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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향기나는 부자들!(경주 최부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작금의 인사말을 보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에서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말을 심심찮게 많이 듣는다.
아마 이 말 속에는 누구나 부자 되기를 갈망하는 말이 베어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부자를 잘 대접하고 존경하는 사회인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부자들은 대부분 정경유착이나 부동산 투기, 편법...... 등으로 돈을 취한 부도덕한 졸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 사회의 이중률(二重律)이고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그러면 부자가 대우받고 존경받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인가?
꼭 그렇치 만은 않은 집안이 있어 소개해 볼까한다.
바로 경주 최 부잣집이다.
경주의 최 부잣집은 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집안이라고 생각한다.
경주 최씨의 종가로 경주 교동에 있는 1700년경에 건립된 가옥이다.
경주최씨 교촌파 7대 최언경(1743~1804)이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에서 이곳으로이사와서 터를 잡아 정착해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내남면 이조리까지 합치면 약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자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부잣집의 부지는 약 2천여 평이고 후원이 약 1만 평이었으며 집은 99칸의 대저택이다.
이 집에 살았던 하인이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최부잣집이 겸손을 볼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최부잣집은 경주 향교 옆에 있는데 다른 저택들과는 달리 지붕 처마가 이외로 낮다.
바로 공자의 위폐를 모신 향교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하여 집터를 깍아 내려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 집을 낮춤으로서 유림들과의 마찰도 피해가는 지혜을 엿 볼 수 있다.
오늘날 서초동 법원 앞의 고도 제한과 유사하지 않은가?
최부잣집이 부를 형성하게되는 과정은 풍수지리학적으도 큰 의미를 갖는다.
경주최씨 시조 고운 최치원 선생의 17대 손인 정무공 최진립장군(1568-1636)의 부친 신보(1531~1577)가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살고 있는 참봉 황임종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어 황 참봉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대에서 큰 부자였던 처가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된 것이다.
이후 계실(후처)을 들였는데 강씨 집안 또한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후사없이 죽어 버렸다.
최진립은 그쪽 처가 재산까지 모조리 물려받았다.
최진립은 창졸간에 거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마련된 종자돈은 진립의 후손 2대 동량(용궁현감)-3대 국선(사옹원참봉)-4대 의기를 거치면서 만석꾼의 부를 이루게 되는데 후일 8대 기영(진사시)(1768-1825)이 주위의 형제와 사촌들의 해코지를 견디다 못하여 현 교동으로 이사를 와서 교촌파의 파조가 되었다.
그러면 최부잣집이 어떻게 하여 최 부잣집이 300년 부를 유지하며 주위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고, 존경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가정교육의 근간인 여섯 가지 수신(修身) 육연(六然)과 여섯 가지 행동지침격인 육훈(六訓)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육연’은 이 집안의 가정교육 근간(根幹)이자, 인품을 닦는 수신(修身) 철학이기도 하였다.
첫째는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낸다.
둘째는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한다.
셋째는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에는 맑게 지낸다.
넷째는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한다.
다섯째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에는 담담하게 행동한다.
여섯째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에는 태연하게 행동한다.
어떤 일이 실패했다고 해서 낙담하거나 절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상이 6가지 연(然)이다.
마지막 부자인 12대 최준(참봉)(1884-1970)을 비롯한 형제들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제일 먼저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붓으로 이 육연을 써서 할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최준의 이야기를 아는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매일 이렇게 육연을 쓰다가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몸에 베이고 또 행동으로도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가정교육인가?
또 하나는 집안의 행동지침 격인 육훈(六訓)이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그 부를 자손대대로 지속되기를 원한다.
최부자는 이 육훈을 통하여 집안을 다스렸다.
1. 과거(科擧)를 보되 진사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양반 자격 유지하기 위하여 학문수행에는 정진하되 부와 권력을 동시에 누릴려는 과욕은 삼가하라는 의미이다.
최 부잣집은 9대 진사를 지냈다.
진사는 초시 합격자의 신분이다.
이를테면 양반신분증의 획득인 셈이다.
그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집안의 철칙이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이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돈 있으면 권력도 잡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 집안은 돈만 잡고 권력은 포기했다.
벼슬이 높아질수록 감옥이 가깝다고 여겼던 탓이다.
벼슬이 높을수록 당쟁에 휘말릴 확률은 높아지고, 한번 휘말리면 집구석 절단 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벼슬의 끝, 그러니까 권력의 종착점이 어디인가를 꿰뚫어 본 데서 나온 통찰력의 산물이 ‘진사 이상 하지 말라’이다.
작금의 전직 대통령과 그의 자녀들과 형제들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 쉬운 답이 나온다.
2. 만석(萬石)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상한선으로 정한 만석을 초과할 경우에는 초과된 소작료를 돌려주고, 만석 이상의 부를 축적하지 않았다.
돈이란 것은 가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돈이 돈을 벌게 된다.
돈이 돈을 벌게 되면 거기에는 반드시 민초들의 애환과 희생이 뛰따르기 마련이다.
이 지경까지 오면 그 행위를 멈추기가 더욱 어렵다.
오늘날 재벌들이 이를 여실히 잘 증명해 주고 있다.
수 조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형제지간 재산 싸움은 서민들의 눈쌀을 찌프리게 하고
돈으로 서민들을 억압하는 꼴사나운 건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그러나 최부자는 만석에서 과감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 이상은 내 돈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즉 쌓여진 부를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식이 바로 소작료 할인이었다.
토지가 좁은 영남지방에서 만 석 이상의 소작료는 필연코 무리가 뒤따라 누군가의 원성을 살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소작료를 만석으로 고정하자 땅이 늘면 늘 수록 소작료는 빵이 불은 만큼 낮아졋다.
즉 최부잣집이 부유해지면 소작인의 곳간도 덩달아 불어나는 독특한 경제형태엿다.
이른바 요즘의 <상생의 경제>이고 WIN-WIN 게임아니던가?
그래서 주변 소작인들은 최부자가 땅을 더 사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또 다른 부자집들이 소작료를 수확량의 70% 정도 받았다면, 최 부자는 40% 선에서 멈췄다.
소작료가 저렴하니까 경주 일대의 소작인들이 앞다퉈 최부자 집 농사를 지으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팠지만 최 부자가 논을 사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쳤다.
최 부자가 논을 사면 나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 흉년(凶年)에는 땅을 들리지 말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자신의 부의 증식에 이용하지 말라.
오늘날 甲질을 미연에 방지하는 혜안을 볼 수 있다.
흉년이 들면 수천 명씩 굶어 죽는 시대. 흉년이야말로 없는 사람에게는 지옥이었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배부른 자가 배고픈 자의 절망과 공포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점에서 최부잣집은 다른 부잣집과 달랐다.
이처럼 최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 굶어죽지 않기 위하여 헐값으로 내놓은 전답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 부자 집은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이는 가진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이웃의 인심을 얻고 가문의 덕을 쌓았다.
얼마전 우리가 격은 뼈아픈 IMF가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또 없는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하여 물건을 구입할 시는 파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지 않았다.
보통 장이 파할 직전에는 떠리미라는 용어로 물건 값이 폭락하지 않던가?
오늘날 세일이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는 주부들과는 전혀 다른 개념아니던가?
그러나 최부자는 바보(?)같이 물건 값이 가장 비싼 기를 택하여 물건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물건 하나 구입하는 데에도 생산자의 맘을 헤아렸건 지혜가 묻어있었다.
4.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그 시절 지나는 과객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고 세상의 흐름을 알려주는 매신저였으며, 이들을 통한 정보습득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 지식정보경영이 숨겨져 있다.
최 부자 집에서 1년에 소비하는 쌀의 양은 대략 3000석(쌀1석: 80kg) 정도였다고 한다.
1000석은 식구들 양식으로 썼고, 1000석은 과객들의 식사대접에 사용했다.
최부자집 사랑채는 1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부자집이라고 소문나니까 과객들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과객들이 묵고 가는 사랑채에는 독특한 쌀뒤주가 하나 있었다.
두 손이 겨우 들어가도록 입구를 좁게 만든 뒤주였는데, 과객이면 누구든지 이 쌀 뒤주에 두 손을 넣어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한 뒤주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갈 때 소요되는 여행경비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입구를 좁게 한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양은 가져가지 말라는 암시였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과객들은 정보전달자 역을 톡톡히 했다.
후한 대접을 받았던 이들은 조선팔도에 최 부자집의 인심을 입에 거품을 물고 소문내고 다녔다.
오늘날의 이론을 보면 과객에게 후한 대접을 해 주고 광고료 없이 가문을 홍보했던 것이다.
‘적선지가(積善之家)’란 평판은 사회적 혼란기에도 이 집을 무사할 수 있게 만든 비결이었다.
동학 이후에 경상도 일대에는 말을 타고 다니면서 부잣집을 터는 활빈당이 유행했다.
다른 부자집들은 대부분 털렸지만 최 부자집 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 집의 평판을 활빈당도 잘 알고 있었고 흡모의 대상이였기 때문이다.
5. 주변 100리에는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흉년이 들면 사방백리(동:동해안, 서:영천, 남:울산, 북:포항)의 어려운 이웃에 베품으로써 그 모진 흉년을 이겨냈다.
1671년 삼남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최부자는 사옹원 참봉을 지낸 3대 최국선이다.
그는 과감히 곳간을 헐어 주위 사람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였다.
그의 행장(行狀 오늘날의 일기장과 유사함)에는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찌 집안 재물을 아껴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사방 100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6.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최부잣집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야 했는데 집안의 전통인 부지런함과 절약 정신을 가르쳤다.
조선시대 창고의 열쇠는 남자가 아니라 안방마님이 가지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 만큼 실제 집안 살림을 담당하는 여자들의 절약정신이 중요했다.
보릿고개 때는 집안 식구들도 쌀밥을 먹지 못하게 했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백동 숟가락의 태극무늬 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
7대 조모는 삼베 치마를 하도 오래 기워 입어서 옷이 두꺼워져서, 서말치 (3말의 물이 들어가는) 솥에 치마 하나만 넣어도 찰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기워서 물에 옷을 넣으면 옷이 불어나 솥단지가 꽉 찼다는 말이다.
이 집에 시집온 며느리들은 모두가 영남의 일류 양반집이었다.
본인들은 진사급이었지만, 만석군이다 보니 사돈이 된 집안들은 명문 집안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치마양반’이다.
로마 천년의 유지 비결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였다면, 신라 천년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경주 최 부자집의 유지 비결도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였음을 알 수 있다.
동·서양의 1000년 문명을 지탱한 노하우였던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 이런 부자들이 있는가?
만약 이런 부자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이 부자를 존경하지 않을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나는 단호히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위대한 가훈들은 아직도 후손들에게 지워지지 않고 잘 전해지고 있다.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종가에 있는 충의당과 충노비각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이 기거 하시던 충의당에는 매년 최진립장군과 충노들의 제사를 독특하게 지낸다.
“주인이 목숨을 버려 충신이 되는데 어찌 우리 종들이 충노(忠奴)가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항변을 하며 주인과 함께 목숨을 바친 종들을 위하여 종가에서는 반상의 계급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상민도 아닌 종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장군의 제사 상을 물린 뒤에 다시 충노들의 제사를 같이 지내고 있다고 한다.
지금 종가에서는 충노비 비각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고 해서 충의당과 충노비각 이라고 한다.
이처럼 최 부잣집의 가훈을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용(中庸)과 의(義)로움이다.
“치우치지 말고, 성급하지 말고, 욕심 내지 않는다.
어느 것이든 완벽한 한 가지는 없으며,
좌우에 치우침이 없이 의롭게 산다.”
이런 중용의 덕을 뼈에 심기 위한 듯,
마지막 최부자 12대 최준의 조부 10대 최만희의 호는 "대우(大愚: 크게 어리석음)"였으며,
11대 친부(親父) 최현식의 호는 둔차(鈍次: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함)였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역사의 뼈져린 경험에서 교훈을 얻게 된 최부잣집은 다른 양반과 달리 권위와 힘으로 이웃들을 장악했다면 최부잣집은 이웃들과 신뢰를 통해 부를 축척하고 유지하고 그것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면서 또 가문을 잘 유지하였다.
훌륭한 가훈으로 인하여 400전 전부터 최부잣집은 상생의 길을 통해 부를 유지하는 지혜를 가졌던 것이다.
이런 최부잣집에 최대 위기가 닥친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수 백년 이어온 최부잣집의 저력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다.
11대 부자인 최현식과 아들 12대 최준은 집 밖 출입을 끊고 임금님이 있는 한양 북쪽을 향해 매일 곡을 했다고 한다.
나라 잃은 국치의 한을 이기지 못한 최현식(1854-1928)은 집안 살림을 모두 아들 최준에게 넘기고 은거한다.
이 때 최준(1884-1970)의 나이는 20대이다.
망국의 한을 참기에는 혈기 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집안 살림에 몰두하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모르게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다.
벽산 안희제와 함께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축적된 부로 막대한 독립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비빌리에 송금했다.
최준의 손자인 최염의 말에 의하면 독립이 된 후 김구선생이 귀국하여 1946년 경교장에 기거하면서 최준을 “한 번 뵙고 쉽다”편지가 와서 손자 최염과 경교장으로 갔다.
“동지가 보내준 독립자금은 조국독립을 위해서 소중하게 썼습니다”하는 말과 함께 내어 놓은 임정의 자금 조달 인명 기록장을 보여주었는데
즉 김구가 안희제를 통하여 독립자금을 송금 받은 장부를 내어 놓았는데 최준이 확인하여 보니 그 많은 독립자금을 송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비나 경비 한 푼 지출되지 않고 고스란히 송금된 내용을 확인하고 안희제의 결백함에 김구도 놀라고 최준도 놀랐다고 한다.
물론 이 독립자금 제공으로 인하여 최준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최준의 동생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다.
수 많은 동지들과 동생들(특히 둘째동생 최완은 <대동청년단>을 거쳐 1920년<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해 재무위원과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다.
최준에게 접근하여 회유와 협박도 하면서 글을 배우고 쉽다고 드나들던 일본경찰은 진짜 속셈은 최완을 체포하기 위한 수작이였다.
즉 최준의 글씨체를 모방하기 위함이였다.
부친이 위급하다는 위조된 최준의 편지에 속아 귀국하던 최완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35세의 짧은 생애로 순국한다.)이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을 지켜본 최준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반드시 해방된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의 재산이 의미있게 쓸 방법을 고심한 한 결과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심한다.
대학 설립을 결심한 최준은 경북의 유력 인사들을 설득하고 도민들의 뜻을 모아 사립대학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즉 교육사업에 쓰는 게 만석꾼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선산과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는 집까지 모조리 학교사업에 희사한다.
그 결과 1947년 마침내 지금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이 설립된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혁명 이 후 ‘대학설치령’이 강화되면서 대구대학은 심각한 운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최준은 마지막으로 남은 전 재산을 대구대학 육성에 쏟아 부었지만 그 막대한 소요 자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당대 최고 부자인 이병철을 불렀다.
평소 최준을 존경하던 이병철은 몸은 마치 넘치처럼 엎드려서 최준에게 절을 하였다고 한다.
이병철에게 최부자는 이제 최부자의 경제력 한계를 솔직히 말하고, 대구대학을 더 이상 끌고 가기에는 재력이 없다라고 말하고 아무 조건없이 대구대학을 맡아라라고 부탁하니 이병철이 일언지하에 “예”하고 대답하기에 최준은 아무 댓가 없이 대구대학을 이병철에게 넘겨 주었다.
쉽게 말하면 이병철은 대구대학을 공짜로 얻은 셈이다.
오늘날 학교를 사고 파는 것과는 너무나 대비된다.
그 후 대구대학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곧 이병철이 손을 떼게 되고,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합병되더니 오늘날 영남대학교가 개교한다.
그리고 대학 운영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박정희 일가로 넘어간다.
독립투사 최준이 세운 학교가 최고 권력자 박정희에게 넘어간 사실에서 손자 최염의 말에 의하면 최준은
"나라가 더 발전하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일언하고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제1장 총칙-“교주 박정희 선생” ................????
최준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귀중한 도서 8000여권 마져도 모두 대구 대학에 기증한다.
그리고 그해 1990년 10월 마지막 최부자 최준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해방이 되었으니 일경의 감시도 없고, 전 재산을 희사했으니 도둑이 들 일도 없으니 항상 대문을 활짝 열어두어라”는 유언을 남기고....
문자 그대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이었다.
이 얼마나 위대한 행동이고 경륜있는 깊은 철학이었는가?!!!
지금 최부잣집 종손은 최준의 손자 최염씨!
자녀는 2남 1녀로 지금 차종손인 장남은 판사이다. (가훈에 진사 이상 하지 말라고 되어있는데 판사는 3급 이상의 고위직으로 가훈을 어긴게 됐다)
사법 고시를 10번 떨어지고 아슬아슬하게 11번째 합격을 했는데, 지금 종부이신 강희숙 여사의 꿈에 시조부님이 나타나
“이제는 진사 이상도 된다”고 하시었는데 그 이후 시험에 붙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잣집!!
3대 부자를 넘기기가 힘들다는 재계 통설을 뒤로하고 12대 근 400년(1대 30년 *12대=360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만석꾼을 지냈다는 사실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주변 사람들로부터 확실한 검증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깊은 철학과 경륜이 없었다면 어떻게 300년을 유지할 수도 없었거니와 불가능한 이야기다.
최 부잣집은 어떤가. 자그마치 12대 300년 동안 만석꾼을 유지했던 집안이다.
300년 장수 기록은 세계적인 기록이다.
중세 이태리에서 르네상스를 일으켰던 메디치 집안의 300년 기록에 비견될 수 있는 집이 최 부잣집이다.
이러하였기에 아직도 경주 최부잣집 그 후손들의 행동도 올바르지만 경주 지방에서 타 가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많은 존경과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울러 부를 유지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고도의 인격수양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의 대한항공 사건과 너무나 판이하다.
이런 덕과 선을 아낌없이 베푼 집안이었으니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의 시기나 질투없이 영남의 어른 집안으로 줄곧 존경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다.
아! 어디 유렵에만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아니던가?
최부잣집!
이제 최부잣집 후손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은 없으나 아직도 육연과 육훈을 잘 실천한 나머지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경주 지방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은 것으로 듣고 있다.
왜냐하면 경주지방 모든 사람들의 조상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은연중 최부잣집의 크고 작은 음덕을 입었기 때문에 아직도 그들의 후손들을 잘 대접해 주고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 여기 저기 마실다니며 주어 챙기고 하느라고 시간이...... 초저녁에 시작한 것이 이제 끝나네요.ㅎ ㅎ ㅎ
졸필 읽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꾸벅!!!!
첫댓글 좋은자료 글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졸필 잘 보았다니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좋은 글이라고 칭찬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빈부 격차가 심한편인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서
부유층의 나눔의 정신이 필요 하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한 참 좋은 내용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