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훈련’ 찬반 팽팽? 반년새 확 달라진 여론조사 결과의 비밀
문재인 대통령이 의장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작년 11월과 지난 6월 한미 연합 훈련에 대해 조사했다. 작년 11월엔 연합 훈련을 ‘예정대로 해야 한다’(66.5%)가 ‘축소하거나 연기해야 한다’(28.7%)를 압도했다. 그런데 지난 6월엔 연합 훈련 잠정 중단에 대해 ‘찬성’(46.6%)과 ‘반대’(47.3%)가 비슷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 의원들이 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문재인 정부 평화협상을 위한 8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연기를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불과 반년 만에 여론이 확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 설문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2021년 상반기는 미국 신행정부 출범과 북한의 제8차 당대회 등이 있을 예정이다. 이를 감안할 때 한미 군사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이번엔 “문재인 대통령은 코로나로 대규모 한미 군사훈련 실시에 어려움이 있음을 밝혔다.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한미 군사훈련을 잠정 중단하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코로나로 훈련이 어렵다’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해’ 등 문구를 넣어서 ‘훈련 중단’ 쪽으로 응답을 유도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언급하며 친문 지지층도 결집했다. 누가 봐도 여론 조작에 가깝다. 이 조사는 민주평통 정세현 수석 부의장이 6·15 남북 공동선언 기념 좌담회에서 “한미 연합 훈련을 중단한다는 걸 확실하게 발표해야 한다”고 말한 직후 실시됐다. 정 부의장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조사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북한 대외용 주간지 통일신보는 민주평통 여론조사에 고무된 듯 “남조선 각 계층 속에서 남조선 미국 합동 군사 연습을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울려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열린민주당 등 범여 의원 74명은 한미 연합 훈련 연기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냈다. 여당 대선 후보 상당수도 연기론에 가세했다. 문 대통령도 군 지휘부에 ‘신중한 협의’를 주문하며 훈련 연기 또는 축소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작년 말처럼 이번에도 ‘한미 연합 훈련을 예정대로 해야 한다’는 여론이 국민 대다수인 70%가량에 달했다면 여권 정치인들의 태도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안보와 관련한 어설픈 여론조사에 편승해서 한미 동맹과 방위력이 약해진다면 가장 큰 피해자는 국민이다.
최근 여당은 “고의적·악의적 가짜 뉴스를 내면 언론사를 망하게 해야 한다”며 언론에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씌우고 표현의 자유를 옥죄는 언론중재법을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여론조사가 선거 과정과 정책 결정에 영향이 큰 우리나라에서는 엉터리 여론조사야말로 민심을 오도(誤導)하는 매우 심각한 가짜 뉴스다. 헌법 기관인 민주평통은 희한한 여론조사를 유포하고 여권 정치인들은 여기에 장단을 맞추고 있다. 가짜 뉴스에 대해서도 ‘내로남불’이다. 정부와 여당은 악마의 속삭임 같은 엉터리 여론조사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방어훈련도 적과 타협… 北만 쳐다본 당정청
北에 휘둘린 2주일
한미 연합훈련 이틀째인 11일 군 내부에선 “이렇게 부실한 훈련으론 유사시 대처가 어렵다”는 우려가 쏟아졌다. 합참에 파견된 증원 병력이 필수 인력의 12분의 1(30여 명) 수준이고, 한미연합사의 지시를 받아 병력을 운용하는 사단급 이하 부대의 훈련 참가도 최소화된 탓이다. 훈련을 중단하라는 북한의 내정 간섭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사실상 묵인하는 가운데 정부·여당이 앞다퉈 훈련 연기 여론을 조성하고, 군조차 ‘안보’보다 ‘정치’ 논리에 휘둘린 결과라는 지적이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주권국이 자국 방어 훈련을 적(敵)과 타협할 수 있다는 발상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했다. 여권과 정부는 희망적 사고에 기대 무리한 요구를 원칙 없이 수용하다 북한이 본색을 드러내자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한미 연합훈련 사전연습이 시작된 1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고공정찰기 U-2S가 착륙하고 있다. 한미는 이날부터 오는 13일까지 한반도의 전시상황을 가정한 본훈련의 사전연습 격인 위기관리참모훈련(CMST)을 진행한다. 2021.8.10/연합뉴스
전문가들은 “북한이 지난달 27일 남북 통신선 복원에 합의했을 때 정부가 북한의 저의를 면밀히 따졌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이 강력 반발할 게 명백한 한미연합훈련을 목전에 두고 대남 유화책을 쓴 의도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사이 친서가 오간 사실을 공개하며 “평화의 출발점”이라고 홍보했다. 여당은 “가뭄 깊은 대지에 소나기처럼 시원한 소식” “한반도 관계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했다.
하지만 김여정 부부장은 닷새 뒤 담화에서 ‘통신선 복원 의미를 확대 해석하지 말라’며 찬물을 끼얹었다. 이어 “군사연습은 북남 관계의 앞길을 흐리게 하는 재미없는 전주곡”이라며 훈련 중단을 본격 압박했다.
정부·여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훈련 연기론과 연기 신중론이 맞섰다. 이런 가운데 박지원 국정원장이 정보위 소집을 자청해 훈련 연기 필요성을 강조했고, 범여권 의원 74명은 이에 동조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결국 군 당국이 훈련 참가 요원을 대폭 줄이며 ‘유명무실 훈련’을 예고했는데도 김여정은 연합훈련이 시작된 날 “연습 규모가 어떠하든 침략”이라며 주한미군 철수까지 거론했다. 그리고 예정된 수순처럼 통신선을 다시 끊었다. 보름여 만에 급반전된 상황에 대해 청와대는 “예단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침묵했고, 민주당은 11일 북의 강경 담화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지도부 회의에서) 관련 논의는 없었다”고 했다.
北에 휘둘리며 내부서 무너지는 안보
전직 고위 외교관은 “통신선 복원과 한미 훈련 반발, 통신선 재단절로 이어지는 북한의 움직임은 사전에 설계됐을 것”이라며 “북은 남남(南南) 갈등 유발, 한미 동맹 훼손, 후속 도발 명분 축적 등 원하는 과실은 모두 따갔다”고 했다. 고위 탈북자 A씨는 “대화에 급급해할수록 북한은 한국을 얕잡아 보고 맘대로 흔들려 한다”며 “당장 얼굴을 붉히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북도 한국을 존중한다”고 했다.
북한의 이번 행보는 작년 6월 대북 전단을 트집 잡아 3주 동안 파상적인 대남 공세를 퍼부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 북은 우리 정부가 전단 금지법 제정 의사를 밝히고 전단을 살포한 탈북 단체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는데도 대남 비난 담화를 쏟아내며 통신선 단절,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등을 강행했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북한이 작심하고 대남 공세를 퍼붓는 것은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차원”이라며 “작년 6월엔 경제난과 주민들의 사상 이완에 대처해야 했고 지금은 군부의 불만과 사기 저하가 심각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 등 외부 세력 반발에 안보 주권(主權)을 포기한 사례는 이번 훈련 축소가 처음이 아니다. 경북 성주 사드 기지는 2017년 배치 이후 장병 막사 등 생활 필수 시설 공사가 4년간 이뤄지지 않았다. 사드 배치에 반발했던 중국을 의식해 방치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이어졌다. 지난 3월 방한한 오스틴 미 국방장관이 “동맹으로서 용납 못 할 일”이라고 강력 항의하자 비로소 공사가 재개됐다. 2018년엔 9·19 남북군사합의에 따라 접경 지역 훈련이 중단되자 주한미군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작년 에이브럼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최근 폐쇄된 훈련장 때문에 준비 태세가 지장을 받고 있다”며 “한미 합동 실사격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美국무부 “한미훈련은 전적으로 방어 목적”
싱하이밍 주한 중국 대사는 “남북관계 긍정적, 기쁘다”
북한이 연일 한미 연합 훈련을 비난하며 무력 도발을 시사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동맹과의 연합 군사훈련은 전적으로 방어적(purely defensive in nature)”이라고 했다. ‘연합 훈련은 침략 행위’라는 북의 주장을 일축한 것이다.
한미 연합훈련 사전연습이 시작된 10일 오후 경기도 평택시 주한미공군 오산기지에서 고공정찰기 U-2S가 착륙하고 있다. 2021.8.10 /연합뉴스
네드 프라이스 국무부 대변인은 10일(현지 시각)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의 연합 훈련 비난 담화와 관련,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어떤 적대적인 의도도 숨기고 있지 않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이런 입장을 밝혔고, 이는 매우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철통같은 한미 동맹에 따라 여전히 한국의 안보와 우리의 연합 방위 태세를 위해 헌신한다”며 “우리는 남북 대화 및 관여를 지지하고 이를 향해 한국 파트너들과 계속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 대사는 11일 서울 종로구에서 열린 한중수교 29주년 기념 포럼 축사에서 “최근 한반도 남북 관계에 긍정적인 변화가 보이고 있어 매우 기쁘다”고 했다. 최근 며칠간의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발언이다.
싱 대사는 이어 “한국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실현을 추진해 나가겠다”며 “쌍궤병행(雙軌竝行) 구상과 ‘단계적·동시적 접근’ 원칙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비핵화와 미·북 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쌍궤병행’은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 훈련을 함께 중단하자는 ‘쌍중단’(雙中斷)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중국의 기본 입장이다.
싱 대사는 포럼 직후 ‘북한이 한미 훈련에 반발하는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서로 같은 민족인데 서로 좋도록 노력했으면 좋겠다”며 “남북 관계는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