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다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르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초록 거미의 사랑>(2006)-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 표현 : '몰랐다'와 '알았다'를 반복함으로써 화자의 내적 시련을 통한 성숙의
과정을 드러냄. 역설적 표현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빈 의자 → 화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대의 인고의 심정이 함축되어 있음
* 빛 → 삶과 사랑의 희망
*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 두 사람의 만남과 애정의 표현
* 목덜미를 핥고 있는 → 진정한 사랑의 표현
*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 원망의 표현
*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 화자는 깊이 절망하는 때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온다고 말함(역설적 표현)
*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 관념(희망)의
구체적 형상화
◆ 화자 : 화자는 내적 시련을 통해 성숙의 변환 과정을 거치며, 깊이 절망할 때에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온다고 말함.
◆ 주제 : 사랑과 삶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
[시상의 흐름(짜임)]
◆ 1연(1~9행) : 자신을 기다리던, 사랑했던 사람의 인고의 심정을 느낌.
◆ 1연(10~19행) : 진정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
◆ 1연(20~23행) : 희망은 절망의 희망임을 깨달음
◆ 2연 : '너'에 대한 진실한 사랑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진 후, 후회와 절망 속에서 그 사랑의 애절함을 느끼며,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들로부터 의미를 발견한다. 이 시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은 삶의 진실함에 대한 깨달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제18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으로 평론가의 평설을 들어보면,
"이 시는 얼마 전에 사별한 시인의 남편에게 전하는 추모의 시로 고백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공백을 애닯아 한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하나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깨달음은, 뺨이 빨간 사과의 성숙 뒤에는 '바람' 같은 자연의 힘, 또는 한 송이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도록 보살피는, '꽃' 같은 생성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꽃 속에 피는 꽃'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써 명명하였다. 그 깨달음은 시인에게 '의자'의 공백으로 아리게, 따갑게 소용돌이치는 '너'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시집 <초록 거미의 사랑>에서 시인은 남편을 'L.J.N'으로 호칭했다. 그 호칭으로 불린 인물은 아내 강은교와 <70년대> 동이을 결성하여 시작의 길을 나섰던 임정남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아내와 같은 길에 섰었던 만큼, 아내의 시에 자주 쓴소리를 쏟아놓기도 했었다. 그 점은 남편 - 아내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도 극히 경계해야 할 태도이다. 대학 동기이기도 한 그들은 같은 문학, 시인의 길을 걸었던 동지였으면서 연인이었고 동반자였다. 그들은 결혼 이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 겪어야 했고, 이른바 이상주의자였던 남편의 고초를 함께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시인의 애정 곡선을 보면서 <초록 거미의 사랑>은 시인 강은교가 망부에게 보내는 추모시 몇 편을 담아낸, 곡진한 사랑을 그려낸 시집이다.
시 '너를 사랑한다'는 아마도 강은교의 시작 생애가 빚어낸 가장 큰 성과물의 하나로 평가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상찬의 뜻을 표하는 것은 그 시가 시인의 남편을 잃은 특수한 경우를 애닯게 그려낸 시이면서도, 또한 모든 사람, 목숨을 가진 모든 생물,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깊이 있게 그려낸 것으로도 부각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시 '너를 사랑한다'는 시인 개인이 평생의 반려를 잃은, 특수한 아픔을 흐느낀 격조 놓은 연가, 애가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또한 그 시는, 모든 인간과 자연이 이룩한 성취에는 그 성취를 이루도록 보살핀 어떤 도움의 힘이 존재한다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토로한 증도가(證道歌)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권오만)
[작가소개]
강은교[姜恩喬] (Kang Unkyo) 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45.
소속 : 동아대학교(명예교수)
학력 :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데뷔 : 1968년 사상계 '순례자의 잠' 등단
수상 : 2015년 제7회 구상문학상 본상
2015년 제18회 한국가톨릭문학상 시부문
경력 :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작품 : 도서 129건
<요약>
강은교의 시 세계는 허무의식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시에서 점차 민중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에서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로 전개되었다.
1945년 12월 13일 함남 홍원 출생. 서울에서 성장하면서 경기여중‧고와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됨으로써 시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김형영(金炯榮)‧윤상규(尹常奎)‧임정남(林正男)‧정희성(鄭喜成) 등과 함께 『70년대』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작활동을 하였다. 초기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의 인식 자체가 존재의 차원을 넘어서는 허무의 관념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향은 첫 시집 『허무집』(1971), 『풀잎』(1974), 『빈자일기(貧者日記)』(1978)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 이후의 중반기로 접어들어서도 시인의 감성은 더욱 정교한 감각의 언어와 표현을 획득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있다. 시집 『소리집』(1982), 『우리가 물이 되어』(1987), 『바람 노래』(1987), 『슬픈 노래』(1989),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1989), 『벽 속의 편지』(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업적들이다. 그런데 시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에서부터 시인의 일상의 경험을 시적으로 변용하는 데에 있어서 더욱 포괄적인 상상력을 보여주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감각과 인식을 중시하던 시적 경향이 사색과 성찰의 경지로 더욱 넓고 깊어졌음을 말해준다.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2002), 『초록 거미의 사랑』(2006)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강은교의 시 세계는 허무의식을 통하여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던 초기의 시로부터 점차 민중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에서 시대와 역사의 문제를 탐구하는 데로 폭넓게 전개되고 있다.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고, 1992년 현대문학상 시부문상을 받았다. 1997년 PSB 문화대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제18회 정지용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시집으로는 『허무집』(1971), 『풀잎』(974), 『빈자일기』(1977), 『붉은 강』(1984), 『슬픈 노래』(1988), 『어느 미루나무의 새벽노래』(1988), 『순례자의 꿈』(1988),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1989), 『그대는 깊디깊은 강』(1991, 시선집), 『벽속의 편지』(1992), 『어느 별에서의 하루』(1996), 『사랑비늘』(1997), 『가장 큰 하늘은 그대 등 뒤에 있다』(1999, 시선집),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1999),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2000, 시화집),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2002), 『초록거미의 사랑』(2006), 『네가 떠난 후에 너를 얻었다』(2011),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2013)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추억제』(1975), 『시인수첩』(1980), 『누가 풀잎으로 눈뜨랴』(1984), 『허무수첩』(1996), 『달팽이가 달릴 때』(1997), 『사랑법-그 담쟁이가 말했다』(2004) 등이 있고, 동화집 『하늘이와 거위』(1994), 『저 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1996), 『삐꼬의 모험』(1997) 등도 펴냈다. 박사학위 논문인 『1930년대 김기림의 모더니즘 연구』(연세대, 1988)과 시창작론인 『시창작실습』(2002), 시 해설집 『강은교의 시에 전화하기』(2005) 등이 있다.
<학력사항>
경기여자중학교(졸업)
경기여자고등학교(졸업)
연세대학교 - 영어영문학 학사(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졸업)
<경력사항>
70년대 동인으로 활동
<수상내역>
1968년 작품명 '순례자의 잠' -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
1992년 현대문학상 시부문상
1997년 PSB 문화대상 문학부문상
2006년 제18회 정지용문학상
[네이버 지식백과] 강은교 [姜恩喬]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