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거구제냐, 중대선거구제냐” 저마다 동상이몽
중대선거구제 둘러싼 쟁점
《선거제도는 정치 지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거대 양당이 대부분의 의석을 양분하는 정치 현실에서,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면 3당과 4당에게도 당선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신생 정당,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 가능성이 높아지면 극단적 대립으로 치닫는 정치 문화가 바뀌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거대 정당 중진들을 위한 제도로 전락할 것”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 등 반론도 적지 않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둘러싼 쟁점과 도입 가능성을 살펴본다.》
● 민주화의 산물 소선거구제
현행 소선거구제는 198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그해 3월 ‘국회의원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시작됐다. 지금은 소선거구제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지만 당시엔 반대로 중대선거구제가 비판의 대상이었다. 유신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 때까지 9∼12대 총선에서 실시된 중대선거구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당의 안정적인 의석 확보를 위해 도입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함께 ‘87년 체제’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축은 13대 총선부터 부활한 소선거구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30년 넘게 유지되면서 소선거구제도 폐해가 쌓였다. 승자독식으로 유권자의 표심이 국회 의석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대표성 문제가 제기됐고, 지역감정과 진영갈등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많다. 실제 2020년 21대 총선에 참여한 2874만여 명의 유권자 10명 중 4명(43.7%·1256만7432표)이 던진 표는 ‘사표’가 됐다. 국민의힘은 영남지역에서 55.9%를 득표하고도 영남 65석 가운데 56석(86.2%)을 차지했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에서 68.5% 득표율로 호남 28석 가운데 27석(96.4%)을 쓸어 담았다.
거대 양당 후보가 아니면 당선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치 환경이 됐다. ‘공천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각 당에선 공천을 좌우하는 몇몇 실세나 극단적 지지층의 눈치만 살피는 기류가 확산됐다. 일각에선 그 근원적 요인으로 소선거구제를 지목하고 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두 거대 정당이 차지하는 비율이 이번 국회에선 95%까지 갔다. 정당이 양극화되면서 사회도 양극화됐다”며 “중대선거구제에도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양당제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서라면 중대선거구제라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 중대선거구제가 모범답안?
2012년 19대 총선에서 전북 전주을에 출마한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 정운천 후보는 35.8%를 얻고 민주통합당(민주당의 전신) 이상직 후보(47.0%)에게 밀려 낙선했다. 20대 총선에서 국회 입성에 성공했지만, 지역주의에 부담을 느낀 그는 2020년 21대 총선에선 비례대표로 출마했다. 가정이지만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 현재 3개의 소선거구로 나눠져 있는 전주를 3인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했다면 민주당의 ‘텃밭’에서도 보수정당 의원이 다시 배출됐을 수 있다. 이처럼 중대선거구제는 △사표 방지 △지역주의 타파 △다양성 보장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중대선거구제가 선거제도의 ‘모범답안’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민주주의가 안착한 다수의 국가가 소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다. 1928년 중의원 선거부터 중대선거구제를 실시했던 일본도 1996년 소선거구제로 전환했다. 거대 정당의 복수 공천으로 같은 당 후보자 사이에 경쟁이 과열되며 파벌정치, 계파정치, 정치권 부정부패 등의 원인 중 하나로 중대선거구제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또 현행 지역구 2∼5개를 하나로 합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선거구 면적이 넓어지고, 유권자 수가 많아진다. 벽보, 공보물, 유세차량 등 더 많은 선거비용이 필요하다. 유권자들 입장에선 후보자 수가 크게 늘면서 후보들의 면면을 상세히 파악하기 어려워진다. 인지도가 높은 유명 정치인, 조직을 동원하고 유지할 역량이 있는 중진 또는 거대 양당 후보에게 더 유리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중대선거구제로 치르는 기초의원 선거 결과를 봐도 지역 구도 해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실시된 6·1지방선거에서는 기초의원 지역구 1030개 가운데 30개 선거구에서 3∼5인 중대선거구제를 시범 실시했다. 기존 2∼4인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가 다양성과 정치적 대표성 확대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30개 구에서 당선된 109명 가운데 국민의힘과 민주당 소속 당선자가 105명으로 96.3%를 차지했다. 소수 정당 소속은 4명에 불과했다. 복수 공천된 거대 양당 후보들을 향한 몰표 때문이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중대선거구제는 양당 독식 체제를 타파하기는커녕 양당의 동반 부패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며 “오히려 의회로 진입한 소수의 극단적 정치세력이 연정을 구실로 큰 정당을 좌지우지하면서 정국을 혼미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다. 또 “지금 한국 정치의 당면 과제는 제도 개혁보다 인적 쇄신”이라고 말했다.
● 與野 “선거제 개혁” 원론적 동의만
열쇠는 국회가 쥐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 초 “선거가 너무 치열해져 진영이 양극화되고 갈등이 깊어졌다”며 그 대안으로 중대선거구제를 언급했지만 여당의 반응조차 미온적이다.
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은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절감하고 있지만 중대선거구제의 문제점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며 부정적인 뜻을 내비쳤다. 여당 내에선 “중대선거구제 논의는 지금 시작하되 도입은 23대 총선부터 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민주당은 윤 대통령이 촉발시킨 중대선거구제 논의에 대해 신중론을 이어가고 있다. 이재명 대표는 “제3의 선택이 가능한 정치 시스템이 바람직하고 그 방식이 중대선거구제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22대 총선은 내년 4월 10일 실시된다. 현행법상 선거 1년 전인 4월 10일까지 선거구 획정 등 게임의 룰을 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국민의힘과 민주당, 양당 모두 현역 의원들의 이해관계와 선거제 개편에 따른 득실 계산이 엇갈리면서 논의는 “정치 양극화 해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에 동의한다”는 원론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선거제도를 크게 흔들 경우 자신의 선거구가 통합되거나 사라지는 현역 의원들이 대거 나오게 된다. 결국 핵심은 현 제도의 수혜자인 현역 의원들의 동의 여부가 될 수밖에 없다. 다들 동상이몽이기 때문이다. 현행 선거구제 개편 논의가 위성정당 논란을 빚었던 대목을 수정하는 수준에서 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양당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 개편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소선거구제냐 중대선거구제냐의 찬반 논란만 벌이는 것은 2차원적이다. 인구가 밀집한 수도권과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지방의 대표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행정구역과의 일치 문제는 어떻게 조정할지, 갈수록 심해지는 세대 및 계층 갈등 문제를 어떻게 정치적으로 수렴할지 등 보다 입체적이고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선거법에 규정된 선거구획정위원회처럼 선거제도 개편 작업을 의원들이 아닌 외부 위원회에 위임하자는 의견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의원들이 선거법 개정안을 직접 발의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가 제안한 법안에 대해 의원들은 찬반 표결권만 행사하게 하자는 것. 분명한 건 그 정도로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신이 크다는 게 선거제도 개편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사실이다.
길진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