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에 큰아들 결혼식을 올렸으나 사돈은 8월에야 청했다.
상견례를 청주에서 하면서 다음엔 우리가 서울에서 모시겠다고 약속을 했다.
서울과 청주가 가깝지 않던 차에 사돈 내외가 서울 딸네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참에 초대에 응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더니 쾌히 응낙해주셨다.
사돈이 어디 보통 손님인가.
가장 어렵고도 정중하게 대접해야 하는 손님이라 장소 선택부터 마음이 쓰였다.
편안하면서도 격식을 갖춘 곳을 찾다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전통 한옥 궁중요리 전문점이라는 '필경재'가 떠올랐다.
한창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를 이 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사돈간의 생활수준이나 문화의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큰 두 집안 사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로 팬들을 사로잡은 이 드라마를 찍었다고 해서 더 유명해진 곳이다.
필경재는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드님 광평대군의 후손이 경영하는 전통한식 궁중요리 전문음식점이다. 이만한 곳이면 사돈 초대에는 안성맞춤이고 더 이상 좋은 곳은 없다는 생각에 결정을 했다.
'필경재(必敬齋)', 어른을 마땅히 공경해야한다는 좋은 뜻의 옥호도 장소 선택에 한몫했다.
필경재 옥호는 성종임금이 직접 내리신 것이라고 한다.
전통한옥 100간 집이었지만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 50간이 남아 있다.
마당에는 잘생긴 적송과 조경이 잘된 뜰이 있어 격조 높은 전통한옥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7년 문화공보부가 전통건조물 1호로 지정했다.
아쉬운 점은 담 바깥쪽에 바짝 붙여 올린 고층 아파트가 고즈넉한 분위기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약속시간보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주에서 출발하신 사돈은 네비게이션에도 위치 표시가 없어 수서역 근처에서 몇 바퀴를 돌며 필경재를 찾아오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며 약속시각보다 늦게 도착하셨다.
결혼식 후로 처음 만나뵙는 사돈 가족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안내된 방은 임금님의 교지와 병풍, 고서와 초상화로 잘 꾸며진 기품이 가득한 분위기였다.
걸음걸이도 조심조심, 말소리도 크게하면 안 될 것 같은 엄숙함이 느껴졌다.
8인 식탁으로 차려진 상차림은 상상을 넘어 감동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옛문양으로 수놓은 수저받침이며 쟁반과 접시까지도 예사롭지 않았다.
궁중음식으로 나오는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상차림도 훌륭했고, 우리가 왕족인양 착각할 정도로 시중 드는 사람의 옷차림에서 법도에 이르기까지 품위있고 정중했다.
여러 가지 상차림 중에 가장 간단한 '미정식'으로 예약했는데 줄줄이 나오는 음식은 결코 간단하지가 않았다.
죽, 계절냉채, 보쌈김치와 찬류, 칠절판, 탕평채, 소고기 잡채, 세 가지 전, 죽순, 버섯 월과채, 생채, 묵은지와 편육, 한우 떡갈비 구이, 간장 게장, 생선구이, 진지와 탕, 과일과 전통 차.
이런 화려하고도 기품있는 음식 사진을 일일이 찍어 내블로그에 올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어려운 자리라 애써 참고 있었다.
아름답고 화사한 고명으로 장식한 음식에는 차마 수저를 대기가 아까워 주저하기도 했다.
사돈과 마주 앉은 자리라 음식맛을 제대로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서로 권하고 덕담을 하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고 좋았다.
술잔을 들어 두 집안의 좋은 인연으로 맺어진 신혼가정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하기도 했다.
사돈께서도 아주 만족해 하셔서 필경재로의 초대가 성공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식사 후에는 정원에 마련된 열린자리에서 후식을 들고, 광평대군의 능을 돌아보았다.
광평대군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려 20세에 요절한 비운의 왕자다.
후원 약간 경사진 높은 곳에는 능과 묘소가 여러 기 있었다.
봉분의 크기가 일반 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았다.
묘소를 지키는 인물상인 문인석과 비석이 조화를 이루며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고 잘 관리된 잔디가 풋풋한 풀향기를 풍겼다.
안동김씨 양반가의 후손인 사돈은 이 능과 묘소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다.
안동김씨가 세도가로 위상을 떨칠 때 임금님이 하사하신 탄금대를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그것이 현재 사돈 형제분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다고 한다.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의 격전지로 현재 충청도 지방의 관광 명소가 되어있다.
상견례 자리에서 집안 소개를 하면서 맨 먼저 이 탄금대 이야기로 우리의 기를 꺾어 주눅들게 했던 사돈이다.
우리 집안에는 이런 역사적인 인물이나 배경은 없지만 든든한 우리 아들이 대신 우리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유서 깊은 곳에 초대해 주심에 감사한다며, 먼 길을 온 피로가 확 풀린다는 사돈 어른의 말씀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인께서는 부족한 며느리를 딸처럼 사랑해 주시니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는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
귀한 딸 고이 길러 보내 주셨는데 우리가 더 고맙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가족으로 사랑할 테니 염려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우리는 아들 형제만 두었지만 딸 가진 부모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이런 덕담으로 화가애애하고 분위기 좋은 시간을 가진 사돈초대는 대성공이었다.
큰 숙제 하나 끝내서 홀가분하고, 그 숙제를 도와준 필경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2008.8.17
첫댓글 와! 그 드라마속의 한정식집이었군요.
드라마 보면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선배님글에서 만나게 되네요.
자식 나누는 사돈 사이가 얼마나 귀한 인연이겠습니까? 전 아직 그런 인연을 못 만났지만, 여러 얘기를 듣다보면 간접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멋스럽고 귀품있는 음식 사진을 못찍어 섭섭했겠네요. 좋은 글솜씨에 사진까지 더해지면, 더 좋았을텐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김없이 댓글을 올려줘 고마워요.
사돈은 귀한 인연임에 틀림없어요.
그래서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