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유년 시절의 가정 형편은 도시 빈민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한 뒤로 꽤 오랫동안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했지요. 몇천원 짜리 월간 학습지를 구입하거나 한 학기에 한번 씩 사야 하는 전과를 구입하는 것들도 꽤 버거웠던 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그냥 웃으면서 추억하지만 어린 제게는 좀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었지요.
서울 신림동의 열 다섯 평 남짓한 반지하방이 저희 가족 네 식구의 삶터였습니다. 투닥투닥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햇볕을 만나지 못해 눅눅해진 벽지들을 늘 마주하며 보냈습니다. ‘예전처럼 1층으로 다시 이사가면 안되냐’고 아버지께 물었지만 그 당시 별 다른 대답은 듣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사를 안가는 게 아니고 못가는 것이었다는 것을 아주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21일 수도권에 비가 많이 왔습니다. 특히 서울 지역 강서구 화곡동과 양천구 신월동의 지하방에서 사는 분들이 침수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1만 2518동이 침수됐는데 이중 9000동 가량이 반지하라고 하네요. 이 때문에 서울시가 이번에 내어놓은 대책 중에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침수지역에서 반지하 주거시설의 신규 공급을 억제하겠다는 것인데요. 서울시는 침수지역의 반지하 주택 건축허가 제한을 추진하고 장기적으로 이들 지역에 반지하 주택 공급을 불허할 방침이라고 24일 밝혔습니다.
언뜻 든 생각은 ‘반지하 주거시설 없어지면 좋겠다’였습니다. 사실 반지하 주거시설은 인간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옥탑방보다 더 비인간적인 공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햇볕이 잘 안들고 침수 가능성이 크다는 걸 떠나서, 인간이 지하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문화인류학적으로 비인간적이라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언제가 되었든 정책적으로 도시빈민들에게 인간적인 주거공간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늘 생각해왔었습니다. 서울시의 이번 결정도 솔깃하게 느껴졌던 게 이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반지하 주거시설을 없앤다면 거기 밖에 살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어디 가서 살지?’
저희 아버지께서 어린 시절의 저에게 쉽게 이사가자고 말을 꺼내지 못하셨던 것처럼 반지하 주거시설에 사는 분들도 그곳에 원해서 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아마도 지하 주거시설은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막다른 공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책도 없이 사라진다면?
이번 침수 피해의 원인은 반지하 주거시설 자체가 아니라 배수시설의 미비라고 봐야 할 겁니다. 실제 1992년 반지하 주택에 강제배수시설 설치가 의무화되기 전 건축된 24만가구 가량의 반지하 주택에는 배수시설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반지하 주거시설을 없앨 게 아니라 배수시설을 제대로 갖추는 게 급선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누리꾼들은 이미 서울시의 이번 정책이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트위터로 실제 반지하 주거시설에 사는 분들의 견해를 물어보았습니다.
“졸속 행정입니다. 임대주택으로 전환한다지만 그럼 또 전·월세 대란은 뻔합니다.”(@Wa_Dental)
“그곳에 살고 싶어 사는 사람들 없습니다. 지상으로 올라가려면 당연히 월세든 전세든 그 값은 오를 것인데 정부에서 지원해줄 건가요?”(@cocolook)
“문제가 생기면 근본 문제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부터 없애겠다는 얄팍한 생각”(@iamjeongeun)
물론, 서울시가 이런 서민들의 사정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서울시가 내놓은 정책에도 이런 고민의 흔적이 일부 있습니다. 서울시는 반지하 주택이 저소득층의 주거공간인 것을 감안해 대체 주택 공급 정책을 펴겠다고 함께 밝혔습니다. 예를 들어 다세대 주택 등을 매입해 저소득층 임대주택으로 활용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별로 구체적이지 못해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혜택을 받을 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지하 주거시설을 억제하겠다는 정책은 선명하게 다가오지만 반지하에 살던 서민들이 이주한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규모로 얼마만큼의 실질적인 지원을 해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누리꾼들의 지적처럼 서울시가 문제가 되는 장소를 그냥 없애버리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을 지 걱정스럽습니다. 누리꾼들은 “반지하방 침수 되면 반지하방 없애고, 지하철 물새면 지하철도 없애고, 남는 게 없겠다”고 비판하더군요.
제 생각에, 문제의 원인은 서울시의 예산이 지금까지 엉뚱한 데에 쓰여왔다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발표한 ‘수방시설능력향상 4개년 계획’을 살펴본 <한겨레> 보도를 보면, 서울시는 2010년까지 4645억원을 들여 빗물펌프장 52곳의 배수처리 능력을 시간당 75mm에서 95mm로 끌어올리겠다고 했는데 정작 빗물펌프장 완성된 곳은 19개에 불과하고 그나마 예산도 1000억원 이상 줄었더군요.
간단히 말하면, 배수시설 증강하겠다고 해놓고 안한 겁니다. 태풍 루사 때보다 적은 강수량으로도 침수를 피하지 못한 것을 두고 서울시는 “천재지변”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번에도 인재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반지하 주거시설을 장기적으로 없애겠다는 그 정책 자체를 저는 반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정책의 철학적 고민이 ‘인간적 주거시설의 확장’과 같은 곳에서 출발한 게 아니라 여론의 따가운 비판을 무마하려고 수해대책처럼 내놓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수해의 원인이 무엇인 지 대안은 무엇인 지 근본적인 고민이 부족해보여 아쉽습니다.
수해가 있었던 게 아직 일주일도 안되었습니다. 급하게 먹는 밥일 수록 체한다느 말이 있지요. 여론의 뭇매를 이겨내려고 후다닥 아무 대책이나 내놓지 말고, 정말 진정성 있는 대책을 내놓고 끝까지 그 약속을 지키는 모습을 서울시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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