고, 숨겨져 있는 본질을 믿으려고 애쓰는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갑시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필리3,18ㄴ-19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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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 8)
마음은 있어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변화가 필요한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몰락과
멸망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단절은 없습니다.
닫히면
다시
열리는 것이
우리들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만남에서
우리는
삶을
배웁니다.
가장 큰
삶의
아픔은
관계의
결핍입니다.
관계의
결핍으로
삶을 망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 안에서
길을 찾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까지도
당신께
내어놓기를
바라십니다.
이와 같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잡초처럼
더 영리한 것은
사람을 얻는
관계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든 것에서
배우고 익히며
성장합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 시간을
가꾸어 나가는
빛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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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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