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조천읍 조천리 2654번지.(조함해안로 10-13)
•주요 활동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건물 터)
고순흠(高順欽 1893~1977) 지사의 본관은 제주. 자는 자유(自由), 호는 죽암(竹岩). 아버지는 성균관 교수였던 능봉(菱峰) 고성겸(高性謙)이며,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신좌면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능봉 선생은 특출한 유학자로서 이응호가 개설한 오라리 칠봉서당(七峰書堂)에서 훈학하던 중 석유 등불로 인하여 서당에 화재가 발생하자 문하생들을 구하려다 순직한 분이다. 이 때 제주 성내에 유배되어 있던 운양 김윤식은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속음청사』에 “고성겸은 이 지방 선비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인데 매우매우 참담하다”라고 기록했다.
고순흠은 부친이 조천리의 41세 송씨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이다. 모친은 아들을 기필코 성공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제주읍내로 유학시키면서 훈언6조(訓言六條)를 글로 써서 일평생 지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돌아가신 남편의 영혼에게 출필고(出必告)하도록 설상하여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뒤 글을 넘겨 주었다. 그 내용은 ①집안에 금품을 두지 말 것 ②안일하게 지내지 말 것 ③도박을 하지 말 것 ④무당·점쟁이를 말리 할 것 ⑤부친이 화재로 타계했으니 불을 조심할 것이었다. 죽암(竹岩)은 평생 이 훈계를 지켰다.
정부의 공훈전자사료관에는 〈제주(濟州)에서 태어났다. 1909년 남형우(南亨祐)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김동삼(金東三) 이시열(李時說) 박중화(朴重華) 배천택(裵天澤)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규열(金圭烈) 황종화(黃鍾和) 이영봉(李永鳳) 최익무(崔翼武) 등 동지들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일제의 관공리인 동포에게」,「포고 제 1호, 남녀 학생에게」,「포고 제 2호,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등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포고문과 격문을 전달받아 국내에 배포하였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창립을 발기하고, 1921년 제3회 정기총회에서 간사(서무책임자)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라고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고향에서 한문을 익혔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에 능하여 9세 때부터 한문으로 글을 지을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났다. 의신학교(義信學校)를 거쳐 1912년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공립농업중학교(6년제)⇒제주농업고등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제주고등학교)를 제2기로 졸업하였고 1914년 3월에 경성전수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를 나왔다. 김명식(金明植)과 홍두표(洪斗杓)와 함께 그들이 함께 공부했던 의흥학교 터(연북정)에서 송매죽(松梅竹)혈맹결의를 맺어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할 것을 결의했다.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면서 대동청년당(신민회 계열의 비밀단체)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하면서 1919년 7월 조선노동문제연구회를 설립했고, 이어 1920년에는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서무 책임자로, 1921년에는 간사로 선출되었다. 그해 9월 조선통신중학관을 개설하여 학감에 취임하고 통신중학강의록을 발행하여 독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1924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절대 자유를 이념으로 하는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사상운동을 전개(사상단체 남흥여명사南興黎明社 참여)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의 주창(主唱)으로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조선인언론집회탄압탄핵대회’를 개최하였고, 1924년 7월에는 오사카조선노동동맹회, 간사이조선인3·1청년회 및 오사카조선유학생학우회 등 3개 단체와 조선무산자사회연맹 공동으로 ‘조선인문제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착취받고 있는 조선인 여성을 위해 조선인여공보호연맹회를 조직해 여공들의 처우 개선과 분쟁해결에 노력하였다.
1924년 사카이(堺) 조선 자유노동연맹과 오사카 자유노동연맹 등을 창립하여 노동 운동과 사상 계몽을 함에 있어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이후의 노동 운동은 죽암(竹岩)보다 차츰 목우(木牛) 김문준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1928년에는 당시 제주와 오사카 항로를 독점 운영하던 일본 선박업자들이 운임료를 대폭 인상하자 이에 제주도민들이 집회를 열어 운임료 인상의 부당함을 규탄하고, 요금의 인하를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러한 제주도의 상황을 보고 고순흠은 자주운항운동(自主運航運動)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김문준 등과 더불어 제주항해조합과 기업동맹기선부를 설립하여 일본기선회사의 횡포에 대처하면서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항로에 순길환(順吉丸)을 취항시켰다. 이 당시 기업동맹기선부는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제주도민의 소비조합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일본 선박이 덤핑으로 대항하는 바람에 경영난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공산주의 사상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 무정부주의 운동이 퇴조되면서 그의 항일 활동도 점차 후퇴되어 신진회(新進會)를 조직, 오직 사상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고순흠의 아나키즘 사상의 원류(源流)는 러시아의 크로포트킨에서 찾을 수 있다.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2∼1921)은 지리학, 동물학, 사회학, 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세속적인 출세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의 삶을 택하고 자신의 높은 윤리기준 및 사상과 행동을 결합을 보여준 인물이다. 육군장교로 시베리아 재임 시에 군무 이외에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고 지리학적 탐사에 열중해 산맥구조선 이론을 전개하여 동아시아의 지도작도법을 수정하게 했다. 1871년 러시아 지리학회의 회장직을 거절한 후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1872년 스위스 시계제조업자들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자발적 결사체에 감탄하여 자유주의적 신념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유재산과 불평등한 소득 대신 물자와 용역의 무상분배가 이루어지는 '무정부적 공산주의' 이론을 정립하여 무정부적 경제사상의 발전에 기여했다. 만년을 윤리학사의 집필에 몰두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다음백과)
온건론적 무정부주의라고나 할까 음모나 테러, 총파업 등의 과격적인 방법보다 온건한 방법, 즉 선전과 계몽을 통해 목적 달성을 시도했다.
이후 광복 이후 조국이 해방되어 이념이 양극화되기 이전인 1946년 2월 재일본조선인연맹 대표자로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참가했고, 조련(朝聯)이 공산주의 외곽 단체로 변신되자 이를 박차고 1946년 9월 25일 재일본조선거류민단 조직에 준비위원장으로서 앞장서서 10월 3일 이 단체가 결성되자 박렬(朴烈)이 중앙총본부 단장을 맡았으며, 고순흠은 중앙총본부 의장을 맡았다. 또 이 무렵 세기(世紀)신문 사장에 취임했으며, 1947년 10월 1일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부단장에 피선되어 1949년 6월까지 재임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을 중앙청 앞에서 거행하게 되자 당시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은 민단 단장 박열ㆍ부단장 고순흠은 ‘건국 축전 참가 경축사절단’을 이끌고 단상에 오르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및 미 극동사령관 맥아더 원수(元帥)를 비롯하여 국내외 동포로부터 열열한 환영을 받았다.
1950년 여름에는 박열과 함께 재일교포(在日僑胞)의 동향을 조국의 동포에게 알리기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마침 6ㆍ25 전쟁이 발생하여 박열은 공산군에게 납북(拉北)당하고 죽암은 간신히 한강을 넘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목우(木牛) 김문준(金文準)이 1936년 오사카에서 순국(殉國)하자 그는 이 유해를 제주로 운구 안장하도록 조천의 안요검(安堯儉), 김유환(金瑬煥), 김시용(金時容) 등에게 연락을 취하며 이를 지도하여 안장시키고 그의 묘표(墓表=묘비)을 썼다. 이 때 운구위원은 목우의 문하생인 김광추가 맡았다. 김운배(金沄培)와 김시성(金時成) 및 여성 항일운동가 김시숙(金時淑)의 묘비, 귀덕리 조대수 지사의 묘비 등 고향 출신 항일운동가들의 비문은 대부분 고순흠의 글씨이다.
1963년에 영구 귀국한 이후 한때 정치에 발을 들이기도 했으나 서예에 몰두해 제주와 부산 등지에서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77년 11월 28일 오후 7시 30분 사망하였다. 서울 화곡동(禾谷洞)에서 사망하자 그 곳에 묻혔다가 대전에 있는 국립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으로 옮겼다. 아들 고려한(麗漢)과 고려적(麗迹)은 일본에 귀화하여 일본인이 되어버려 혈육 한 분 없자 만년의 반려자 민혜경(閔惠璟) 여사와 문하생 서예가 김순겸(金順謙)이 비문을 쓰고 세워 그 자리에 참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청 역사인물, 제주항일인사실기, 제주인물대사전, 『동아일보』, 1921년 8월 21일,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그의 생가는 전직 국회의원 양 모씨 소유였고, 일가친척이 관리하고 있다가 최근에 헐어 버리고 공동주택(삼성빌리지)이 지어졌다.
《작성 220502》