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만 해도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쌀을 씻기 전에 한 숟가락을 부뚜막 한 귀퉁이 놓인 조그만 옹기 항아리에 넣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았다. 새마을운동의 한 부분으로 이웃돕기 사랑이었다. 굶는 사람이 많았다. 요즈음 굶어 죽어 나간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먹는 것은 해결이 된 셈이다. 이제 한발 성큼 나아가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양극화가 점점 심해져 갈등을 겪고 있다. 지나치게 부익부 빈익빈이 되어 네 탓 내 탓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가난은 나라에서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한다. 자유경제에서 끊임없이 경쟁을 하고 다투면서 빈부의 차이가 심해졌다. “좀도리는 절미의 전라남도 방언이다.” 우리나라는 쌀이 주식이지만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해 굶주림에 초근목피로 삶을 이어 왔다. 조선 시대도 쌀 부족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위해 절미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 암흑기에 조선총독부는 절미운동을 강력하게 시행했으며 해방 후에도 이어졌었으나 ‘보릿고개’로 갈수록 빈곤층이 늘었다. 쌀이 원료가 되는 술, 떡, 과자 등의 제조를 아예 금지하고 혼분식을 장려하였다. 1960년대 초에 재건국민운동 본부의 주도로 절미운동이 추진되고,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과정을 거쳐 1980년대 이후 비로소 절미운동이 사라졌다. 절미운동은 개인을 넘어 국가적 정책의 하나로 굳어졌다. 사실상 한 끼니조차 제대로 먹을 쌀이 없는데 그래도 주부는 쌀 한 숟가락을 덜어서 모았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이 실감 나게 했다. 비록 작은 항아리지만 날이 갈수록 채워졌고 그것을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던 십시일반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며 크나큰 사랑이기도 하다. 나만이 아닌 모두가 다 함께 고난을 견디며 같이 가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몫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인정은 오히려 더 절절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한민족의 순수한 인간미이고 착하고 순박한 면면이며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