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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青岩 朴泰俊, 1927년 ~ 2011년)
목차
1. 개요
2. 생애
3. 어록
4. 상훈 내역
5. 저서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여담
9. 가계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기업인 및 정치인이다. 제32대 국무총리이자 국회의원 11, 13, 14, 15대 의원이다.
포스코그룹, 포스코교육재단, 포항공과대학교의 설립자이다. 포항 스틸러스의 전신인 포항제철 실업축구단도 창립하였다.
2. 생애
2.1. 귀국 및 군인 시절
1927년 10월 24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아버지 박봉관과 어머니 김소순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일본으로 떠나서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여 2학년 과정만 마치고 귀국하였다.
청암(靑巖) 박태준(朴泰俊) 포항제철 회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국가 건설자(state-maker)입니다.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초중고교를 다녔고 와세다대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중퇴·귀국했습니다. - 조선일보
1947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 1948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생도 시절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을 담당하던 박정희 당시 포병 대위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탄도학 강의를 진행하다가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던 박태준을 눈여겨본다. 박태준이 소위로 임관한 후에도 인연을 유지하면서 박정희와 박태준은 서로를 믿으며 의지한다. 이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임관 후에는 6.25 전쟁에 참전하며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휴전 이후에는 제5보병사단 작전참모,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제25보병사단 참모장 및 연대장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한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경제인으로 활약했을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다소 묘한 부분. 동시에 경제 분야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어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교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뒤늦게 신설(11기 이후) 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였다.
1963년 소장으로 전역하고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의 사장에 취임하여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전환한다. 2년 후인 1965년에 진행한 한일수교에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서 얻어낸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포항제철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 조정래가 작성한 박태준 전기에 따르면, 군수품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만연하던 시절에 복무한 군인임에도 박태준은 군수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부사관 이상의 간부라면 자택에 군용 모포를 하나 이상은 갖고 있던 시절임에도 박태준은 그러지 않았다. 박태준이 유일하게 가져온 군수품은 반창고인데 이유는 오래도록 농사를 짓느라 갈라진 어머니 김소순 여사의 손에 감아드리려는 목적이었다. 김소순 여사가 갈라진 자신의 손을 보고는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라고 혼잣말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혼잣말을 들은 박태준이 다음 날에 반창고를 가져와서 감아드린 것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에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박태준의 형편을 둘러보고는 아내인 장옥자에게 "군 장교가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가?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 게 없던데.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 좀 하시오."라고 질타할 정도로 이때만 해도 청백리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납비리를 저지르던 군수업자를 추방하고 정직한 군수업자와 다시 계약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톱밥 고춧가루 사건. 박태준이 제25보병사단의 연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병사식당을 순찰하는데, 병사들이 김치를 아예 먹으려고 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보급 장교를 호출한다. 박태준은 양동이에 물을 부은 다음 보급장교에게 창고에서 고춧가루를 가져와 물에 풀으라고 지시했고, 빨간색 색소가 빠지면서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를 보고 분노한 박태준은 톱밥이 섞인 뻘건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부어버리고는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라고 일갈하였다. 이후 상부에 군납비리를 보고하지만 적극적인 조치는커녕 군수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좋게좋게 마무리하라는 지시만 왔다. 문제의 고춧가루, 아니 톱밥을 납품한 군수업자도 나중에 찾아와 돈봉투를 내밀며 일을 무마하려고 하자 분노가 폭발한 박태준은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며 군수업자를 쫓아냈다. 믿음직한 납품업자를 찾은 박태준은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시오."고 지시했고 그제야 먹을 만한 김치를 부대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군납비리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서술한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또한 박태준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여서 결혼한 후에도 당번병을 두지 않았다. 다른 장교들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당번병을 늘리는데 박태준은 반대로 한 것이다. 당시 존재한 야간통행금지를 지키느라 병에 걸린 맏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개인적인 사유로 부대의 차를 사용할 수는 없고 통행금지가 적용되는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려고 한 것인데 결국 아이는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박태준이 귀가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사망한다. 맏아이를 보내고 시간이 흘러서 둘째도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이 찾아오는데 톱밥 고춧가루 사건 이후로 박태준과 계약한 군수업자가 찾아와서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박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워서 병원으로 이동한다.
2.2. 포항제철 창립
그의 진면목(眞面目)은 포항제철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드러났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고, 이듬해 11월 미국·영국·독일 등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인 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발족했습니다. KISA는 그러나 1969년 상반기 “한국에서 종합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다”며 ‘최종(最終) 불가(不可)’ 결론을 내리고 붕괴했습니다. 세계은행(IBRD)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 제철소 건립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가 됐습니다. 여기서 청암은 ‘농림수산업 지원 용도’로 정해져 있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일부 전용(轉用)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이 제안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大藏相·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1969년 8월 1주일 동안 세 차례 만났습니다. 청암은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찾아가 샅샅이 뒤져 일본 사례를 분석한 뒤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일본 안보에 큰 도움된다”는 논리를 설파하며 설득해 냈습니다. 전 세계가 하나같이 “한국에서 제철 산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난국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청암의 순정하고 강렬한 애국심이 일본 지도층을 감복시킨 것입니다. 그의 완벽한 일본어와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과 심리를 꿰뚫는 실력도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나는 박태준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감정적인 반일(反日) 데모가 끊이지 않던 1960~70년대,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3단계 일본 대응을 주창했습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해 그 타당성을 증명해 냈습니다. 1978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나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하자, 요시히로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 일화는 박태준이 한국을 넘어 최소한 ‘아시아적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 조선일보
포항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한국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제철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와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고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박태준의 리더십으로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강 불모지에서 1968년 16억원의 차관으로 포스코를 이끌어 국가 철강산업의 기틀을 다진 거물 기업가 중 하나는 분명하다.
2.3. 삼성 이병철과의 인연
이병철 회장과 박태준 명예회장은 17년 나이 차이에도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호도 각각 호암과 청암이다. 청암은 이병철 회장이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선물한 아호다. 선배는 사업보국, 후배는 제철보국에 매진하며, 조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경제인의 길에 들어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업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깊은 교분을 나눴다. 호암은 청암에게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곤 했다. - 매일경제
일본 철강회사들이 '부메랑 현상'을 이유로 포스코를 견제했을 땐 호암이 방패막이 역할을 했으며 1981년 11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부메랑 현상'을 경고할 만큼 박태준은 기술 이전을 꺼리는 사이토 신일본제철 사장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때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박태준을 와세다대학 후배라면서 불러서 신일본제철 사장과의 골프 기회를 주선해 제공했다. 이병철 회장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과 만든 작품이었고 얼마 후 일본 철강업계는 광양제철소에 간접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한국 철강의 역사를 바꾼 골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삼성중공업을 박태준에게 맡기려고 까지 했었다.
2.4. 정치인 시절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비서실장
제11대(전국구), 13대(전국구), 14대(전국구)[8], 15대(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민주자유당 최고위원
자유민주연합 총재
국무총리(국민의 정부)
박정희 정부 시절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최대한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 시기 포항제철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정치자금(사실상 불법뇌물)을 단 한푼도 안내면서도 무사했는데,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여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은 "최소한 포항제철의 울타리는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내켜하지 않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거쳐 민정당 창당 멤버로 11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이때도 포항제철 경영에 집중하면서 정치 활동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1985년 12대 총선에선 아예 빠지게 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13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돌아왔고, 당 대표로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해 민정당의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1990년 삼당합당 이후에는 민정계를 대표하는 최고위원으로서 자연스레 김영삼과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상당수 민정계 인사들이 박태준 주변에 모여들었고, 박태준도 나름 대권 꿈을 꾸었던 것 같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중도 포기하였다.
김영삼이 민자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선거대책위원장 제안을 거절한 채 1992년 10월 민자당 최고위원 및 포항제철 회장직을 모두 사퇴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2월 17일에는 국회의원직 사퇴서까지 제출했다. 김영삼을 도울 수 없다는 명확한 의사를 표시한 것.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국세청이 포항제철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하자, 박태준은 1993년 3월 출국하여 해외를 떠돌다가 1994년 10월 모친상을 당하면서 귀국하였다. 그리고 포항제철 계열사와 협력업체에서 약 3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도중인 1995년 특별사면되면서 공소기각 결정을 받았다.
그 후로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야인으로 있다가 1996년 11월 귀국했다. 1997년 4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허화평의 의원직 상실로 인해 같은 해 7월 24일 실시된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 포항시 북구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면서 국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당 총재로 추대되어 김대중과 김종필 간의 연합(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끌어낸다.
△ 박태준과 김종필 그리고 김대중
1998년 이후 공동여당인 자유민주연합의 총재로서 국민의 정부를 뒷받침했고, 2000년 1월 13일 김종필의 후임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인 2000년 5월 18일부로 사임했다.
2.5. 말년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2004년 중앙일보에 90회에 걸쳐 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했다.
2011년 들어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입원했고, 12월 13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에 안장되었다.
3. 어록
-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 한국 전쟁이 휴전될 쯤에 새긴 좌우명
- 사심없이 헌신하라, 무한 경쟁시대일수록 필요하다.
- 자원은 유한하지만, 창의는 무한하다.
-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에 빠져 죽자 제철보국(製鐵保國)을 우리 인생의 신조로 삼자.
- 신뢰를 얻으면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다.
- 항상 애국심을 갖고 일해달라.
- 창업 이래 지금까지 제철보국(製鐵保國)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철은 산업의 쌀입니다. 쌀이 생명과 성장의 근원이듯, 철은 모든 산업의 기초소재입니다. 따라서 양질의 철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여 국부를 증대시키고 국민 생활을 윤택하게 하며 복지사회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것이 곧 제철보국 입니다. 우리는 국민과 인류에게 복락(福樂)을 줄 수 있는 제철산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 국가의 부름을 받고 영일만에 모였을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핵심 기간산업인 철강산업을 일으켜 보자는 비장한 각오로 모든 조소와 부정적 논리를 뒤로하고 건설에 박차를 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 손으로 국가경제를 일으켜 보려는 철저한 공인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고용인이 아닙니다. 포스코인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공인이 된 것입니다.
- 국가로부터 일관제철 사업의 소임을 부여받은 우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희생정신을 발휘하여 국민의 여망에 보답해야 합니다. 개발도상국이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 운영하는 것은 결코 어디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개인의 희생에 바탕을 둔 헌신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회사는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하여 건설한 민족기업입니다. 우리의 모든 정열을 바쳐 신명을 다하겠다는 굳은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 자체가 큰 인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속해있는 국가와 민족에게 의무감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 입니다. 제철산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과 절박한 시대적 요청 앞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맡게 됐을 때, 나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큰 인연이요 회피할 수 없는 일생의 사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온갖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직원들에게 민족의 진운(進運)을 바꿀 대역사에 동참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자고 강조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자고 독려했습니다.
4. 상훈 내역
화랑무공훈장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오스트리아 금성공로대훈장
페루 대공로훈장
브라질 십자대훈장
독일 십자공로훈장
영국금속학회 베세머금상
브라질 남십자성훈장(브라질)
페루 대십자훈장
오스트리아 은성공로대훈장
제2회 운경상(운경재단) - 국회의장이자 학생 독립운동가 운경 이재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장학재단.
일본 훈일등욱일대수장
5. 저서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2004)
6.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1980 – 1981 정계 입문
민주정의당 1981 – 1990 창당
민주자유당 1990 – 1992 합당
무소속 1992 – 1997 탈당, 정계 은퇴, 정계 복귀
자유민주연합 1997 – 2000 입당
무소속 2000 – 2011 탈당, 정계 은퇴, 작고
7.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정의당 5,776,624 (35.64%) 당선 (17번) 초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정의당 6,670,494 (33.96%) 당선 (6번) 재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7,923,718 (38.49%) 당선 (2번) 3선
1997년7월 재보궐선거(국회의원) 경북 포항 북 무소속 47,884 (47.49%) 당선 (1위) 4선
8. 여담
생전 정리정돈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어질러둔 것을 보고 "저게 공사 자재냐"고 소장에게 물어봤고, 소장은 버리는 자재라며 멀쩡한 자재를 모두 버리고 새 자재를 깔끔하게 정돈해뒀다고 한다.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조인트를 잘 깠다고 한다. 다만 이 조인트를 까인 사람이 결국 자회사 사장까지 간 거 보면 크게 뒤끝은 없었던 듯하다.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이 붙는 학교의 주인인 포스코교육재단 창립이사장이다. 전신은 1976년에 설립된 학교법인 제철학원으로, 포항공과대학교도 이 법인 산하 학교였으나 1995년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되었다. 평소 "제철소에서 고된 일을 하는 직원의 자녀 중에 나라를 구할 큰 인물이 나올지 어떻게 아냐"며 직원들의 자녀 교육을 매우 중시했다. 포항제철고등학교, 광양제철고등학교 등에도 자주 찾아왔는데, 학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들은 초,중,고교 뿐 아니라 유치원들에도 아직도 많이 벽에 걸려있다. 학교 선생님들에 의하면, 부실공사로 잘못 설계돼 한여름에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창문을 보고 당장 뜯어 고치게 하고 책임자를 찾아내 처벌했다는 등의 여러 전설들이 두서 없이 전해져 온다. 그리고 광양의 경우 학교를 방문한 날 저녁에는 주택단지 공원에서 산책하는 박태준 부부와 인사하는 직원 가족들도 많았다고 한다.
상기했듯 박정희와 친분이 있다보니 박정희의 장남인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하였는데, 박지만 결혼식도 박태준 부부 내외가 함 들어가던 날의 음식 준비를 손수 담당하기도 했다. 만일 박태준이 없었다면 박지만은 지금도 마약에 찌들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박지만이 현재 회장으로 있는 "EG"의 전신인 삼양산업을 박지만이 인수하는 데 주선한 장본인도 박태준이었다.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당시 초대 총장인 김호길 박사가 '지금은 포항제철 부설 포항공대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 부설 포항제철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며 '학교 조직, 개설학과, 교수 수준, 교수 대 학생의 비율은 자기가 모두 다 하겠다'라는 요구를 했다. 원래 이러한 요구는 사학법에 규정된 재단 이사장의 권한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는데, 박 회장은 오히려 '초대 총장은 창업자와 같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잡아야 한다'며 기분 좋게 웃었다고 한다.
2001년 7월에 당시 74세였던 박태준은 미국에서 폐 밑의 물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에 걸린 시간은 6시간 30분, 물혹 무게는 3.2㎏이나 됐다. 물혹을 해부한 의료진의 말이다. “혹 속에 이처럼 많은 규사가 들어 있는 경우는 처음 봤다.” 박 명예회장의 부인 장옥자 여사의 설명이다. “포항제철 초창기에, 특히 늦가을부터 봄까지 매일같이 불어댄 모래바람 때문이었을 거다.”
KBS 1TV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강철왕"을 기획했다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보류되었다. 결국 KBS에서는 편성을 포기했으며, 이후 몇 년이 지나 2014년 종합편성채널인 TV조선에서 불꽃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작품명이 바뀌어 방영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포항시 남구의 청암로, 포항공대의 박태준학술정보관 등 포항에는 그를 기리는 지명들이 은근히 많다.
포항공과대학교 부설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가 있다.
굽시니스트는 자신의 만화에서 박태준의 캐릭터로 아이언맨을 밀고 있다. 역대 총리 사진에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박태준을 그린다든가 자신의 정적 YS를 까기 위해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날라온다든가.
임랑해수욕장 입구에 생가가 있으며, 현재 기념관으로 리모델링되었다.
8.1. 스포츠 매니아
박태준은 열혈 축구 마니아로 유명했다. 포항제철 이전부터 축빠 성향이 있었는지, 대한중석(現 대구텍) 사장 시절에 축구단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때 멤버들은 포항제철 축구단으로 그대로 흡수된다. 그리고 1973년에 포항제철 실업축구단(포항 스틸러스 전신)을 창단했다.
덕분에 국내 최초의 축구전용구장으로 1990년 지어진 포항스틸야드 건설에도 관여하고 유스 시스템 구축에도 도움을 주는 등 이런저런 공헌을 해서 훗날 K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참고로 포항스틸야드가 지어진 이유가 다소 즉흥적인데, 당시 한국이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본선에 연속 진출하면서 월드컵 진출 통산 횟수가 3회를 넘긴 최초의 아시아 국가가 되자 한 이탈리아 언론에서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나라가 월드컵에 나온다."라며 한국 축구를 조롱하는 어그로를 시전했고, 이에 축빠였던 박태준이 열받아 축구전용구장 건설을 제안했다고 한다. 참고로 후술되어 있듯 이후 축구전용구장을 한개 더 짓는데, 마찬가지로 포스코와 관계된 광양축구전용구장.
전용구장을 시공한 업체는 당시 축구장 건축에 대한 아무런 경험과 노하우도 없었던 포스코이앤씨였다. 경험과 노하우는 없었지만 포철 축구단 직원들이 해외 유수의 축구장을 둘러보며 벤치마킹한 것들을 오롯이 담아내면서 무사히 전용구장을 지을 수 있었다. 박태준 본인도 전용구장 그라운드에 내려가서 잔디 사이사이에 자라난 잡초를 스스로 뽑아내기도 했을 정도로 전용구장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원래 전용구장은 포항시내에 지으려 했지만 당시 중앙정부가 전용구장 건립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시내에 마땅한 부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그래서 포항제철소 뒷동산을 밀어버리고 지었다. 이후 지속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도 현대적이고 미려한 전용구장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포스코 부지 내에 건설된 경기장이다 보니 위치는 좋진 못해서 상업시설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접근성이 약간 떨어지는 것이 흠이지만 스틸야드 앞에 시내버스가 다녀서 접근성은 엄청 나쁘지도 않다.
이런 이유로 포항 서포터즈들의 걸개에도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포항 구단측에서는 창단 40주년이 되는 2013년에 스틸야드 E석 스탠드를 청암존이라고 명명하며 박태준 회장을 기렸다. 청암(青岩)은 박태준 회장의 호다.
두 번째 전용구장은 광양에 건설했는데, 이 경기장은 애초부터 구장 확장을 염두에 두고 설계, 건설했다. '언젠가 광양시가 커지면 구장도 확장하겠다'라는 비전을 갖고 지은 것이다. 처음 광양축구전용구장을 건설하게 된 계기는 프로축구단 전용이 아니라 광양제철소 직원 복지차원에서 건설한 것이다. 포항 스틸야드처럼 광양제철소 공단 안에 위치해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접근성은 스틸야드 보다 더 안 좋아졌다.(...)
축구 매니아이기도 했지만 야구선수 장효조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 예로 실업야구팀인 포항제철 야구단에 장효조를 영입하려고 했을 때, 장효조가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달라."고 하자, 박태준은 강남 아파트도 모자라서 보너스까지 얹어줬다고 한다.
8.2. 긍정적인 일면
퇴임 당시 포스코 주식이 1주도 없었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는 박태준을 "수조원의 순이익을 내는 회사를 키우고 조용히 물러난 진정한 철강왕이었다."고 평가했다.
포항제철소 공사 시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핏값이다. 제철소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라고 설파했다. 실제로 공장 착공부터 완공 시기까지 박태준 사장 이하 전 직원이 집에 거의 들어가지 않고 포항에 상주하며 일을 진행할 만큼 열의를 보였다. 열정페이나 혹사 논란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 박태준 사장 스스로 공사판에서 같이 굴렀기 때문. 공사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민가를 비롯한 많은 건물을 철거할 때 반발이 심하자 직접 뛰어다니며 설득하고, 가장 난관인 예수성심시녀회(가톨릭 수녀원)도 직접 찾아가 결국 철거 협조를 받아낸다. 그때 수녀들이 "이 흙강아지 같은 분이 사장님이냐"며 놀랐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뛰어다녔다.
열정페이를 강요하는 일부 기업의 안티테제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인재를 유치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이 윤택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욕을 먹으면서도 직원들이 거주할 아파트와 학교, 병원 등 직원들의 복지를 공장 착공 전 우선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집은 임대형식도 아닌 직원 소유로 넘겼다. 포항 및 광양 사업장의 직원 주거시설이 건립 시기를 감안해도 상당히 혁신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당시 주변에서 그렇게 회사 운영하면 망한다고 질타가 쏟아졌지만 "사원 복지 잘 해서 망한 회사는 없다."며 일축했다. 심지어는 소련의 대학총장급 지식인이 "우리가 꿈꾸는 모습을 포항제철에서 실현하고 있다."며 극찬을 한 적도 있을 만큼, 박태준 사장의 직원 복지는 호평을 받았다.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 당시, "그런 신문도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5억 원을 기부했고, 포항제철 기업 광고를 꾸준히 실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문재인 변호사, 리영희 교수 등과 더불어 한겨레신문 창간의 주역 중 한 사람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한겨레신문과 반대쪽 이념의 정당에서 정치 인생을 살았고 젊은 시절에는 박정희의 측근 출신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한 파격적인 행보다. 2011년 12월 한겨레에서는 박태준 회장의 부음기사를 실으면서 이례적으로 "별세" 소식 및 고인의 생전 업적을 상세히 소개하기도 하였다. 물론 5.16 군사정변 세력과 가까웠다는 점은 비판했으나, 한겨레가 기업인을 이 정도로 다룬 것만 해도 한겨레의 평소 논조와는 매우 다른, 융숭한 대접이다. 생전에도 한겨레는 박태준 회장의 동정을 자주 소개했을 정도로 군사정권 군인출신답지 않게 한겨레와 원만한 관계를 보였다. 심지어 박태준 5주기 평전 소개 기사까지 쓸 정도로 박태준 사후에도 한겨레가 박태준을 챙기고 있다.
1977년에 크레인 기사가 야간근무 도중 졸음 때문에 쇳물을 잘못 부어서 제강공장의 각종 배선이 완전히 망가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박태준은 해당 기사에겐 징계를 내리지 않고, 오히려 중간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은 잠도 안자나? 야간 근무라면 출근하기 전에 충분히 수면을 취했을 텐데, 그럼에도 사고가 났다면 집에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 아닌가? 당신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가?'라고 혼냈다고 한다.
부실공사 현장을 발견하곤 짓던 공장을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와 폭파시킨 뒤 다시 짓게 했다. 사실 계획안과 30cm 정도 차이였는데 대충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고. 조정래 작가의 전기에서는 콘크리트가 울퉁불퉁한 모양새였고 부하직원이 "그 부분만 뜯어내고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잔소리 마라, 땜질이 대형사고를 부르는거 모르나? 당장 폭파 시켜!"라며 폭발시켰다고 한다. 포항제철소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본기업 도멘(東棉)의 지점 소장인 모모세 타다시(百瀬 格)가 "폭발 충격 때문에 기초 부분이 잘못될 수도 있다"라고 항의하자, '그 부분은 군(해병대) 공병대에게 의뢰해서 해결했으니 걱정마시오.'라고 해명했다. 그래서 70%나 진척된 공사가 죄다 폭발해 사라졌다. 또한 잘못 조여진 볼트 하나하나 하얀 분필로 표시해가며 "다시 꼼꼼하게 볼트를 조이도록!"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 표시된 볼트는 모두 400개였다. 또다른 일화로 아직 한창 공장을 짓는 중에 기초 공사가 잘못되어 콘크리트 반죽을 붓자 쇠 기둥이 휘어지는걸 보고 간부급을 불러 너는 나라를 말아먹는 놈이라고 질타했다.
- 이렇게 회장이 직접 깐깐, 꼼꼼하게 점검을 하는 분위기였기에 당시, 국내 건설업계에서는 포항제철 공사 또는 미군(美軍) 공사를 맡아 일한다고 하면, 실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고.
비슷하게 포항공과대학교를 지을 때도 내진 설계 기준도 없을 당시 강진에도 끄떡 없는 1000년 갈 학교를 만들라고 지시하여서 원리 원칙에 충실하게 공사를 진행하였다. 덕분에 2017년 포항 지진 때도 포항공대는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재조명되기도 했다. 포스텍은 지진 피해가 심각한 포항 북구가 아닌 남구에 위치해 있기에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공사 시점이 2017년으로부터 무려 31년 전인 1986년인 점을 감안하면, 그 당시에 철저하게 안전 기준에 따라 공사를 진행했다는 점은 어찌보면 당연한건데도 미담이 되기도 한다. 몇년 후 기본도 지키지 않아 삼풍백화점을 무너지게 해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준 회장과 비교하면 더 대조적이다.
광양제철소 건설 당시 잠수복을 입고 비서와 함께 광양 앞바다에 입수해 직접 줄자를 들고 치수를 쟀다. 바다를 메워서 공정을 진행하는 만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걸 염두에 두고 회장이 앞장섰던 것.
포스코의 초대회장인 만큼, 포항제철소 건설 당시 수많은 청탁과 압력을 받았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써주면 안되겠냐"고 했고, 이 말을 들은 박태준 회장은 그대로 방을 나와 포항제철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지나쳐서 당시 박정희 주변에서 떡고물을 받아먹던 측근들에게 밉보인 덕에 중앙정보부에선 허구한날 박태준의 집을 수색하고 꼬투리를 잡으려 하자, 박태준은 "이렇게는 못 해먹겠다"고 박정희를 찾아가서 "포항제철 건설에서 손을 떼겠다"고 말했다. 이에 박정희는 비서에게 종이 한 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주는 걸로 화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군 시절 국방부 인사과에 있을 때 정치판의 더러움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10] 정치에는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3선을 위한 개헌을 시도할 당시, 이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서류에 사인을 하라고 했을 때도 "난 정치에는 개입 안해." 라고 딱 잘라 버렸는데, 보고를 들은 박정희도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 일이나 잘 하게 냅둬." 하고 놔뒀다고. 참고로 그 서명은 중앙정보부장(Flying 돈까스 김형욱)이 진행한 일이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위상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박태준을 지켜보았던 김재규는 그 뒤로 박태준을 달리 보았다고 한다.
포항제철 창립 당시 세계은행의 보고서에서 '한국은 철강 생산을 하면 투자금을 다 날린다'고 나오는 바람에 원조를 받지 못했다. 결국 박태준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해서 포항에 제철소를 짓고 포스코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다. 1986년 박태준은 런던에서 당시 보고서를 작성했던 존 자페와 만나 그 때 똑같이 보고서를 쓰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자페가 한 말이 걸작. "나는 그 때로 돌아가면 똑같이 쓸 거다. 철강 수요가 없는 나라가 백만톤짜리 제철소를 짓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내 실수는 박태준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신이 상식을 초월하는(beyond common sense) 일을 하는 바람에 내 보고서가 엉망이 된 것."
중국의 개방/개혁 초기인 1978년 8월, 덩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포항 제철소 같은 제철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자,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은 "공장이야 지을 수 있지만 중국에는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어서 그런 제철소는 못 짓는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덩샤오핑은 껄껄 웃었지만 내심 속이 쓰렸을 것이다. 그해 말 일본 도쿄에서 박태준을 만난 이나야마 회장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사장, 중국에 납치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나중에 중국의 초청으로 방중한 후 포항제철 임원들에게 "광산을 최대한 확보해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중국이 경제개발 착수 전이라, 직원들이 충고를 소극적으로 이행했는데,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아프리카, 호주, 동남아시아 등지의 자원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후회했다는 설도 있다.
1992년 포항제철 회장직 사퇴 발표 후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 직원들이 회장 사퇴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는 국내 기업 역사상 전무한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아직까진 포스코 역사에서 본사 정직원들이 일으킨 유일한 시위다. 단순히 작은 시위가 아니라 포항, 광양시 주민, 포스코 임직원들과 주부, 지역 의사들, 학교 선생님들까지 뛰쳐나갔다는 증언들도 있다. 실제 포항에서 박태준의 위상은 울산광역시에서 정주영 회장의 그것에 비견될만했다. 물론 전미가 울었다 수준은 아니고, 포스코 내부에도 엄연히 박태준 반대 세력은 있었기에 당시 포항, 광양에선 이들이 정치권과 결탁해 박태준을 밀어내고 포스코를 먹으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찌됐든 그렇게 회장직을 내려놓은 박태준은 "이젠 국회에서 포항제철을 지키겠다"는 말로 다독였고 시위는 해산됐다고 한다.
9. 가계
박태준은 장옥자와 1남 4녀를 두었다.
부친 박봉관 (? ~ 1981) / 모친 김소순 (1906 ~ 1994)
박봉관의 1남 박태준 (1927 ~ 2011) / 배우자 장옥자 (1930 ~ )
맏아이 (요절)
1녀 박진아 (1957 ~ ) / 夫 윤영각 삼정KPMG 회장
2녀 박유아 (1961 ~ ) / 前夫 고승덕 (1957 ~ ) : 장녀 고희경 (1987 ~ ), 장남 (1991 ~ )
3녀 박근아 / 夫 김형수
1남 박성빈 (1966 ~ ) 스파크 대표 / 妻 정지윤 (1976 ~ )
4녀 박경아 (1967 ~ ) / 前夫 전재용 (1964 ~ ) / 夫 김병주 (1963 ~ ) MBK파트너스 회장 : 장남, 차남 김재민 (2001 ~ )
박태준의 장남은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사위이며, 4명의 사위들 역시 그 면모가 화려하다. 맏사위는 국내 3대 대형 회계법인 중 하나인 삼정KPMG의 윤영각 회장이고, 둘째딸은 고승덕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하였다. 셋째딸은 부산 지역 향토기업인 동일고무벨트 창업자 김도근의 차남이자 김진재의 동생인 김형수와 결혼하였다. 막내딸은 전두환의 차남 전재용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한 뒤 MBK파트너스 김병주 회장과 재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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